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맺음말: 자기시대의 의미를 알았던 지도자

    ‘문명의 전환’에 성공한 이승만과 아데나워

       세계사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이승만(1875-1965)의 시대적 역할은 제2차 세계대전 후
    서독의 지도자 콘라드 아데나워(Konrad Adenauer,1876-1967))와 비슷했다.
    두 사람은 개인적으로도 많은 유사점을 가지고 있었다. 
  • ▲ 고종이 실패한 한미동맹을 성공시킨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을 공식방문하여 아이젠하워와 악수하고 있다.
    ▲ 고종이 실패한 한미동맹을 성공시킨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을 공식방문하여 아이젠하워와 악수하고 있다.
   두 지도자는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서 비슷한 시기에 정권을 잡고, 비슷한 기간(14년과 12년) 통치하였다. 그리고 통치자로서는 드믈게 최고의 학력인 박사 학위를 가졌고, 90세 이상 장수하였다.
  두 사람은 모두 패전과 식민지 상태라는 극한적인 상황에서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고 냉전이라는 초강대국들의 갈등 구조 속에서 국가의 생존을 지켜내야 하는 힘든 과제를 안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나라는 약했지만 지도자는 강했다”는 말에 적합할 정도로 국제적 발언권을 가졌던 거물급 지도자들이었다. 

   이승만의 경우, 그의 국제적 중요성이 얼마나 컸나 하는 것은 그가 유학생 자격으로 미국 땅을 밟은 1904년부터 하와이에서 죽은 1965년까지 <뉴욕타임스>에 게재된 관련 기사만도 1,256건에 이른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불행에 빠진 자기 조국을 재건하는 데 있어서 두 지도자가 공통으로 보여준 가장 중요한 특징은 ‘현대판 로마제국’으로 떠오르고 있던 미국을 파트너로 잡았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두 지도자는 모두 자기 조국을 ‘대륙문명권’으로부터 벗어나 ‘해양문명권’에 편입시키는 ‘문명의 전환’을 시도함으로써 일찌감치 ‘팍스아메리카나’ 시대에 적응하려 했던  선각자들이었다. 
  • ▲ 프랑스 드골과 손잡은 서독의 아데나워(오른쪽).
    ▲ 프랑스 드골과 손잡은 서독의 아데나워(오른쪽).
  •    아데나워가 볼 때 독일의 문명사적 위치는 영국,프랑스의 서방문명과 러시아의 동방문명 중간에 걸처있는 ‘그네타기 식’ 그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독일을 동방문명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여 서방문명에 확실하게 편입시키려 했다. 따라서 그는 독일을 대서양 건너 미국과 연결시킨 대서양주의자가 되었다.  
       이승만도 한국을 태평양 건너 미국문명과 직접 연결시킨  태평양주의자가 되었다.   
       
    이러한 ‘문명의 전환’은 아데나워 보다 이승만에게 더 큰 어려움을 가져다 주었다.
    한국인에게 있어서 그것은 오랫 동안 익숙해 온 공동체주의적인 ‘중국적 생활방식’을 버리고
    완전히 낯 선 개인주의적인 ‘미국적 생활 방식’을 새로이 받아 들임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낯 선 문화에 대한 적응과정에서 격렬한 반발의 진통이 따랐다.
    진통이 얼마나 컸던가 하는 것은 지난 반 세기 동안의 남-북한 역사를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다.  
       대륙문명권에 그대로 남아 있던 북한 사회가 비교적 안정된 모습을 보여 주고 있는 것과는 달리, 대한민국 사회는 시위,파업, 폭동,정변으로 끊임없이 시달려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진통을 겪으면서도 대한민국은 해양문명권에 적응했고,
    그 대가로 자유와 번영을 얻었다.

    해양문명권에 적합한 엘리트의 육성
     
       새로운 문명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그것에 적합한 새로운 엘리트가 형성되어야 했다. 
       그러므로 이승만은 해방 직후의 격동기에 이념 대결로 엘리트가 희생되는 것을 막으려 했다. 그래서 친일 시비에도 불구하고 일제시대에 교육을 받고 경험을 쌓은 엘리트를 보존하고 활용하려고 했던 것이다. 
       미국식 자유민주체제가 수립된 다음부터는 민주주의 운영에 적합한 교육받은 국민을
    양성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그러므로 의무교육제도의 시행을 서두르게 하였다.
     가난한 나라의 작은 예산이기는 하지만 연평균 10퍼센트 이상이 교육에 투자되었다. 
       그 결과로 그의 임기말인 1959년에 오면 학령아동의 95.3퍼센트가 취학하고,
    국민의 문맹률이 22퍼센트로 떨어지는 놀라운 성과를 보였다.
     그 때문에 로버트 올리버는 그를 가리켜 ‘교육 대통령’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의 교육정책은 새로운 엘리트 양성에서도 나타났다. 
       대통령이 외국 유학을 적극 권유했기 때문에, 나라가 가난했어도 1953-1960년 기간에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으로 나간 유학생이 4,884명에 이르렀다. 
       1953-1961년 기간에 해외로 떠난 단기연수 기술훈련생은 2,309명이었고,
    미국을 다녀 온 군 장교와 하사관은 1만명이 넘었다. 미 국무부의 교환 계획에 따라 단기간으로 미국을 다녀 온 사회 지도자들도 수백명에 이르렀다.  
       그들은 나중에 모두 한국의 발빠른 공업화와 근대화에 기여할 귀중한 인재였다.

    동맹이 국가생존의 필수조건임을 알았던 지도자

       두 지도자는 모두 국가의 생존에 있어서 동맹국의 확보를 위한 외교가 무엇보다도 중요함을
    알고 있었다. 
       아데나워는 총리로 있으면서 오랫 동안 외무장관을 겸직할 정도로 외교를 중요시했다.
    그의 가장 큰 관심은 소련의 침공에 대비하기 위해 미국이 주도하는  NATO에 가입하는 것이었다.   
       이승만은 청년시절부터 약소국이 주권을 유지하는 데 외교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1904년에 쓴 <독립정신>에서 외교의 중요성을 역설하기 시작했다.
       독립운동 시절에 그는 한국의 독립은 미국이 일본을 전쟁에서 패배시키는 경우에만 가능하므로 미국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놓아야 한다는 외교독립론을 주장했다. 

      그는 미 상원 부속교회 목사인 해리스 같은 거물급 감리교 지도자들을 통해 한국인의 독립의지를 미국정부에 전달했고, 그 결과로 루즈벨트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독실한 감리교도인 해리 홉킨스가 카이로 선언문을 기초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

       해방후에는 미국과 소련의 합의에 의한 정부수립이 실패할 것을 확신하고 그 문제를 UN으로 옮겨가게 함으로써 UN 감시하의 5.10선거가 가능하게 했다.

       또한 그의 외교는 6.25전쟁에서 “없어질 뻔 했던” 대한민국을 살린데서 위력을 드러냈다. 
       미군의 참전이 그처럼 빨리 이루어진 데는 평소의 친분이 깊었던 동경의 맥아더 사령관,
    그리고 동경에 일시 머무르고 있던 미 국무부 고문 덜레스와의 친분이 중요하게 작용하였다.
        6.25전쟁 당시 미국의 일방적인 휴전 기도를 막고 한미동맹을 얻어내기 위해 그는 반공포로 석방이라는 극약처방을 내렸다. 
       그리고 1951년에 유엔휴전3인위원회와 1954년에 제네바정치회의의 유엔참전국들이 대한민국을 없었던 것으로 하고 남북한 총선거를 통해 통일정부를 세우려 했을 때, 그는 벼랑끝 전술로
     버텼다.
       그 때문에 이승만 밑에서 오랫 동안 외무장관을 맡았던  조정환은 그를 가리켜 ’외교의 신(神)‘으로 불렀던 것이다.

       이승만의 한미동맹 결성은 한말부터 한국 외교가 추구했던 목표의 달성이었다. 
       열강의 각축전 속에서 나라를 잃을가 전전긍긍했던 고종 황제는 동맹국의 제1조건으로 한 반도에 대한 영토적 야심이 없어야함을 꼽았는 데, 그러한 나라는 미국뿐이었던 것이다.
       고종은 그러한 미국을 동맹국으로 잡는 데 실패했지만, 이승만은 성공한 것이다.
      
  • ▲ 6.25 공산침략에서 나라를 구한 이승만과 오랜 친구 맥아더.
    ▲ 6.25 공산침략에서 나라를 구한 이승만과 오랜 친구 맥아더.
  • 공산혁명가들의 자유만은 허용할 수 없었던 자유주의자

        아데나워와 이승만은 철저한 반공주의자들이었다. 
       아데나워는 공산당을 허용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공산체제의 동독을 국가로 인정하는 국가들과는 국교를 맺지 않는다는 ‘할슈타인 원칙’을 고집했다.

       이승만도 대한민국의 생존을 위해 공산주의자들의 자유만은 허용하지 않기 위해 국가보안법을 운영했다. 

       이처럼 목표가 같고 결과가 같았는 데도 두 지도자는 각기 자기 조국에서 아주 다른 평가를 받았다.  
       아데나워는 국민의 압도적 다수에 의해 ‘건국의 아버지’로,  ‘라인강의 기적’을 이룩한 영웅으로 존경받고 있다.  2003년 11월 독일공영방송 ZDF 텔레비전이 330만명을 대상으로한 설문조사는 아데나워가 독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임을 보여 주었다. 

       이와는 달리 이승만은 한국인에 의해 거의 최악의 평가를 받고 있다.
    2008년의 한 대학의 연구소가 조사한 대한민국 역대 대통령 인기도를 보면,
    이승만은 겨우 0.6퍼센트에 불과했다. 
       이처럼 이승만이 한국에서 잊혀 지고 지워지고 왜곡된 것은 그가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다는 사실이 가장 중요하게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 ▲ 소련의 좌우합작 공작에 말려들어 김일성과 손잡으려다 이용만 당한 김구 선생.
    ▲ 소련의 좌우합작 공작에 말려들어 김일성과 손잡으려다 이용만 당한 김구 선생.
    북한과 공산주의자들에게는 이승만이 없었으면 공산화 통일을 달성했을 것이라는 안타까움이 남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    이것은 이승만이 없었더라면 대한민국은 공산화가 되었을 것이라는 말이 된다.
    다시 말해, 이승만이 없었더라면 대한민국 땅도 북한처럼 중국 중심의 ‘대륙문명권’에 속해 있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렇게 되었더라면 대한민국은 ‘자유세계’에 속하지 못하게 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개인(個人)의 자유를 최고 가치로 여기고 자유선거를 통해 정부를 선택하는
    자유민주주의 제도는 ‘해양문명권’에서만 두드러지게 나타난 현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 대한민국이 오늘날의 자유와 번영을 누리게 된 것은 상당히는 개화파(開化派) 지식인 이승만의 공로인 것이다.
     그리고 그 업적은 ‘현대판 위정척사파’와의 힘겨운 싸움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끝)
    <이주영 /건국이념보급회 이승만 포럼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