2차대전 때 80억 장, 6.25 때는 40억 장 뿌려… 노무현 정권 때 '삐라 금지' 조치로 민간 대북전단 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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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라’는 영어 ‘Bill(광고지)’의 일본식 발음 ‘비라(ビラ)’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전단’이 한국식 표현이며 ‘삐라’는 북한말이라고 정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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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대전 당시 뿌려진 삐라는 6500만 장이었다. 삐라를 본격적인 심리전 수단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제2차 세계대전 동안에는 80억 장의 삐라가 세계 곳곳에 내려앉았다.이때 연합군 삐라는 주로 항복을 권유하는 내용이었던 반면, 일제를 비롯한 추축국 삐라는 탈영을 부추기는 내용이었다. 특히 결혼한 장병들에게 “부인의 침대에 지금 다른 남자가 있다”는 식의 망상을 심어주려 노력했다. -
한반도에서는 6·25전쟁을 시작으로 2004년까지 남북한 양측의 ‘삐라전쟁’이 있었다. 6·25전쟁 당시 첫 삐라는 연합군이 뿌렸다. 미군 극동군사령부는 6월28일까지 사흘 동안 삐라 1200만 장을 만들어 전선에 투하했다. 이때부터 연합군과 북한·중공군은 휴전 때까지 약 40억 장의 삐라를 뿌린 것으로 알려졌다. 면적으로 계산하면 한반도를 20번 덮을 정도라는 주장까지 있을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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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노무현 정권은 남북 장성급회담에 따라 대북전단 살포와 대북방송을 모두 중단하고, 이 일에 종사하던 탈북민들을 일시에 모두 해고했다. 그러자 탈북민단체들이 “이대로는 안 된다. 정부가 하지 않는다면 민간에서라도 나서야 한다”며 2005년부터 대북전단 살포에 나섰다. 민간 대북방송 또한 이때부터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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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진 속 대북전단은 지난 5월31일 살포했다. 이때 전단과 함께 1달러짜리 지폐, SD카드 등을 담아 보냈다. 나흘 뒤 김여정은 이 대북전단을 빌미로 남한을 맹비난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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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0월에는 대북전단 풍선이 항공법을 위반했다는 주장도 나왔지만, 국토교통부는 “조종장치가 없는 풍선은 비행장치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유권해석을 내놔 문제 없이 넘어갔다.
그러자 북한도 다시 대남 삐라를 뿌리기 시작했다. 2012년부터 2014년까지 경기·강원 일대에서 수거된 대남 삐라는 3만여 장에 달했다는 국방부 발표도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