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6회 우남 이승만(李承晩) 포럼 성료신철식 "혼란스러운 오늘날 그의 정신이 너무 필요"
  • ▲ 17일 오후 서울 마포구 근신빌딩 제2신관에서 신철식 (사)이승만건국대통령기념사업회 회장이 강연을 진행하고 있다.ⓒ뉴데일리 공준표 기자
    ▲ 17일 오후 서울 마포구 근신빌딩 제2신관에서 신철식 (사)이승만건국대통령기념사업회 회장이 강연을 진행하고 있다.ⓒ뉴데일리 공준표 기자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도록, 자유를 지켜야 한다"

    이승만 건국 대통령이 유언으로 남긴 것으로 알려진 한 마디가, 반 세기가 지난 2018년 한 강의실을 가득 메웠다.

    17일 오후 서울 마포구 삼개로에 위치한 근신빌딩 제2신관에서 제86회 우남 이승만(李承晩) 포럼이 열렸다. 이날 포럼은 '대한민국 건국역사 바로 알기'를 주제로 신철식 (사)이승만건국대통령기념사업회 회장이 강연을 맡았다.

    강연은 크게 7개 섹션으로 나눠 진행됐다. 이승만 박사의 △성장기 △청년기 △유학기 △하와이 독립투쟁기 △임시 정부 활동기 △하와이 독립운동기2 △대통령 취임 후 등으로 이어졌다.

    신철식 회장은 "국민들이 건국사를 폄하하는 자학 사관에 매몰돼 조국에 대한 자부심을 잃어가고 있지만, 농지개혁을 단행해 5천 년 역사상 처음으로 농민이 농지를 소유할 수 있었고 의무교육을 실시해 대부분의 국민들이 글자를 읽고 쓰는 시대가 대한민국의 출발이었다"며 "대한민국은 시작부터 위대했다"고 대한민국 역사 출발점을 강조했다.

  • ▲ 이승만 박사가 1910년 미국 프린스턴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한 모습.ⓒ네이버 블로그 화면 캡처
    ▲ 이승만 박사가 1910년 미국 프린스턴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한 모습.ⓒ네이버 블로그 화면 캡처
    ▶이승만은 어떻게 미국 최고의 대학 과정을 단 5년 만에 수료했나

    신 회장은 "이승만 박사는 미국 최고의 대학이라 불리는 조지 워싱턴대학을 2년 반 만에 졸업했고, 하버드대에 입학 후 프린스턴 대학 박사 과정을 마친다. 이 모든 과정이 소요되는 데 걸리는 시간은 단 5년이었다"고 말했다.

    제아무리 똑똑한 이승만 박사라 할지라도 어떻게 전세계 최고 수준의 교육과정을 그것도 유학으로 5년 만에 마무리할 수 있었을까. 바로 고종의 특사 신분으로 미국에 파견된 것이 그 발단이 됐다.

    신 회장은 "이승만 박사는 조선의 왕족 출신으로 서당을 다니며 한학을 익혔지만 몰락 왕손이라는 이유로 과거에서 수차례 떨어졌고 이후 조선 최초의 서양식 학교인 배재학당에서 서양 신문물을 접한 것이 그 계기가 됐다"고 밝혔다.

    1896년 미국시민권자로서 조선에 귀국한 서재필의 교육영향 등에 맞물려 '입헌군주제', '대통령제 민주주의' 등을 공부한 이승만 박사는 우리나라 최초의 일간지인 '매일신문' 등을 창간한다. 언론가 및 계몽운동가로서 활동하며 전제군주정에 도전한 이승만은 결국 '역적 모의'로 감옥에 투옥됐고 이 시기 옥중에서 독립정신을 저술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신 회장은 "이승만은 서른살에 세계를 꿰뚫는 지혜를 지녔고, 일본의 야욕을 곧바로 내다봤다"며 "일제의 한반도 침략이 노골화되자 이승만은 고종 특사로 미국에 가게 되는데 사실 이미 미국은 일본과 '가쓰라 태프트 밀약'을 체결했고 특사 파견은 효력이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그러나 이승만은 귀국하지 않고 미국에 남아 '내가 대한제국 외교 특사로 왔으니, 조선에서 공부한 학점을 인정해달라'고 요구, 5년 만에 미국 유학 과정을 수료한다"고 강조했다.

    신철식 회장은 "5년의 유학생활에서 이승만은 조선 독립을 주장하는 170여회의 강연도 병행하지만, 끝내 박사 학위를 받은 날 나라를 잃게 된다"며 "개인 영달을 위해 미국에 남을 수도 있었지만 이승만은 결국 조선으로 돌아와 계몽운동을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 ▲ 이승만 박사는 1919년 9월 대한민국 통합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으로 임명된다. 사진은 1920년 이승만 대통령이 중국 상해를 찾아 임시정부 요원들과 환영식을 가지는 모습.ⓒ네이버 블로그 화면 캡처
    ▲ 이승만 박사는 1919년 9월 대한민국 통합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으로 임명된다. 사진은 1920년 이승만 대통령이 중국 상해를 찾아 임시정부 요원들과 환영식을 가지는 모습.ⓒ네이버 블로그 화면 캡처

    ▶대한민국 건국 1919vs1948년 싸움 의미없어...초대대통령 '이승만'은 변치 않는 사실

    프린스턴 대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이승만 박사는 일제식민지가 된 조선으로 돌아와 YMCA 활동으로 학생들을 지도한다. 그러나 곧 데라우치 총독 암살 사건으로 인해 일제의 감시가 심해지고 결국 이승만 박사는 하와이로 떠나 1919년까지 교육과 언론 및 선교활동을 통해 장기적 독립운동을 이어간다.

    1919년 조선에서 대대적인 3.1절 운동이 일어난 후 중국 곳곳에는 임시 정부가 들어서고 이승만 박사는 6곳 임시 정부에 소속된다. 1919년 9월 후 각 임시 정부는 모두 통합해 '대통령제'를 채택, 초대 대통령으로 이승만을 임명한다.

    신철식 회장은 "초대 대통령이 된 이승만 박사는 1920년 임시정부가 있던 상해로 가는데, 이 당시 일본은 이승만의 목숨에 30만달러 현상금을 내걸었다"며 "현재 돈으로 환산하면 수천억에 달하는 가치였다"고 분석했다.

    신 회장은 "당시 삼엄한 경계를 뚫기 위해 이 박사는 중국인으로 변장, 관에 담긴 시체로 위장해 3달 만에 중국에 밀입국해 상해로 입성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독립'을 위해 뭉쳤던 임시정부가 얼마 가지 않아 분열되기 시작한다. 노선 갈등이 발생하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는 1917년 러시아혁명의 성공으로 인해 공산주의가 들불같이 번지던 시기였다. 상해 임시정부도 민주주의냐 공산주의냐, 외교투쟁이냐 무장투쟁이냐를 놓고 끝내 두 갈래로 갈라지게 된다.

    신철식 회장은 "그러나 이승만 박사는 결코 공산주의는 안된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고 했다. 신 회장이 언급한대로 실제 이승만 박사는 1923년 '공산당의 당부당(當不當)'이라는 논설에서 "공산주의가 말은 좋지만 실제로 그렇게 되지 않는다는 게 문제"라고 지적했다.

    또한 신 회장은 "20세기 초반의 일본은 전세계 3대 강국 중의 하나였고 8천만명의 국민 중 군인이 700만을 차지했던 시기"라며 "이승만 박사는 당시 무장투쟁으로 일본을 이긴다는 것은 유아적인 발상이라고 봤다"고 강조했다. 그에 따르면 조선광복군이 가장 번성했을 때가 4,600여명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임시정부에서 무장투쟁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김구 선생은 1921년 상해임시정부에 합류해 독립운동을 이어가게 되고, 노선갈등으로 인해 1925년 이승만 초대대통령이 임시정부에서 탄핵을 당하고 난 뒤 15년 뒤인 1940년에야 임시정부 주석이 된다.

    일본이 미국과의 태평양전쟁에서 패전한 후 항복하면서 조선은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게 되고 임시정부 요인들은 조선으로 귀국한다. 당시 임시정부의 수장격인 주석을 맡고 있던 인물은 김구. 이로 인해 '임시정부의 수장은 김구'라는 인식이 일반적으로 널리 퍼져있기도 하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김구가 임시정부에 합류하기 전인 1919년 9월 이미 통합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직을 맡고 있었다.

    신 회장은 "독립운동가가 일본 간부 한 명을 죽인다고 우리가 독립을 얻을 수 없을 것으로 봤던 것이 이승만 박사의 생각이었을 것"이라며 "수많은 독립지사들이 일제 치하 36년간 해외로 도피해 해당 국가의 국적을 따고 독립운동을 이어갔지만, 끝내 마지막까지 무국적자로 살았던 자가 바로 이승만"이라고 강조했다.

  • ▲ 1952년 여름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맞서 혈투를 벌이고 있는 서부전선을 찾아 해병 1연대 장교들을 격려하고 있는 이승만 대통령. ⓒ 뉴데일리DB
    ▲ 1952년 여름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맞서 혈투를 벌이고 있는 서부전선을 찾아 해병 1연대 장교들을 격려하고 있는 이승만 대통령. ⓒ 뉴데일리DB
    ▶ 대한민국의 시작...6.25를 버텨낸 원동력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이승만 박사는 일본의 야욕을 내다보고 1941년 '일본내막기(Japan Inside Out)'이라는 책을 발간해 일본의 공격이 임박했음을 주장했다. 발간 4개월 후 실제 일본은 진주만을 공습했고 태평양전쟁이 발발한다. 이승만 박사의 예상 적중에 따라 미국 지도층 내에는 한국 독립에 우호적 여론이 형성됐고 1943년 11월 카이로회담에서 미국,영국,중국은 조선의 독립을 약속했다.

    신철식 회장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될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나이는 73세였지만, 이승만의 공은 73세 전후로 나뉜다"고 했다. 그가 건국 전에 이룩한 일들은 건국 후 이뤄낸 공적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주장이다.

    신 회장은 이승만 대통령의 취임 후 5가지 공으로 △자유민주주의 정치제도 도입 △농지개혁 △교육개혁 △한미동맹 △경제부흥 기반 구축을 들었다.

    그는 "전세계에서 여성의 참정권이 정리되기 이전 1948년 이승만 대통령은 남한에서 최초의 보통선거를 실시해 5천만 년 한반도의 첫 국민 주권행사를 이뤄냈다"며 "또한 자유민주주의를 경제적으로 제대로 해석한 것이 바로 농지개혁"이라고 주장했다.

    신철식 회장은 "농지개혁은 당시 국회의원 전원이 반대했다. 거의 내전에 가까운 저항을 뚫고 이승만 대통령은 농민들과 손을 잡아 결국 농지개혁을 단행, 농민들에게 토지를 가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고 강조했다.

    당시 농지개혁 강행으로 인해 이승만 대통령은 정치권으로부터 '독재자'라는 타이틀을 뒤집어쓰기도 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은 1948년 12월 한 라디오 연설에서 "반상과 귀천에 등급이 없고 모든 인민이 평등과 자유를 누리는 근본적 해결책이 토지개혁"이라며 1950년 농지개혁법 개정안을 공포한다.

    그러나 농지개혁법이 공포된 후 세 달 뒤 북한 인민군이 기습적으로 6.25 남침을 강행했다. 당시 김일성은 소련의 스탈린에게 "걱정말라. 남침 후 3일만에 남한 농민들이 봉기를 일으키고 우리를 지지할 것"이라고 큰 소리 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한국 내 농민들의 동요는 없었다. 대한민국 정부에서 6.25 발발 직전 5월 '분배 농지 예정 통지서'를 배포했기 때문이다.

    신철식 회장은 "농지 95%가 소작농이 아닌 자작농이 됐고, 신분차별이 공식적으로 철폐되는 계기가 됐다"며 "이승만 대통령은 기꺼이 독재자라는 오명을 감수했고 그 결과 이는 6.25를 승리로 이끈 이유 중 하나가 됐다"고 농지개혁을 대한민국의 시작의 걸작으로 꼽았다.

    ▶ 일방적으로 강대국에게 불리하게 체결된 황당한 조약 '한미상호방위 조약'

    신철식 회장은 "한미상호방위 조약은, 역대 전세계 강대국과 약소국 사이에서 체결된 조약 중 일방적으로 강대국에게 불리하게 체결된 유일한 조약"이라고 했다. 그만큼 미국에 불리하고 한국에 유리하게 끌어왔다는 주장이다.

    3년간 지속된 6.25로 미군은 5만명의 사망자와 10만명의 부상자를 냈다. 트루먼 美대통령의 인기는 급락했고 "한국전을 종식시키겠다"는 공약을 내세운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에 당선됐다. 전쟁이 진행중인 한반도에서 미군을 철수시킬 위기가 닥친 것이다.

    북진 통일론을 고집하던 이승만 대통령은 당시 미국에게 피곤한 존재였다. 미국은 1953년 휴전협정을 맺고 철수 시도를 했고 이승만 대통령은 이에 대한 방어로 '반공포로 석방'을 단행했다. 기습적인 조치로 휴전이 지연되자 미국은 결국 이승만 대통령의 요구대로 1953년 7월 12일 한미상호방위조약에 조인한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우리 후손들은 여러 대에 걸쳐 이 조약의 혜택을 누릴 것"이라고 예언했고 실제 대한민국은 미국으로부터 8억 달러의 경제 원조 및 20개 사단 60만 대군을 양성할 수 있는 군사 원조를 받는다. 대한제국 군대가 일본에 의해 강제 해산 될 때 8,800여명의 수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폭발적인 증가다.

    신철식 회장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없었다면, 언제 전쟁이 날 지 모르는 상황인 것인데 그렇다면 어떤 나라가 한국에 해외 자본을 투자하고 유치하겠나"고 반문, "최약소국인 한국 대통령이 미국 뉴욕시 브로드웨이에서 최초 카퍼레이드를 하며 영웅대접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라고 평했다. 

  • ▲ 17일 오후 서울 마포구 삼개로에 위치한 근신빌딩 제2신관에서 제86회 우남 이승만(李承晩) 포럼이 열렸다. 이날 포럼은 '대한민국 건국역사 바로 알기'를 주제로 신철식 (사)이승만건국대통령기념사업회 회장이 강연을 맡았다. ⓒ뉴데일리 공준표 기자
    ▲ 17일 오후 서울 마포구 삼개로에 위치한 근신빌딩 제2신관에서 제86회 우남 이승만(李承晩) 포럼이 열렸다. 이날 포럼은 '대한민국 건국역사 바로 알기'를 주제로 신철식 (사)이승만건국대통령기념사업회 회장이 강연을 맡았다. ⓒ뉴데일리 공준표 기자
    ▶ "전쟁 중에도 대학생들은 배워라" 교육에 대한 집착과 경제 부흥 시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의 대통령 이승만은 '교육'에 주력한다. 1949년 6년제 의무교육제를 도입했고 문맹퇴치운동을 전개했다. 그 결과 1945년 78%에 달했던 문맹률은 1959년 22%로 떨어지게 된다.

    해방 후 19개교(8천여명)에 불과했던 대학은 10여년 후 1960년 63개교로 늘어났고 대학생은 10만 명을 넘어섰다. 또 약 2만 여명의 해외 유학생을 파견했다. 이승만 정부가 길러낸 인재들은 본격적으로 진행된 대한민국의 근대화와 공업화의 주역을 맡았다. 

    신 회장은 "이승만 대통령은 전쟁 중 대학생을 징발하지 않았다. 그 정도로 교육에 대한 집념이 컸던 것인데 이는 전세계 전쟁사에 유례가 없다"고 강조했다.

    그는 "한미상호방위조약으로 확보한 8억 불 경제 원조를 바탕으로 수입대체산업 육성을 추진했고 1954년 산업부흥 5개년 계획을 수립해 60년대 수출공업화 정책의 초석을 놨다"고 했다. 이는 이후 박정희 정부 대에 들어서 경제 5개년 정책으로 계승된다.

    ▶ "국민이 원한다면 하야한다" 4.19의 진실

    신철식 회장은 "4.19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며 "3.15 부정선거는 대통령이 아닌 부통령 선거였다. 86세의 고령이던 이 대통령은 인(人)의 장막에 눈과 귀가 가려졌고 3.15 부정선거의 사태도 4.19 의거가 일어난 후에야 알게 된다"고 안타까워했다.

    신 회장은 "이 대통령은 4.19 유혈사태의 진상을 알게 된 후 곧바로 부상당한 학생들을 찾아가 '학생들이 왜 이렇게 다쳤어? 부정을 왜 해? 암, 부정을 보고 일어나지 않는 백성은 죽은 백성이지. 젊은 학생들이 참으로 장하다'고 눈물을 흘린 것으로 잘 알려져있다"고 했다. 일각에서 이승만 정부가 학생들을 탄압한 독재자로 알려져있는 것에 대한 지적이다.

    1960년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은 '국민이 원하면 물러난다'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스스로 하야했다. 4.19 이후 혼란 속에서 건국 대통령 내외는 결국 하와이 망명을 떠나게 되고 현지에서 이 대통령은 1965년 7월 19일 만 90세를 일기로 숨을 거둔다.

    신철식 회장은 "1965년 이승만 대통령 서거 후 운구행렬을 보면 알 수 있듯 당시 국민적인 애도가 있었다"며 "장기 집권의 폐해로 자유당의 독주와 부패가 뒤따랐지만, 오늘의 대한민국은 우리가 받은 선물이고 이승만의 대체 불가능한 위대한 업적"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문화대혁명 등으로 2천만명을 학살했다고 알려진 중국의 모택동도 국부로 추앙받고 5만여명을 죽인 베트남의 호치민도 그의 이름을 본딴 도시까지 있다. 도대체 어떤 나라가 자기 건국대통령을 공과로 평가하지, 오로지 과(過)만 내세우며 공(功)을 묻어버리나"고 호소했다.

    끝으로 신 회장은 "감성적 민족주의에 휘둘리지 않고 냉정하게 국제정세와 세계사 흐름을 완주하며 위기 때마다 신의 한수로 나라를 구해낸 이승만 대통령. 혼란스러운 오늘날 그의 정신이 너무 필요하다. 대한민국 건국을 바르게 정립하고 건국대통령의 업적을 올바로 알리는 일이야말로 대한민국 역사의 시작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