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들 한홍구 때문에 마음 고생한 한만년 前 '일조각' 사장

    신문 칼럼에서 아들을 '자기가 무엇을 하는지조차 모르는,
    그리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 미련한 인간'이라고 표현

    배진영   

    임수경 밀입북 사건의 충격이 채 가시기 전인, 1989년 7월 20일
    《국민일보》에 칼럼이 하나 실렸다. 이 칼럼의 필자는
    “얼마 전 평양축전 밀사 임수경 양이 전대협을 통해 남긴 부모님께 드리는 글이
    신문에 발표되었다. 그 글을 읽고 내 가슴은 무어라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답답하고
    아프게 저며 왔다”면서 “단 한 마디 상의도 없이 훌쩍 떠나버린 딸자식을 둔 어버이,
    딸자식이 북에 갔다는 사실조차 남을 통해 들어야 했던 그 어버이를 생각했기에
    나는 속으로 울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임수경처럼 자신의 속을 썩이고 있는 자신의 자식에 대한
    통한(痛恨)의 념(念)을 솔직히 털어놓았다.

    <(前略) 요즈음 내가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앉을 만큼 화가 치밀고 놀라기도 하는 것은
    아들 중의 막내인 넷째를 생각할 때이다.

    사학과를 선택한 이놈은 ‘언더서클’에 열심히 다니다가 무슨 사건인가에 관련이 있다 하여
    결국 예정보다 일찍 군 복무를 하는 신세가 되었었다. 아무튼 졸업을 하고 대학원에 간다길래
    학문을 하려나보다 생각해서 뒷바라지를 해 주었다.

    석사과정을 끝내고 나서도 뭉그적거리고 박사과정에 입학을 안 할 뿐더러 취직도 안하고 있었다. 그래도 무엇인가 열심히 공부는 하고 있는 듯 하여 불안하기는 했지만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랬더니 얼마 전부터는 ‘현대사 연구가’라는 희한한 신분을 자처하며 잡지에 글을 쓰지를 않나, TV좌담회 화면에 튀어 나오지를 않나, ‘강의 준비’와 ‘저술 원고’에 바쁘다 하여 부모형제조차도 만나보기가 힘들 지경이 되었다.

    이러다가는 안 되겠다 싶어서 하루는 앞에 불러놓고 정색을 하며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그리고는 너무나 놀랍고, 슬프고, 분하고, 어처구니가 없어서 하루 종일 줄담배를 피우기만 했다.
    내 앞에 있는 애는 혹시나 하고 기대했던(부모란 이렇게도 자식에 관한 한 어리석은가보다) 이제까지의 터부를 깨고 미개척 분야에 과감히 도전하는 날카로운 소장학자의 모습이 아니었다.
    애비가 새삼 발견한 아들의 모습은 너무나도 슬프게도 자기가 무엇을 하는지조차 모르는, 그리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 미련한 인간 그것이었다.

    6.25를 몸으로 겪은 부모가 김일성에게 품은 증오와 경계, 그리고 전쟁통에 죽고 다치고 피난다닌 너무나도 현실적인 공포를 이른바 ‘구세대’의 상투적인 잔소리 정도로 치부하다니....

    반컵의 물을 보고서도 자기 것이면 반(半)이나 찬 것이라고 자랑하고 상대의 것은 반이나 비었다고 욕을 하니, 궤변이라기보다 차라리 억지요 논리의 치졸이었다.

    민중에 대한 지식인의 사명을 입에 담으면서도 정작 자기 스스로의 주장에 대한 회의(懷疑)라고는 전혀 없는 뱃속 편한 지적 기능인의 모습이었다.

    내가 이렇듯 분통이 터지는 이유는 자칭 현대사를 연구한다는 자가
    첫째 그 기본 도구 중의 하나인 어학 훈련을 등한시하고 있으니,
         학술적인 문맹(文盲)이 되어 버린 점이다.

    둘째, 남들이 아직 못본 소위 미개척 분야의 사료(史料)를 조금 먼저 볼 뿐 정작 사료를 다루는 기술과 이를 해석할 안목을 기르는 훈련을 안 하니 깊이 있는 연구성과를 기대하기 힘든 점이다.

    셋째, 학부 때부터 그저 한국사라는 분야에만 매달리다보니 역사학이 학문으로서 성립한 아래 무수한 선학(先學)들의 시행착오와 업적들을 눈여겨보지 아니하고 사실상 ‘단절된’ 우물 안 개구리가 되어버린 점이다.

    넷째, 이러한 무지에서 비롯된 자신감과 용기에 가득 찼으니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격이다.

    다섯째, 이러한 애가 무슨 민중학교인지 정치학교에서 강의를 하고 다녔다니 하룻강아지가 다른 강아지들에게 ‘범이란 설사 물려가더라도 정신만 바짝 차리면 되니 무서울 것이 없다’고 가르치는 격이다.

    가만히 보자 하니 저 혼자 정신 못 차리고 있는 정도가 아니라 이건 남의 자식까지도 혼란시키고 있는 것으로, 애비된 도리로서 다른 부모들에게도 면목이 없다. 이런 이야기를 해 가며 이것저것 타일러 보았으나 도무지 호두껍질같이 단단한 자기 세계 속에 웅크리고 들어앉은 상태라 쇠귀에 경읽기다. 마치 사이비 종교에 빠진 사람 같이 자기들만이 진리를 알고 있고, 자기들만이 세상을 구원하고 있다는 식이다.

    왜 이 지경이 되었는지....

    궁여지책으로 소위 ‘미제국주의자(美帝國主義者)’들이 어떻게들 대학에서 연구하고 있는지 좀 보고 오지 않겠느냐고, 기왕이면 서머스쿨이라도 다니며 어학실력이라도 기르라고 강권하면서 필요없다고 툴툴대는 놈의 등을 떠밀다시피 해서 미국으로 쫒아 보냈다. 속으로는 저도 사람인 바에야 강제로라도 우물 밖으로 끌어내 놓으면 세상 넓은 것도 알고 자기 생각이 너무도 좁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겠지 하는 가냘픈 기대에서였다.

    자식이 하필이면 시대착오적인 좌경(左傾)이나 용공(容共)세력에 관련되어 수사기관에 불려다니는 것은 어느 부모나 소름끼치도록 싫을 것이며, 좌경으로 낙인찍힌 덕택으로 장래 변변한 직장에 취직하는 것조차 마음대로 안 되는 것도 더더욱 싫은 법이다. 그런 형제나 자매나 친척을 두었다는 이유로 음으로 양으로 불리한 대우를 받을 다른 자식, 친척들간에 조금이라도 원망하는 마음이 생길까보아 더더욱 생각하기도 싫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끔찍한 것은 혹시라도 자식이 너무 늦게 제 미련함을 깨닫거나 혹은 끝끝내 깨닫지를 못한 채 단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제 인생을 낭비해버리지나 않을까 하는 악몽과도 같은 시나리오다. 그런 시나리오의 전개 속에서 비록 자식에게 버림받더라도 그 자식을 끝내 버릴 수도 없는 것이 부모된 죄라는 것, 그리고 나뿐만 아니라 이 글을 읽는 그 누구도 그런 불쌍한 부모의 하나가 될 지도 모른다는 서글픈 사실이다.>

이 글의 필자는 한만년(韓萬年.1925~2004) 선생. 1953년 출판사 일조각(一潮閣)을 설립, 수많은 학술서적을 펴낸 출판계의 존경받는 원로였다. 

한만년 선생의 글에는 어느 날 문득 자신의 자식이 길을 잘못 들었다는 사실을 알고 어쩔 줄을 몰라 하는 부모의 당혹감, 아버지가 살아온 인생과 나라를 부정하는 잘못된 역사관을 가지고 남의 자식들까지 망치는 못된 자식을 둔 데 부모로서 세상에 대한 송구함, 그리고 자식이 그로 인해 인생을 망치지나 않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절절이 배어 있다. 그것은 차라리 통곡이었다. 

한만년 선생의 이러한 마음을 느낀 것일까? 《중앙일보》는 다음날 ‘분수대’라는 칼럼난에서 ‘어떤 부정(父情)’이라는 제목으로 이 사연을 소개했다.

하지만 ‘저도 사람인 바에야 강제로라도 우물 밖으로 끌어내 놓으면 세상 넓은 것도 알고 자기 생각이 너무도 좁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겠지’ 하는 아버지의 가냘픈 기대는 철저하게 배신당하고 말았다.

아들은 미국 워싱턴주립대에서 1980년대 한국 민주화운동의 지지자였던 제임스 팔레 교수를 만났다. 한국에 있을 때, 6.25 당시 태백산 빨치산 지휘관 남도부(본명 하준수)의 이름을 따서 남준수라는 이름으로 <민중일보>(민청련 기관지) 기자 노릇을 했던 그는, 아무도 자기에게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는 미국에서 본격적으로 일제하 만주지역의 빨치산 투쟁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걸로 박사학위를 받고 돌아왔다.

당초 기대와는 달리 더 나빠진 모습으로 돌아온 아들을 본 한만년 선생은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한만년 선생을 잘 아는 분들의 말에 의하면, 한 선생의 상심은 이루 말할 수 없었으며 돌아가실 때까지 아들과 의절하다시피 했다고 한다.

행인지 불행인지, 세상은 바뀌었다.  
아버지가 걱정했던 것처럼 ‘좌경으로 낙인찍힌 덕택으로 장래 변변한 직장에 취직하는 것조차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은 고사하고, 아들은 좌경 경력을 밑천으로 대학 교수 자리를 꿰찼다.
한때는 국가기관의 위원 자리도 여러 개 차지했다. 그리고 인기 강사이자 저술가로 돈도 많이 벌고 있다.  그리고 아버지의 걱정처럼 ‘제 미련함을 끝끝내 깨닫지를 못한 채 단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제 인생을 낭비’하고 있다. 

그렇게 한만년 선생의 속을 썩였던 그 아들의 이름은 한홍구 -
'김창룡이 죽여도 될 사람을 하나 살려줬다. 박정희가 그때 죽었으면 대통령이 될 수 없었다. 우리 언니(박근혜 대통령)는 태어나기도 전이다. 태어나 보지도 못하는 거였는데 살려줬다'는 막말을 한 바로 그 사람이다. (페북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