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본~인도~베트남~호주~뉴질랜드'와 反中 경제 네트워크 추진… 외교가 '올 것이 왔다'
  • ▲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뉴데일리DB
    ▲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뉴데일리DB
    미국 국무부가 '경제번영네트워크(EPN, Economic Prosperity Network)'에 한국의 참여 문제를 공개적으로 언급하자 외교가에서는 올 것이 왔다는 분위기다. EPN 관련 논의는 우한코로나 사태를 계기로 본격화한 듯하지만 실제로는 오래전부터 미국이 구상했던 것으로, 한국 측의 답변을 기다리던 미국이 독촉장을 보낸 것이라는 평가다.

    EPN은 민주주의의 가치에 뜻을 같이하는 국가·시민사회·기업들로 구성되며, 교역·에너지·교육·의료·기술을 포함한 경제의 많은 분야를 포괄하는 미국 주도 경제 블록이다. 

    지난 20일(현지시간) 키스 크라크 미 국무부 경제차관은 아시아태평양 미디어허브 특별 전화 브리핑에서 "미국·한국 등 국가들의 단합을 위한 EPN 구상을 논의했다"고 밝혔다. 

    미국 고위관리가 '한국과 EPN을 논의 중'이라는 취지의 발언을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EPN에는 현재 한국을 비롯해 일본·호주·인도·뉴질랜드·베트남 등이 참여국으로 거론된다.

    미국은 오래전부터 중국 패권의 부상을 저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세계 공급망 재편을 추진해왔다. 오바마 정부가 야심차게 추진한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이 대표적으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 후 이 협정에서 탈퇴하며 일본 주도의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으로 명칭이 변경됐다. 

    하지만 실제로는 트럼프 대통령이 일본에 '당분간' 협정 운영을 맡겨두었다는 시각이 있었다. '아메리카 퍼스트'를 내세운 트럼프 대통령이 국내문제에 집중하면서 국제문제를 '건드릴' 때를 기다렸다는 것이다.  

    EPN, '탈중국' 노골화한 트럼프의 전략 카드

    EPN은 인도·뉴질랜드 등이 참여한다는 점에서 TPP와 다를 것이라는 전망이다. EPN는 TPP를 기반으로 더욱 강화한 배타적 경제 블록으로 전환될 것으로 관측된다. 

    우리나라는 농민들의 반발로 TPP에 가입하지 못했고, 일본 주도 CPTPP로 재편된 이후에는 '징용배상' 문제 등 선결조건 때문에 아직 가입하지 않은 상태다. 

    무엇보다 TPP와 EPN이 가장 크게 다른 것은, TPP가 오바마 정부가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경제질서를 유지하겠다는 차원이었다면 EPN은 '탈중국'을 노골화한 트럼프 행정부가 세계경제질서에서 중국을 배제할 목적으로 추진한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외교가 일각에서는 "EPN에서 빠진다는 것은 중국과 같이 죽겠다는 뜻" "중국과 결별해야 할 운명"이라는 말이 나온다. 이 같은 시각은 "한중이 무역관계로 얽힌 것은 미국이 중국을 무역 파트너로 인정하고 교역을 지속할 때나 가능한 것"이라는 분석에 기인한다. 미국이 중국을 경제적으로 무력화할 경우, 중국은 한국의 주요 수출국도 주요 수입국도 될 수 없다는 논리다.

    최원목 이화여대 교수는 22일 본지와 통화에서 'EPN은 미국의 세계전략 재편의 일환'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관련 논의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최 교수는 "크라크 차관의 이번 발언은, 미국이 코로나 사태 전부터 미국 주도 공급망 구상을 한국에 제안했고, 한국에서 별다른 반응이 없자 불만의 목소리를 낸 것"이라며 "정부가 제대로 검토를 하기나 한 것인지 의심스럽다"고 말했다.

    "아메리카 퍼스트 전략 성공… 美, 세계질서 조정 본격 나서" 

    최 교수는 이어  "'아메리카 퍼스트'가 성과를 거두고 미국 국내경제가 안정되면서 이제 미국이 국제경제체제 재편에 나선 것"이라며 "파트너를 모집하는 단계에서 빨리 뛰어들어 주도권을 높여야 한다"고 역설했다. 

    또 "EPN은 단순히 관세 혜택 등 교역 블록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공급망-판매망-환경이나 노동분야 규제의 조화로운 운영 등 역내 자급자족적 질서를 만들겠다는 취지"라며 정부에 전향적 자세를 촉구했다. 

    최 교수는 "탈중국 추세가 상당기간 지속되고, 서구권이 단합해 중국을 압박하고, 코로나와 연계해 상당한 제재를 가할 것으로 예상된다"면서 "우리로서는 최소한 공급망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대체 블록을 적극적으로 모색해야 할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우리가 EPN에 참여한다고 해서 중국과 교역을 당장 끊는 것도 아니어서 중국의 반발은 사드 보복만큼 걱정할 수준이 아니다"라며 "EPN에 빨리 참여해 주도권을 키워야 실리를 챙길 수 있다. 가입 비용을 키우는 건 어리석은 행위"라고 지적했다. 

    "빨리 참여해 주도권 확보해야… 가입비용 키우는 건 어리석어"

    일각에서는 신중론도 제기한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오는 11월 대선을 앞두고 '탈중국'을 정치적 어젠다로 삼으려는 의도일 경우 EPN이 실체가 없을 수도 있다는 지적이다. 또한 EPN이 자칫 자유무역질서를 해치는 결과를 가져온다면 수출 주도 경제인 우리나라에 불확실성을 가져올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이병태 카이스트 교수는 22일 본지와 통화에서 "중국패권주의에는 당연히 경각심을 가져야 하지만, 중국을 배제한 새로운 공급망을 만든다는 것이 현 시점에서 바람직한지 의문"이라며 신중한 견해를 보였다. 또 "EPN 논의가 트럼프 대통령의 선거전략의 일환으로 볼 수 있어 얼마나 진지하게 논의될지 미지수"라고도 경계했다. 

    신중론도 제기… "트럼프 선거전략이라면 진정성 없을 수도"

    이 교수는 "코로나 사태 이전부터 중국은 생산기지로서 매력을 잃고 오히려 소비시장으로 부각됐던 상황"이라며 "최근 베트남이나 동유럽 등으로 생산설비를 옮기는 기업들이 늘고 있는데, 이는 기업들이 국가 간 합의와는 별개로 수시로 공급망을 이전한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이 교수는 다만 "미국이 주도하는데 우리로서는 대놓고 반대할 수는 없는 입장이기에 유연한 외교적 대응이 필요할 것"이라고도 덧붙였다.  

    크라크 미 국무부 차관의 발언에 앞서 지난달 29일(현지시각),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국무부 기자회견에서 "미국은 호주·인도·일본·뉴질랜드·한국·베트남에 있는 친구들과 함께 세계경제 발전을 위해 정보와 모범사례를 공유하는 등 함께 노력한다"고 말했다.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이 자리에서 'EPN'을 직접 언급하는 대신 '세계공급망'이라는 표현을 썼다. 폼페이오는 "우리의 논의에는 세계공급망에 관한 이야기가 확실히 포함됐다"며 "어떻게 하면 이 공급망을 원활하게 가동하고, 다시는 이런 일(코로나로 인한 경제타격)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새로운 공급망을 어떻게 재구성할 것인지 등을 논의 중"이라고 말했다.

    靑 "EPN 검토 단계"… 미국의 제안 있었는지 여부는 안 밝혀

    한편 청와대는 22일 미국이 추진하는 EPN 구상과 관련해 "검토단계인 것으로 안다"고 밝혔다. 청와대 핵심관계자는 이날 춘추관에서 "(미국 측이 ) 정부에 제안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여부는 확인해드릴 수 없다"며 이같이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