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제와 겸양 없는 한국가요, 해외 락에서 배워야

"저급한 상업주의가 빚어 낸 '감정 과잉' 경계해야"
"대중이 당장 원하는 것만을 떠먹여주면 그 끝은 'The End'"

양일국 한국자유총연맹 방송팀장/문화평론가 | 최종편집 2018.01.15 14:56:24


‘나는 가수다’ 열풍이 벌써 7년 전이라니 세월이 무상하다. 지금 돌아볼 때 아마츄어가 아닌 전업 가수들이 현장 방청객에게 순위를 평가받아 울고 웃는다는 자체가 기상천외한 것으로, 이른바 정치판의 포퓰리즘이 대중문화계로 전이된 것이었다. 순위 정하는 프로그램이 다 잘못됐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500여명 남짓의 일반인들이 ‘한번 듣고’ 평가한다는 것이 문제라는 생각이다. 대개 좋은 음악은 한번 들어서는 그 진가를 모르는 경우가 많고 한번에 느낌이 확 오는 곡도 몇 번 듣다 손이 안가는 경우도 적지 않다.

아무튼 이러한 기획의 목적은 주로 ‘지위의 역전’이 주는 기쁨일 것이다. 내가 감히 평가할 수 없는 특정 분야의 전문가들을 세워 놓고 그들이 긴장해서 떠는 모습을 보는 것은 한편으로 재밌는 일이다. 비슷한 예로 모 방송의 라면 요리대회 심사위원석에 쟁쟁한 호텔 요리사와 함께 이름도 못 들어본 ‘라면 카페’ 운영자가 앉아있던 것을 들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절친한 선후배 사이의 “야자(반말) 타임” 같은 예외적인 것이어야지 사회 전반이 매사 그렇게 돌아가면 그게 바로 막장 사회다.



‘나는 가수다’를 추억할 때, 개중에는 가히 세계적인 수준의 무대를 보여준 경우도 있었지만 대체로 현장에서 대중들의 즉흥적인 지지를 이끌어내야 하는 탓에 회를 거듭할수록 출연자들의 행태는 가관으로 흘러갔다. 그냥 원곡의 진행대로 가도 좋을 전주에 별 이상한 불협화음(좋게 말해줘서 계류음)을 편곡이라는 이름으로 구겨 넣고 “나는 도시적이며 최신 트렌드를 아는 깨어 있는 뮤지션이야” 하는 표정을 짓고 서 있거나 과연 저 노래를 듣고 그랬을까 싶을 눈물 흘리는 관객들의 모습을 편집해 넣어서 “뭐해! 어서 너도 울어!” 하는 일종의 강요된 ‘신파극’이 계속됐다. 결국 나가수는 신-구세대 가수가 한데 뒤섞여 ① 억지 고음 ② 과잉 감정 ③ 과잉감정 후 억지 고음의 세 가지 패턴으로 밟고 밟히는 아비규환이 되고 말았다.

급기야 TV출연을 안하기로 유명한 조용필은 보다 못했는지 2011년 9월 25일 방송에 직접 출연, 후배 가수들에게 감정을 절제하라고 일갈했다. 이날 한 소리 들은 중견 여가수가 나름의 변명을 하려하자 “그래도!”라며 잘라 버렸다. 출연자 중 막내이자 맨날 술을 마신듯한 감정 과잉을 보여준 가수에게는 상처 받을 것을 걱정했던지 고음이 많이 올라간다는 칭찬을 하나 던져주었지만 역시 총평은 오버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문제는 나가수는 끝났지만 나가수식 ‘감정 오버’는 여전히 가요계에 암덩이처럼 남아있다는 것이다.


물론 가수 본인이나 제작자들도 할말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오늘날 음악 시장의 특성상 몇 초 내외에 강한 인상을 주지 못하면 외면받기 때문에 이른바 조미료를 강하게 넣지 않을 수 없다는 이야기가 들린다. 예를 들면 발음이나 억양을 외국인처럼 하거나 과장된 감정을 연출하는 하는 식으로 어떻게든 기억에 남도록 하자는 전략이다. 또 어떤 이들은 세상살이가 팍팍해서 목 놓아 울고 싶은 이들을 위한 일종의 맞춤형 서비스라고도 말한다.

사실 드물긴 하지만 해외에도 과도하게 감정이 들어가 이상한 노래가 없진 않다.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임을 전제하고 몇 곡을 들자면 셀린 디온의 ‘It's All Coming Back To Me Now(1996)’, 건스 앤 로지스의 ‘Estranged(1991)’에서 액슬 로즈의 노래를 들 수 있다. 다행히 액슬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공연장에서는 앨범처럼 부르지 않아 한결 듣기 좋다.

문제는 우리나라 가수들의 일반적인 감정 과잉에 비하면 저 정도는 귀엽게 봐줄 수준이라는 점이다. 특히 발라드 곡을 들고 나오는 국내 여성 가수들은 적어도 필자의 기준으로 볼 때 거의 대부분이 과잉으로 생각된다. 어느 식당을 가나 웰빙과 저염식을 권하는 오늘날 가요만은 시대에 역행하는 것 같아 걱정된다. 비단 가창의 문제뿐 아니라 의상과 퍼포먼스 등 전반이 과장돼있다고 느끼는 것이 필자뿐은 아닐 것이다. 


절제는 음악뿐 아니라 다양한 예술에서 하나의 미덕으로 여겨진다. 예를 들면 정지용의 ‘유리창(1930)’은 특별한 시적 기교 없이 오직 절제만으로도 깊은 감동을 줄 수 있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시인은 딸아이를 폐렴으로 떠나보냈다. 어느날 넋 놓고 아이 방 유리창에 기대 있는데 자신의 입김이 서렸다 사라지는 것을 아이 영혼이 날개짓하며 떠나가는 것에 비유했다. 목 놓아 울어도 모자랄 상황을 담담하게 써놓으니 이게 참 서럽고 슬프다. 만약 요즘 한국 가수들에게 이런 내용의 노래를 부르라고 하면 무대에 주저앉아 상가집 곡 소리를 할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방송사는 이때다 싶어서 노래 사이 사이 어디서 가져왔는지도 모를 눈물 흘리는 관객 모습 몇 개 편집해서 넣어줄 것이다.

악기 연주에 있어서도 감정의 절제는 중요하다. 1986년 일본 가루이자와에서 제프 벡, 카를로스 산타나와 협연했던 스티브 루카서의 연주가 우선 떠오른다. 그는 시종일관 속주와 화려한 기교를 남발했지만 절제하며 한 음 한 음을 연주한 나머지 두 거장의 연주에 묻혀버렸다. 스티브는 종종 무대에서 ‘Hold The Line’의 명품 기타 솔로를 재현하지 않고 다소 이해하기 힘든 즉흥적 속주로 대신하곤 했다. 다섯 차례나 그래미 상을 받은, 얼마든지 좋은 곡을 쓰고 연주할 수 있는 그가 무대에만 서면 왜 저럴까를 생각해보니 그것 역시 크게 볼 때 절제의 부족이 원인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사람은 발전한다. 2015년 1월에 래리 칼튼과 함께했던 그의 내한공연에 가보니 아마도 9살 선배인 래리 칼튼이 눈치를 줘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절제된 하모니가 듣기 좋았다.

드럼에서 절제된 연주의 좋은 사례로는 1988년 카네기 홀에서 열린 버디 리치 추모공연에서 데이브 웨클, 비니 칼리우타와 함께 멋진 배틀을 선보였던 스티브 갯을 들 수 있다. 그는 거의 스틱이 보이지 않을 만큼 화려한 데이브와 비니의 공격(?)에 단순하며 기본적인 패턴으로 맞섰다. 그런데 그게 참 기가막혀서 적잖은 사람들이 진정한 내공이란 이런 것이구나 감탄했다. 실제로도 2012년 10월에 그의 내한 공연이 모 신학대에서 열렸는데 이토록 관객들이 드럼만 집중해서 보는 밴드 공연이 또 있을까 싶었다. 그리고 이 자리를 빌어 다른 날에는 신성한 종교의식이 행해질 그 공연장에서 맥주를 마신 것을 고백하고 또 사죄한다.

음악에 있어서 절제의 궁극적 완성은 아마도 다른 파트를 더욱 빛나게 하기 위해 자신을 낮추는 겸양(謙讓)의 경지일 것이다. 이를테면 1975년 결성해 오늘날까지 멋진 기타 하모니를 들려주는 아이언 메이든의 두 기타리스트(최근엔 세 명) 데이브 머레이와 야닉 거스를 들 수 있다. 돌아가며 리드 솔로를 주고 받는 두 연주자는 절대로 상대방이 연주할 때 끼어들거나 방해하지 않고 자신의 소리를 작게 줄여 상대를 위한 반주에 열중한다.

아일랜드가 배출한 세계적인 밴드 씬 리지의 기타리스트 스콧 고햄 역시 진정한 대인의 풍모를 보인 연주자다. 1986년에 세상을 떠난 밴드 리더 필 라이넛의 추모공연 실황을 담은 ‘One Night Only(2000)’에서 그는 리드 기타 존 사이크스 특유의 거칠고 직선적인 기타 솔로를 위해 깨끗하면서 약간 부족한 듯한 톤으로 반주함으로써 공연 전체를 예술의 경지로 끌어 올렸다. 특히 이 음반 가운데 ‘Still in Love with You’에서 스콧의 리듬 기타가 없었다면 아주 심심한 곡이 됐을 것이다.   

지난 50여년간 에릭 클랩튼이 공연할때마다 거의 빠지지 않고 함께하는 기타리스트 앤디 페어웨더 로 역시 빼놓을 수 없는 겸양의 아티스트다. 귀 기울여 듣지 않으면 잘 들리지 않을 정도의 반주를 담당할 뿐이지만 그가 반주를 해줄 때 에릭 클랩튼이 느끼는 심리적 안정감에 의해 공연 전체가 빛이 난다. 특히 에릭의 1995년 런던 하이드파크 공연에서 앤디의 ‘지원 사격’은 가히 모든 리듬(세컨드) 기타의 교과서라 할만하다. 특히 ‘Everyday I Have the Blues’에서 앤디의 연주가 그렇다.


작년 11월 타계한 호주의 간판 하드록 밴드 AC/DC의 리듬기타 연주자 맬콤 영 역시 겸양과 절제의 미덕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뮤지션이다. 단적인 예로 그는 일반적으로 크고 거친 소리를 선호하는 하드락/메탈 기타리스트와는 달리 기타에 거의 게인(기타 앰프에서 소리를 증폭해서 거칠게 만드는 기능)을 넣지 않았다. 오그라드는 80년대 음악평론 식으로 말하자면 맬콤 영의 연주는 리드 기타 앵거스 영이 완벽하게 날아오를 수 있는 활주로였다. 1992년에 발매된 그들의 공연실황음반 ‘AC/DC Live’의 ‘Back in Black’에서 그의 우직하며 겸손한 연주를 들을 수 있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오늘날 가요에 퍼져 있는 감정 과잉은 저급한 상업주의가 빚어 낸 것이면서 동시에 조급하고 바쁜 이 사회의 단면을 보여준다. 그나마 몇 안남은 신촌 등지의 옛 음악을 들려주는 LP바에 가도 ‘Echoes’처럼 20여분에 달하는 핑크 플로이드의 명곡들을 신청하는 이는 거의 없다. 사실 음악도 다른 취미와 마찬가지로 노력하고 투자한 만큼 더 좋은게 들리는 법인데 바쁜 세상에 그럴 여유가 없다.

결국 인스턴트 라면처럼 짧은 시간에 위로받기 위해 ‘오버하며 질질 짜는’ 음악이 필요한 것일지 모른다. 그러나 앞서 소개한 나가수, 그리고 얼마전 그리스의 경우처럼 예술이건 정치건 대중들이 당장 원하는 것만을 떠먹여주면 그 끝은 국가 부도 아니면 종영이다. 맬콤 영처럼 남들이 알아주건 말건 묵묵히 절제하는 뮤지션이 보고 싶다. 다시 한번 이 자리를 빌어 그의 명복을 빈다(1953-2017).

양일국 한국자유총연맹 방송팀장/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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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제공 = TOPIC/SplashNews(www.splashnews.com 스플래쉬닷컴), 픽사베이(https://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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