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사태, 민중봉기 아닌 공산폭동

“김대중 대통령도 공산폭동 인정했다”

조영환 칼럼 | 최종편집 2018.04.03 22:16:21

  조영환 편집인 /올인 코리아 
 
 ‘제주4·3은 민중봉기 아닌 공산폭동’

서옥식, 제주 4·3사건 70주년 조명

“김대중 대통령도 공산폭동 인정했다”

▲제주4·3사건은 대한민국의 건국을 저지하기 위해 남로당 제주도당 좌익 무장대가 북과 연계된 중앙당의 지령을 받아 일으킨‘공산폭동’인데도 노무현 대통령은 이를 남로당 제주도당의 자발적이고 단독적인 ‘민중봉기’로 역사 바꿔치기를 했다. 따라서 공산폭도는 희생자로 둔갑되고 폭동을 진압한 국군은 학살주범이 됐다.

▲노무현 정부의 4·3 성격 규정은 ‘민중봉기’로, ‘인민봉기’란 북한 주장과 유사하다

▲제주4·3사건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을 찬동, 지지하기 위한 ‘공산폭동’이지 단순히 경찰과 서청(西靑)의 탄압에 반대한 ‘민중봉기’ 아니다

▲남로당 유격대 문서에도 상부 지시받고 일으켰다고 돼있지만 노무현 정부는 일축했다

▲북한은 ‘미제축출과 통일중앙정부 수립하라’는 김일성의 교시와 호소 받들어 제주인민이 일으킨 ‘인민봉기’이며 ‘반미-반팟쇼 구국항쟁’이라고 문헌에 기술하고 있다

▲노무현 정부는 592억 원에 달하는 국민세금으로 제주시 봉개동 12만평 부지에 제주4·3평화공원을 건립해놓고, 이승만 전 대통령과 국군을 학살자로 표현해 평화기념관을 찾는 많은 청소년들에게 반미종북좌파사상의 학습장을 만들었다.

▲제주4·3폭동 주범 김달삼은 김일성으로부터 국기훈장 받고 애국열사릉에 안장(가묘)됐다

▲남로당 제주도당위원장 강규찬은 4·3 前 북에 가서 김일성으로부터 공작임무 부여받았다.

 

3일은 6·25전쟁과 더불어 우리 현대사의 최대 비극적 사태이자 대구폭동(1946년 10월1일), 여순반란사건(1948년 10월19일)과 함께 해방과 건국의 전후시기에 남조선노동당(남로당, 조선공산당 후계체제)이 일으켰던 3대 유혈폭동의 하나인 제주 4·3사건 71주년이 되는 날이다.  ‘제주 4·3 제70주년 범국민위원회’는 3월 21일부터 4월 10일까지 ‘4·3 평화인권주간’으로 정하고 7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제주 4·3 제70주년 (촛불)국민문화제’를 개최하는 등 전국적으로 추념식과 전야제, 문화예술축전 등 각종 행사를 벌인다. 전국 주요 도시에 분향소도 설치됐다.

아래는 언론인 출신의 북한문제 연구가인 서옥식 박사(정치학)가 ‘대한언론’ 4월호에 <제주 4·3사건 70년 주년 조명 - 인민봉기인가 공산폭동인가>라는 제목으로 기고한 자신의 글을 보완, 작성한 것이다. [조영환 편집인]

제주 4·3사건은 1947년 3월 1일 제주읍 관덕정(觀德亭)에서 열린 3·1절 28돌 기념식에서 경찰이 집회에 참석한 뒤 가두시위에 나선 군중을 향해 발포한 것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 3일 남로당의 치밀한 계획에 따라 발생한 좌익계열의 폭동사태와 그로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계속된 무력 충돌과 진압 과정에서 군경과 양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다. 피해자는 지난해 10월 현재 사망 1만 244명, 행방불명 3천 576명, 후유장애 164명, 수형자 248명 등 1만 4천 232명이다. 남로당 무장대에 의해 살해된 군경과 우익인사 등 민간인은 모두 1천 756명으로 집계되고 있다.

제주 4·3사건은 종래 4·3사태, 44·3폭동, 4·3반란 등 여러 이름으로 불려왔다. 그러나 제주4·3사건은 노무현 정권 때 만들어진 정부 공식문서에서 남로당 중앙당 등 상부의 지령없이 남로당 제주도당이 독자적으로 일으킨 ‘민중봉기’였다고 천명했고 현재 국내 좌파세력을 비롯한 일부에서도 남로당 상부 지령설을 부인하면서 ‘제주 4·3항쟁’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노무현 정부때 고건 총리를 위원장으로 하여 박원순, 강만길, 김삼웅 등 골수 좌익들이 만든 ‘제주4·3진상조사보고서’는 4·3사건의 성격을 민주화운동이며, 미군정의 폭정과 군인-경찰의 횡포에 맞서 싸운 민중항쟁이자, 통일중앙정부 수립을 위한 민중봉기라면서 무장폭동을 진압한 군경을 정부가 고용한 폭력집단이라고 규정했다.

노무현 정부가 2003년 발표한 제주 4·3사건에 대한 한국 정부의 역사적 규정은 <1947년 3월 1일 경찰 발포를 기점으로 경찰과 서청(서북청년회)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선(單選)·단정(單政)반대를 기치로 1943년 4월 3일 무장봉기한 이래 제주에서 발행한 무장대와 토벌대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다. 한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4·3사건을 공권력 탄압에 대한 저항이자, ‘단독정부 수립’을 막기 위한 ‘무장봉기’를 과잉 진압한 토벌대에 의한 주민 희생사건으로 규정한 것이다.

지난 55년간 유지돼온 ‘폭동(roit)’, ‘반란(rebellion)’이란 4·3의 성격이 노무현 정부 들어 하루 아침에 ‘봉기(uprising)’, ‘항쟁(resistance)’으로 바뀐 것이다. 북한은 ‘4·3인민봉기’ ‘제주도 인민봉기’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노무현 정부는 특히 ‘무장봉기’란 용어와 함께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유혈 충돌’이란 표현을 씀으로써 남로당 무장반란 세력을 ‘봉기세력’이라고 미화하고, 국가가 동원한 군대와 경찰을 ‘토벌대’라고 비하했다. 이에 따라 무장폭력을 일으킨 남로당 당사자들은 정당한 저항 행위로 평가받고 책임소재는 대한민국 정부와 미군 및 미군정, 그리고 국군, 경찰 및 이승만 대통령으로 귀결됐으며, 노무현 정부는 스스로 만든 정부 조사보고서에 근거해 사과했다.

노무현 정부는 592억원에 달하는 국민세금으로 제주시 봉개동 12만평 부지에 제주4·3평화공원을 건립해놓고, 이승만 전 대통령과 국군을 학살자로 표현해 평화기념관을 찾는 많은 청소년들에게 반미종북좌파사상의 학습장을 만들었다. 제주 4·3사건 때 억울하게 희생된 분들을 위해 진상을 조사하여 명예를 회복케 하려는 국민통합의 목적에서 김대중 정부시절 ‘4·3특별법’을 제정한 것인데, 오히려 공산폭도가 희생자가 되고 대한민국 국군이 학살 주범이 돼버린 것이다.

▲4.3사건 당시 제주도 일원에 뿌려진 남로당의 삐라 내용. 1949년 1월13일 북제주군 구좌면 투쟁위원회가 제작한 이 삐라는 “조국해방의 결정적 계기인 (1949년) 1월 1일을 기하여 전민족은 총궐기 하였다”면서 “김일성 수상은 1월1일 신년사에서 장래에 남반부 동포들에게도 노동자에 노동법령을, 농민에게 토지개혁을, 여성에게 남녀평등권을 실시케 하며 미제를 철수시키고 매국단정을 타도하겠다”고 밝혔다고 선전하고 있다. 그러면서 “여러분! 김일성 수상의 성명서가 구체화 될 날도 시간문제이며 인민군의 원쑤(대한민국을 지칭)를 섬멸시킬 날도 가까워졌습니다”고 밝혀 제주 4.3사건이 1949년 1월 이후 김일성의 지시를 따르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제주4·3사건은 골수 공산주의자 박헌영이 이끈 조선공산당의 후신인 남로당 중앙당의 지시를 받은 남로당 제주도당 군사부 총책이자 제주인민유격대사령관 김달삼(金達三: 본명 이승진)이 350여 명의 무장폭도들을 조직, 5·10 제헌국회의원선거를 저지함으로써 대한민국 건국과 정부수립을 방해하고 김일성의 주도로 이미 1947년 2월 17일자로 수립된 북한 최초의 인민정부인 ‘북조선인민위원회’를 지지·지원하기 위해 일으킨 반국가적 무장폭동이었다. 박헌영은 1946년 5월 남로당의 ‘조선정판사위폐사건’으로 미군정의 지명수배를 받게되자 그해 9월 북으로 도주한 뒤에도 서한 등을 통해 계속 남측의 남로당에 지령을 내리고 투쟁을 독려했다.

북한의 조선대백과사전을 비롯한 문헌과 대남선전선동 매체들은 6·25직후 김일성에 의해 처형된 박헌영에 대해서는 언급을 피한 채 4·3사건이 통일적 중앙정부수립을 위한 김일성의 교시와 호소를 높이 받아들인 제주도 인민들이 주체의 기치를 높이 들고 ‘미제침략자들이 조작한 5.10망국단독선거를 반대하여 일으킨 반미-반팟쇼 구국항쟁’으로 규정함으로써 북의 지령에 따라 제주도민들이 봉기했다고 적고있다.

4·3사건이 남로당 상부 지시로 발생했다는 것은 당시 남로당 세력들이 남긴 유일한 문서인 ‘제주도인민유격대 투쟁보고서’에 잘 나타나있다. 이 보고서는 1948년 3월 중순경 상부로부터 무장 반격 지령을 받은 것으로 돼있다. 이 같은 불법적인 ‘무장폭동’에 대해 당국이 질서회복 차원에서 ‘진압작전’으로 대응한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선택이었다.

4월 3일 무장폭도들은 스스로를 ‘제주인민해방군’이라 칭하면서 북한의 혁명가요인 ‘적기가’와 ‘인민항쟁가’를 부르면서 제주도내 경찰지서 24개중 12개소를 비롯한 수많은 관공서 건물을 약탈·방화하고, 우익인사와 군경가족을 습격·살해하는 등 폭력적 수법으로 반인륜적인 살인 만행을 저질렀다. 주동자인 김달삼(金達三)은 박헌영의 지령에 따라 폭동이 진행 중이던 1948년 8월 2일 제주에서 선박편으로 목포를 거쳐 월북, 8월 21-25일 해주에서 열린 이른바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에 참석해 ‘제주4·3투쟁보고’를 하고, 대한민국의 타도를 외치며“조국의 해방군인 위대한 소련군과 그의 천재적 령도자 스탈린 대원수 만세!, 김일성 장군 만세!”를 불렀다.

김달삼은 이후 김일성, 박헌영, 홍명희, 허헌(許憲) 등과 함께 49명으로 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돼 9월 9일 선포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창설에 기여한 인물이다. 그는 제주4·3폭동에 대한 공로로 1949년 1월 8일 수상이던 김일성으로부터 국기훈장 2급을 받았으며, 6·25 발발 직전 빨치산부대를 이끌고 남침했다가 1950년 3월 정선지역전투에서 사살됐다. 강원도 정선군 여량면 봉정리에는 남한에서 두 번째로 긴 이름의 ‘김달삼모가지잘린골’이라는 지명이 있는 데 김달삼이 이 근처에서 잡혀 목이 잘렸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김달삼은 사후 평양근교 신미리의 애국열사릉에 가묘가 안장됐으며, 이러한 사실은 2000년 3월 평양을 방문한 우근민 당시 제주지사에 의해 확인된 바 있다.

당시 김달삼과 함께 제주4·3무장폭동을 주도하고 월북한 남로당 제주도당위원장 강규찬(姜圭贊)과 그의 부인 고진희(高眞姬), 이정숙(李貞淑), 안세훈(安世勳) 문등용 등 5명도 북한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으로 선출됐다. 이들 가운데 특히 주목할 인물은 강규찬이다. 강규찬ㆍ고진희 부부는 4·3무장폭동을 일으키기 전에 이미 북한에 들어가 김일성을 직접 만났으며 그로부터 특별히 공작임무를 받고 다시 제주도로 파견됐다. 이는 4·3무장폭동이 김일성과 북한 지도부의 지시에 따라 일어났다는 것을 강력히 시사하는 대목이다.

강규찬ㆍ고진희 부부는 4·3무장폭동을 주도하던 중 북한에 월북했을 때 김일성을 또다시 만나 그동안의 공작임무 수행 결과를 보고했다. 강규찬ㆍ고진희 부부는 6·25전쟁 발발과 함께 북한군이 점령한 남한지역에서 노동당 재건 및 토지개혁 실시 등 정치공작대 활동을 하다가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래서 김일성은 이들의 공적을 특별히 높이 평가해 공화국 영웅 칭호를 부여하고 북한의 국립묘지격인 애국열사릉에 안장하도록 특별히 배려했다. 지금도 북한은 강규찬ㆍ고진희 부부를 지리산유격대 총사령관이었던 이현상이나 거물급 공작원 성시백 등과 동급으로 평가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제주 4·3공산폭동 총책 김달삼(金達三, 1923-1950)

제주 4·3사건이 ‘공산폭동’이라는 것은 김대중 대통령도 인정한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1998년 11월 23일 미국 CNN과의 인터뷰에서 제주4·3은 공산당의 폭동으로 일어났다고 전 세계에 천명했다.

4·3사건이 대한민국의 수립을 저지하기 위한 계획적인 공산폭동이란 사실은 이밖에도 △4·3의 주체가 공산주의자이며 목적은 공산통일조국 건설이라고 한 남로당 제주 대정면당 위원장 이운방의 증언 △1948년 10월 24일 김달삼의 뒤를 이은 제주인민유격대 제2대 사령관 이덕구가 대한민국을 상대로 선전포고와 함께 국군을 상대로 전투를 벌인 사실 △6&#8231;25가 발발했을 때 남로당 제주도당이 인민군지원환영회를 조직하고, 북한군 상륙시 합세해 대한민국을 전복하려고 획책한 사실 △5&#8231;10선거 때 남로당이 인민공화국 건설을 주창하며 폭력을 행사하는 바람에 전국 200개 선거구중 북제주 2개 선거구 선거가 실시되지 못한 사실을 지적할 수 있다.

특히 제주인민유격대사령관 제1대 김달삼의 월북이후 제2대사령관 김덕구(1949년 6월 7일, 경찰에 사살)의 직속부하인 ‘양생돌’의 주머니에서 발견된 극비 메모인 <제주도인민유격대투쟁보고서>에 의하면 4·3사건은 남로당 제주도당의 독자적인 거사가 아니라 북과 연계된 전남도당으로부터 지령과 지도를 받아 5·10 단선과 단정을 반대하고 유엔감시위원단을 축출하기 위해 게릴라 전술과 조직 및 선전에 전문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는 공산주의자들이 기획하고 연출한 조직적인 무장-선전 투쟁이었다는 것으로 드러났다.

<극비>라는 표시가 돼있는 이 보고서는 1948년 3월 15일부터 7월 24일까지 무려 4개월 10일간에 이르는 투쟁 상황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유격대의 보유병기는 M1소총 6정, 카빙소총 19정, 99식 소총 117정, 44식 소총 4정, 30년식 2정 등 도합 147정이고, 소총 탄환은 M1 1천 396발, 칼빈 1천 912발, 99식 3천 711발, 44식 및 30년식 721발 등 총 7천 740발이다. 이밖에 경기관총(일본제) 1정, 척탄통 2문(탄환 8발), 수류탄 43발, 다이너마이트 69발, 신호탄 2개, 군도(軍刀) 16개, 권총 6연발 1정, 8연발 6정, 10연발 1정 및 탄환 119발과 함께 뇌관 103발, 지뢰 뇌관 8발, 야포탄환 4발 등을 보유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같은 사실은 제주4·3사건이 자발적인 민중봉기가 아니라 군사조직화한 무장폭동투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4·3사건이 박현영이 이끈 남로당 중앙당의 지령에 따라 일어난 ‘무장폭동’이었다는 사실은 당시의 남로당 기관지 ‘노력인민’의 1948년 4월 3일자, 20일자, 6월 8일자 및 11월 7일자에서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또한·미24군단 G-2(정보참모부)일일보고서(1948년 2월 6-7일), 동아일보 제주도폭동 현지답사 기사(1948년 5월 8일),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조국전선)결성식 선언문(1949년 6월 25일) 등 각종 자료가 남로당에 의한 계획적인 폭동이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특히 남로당 기관지 ‘노력인민’의 1948년 6월 8일자는 <조국을 방어하기 위하여 민족의 선두에서 사투하는 제주도 애국 동포를 구출하자!>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남로당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초안을 지지(1948년 3월 3일) 했기 때문에 제주도에서 인민공화국 만세소리가 천지를 뒤흔들었다”고 보도함으로써 노무현 정부의 발표처럼 4·3사건이 단순히 경찰과 서청의 탄압에 맞서 일어난 사건이 아님을 그들 스스로가 분명히 말해주고 있다.

더구나 1993년에 소련의 비밀문건 해제로 확인된 바에 의하면 소련의 스탈린이 1945년 9월 20일자로 “북한에 단독정부를 구성하라”는 지령을 내린 사실, 그리고 이 지령에 따라 임무를 수행했던 평양주둔 소련군 정치담당 부사령관 스티코프의 일기형식으로 된 비망록에 따르면 소련군정이 김일성의 북로당과 박헌영의 남로당을 완전히 장악했던 실상이 나타나 있으며 1946년 9월의 총파업과 10월 대구폭동시, 남로당 당수 박헌영에게 200만엔과 300만엔의 공작금까지 제공하며 투쟁 방법을 구체적으로 지시하는 내용이 기록돼 있다. 특히 1946년 9월 총파업과 10월 대구폭동을 앞두고 박헌영이 “당(黨)이 사회단체들을 어떻게 지도해야 하는지를 문의”하고 있으며 이에대해 스티코프는 “테러와 압제에 반대하는 대중적인 시위를 벌이고 항의집회를 개최하라”고 지시한 기록이 나타나 있다. 이같은 사실은 9월 총파업과 10월 폭동의 연장선상에 있는 제주4·3사건이 김일성과 박헌영의 지령에 의해 일어난 것임을 시사하는 것이다. 

▲1948년 5월 8일자 동아일보의 <제주도폭동현지답사> 기사. 소제목에서 <동족살상이 인민항쟁인가>라고 꼬집고 좌익세력에 의한 폭동임을 분명히 보도하고 있다. 특히 <최고 100만원의 살인현상 지령, 극악무자비한 폭상>이라는 또 다른 소제목의 기사를 보면 “인민 해방군은 순경 1만원, 형사 2만원, 경위이상 3만원, 경찰 유력자는 100만원의 살인 현상금을 걸고 살해를 촉구하고, 각 읍면 촌락에는 후원대를 조직하여 물자를 공급케 하면서, ‘목포까지 김일성 군이 내도하였으니 안심하라’는 적 전술을 연출하고 있다”고 돼있다. 당시, 쌀 한가마니 값이 300원이었으니 순경 1명 사살에 쌀 33가마니가 걸렸던 것이다. 이런 막대한 자금은 북한 공산당이 모든 국민이 함께 사용하는 화폐를 극비에 개혁, 구 화폐를 수거하여 남쪽으로 보내 사회를 교란하고 공작비, 파업지원비, 조직비 등으로 사용한 바 있다. 그럼에도 노무현 정부가 만든 4·3보고서 서문에는 “4·3사건 전체에 대한 성격이나 역사적 평가는 후세 사가들의 몫으로 남긴다”는 고건 전 국무총리의 발언을 명기해 놓고도 내용에는 “남로당 중앙당의 직접적인 지시가 있었다는 자료는 발견되지 않았다”는 일방적 주장으로 “경찰과 서청(서북청년회)의 탄압에 대한 주민들의 무장봉기”였다는 역사적 평가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주민 피해에 대한 “최종 책임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식으로 모든 책임을 대한민국 건국 대통령 탓으로 돌리는 야비하고도 비겁한 결론을 내렸다. 이러한 결론에 따라 노무현 대통령은 2003년 10월 30일, 4·3사건 희생자 발생과 관련해 건국 대통령 이승만 박사의 군 통수권 행사에 대하여 대신 공식사과를 함으로써, 대한민국 건국의 정통성을 전면 부정한 바 있다.

다음은 김일성의 ‘남한 단선단정(單選單政)반대와 전조선 통일적 중앙정부 수립’ 호소에 따라 제주도민들이 ‘4·3민중봉기’를 일으켰다는 북한 문헌 및 대남선전선동매체들의 기술내용이다.

◈4·3은 제주도 인민들이 위대한 수령님(김일성) 호소를 높이 받들어 일으켰다

미제침략자들이 조작한 5·10망국단독선거를 반대하여 주체37(1948)년 4월 3일 제주도인민들이 일으킨 반미구국항쟁. 4·3인민봉기라고도 한다. 남조선을 강점한 첫날부터 민족분렬책동과 식민지예속화정책을 감행하여 온 미제는 1947년 10월 조선문제를 비법적으로 유엔에 상정시키고 그 간판을 도용하여 《유엔림시조선위원단》을 꾸며 냈으며 《유엔림시조선위원단》의 감시 밑에 남조선에서 5·10망국단선을 실시하고 괴뢰정부를 조작하려고 책동하였다. 그리하여 우리 나라에는 국토량단과 민족분렬이 영구화될 엄중한 위기가 조성되였다. 이러한 정세하에서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북과 남의 전체 조선인민들에게 민족분렬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하여 조선인민의 의사를 대표하는 조선최고립법기관을 선거하고 전 조선적인 통일적중앙정부를 수립할 것을 호소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호소를 높이 받들고 남조선로동계급과 함께 제주도인민들은 《유엔림시조선위원단》의 《입국》을 반대배격하는 주체37년 2.7구국투쟁에 일떠섰다. 미제국주의자들은 2.7구국투쟁을 전후하여 제주도에서만도 무려 1만여명의 애국자들을 체포, 투옥, 학살하였다. 그러나 인민들은 5.10망국단선을 반대하는 투쟁에 더욱 힘차게 일떠섰다. 주체37년 3월말부터 제주도인민들은 2.7구국투쟁때 탈취한 무기로 인민무장자위대를 편성하여 한나산을 중심으로 하여 산악지대에 들어 가 근거지를 꾸리였으며 4월 3일 새벽 무장항쟁으로 넘어갔다. 그들은 《미제를 타도하라!》, 《단선단정 결사반대》, 《유엔림시조선위원단은 철거하라》, 《인민의 원쑤 반동무리들을 처단하라》,《주권은 인민위원회로》 등 구호를 웨치며 도처에서 경찰지서들을 습격하고 경찰들과 주구놈들을 처단하였으며 미제에 의하여 강제해산당하였던 인민위원회들을 다시 복구하였다. 30만의 도내 인민들중 24만을 망라한 봉기군중들은 적극적인 투쟁으로써 제주도에서의 망국단독선거를 완전히 파탄시켰으며 적들의 통치질서를 마비상태에 완전히 빠뜨리게 하였다. 미제국주의자들은 제주도인민들의 투쟁을 진압하기 위하여 《제주도비상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수많은 병력을 동원하여 도내 부락의 절반이상이나 되는 296개의 부락에 불을 지르고 7만여명의 인민들을 잔인하게 학살하였다. 그러나 원쑤들의 그 어떠한 발악과 학살만행도 제주도인민들의 영웅적투쟁은 미제와 남조선괴로도당의 야수적폭압과 미제의 고용간첩인 박헌영도당의 간첩행위로 말미암아 계속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제주도인민봉기는 외세의 간섭을 철저히 배격하고 민족자주적인 힘에 의하여 조국의 통일독립을 이룩하려는 제주도인민들의 한결같은 지향과 완강한 투지를 뚜렷이 부여 주었으며 미제침략자들에게 커다란 타격을 주었다.(출처: 『조선대백과사전』 제20권, 백과사전출판사, 평양: 평양종합인쇄공장, 주체89(2000년), pp.348-349)

◈김일성 교시, “제주4.3투쟁은 인민봉기다”

미제의 남조선 단독선거를 저지 파탄시키기 위한 남조선 인민들의 투쟁에서 가장 먼저 폭발한 적극적인 투쟁은 제주도에서 일어난 <4·3인민봉기>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었다. <제주도를 비롯한 남조선의 여러 지방들에서는 선거를 반대하는 인민봉기가 일어났습니다.>(김일성 저작집 4권, p. 376)

◈제주4.3사건은 주체의 기치따라 일어났다

제주도 인민봉기는 주체의 기치따라 유격투쟁과 기타 각종 형태의 투쟁이 결합된 새로운 특징을 지닌 반미 구국투쟁이었으며, 전체 도민 30만 명 중 24만 명이 궐기한 대중적이고 전인민적인 항쟁이였다. 제주도 인민들은 조국의 통일독립과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자기 희생성과 대중적 영웅주의를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4·3인민봉기>는 미제의 식민지 예속화 정책에 커다란 타격을 주었으며, 미제와 그 앞잡이들의 <5·10단선>을 파탄시키는데 있어서 선구자적 역할을 하였다. 제주도 인민들의 영웅적인 투쟁은 <5·10단선>을 반대하여 일어나고 있던 남조선 인민들을 고무하였다. 제주도 인민봉기는 또한 광범한 대중 속에 깊이 들어가 사상 조직적으로 그들과의 연계를 강화하고 군중을 옳게 조직 동원한다면 원쑤들의 그 어떤 아성도 능히 쳐부술 수 있는 커다란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귀중한 경험을 남조선 인민운동사에 남겨놓았다.(출처: 『주체의 기치 따라 나아가는 남조선 인민들의 투쟁』조국통일사, 평양, 1982, pp.137-142)

◈4. 3인민봉기는 제주도인민들의 정의의 반미반파쑈인민항쟁이다

4·3인민봉기는 남조선을 강점한 미제침략자들의 식민지예속화정책과 민족분렬책동을 반대하고 조국의 자주적평화통일을 이룩하기 위한 제주도인민들의 정의의 반미반파쑈인민항쟁으로 력사의 갈피에 자욱을 새겼다.

미제국주의자들은 2·7구국투쟁을 전후하여 제주도에서만도 무려 1만여명의 애국자들을 체포, 투옥, 학살하였다. 그러나 인민들은 《5·10망국단선》을 반대하는 투쟁에 더욱 힘차게 일떠섰다. 1948년 3월말부터 제주도인민들은 2·7구국투쟁때 탈취한 무기로 인민무장자위대를 편성하고 한나산을 중심으로 하여 산악지대에 들어가 근거지를 꾸리였으며 4월 3일 새벽 무장항쟁으로 넘어갔다.(출처:《우리 민족끼리》주체104(2015)년 4월 3일)

◈제주 4·3은 제주만의 고립된 투쟁아닌 남조선 전체 인민의 구국투쟁의 일환이다

(제주인민봉기가 성공하고 있는 것은) 첫째로는 30만 제주도 전체 인민들이 불타는 조국애로써 강철같이 단결하여 미 제국주의와 그 주구 매국노 리승만, 김성수, 리범석 도배들의 남조선 분할 식민지 침략정책을 단호히 반대하고 조국통일과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용감하게 싸웠기 때문입니다. 둘째로는 제주도 무장구국항쟁은 고립된 투쟁이 아니라 남조선 전체 인민들의 위대한 구국투쟁의 일환인 까닭입니다. 전국에서 투쟁이 있었기에 적들이 제주도 무장투쟁을 적극적으로 공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승리가 눈앞에 와 있습니다.(출처: 김달삼의 해주 남조선 인민대표대회 연설문 중에서)

<제주4·3사건 관련 일지>

△ 1946년 10월 1일 좌익주도 대구 10월 폭동

△ 1947년 3월 1일 3·1절 기념대회 시위 후 경찰 발포로 민간인 6명 사망, 8명 중경상

△ 1947년 3월 10일 3·1절 발포 책임자 처벌 요구하는 166개 기관단체 총파업

△ 1947년 3월 22일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朝鮮勞動組合全國評議會) 즉, 전평(全評)이 주 도한 남한 전역 24시간 총파업

△ 1947년 11월 2일 서북청년회 제주도본부 결성

△ 1948년 2월 7일 단선·단정 반대 2·7폭동

△ 1948년 3월 3일 남로당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초안 지지

△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주도 무장대(인민유격대) 폭동 시작. 제주지역 24개 경찰지서 중 12개 지서 공격. 경찰관 4명, 우익인사등 민간인 8명, 무장대 2명 사망

△ 1948년 8월 25일 남로당 제주총책 겸 인민유격대 제1대 사령관 김달삼 월북, 해주에서 열린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 참석

△ 1948년 9월 9일 남로당총책 박헌영, 북조선 정권 수립에 참여해 공화국 내각 부수상 겸 외무상에 선출

△ 1948년 10월 17일 해안에서 5km 벗어난 지역 통행금지를 명령하는 포고령

△ 1948년 10월 19일 제주 폭동진압 명령 거부 군인들 항명(여순반란사건)

△ 1948년 11월 17일 계엄령 선포

△ 1948년 12월 31일 계엄령 해제

△ 1949년 1월 17일 토벌대에 의한 ‘북촌사건’ 발생. 주민 400여 명 학살

△ 1949년 6월 7일 인민유격대 제2대 사령관 이덕구 사살

△ 1949년 10월 2일 제주공항 인근에서 249명에 대한 총살 집행 후 암매장

△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구역 해제

△ 1989년 4월 3일 제1회 4·3추모제

△ 1991년 4월 3일 제46주년 제주도 4·3사건민간인희생자 합동위령제

△ 2000년 1월 12일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공포

△ 2003년 10월 15일 정부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확정

△ 2003년 10월 31일 노무현 대통령, 국가권력에 의한 주민 희생 사과

△ 2005년 1월 27일 제주 평화의 섬 선포

△ 2006년 4월 3일 노무현 대통령, 제58주년 제주4·3사건희생자위령제 참석

△ 2008년 11월 10일 제주4·3평화재단 출범

△ 2014년 3월 24일 제주4·3사건 국가기념일 공포

▲남로당이 4·3무장폭동을 일으키면서 배포한 “반미구국 투쟁에 호응 궐기하자”는 호소문. 제주4·3사건 70주년을 맞아 서울 광화문 대한민국역사박물관 3층에 마련된 ‘제주4·3특별전’ 전시장에 들어서면 눈에 띄는 위치에 크게 걸려 있다. 이 ‘무장대의 호소문’은 남로당 인민유격대가 제주도내 24개 경찰지서 중 12곳을 습격해 경찰관을 살해하고 선거 관계자와 우익단체 인사를 테러하면서 뿌린 유인물이다. “탄압이면 항쟁이다. 제주도 유격대는 인민들을 수호하며 동시에 인민과 같이 서고 있다…양심적인 경찰원·청년·민주인사들이여! 어서 빨리 인민의 편에 서라. 반미구국투쟁에 호응 궐기하라.”고 적혀있다. 하지만 4·3사건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위한 5·10선거를 저지하려고 남로당이 무장 반란을 일으키고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양민들이 희생된 비극이다. 특별전은 남로당 입장을 대변하는 듯 보이는 전시물들로 가득하다는 지적을 받는다.(사진=조선일보 갭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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