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기업인 "조국 있어야 회사 있고, 민족 있어야 회사 필요해"
  • 박정희 대통령이 눈물로 쓴 ‘방독소감(訪獨所感)’

    [이현표의 시간 여행]
    50년전 박정희 국빈방독 v 50년후 박근혜 국빈방독
    
    이현표 /뉴데일리 논설위원, 전 워싱턴 문화원장


    박근혜 대통령이 요아힘 가우크 독일 대통령의 초청으로 3월 25~28일 독일을 국빈방문하는 것은 청와대가 발표한 방문목적과 의의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꼭 반세기(50년)전 박 대통령의 선친인 박정희 전 대통령 내외분의 감동적이고 역사적이었던 독일 국빈방문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1963년 10월 15일 박정희 후보가 대선에서 승리하고, 12월 17일 제5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취임 5일후인 12월 21일, 우리의 초기 산업화 과정에서 경제발전의 든든한 밑거름이 되어준
    광부 247명이 독일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당시 대한민국은 광복이후 동족상잔의 참혹한 전쟁을 치르고 극한적인 남북대치 상황에 처해있어서 불안하고 경제적으로 가장 가난한 나라의 대명사였다. 그러나 군사정부를 거쳐 1963년 박정희 대통령이 취임하자 바야흐로 지역과 세대와 빈부의 격차를 넘어 국가재건이라는 당면 목표의 달성을 위한 야심찬 계획이 실천에 옮겨지고 있었다.

    반면에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 패전 후 폐허와 분단의 아픔을 딛고 20년이 채 안 돼 비약적인
    경제발전을 이룩해낸 자유세계의 모범국가가 되었으며, 미국 다음으로 부자나라였다.
    경제적으로는 부강했지만, 분단국이라는 동병상련의 처지에 있던 독일은 한국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여 주었다.

    독일 뤼브케 대통령은 1964년 박정희 전 대통령(이하 박 대통령으로 표기)에게 국빈방문해
    주도록 초청했고, 독일을 방문한 박 대통령을 최고의 예우로 맞았다.

    이후 독일은 우리 경제발전의 믿음직한 후원자가 됐고, 독일의 발전을 몸소 체험한 박 대통령은 국가재건을 위해 독일을 벤치마킹했다.

    당시 국가홍보를 총괄하던 공보부는 박 대통령이 독일 국민방문을 마친 후 보름만인
    1964년 12월 30일, 역사적인 방문 성과를 사진과 함께 상세히 담은 책 <박정희 대통령 방독록>을 발간했다. 참고로 이 책은 한정판으로 1000부만 인쇄됐다.


  • ▲<박정희 대통령 방독록> 표지 (1964.12.30일 발간)

    편집과 인쇄 기술이 발달한 요즘 보더라도 결코 손색이 없는 책자를 단숨에 제작한 것을 보면,
    당시 박 대통령과 대한민국 홍보공무원들의 놀라운 근무태도를 잘 엿볼 수 있다.
    특히 이 책의 말미에는 박 대통령이 직접 쓴 ‘방독소감’이란 감동적인 글이 실려 있다.

    한편, 독일 방문 4개월 후인 1965년 4월 20일, 동아출판사도 정부의 자료지원을 받아
    <붕정칠만리>라는 시판용 책을 출판했다.
    이 책에는 육영수 여사가 직접 쓴 ‘방독소감’이란 글도 들어있다.

    위 두 책자의 글 내용과 사진을 중심으로 반세기 전으로 시간여행을 떠나보고자 한다.

    독일 향발

    1964년 12월 6일, 서울거리는 태극기, 독일기, 청와대 깃발 등 3색 기로 장식되었고, 수많은 시민이 연도에서 태극기를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하인리히 뤼브케(Heinrich Luebke, 1894~1972) 대통령의 초청을 받고 독일을 국빈방문하는 박 대통령 내외를 환송하기 위해서였다. 박 대통령은 오후 1시40분, 독일 측이 제공한 민간항공기 루프트한자 649편으로 독일 방문길에 올랐다.

    박 대통령은 홍콩, 방콕, 뉴델리, 카라치, 로마, 프랑크푸르트를 경유하여, 1964년 12월 7일(독일시간) 오전 9시 40분, 당시 독일의 수도 본(Bonn)에 도착했다. 무려 28시간을 비행한 것이다.


  • 왼쪽부터 에르하르트 총리, 게르슈텐마이어 하원의장,
    오른쪽 끝이 뤼브케 대통령 (1964.12.7)

    쾰른-본 공항에서 박 대통령은 뤼브케 대통령, 에르하르트 총리, 게르슈텐마이어 하원의장을 비롯한 독일 각료 및 의회지도자, 독일주재 각국 외교관, 그리고 100여명의 교포들의 뜨거운 환영을 받았다. 독일 대통령, 총리, 하원의장, 주요각료들이 공항에 나와 환영한 것은 외교관례상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어 박 대통령 내외는 뤼브케 대통령 내외의 안내로 쾨니히스호프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본에서의 3박 4일 (12.7~12.10)

    뤼브케 대통령은 12월 7일 저녁 박 대통령과 비공식 만찬회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 뤼브케 대통령은 한국의 학생문제에 깊은 관심을 표명하면서 독일의 학생운동에 대해 설명했다. 박 대통령은 12월 8일 오전 10시 독일 대통령궁을 방문하여 뤼브케 대통령과 한·독 정상회담을 가졌다.


  • 한·독 정상회담을 갖는 박 대통령과 뤼브케 대통령 (1964.12.8)

    정상회담 후, 박 대통령은 본(Bonn)의 공원인 호프 가르텐으로 이동하여 무명용사묘비에 헌화한 다음, 본 시청을 방문했다. 이어 시청의 고전 양식의 계단에 올라 수많은 환영인파에게 손을 흔들어 답례한 후 골든 북(귀빈 방명록)에 서명했다. 박 대통령이 한글로 서명하자, 빌헬름 다니엘스 시장은 한국인이 구텐베르크보다 먼저 인쇄술을 발명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서, 세계의 문자 중에서 한글이 가장 훌륭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해 참석자들을 놀라게 했다.

    다니엘스 시장으로부터 베토벤 교향곡 레코드 세트를 선물 받은 박 대통령은 본에서 30km 거리의 쾰른(Koeln) 시청을 방문하고, 쾰른 대성당도 시찰했다.


  • 쾰른 대성당을 방문하는 박 대통령 내외 (1964.12.8)

    12월 8일 저녁, 박 대통령은 뤼브케 대통령이 대통령궁에서 베푼 국빈만찬에 이어, 베토벤할레(Beethovenhalle: 베토벤이 태어난 도시 본에 위치한 예술의 전당)에서 개최된 <박정희 대통령 환영음악회>에 참석했다. 환영음악회에서는 양국 국가와 모차르트의 교향곡 제38번 <프라하(The Prague)>가 연주되었다.

    육영수 여사는 ‘방독소감’에 이날의 음악회에서 연주된 <프라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었다.

    “풍부한 악상이 한없이 맑고 깨끗한 흐름을 이루다가 그 위를 화려한 꽃송이와 그 향기가 퍼져나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요즘 모차르트의 소나타를 열심히 연습하고 있는 우리 아이들 생각도 떠올랐다.”


  • 베토벤할레에서 개최된 <박정희 대통령 환영음악회> (1964.12.8)

    12월 10일 박 대통령은 게르슈텐마이어 하원의장과 조찬을 함께 한 후 본에서의 중요한 일정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우리 광부들이 일하고 있는 루르 지방의 함보른(Hamborn)으로 향했다. 오전 10시 40분, 박 대통령 내외가 탄 차가 함보른 탄광에 도착하자, 광부들로 구성된 악대의 연주가 울려 퍼졌고 양복차림의 광부들과 한복을 입은 간호사들이 태극기를 들고 환영했다.

    강당에 들어선 박 대통령은 광부와 간호사들의 손을 잡으며 인사를 주고받았다. 육영수 여사도 안부를 물으며 뒤따르다 간호사들이 울먹이자 참았던 눈물을 보였고, 행사장에는 흐느끼는 소리가 번져나갔다. 이윽고 박 대통령 내외가 단상에 오르고, 광부 악대가 애국가를 연주했다. 박 대통령의 선창으로 시작된 애국가 합창은 후렴에 이르러 흐느낌과 통곡으로 변했다. 이윽고 박 대통령이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고 연설을 시작했다.


  •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에게 연설하는 박 대통령 (1964.12.10)

    “만리타향에서 상봉하게 되어 감개무량합니다. 국가가 부족하고 내가 부족해서 여러분이 이 먼 타지까지 나와 고생이 많습니다. 모국의 가족이나 고향 땅 생각에 괴로움이 많은 줄 생각되지만, 매 개개인이 무엇 때문에 이 먼 이국땅에 찾아왔던가를 명심하여 모국의 긍지와 조국의 영예를 빛내주기 바랍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뒤에 오는 사람에게 길을 열어주고 또 많이 올 수 있는 길을 닦아주기를 당부합니다.”

    박 대통령은 말을 잇지 못한 채 울음을 터뜨렸고, 강당은 눈물바다가 돼 간신히 즉흥 연설을 끝낼 수 있었다. 이어 박 대통령 내외는 광부들의 숙소를 살펴본 다음, 무거운 마음으로 광산을 떠날 때 차안에서도 눈물을 흘렸다.

     


  • 광부·간호사들과 인사를 건네는 박 대통령 내외 (1964.12.10일)

    박 대통령은 함보른 인근 지역에 위치한 데마그 제철공장을 시찰하고,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지사가 초청한 오찬에 참석한 다음, 베를린으로 향했다. 

    베를린에서의 2박 3일 (12.10~12.12)

    12월 10일 오후 5시 45분 베를린 공항에 도착한 박 대통령은 빌리 브란트(Willy Brandt, 1913~1992: 1969~1974년 기간 독일 총리를 역임했으며, 동서독 화해의 기틀을 마련한 인물) 서베를린 시장의 영접을 받았다. 박 대통령은 베를린 경찰의장대를 사열한 후, 브란트 시장의 환영사에 이어, “베를린과 판문점의 비극이 끝날 날이 가까워졌다. 비극을 종결시켜야 인류의 평화와 번영을 영구화할 수 있으며, 이를 위해 우리는 끝까지 뭉쳐서 전진해야한다”는 요지의 답사를 했다.


  • 베를린 공항에서 브란트 시장의 영접을 받는 박 대통령 (1964.12.10)

    박 대통령 일행은 경찰 호위대의 경호를 받으며, 숙소인 켐핀스키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휴식을 취할 겨를도 없이 베를린 시청으로 향했다. 시청에서 골든 북에 서명 한 후, 시청 환영행사에서 박 대통령은 베를린 시민에게 아래 요지의 인사말을 했다. 

    “베를린은 높은 문화와 번창을 이룩한 도시이며, 모든 자유세계 국가와 국민들의 절실한 자유, 평화에의 염원을 응집하는 자유정신의 성지입니다. (중략) 베를린은 뜻있는 사연으로 우리 한국국민이 잊을 수 없는 곳이기도 합니다. 한국이 낳은 손기정 선수가 베를린 올림픽에서 마라톤에 우승하여 이른바 ‘국적없는 승리’를 거둔 곳이기 때문입니다. (중략) 한국 국민은 그 어떤 고도의 파괴의 위력을 가진 무기보다 더 큰 힘이 존재함을 실증시켰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가진 양심과 정의, 그리고 민주주의에 대한 불굴의 신념입니다.”

    12월 10일 밤, 브란트 시장은 박 대통령을 위해 만찬회를 마련했다. 이는 1963년 6월 케네디 대통령의 베를린 방문 때 베푼 이후 외국 국가원수로는 처음이었다고 한다.


  • 브란트 서베를린 시장과 환담하는 박 대통령 (1964.12.10일)

    박 대통령은 12월 11일, 독일 실업인(實業人)들과 조찬을 함께하면서 한·독 간 민간 베이스의 경제협력방안에 대해서 의견을 교환하고 오전에 브란덴부르크 문과 베를린 장벽을 시찰했다.

    이어 1962년 8월 자유를 찾아 동독을 탈출하다가 공산경비원에게 사살당한 18세의 건축노동자가 살해된 장소에 세워진 기념비에 흰색과 빨강색 카네이션 꽃다발을 헌화하고 명복을 빌었다.


  • 베를린 장벽을 시찰하는 박 대통령 내외 (1964.12.11)

    베를린 장벽 시찰 후 박 대통령은 이날 정오 베를린 공과대학에 도착, 파울 힐비히(Paul Hilbig) 총장의 안내로 강당으로 이동하여, 총장, 대학교수, 학생 등 1000여명을 대상으로 연설했다. 이날 연설의 핵심은 <번영의 균형화 운동>과 <자유 신장의 촉진>의 제창에 있었다.

    “한 나라의 부강(富强)이 다른 나라를 희생시키지 않고도 이루어질 수 있는, 또 한 나라의 성장이 다른 나라의 자선적인 원조에 의해서만 이루어지지 않을 수 있는 진정한 협력관계를 우리는 발전시켜야 합니다. 한 지역, 한 국가의 번영이 다른 지역, 다른 나라의 번영과 상호작용할 수 있는 길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모든 지역의 <번영의 균형화>, 모든 지역에 있어서 <자유 신장의 촉진>, 바로 이것이야말로 온 인류가 한결같이 추구해야할 높은 이상입니다. 이러한 인류의 숭고한 이상은 번영의 독점, 혼자만의 자유의 구가를 배척합니다.”


  • 베를린 대학에서 강연하는 박 대통령 (1964.12.11)

    강연 후, 박 대통령은 1847년 베르너 폰 지멘스에 의해서 설립된 지멘스(Siemens)사 베를린 공장을 시찰한 후 임직원과 오찬을 한 뒤, AEG 전기공장을 시찰했다. 12월 12일 오후 박 대통령 일행은 베를린을 떠나 독일 방문의 마지막 기착지인 뮌헨으로 이동하기 위해서 베를린 템펠호프 공항으로 갔다. 브란트 시장과 시 고위간부들이 박 대통령을 환송했다.

    뮌헨에서의 2박 3일 (12.12~12.14)

    박 대통령 일행이 바이에른 주의 수도이며 문화도시인 뮌헨 공항에 도착한 것은 12월 12일 오후 2시 30분이었다. 공항에서 알폰스 고펠 바이에른 주지사, 한국 교포와 학생들의 환영을 받았다. 박 대통령은 이날 3시 20분부터 숙소인 호텔에서 유럽과 아프리카 지역 공관장회의를 주재했다. 12월 13일 아침 숙소인 호텔에서 한국 유학생 및 교포 80명과 조찬을 함께 했으며, 이어 님펜부르크 성 등 유적지를 시찰했다. 저녁 6시에는 알폰스 고펠 주지사 초청 만찬에 참석했다.


  • 뮌헨 유학생 및 교포와의 조찬회 (1964.12.13)

    12월 13일 저녁 7시, 박 대통령 내외는 쿠빌리에 극장(Cuvilliés Theatre)에서 모차르트의 오페라를 감상했다. 알폰스 고펠 주지사는 공연에 앞서 박 대통령에게 망원경을, 육 여사에게는 오페라글라스를 선물했다.

    육영수 여사는 <붕정칠만리>에 다음과 같은 소감을 남겼다.

    “독일에서 마지막 일정으로 모차르트의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을 보게 된 뮌헨의 오페라 극장은 400명을 수용할 수 있었으며, 그 옛날 왕족만을 위해 건립되었다고 한다. 전쟁 중 내부에 있는 아름다운 조각품들을 시민들이 모두 가져다 정성껏 보관했다가 전쟁이 끝난 후 그 자리에 어김없이 가져다 놓음으로써 옛날의 면모를 그대로 지닐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이런 뮌헨 시민들의 아름다운 정성이 깃들어진 곳이라는 것이 내 마음을 얼마나 벅차게 해 주었는지 모른다.”

    또한 육 여사는 공연을 감상하고 느낀 점도 책에 적었다.

    “<피가로의 결혼>에서 피가로가 백작의 머슴인 케루비노를 상대로 부르는 아리아 ‘이제는 못 날으리’와 제2막의 케루비노가 백작 부인을 연모하며 부르는 ‘그대는 아는가 사랑의 괴로움을’이라는 노래는 얼마나 절묘하고 아름다웠는지 내게 또 한 번 우리 한국의 수많은 음악팬들을 생각나게 했다.

    고국에 돌아가면 우리 꼬마에게 <피가로의 결혼>이 얼마나 좋은 작품인지, 또한 피가로와 케루비노가 얼마나 멋진 성대(聲帶)로 관중을 매혹시켰으며, 또 영특한 여자 수잔나는 얼마나 요염한 음량으로 좋은 연기를 보여주었는지를 들려주리라고 마음먹었다.”


  •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을 관람하는 박 대통령 내외 (1964.12.13)

    박정희 대통령이 귀국을 위해 독일을 떠나기 직전인 12월 14일 오전 10시(한국시간 오후 6시), 국빈방문을 총결산하는 한·독 공동성명이 양국에서 동시에 발표됐다. 한국과 독일이 공동운명체임을 강조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한·독 공동성명의 핵심내용은 아래 세 가지다.

    1) 1965년부터 시작되는 3개년 경제협력계획에 관한 한국측 제안에 대한 독일측의 깊은 이해 표명 및 한국 장기경제개발계획을 위해 가능한 모든 지원을 계속한다는 결의를 재확인 2) 한국에 대한 지원 강화을 위한 독일정부의 1964년도 재정 및 기술 원조 제공 및 한국 산업자원 잠재력 조사를 위한 독일기술전문가단의 한국 파견 3) 양국정부의 상호관심사 토의를 위해 최소한 년 1회의 회담을 가지는 공동위원회 설치


  • 귀국 비행기에 탑승, 환송객들에게 답례하는 박 대통령 내외 (1964.12.14)

    박 대통령 내외는 출발할 때와 같은 경로를 거쳐 1964년 12월 15일 저녁 7시 5분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중요한 것은 박 대통령이 독일체재 중 틈틈이 메모했다가, 귀국 즉시 정리한 방독소감이라는 글이 같은 해 12월 30일 공보부에서 발간된 <박정희 대통령 방독록>에 수록되었다는 사실이다. 귀국 15일 만에 원고, 편집, 인쇄, 제본을 끝냈으니, 박 대통령과 직원들이 보름동안 거의 밤샘작업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필자가 아는 한, 해외순방 후 소감을 글로 남긴 우리 국가원수는 박 대통령뿐이다. 더구나 방독소감은 국가재건의 신념과 나라사랑의 마음이 절절히 느껴지는 감동적인 명문이다.

    이하 전문을 소개한다.  

    박정희 대통령이 눈물로 쓴 방독소감(訪獨所感)

    1964년 12월 6일부터 15일까지 독일연방공화국 뤼브케 대통령의 초청을 받은 나와 우리 일행은 짧은 시간이었으나, 전후 부흥된 독일의 모습을 여러 모로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졌었다.

    실제로 독일에 체류한 시간은 독일연방공화국의 수도 본에서 3박 4일, 서베를린에서 2박 3일, 바바리아 주정부 소재지인 뮌헨에서 2박 3일뿐이었고, 여타시간은 왕복하는데 소비된 셈이다.

    서독을 간단히 소개한다면, 면적은 우리 한반도의 남북한을 합친 것보다 약간 넓은 정도이고, 인구는 약 5,700만 명이다. 동독의 면적은 우리 남한 정도에 인구는 약 1,700만 명이다. 서독의 일인당 국민소득은 900불, 연간수출고는 약 150억불, 현재 외환보유고는 60억불이라고 한다. 제2차 세계대전 전에 독일의 전성시대는 히틀러 집권 당시라고 하는데, 전후 10년만인 1955년에 벌써 서독경제는 1935년 독일경제의 전성시대를 능가했다고 한다.

    독일의 부흥상(復興相)은 과연 기적이라고 할 정도로 비약적인 발전을 하고 있다. 그러나 독일인들은 ‘기적’이라는 말을 쓰기를 싫어하며, 이것은 어디까지나 전후 독일국민들의 피와 땀으로 일구어진 노력의 결정이라고 주장한다. 우리들은 이것이 사실임을 눈으로 확인했다. 오늘날 그들의 부흥과 번영은 지난 20년 동안 그들의 근면, 그들의 검소, 그들의 인내심, 그들의 단결력이 가져온 필연적인 결과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독일의 도시나 농촌을 지나 다녀도 빈둥거리며 놀고 있는 사람이라고는 거의 볼 수 없다. 거리를 다니는 사람들이라고는 노인들, 어린 아동들, 장보러 나온 가정의 주부 정도이고, 나머지는 전부가 일터에 가서 일을 하고 있다.
     
    서독은 5,700만 명의 인구 중에서 노동력을 가진 인구가 2,500만 명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것도 부족해서 외국노동자 약 100만 명이 서독에 와서 일하고 있으나, 그래도 노동력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뤼브케 대통령을 보고 독일의 부흥상과 독일국민들의 근면성을 칭찬하였더니, 대통령이 말하기를 이제 좀 살기가 좋아지니, 배가 불러서 20년 전에 고생하던 일을 잊어가는 것이 걱정이라고 한다.

    물론 오늘날 독일의 번영과 부흥을 가져온 데에는 종전 후 ‘마셜 플랜’에 의한 미국의 막대한 원조에 힘입은 점을 절대 간과할 수 없다. 그러나 외국의 원조를 얻어 이를 최대한 효율적으로 사용하고, 근면과 내핍으로 오늘의 독일을 건설한 독일국민들을 우리는 누구보다도 많이 배우고 교훈으로 삼아야할 줄로 안다.

    개인이나 국가가 그들의 자립능력이 부족할 때 남의 도움을 받는 것은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남의 도움을 받는 자는 그 도움을 받아서 하루바삐 스스로 자립하겠다는 정신이 강렬해야만, 남이 도와준 것이 참다운 도움이 되는 것이고 도와준 보람도 있는 것이다.

    만일 그러한 정신이 결핍되어 있을 때에는 그들 스스로의 자립은커녕 오히려 남에게 의지하겠다는 의타심만을 조장해서 자립능력을 감퇴시키지 않을까 혼자서 곰곰이 생각도 해봤다.

    이번 여행을 통해서 보는 것, 듣는 것 하나하나가 오늘날 우리 국민들이 명심하고 배워야 할 점이라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 다음으로는 독일정부와 국민들의 우리나라에 대한 관심과 한독양국의 협조에 관한 문제이다.

    이미 귀국성명에서 밝힌 바와 같이 이번에 우리 일행을 맞이한 독일정부나 국민들은 그야말로 극진한 환대를 해주었다.

    독일의 모든 언론기관도 우리 일행을 진심으로 환영한다는 기사를 연일 대서특필해 주었다.

    ‘동방에서 온 벗’, ‘동방에서 온 손님’, ‘분단된 나라에서 분단된 나라로’ 등등 우정에 넘치는 필치로써 우리를 맞이해주었다.

    독일의 조야인사들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국토와 민족이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서 분단된 고통을 다 같이 느끼고 다 같이 슬퍼한다는 것을 이구동성으로 역설했다. 또한 그들이 우리가 운명공동체이며, 공동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서로 무슨 일이든 도와야 된다고 진심으로 주장하는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가슴이 뭉클할 정도로 깊은 감명을 받았다. 나는 이와 같은 진실하고도 위대한 벗을 또 하나 가졌다는 것을 진정으로 기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국의 분단과 민족의 이 비극을 몽매에도 잊지 못하는 우리의 심정을 누구보다도 깊이 이해해주고 동정하는 독일 민족에 대해 우리들은 혈육이 상통하는 것 같은 우정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과 독일이 하나의 단일민족이기 때문에 반드시 하나의 한국, 하나의 독일로 다시 통일되어야한다는 원칙에 합의했고, 양국의 통일은 평화적인 방법에 의해 이루어져야하며, 이를 위해서는 자유와 경제적인 번영이 선결과제라는 점에도 완전히 견해를 같이했다. 

    독일은 지금 그들 자신의 경제재건을 완수하고, 이제는 자유세계의 60여개 우방국가에 대해서 경제적인 원조를 제공하고 있다.

    에르하르트 수상은 자유우방사이에 번영의 균형을 역설하면서, 선진 국가들은 후진성을 지닌 우방 국가들을 도와야할 의무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는 덧붙여 ‘문제는 원조 대상 국가들의 선택’이라고 강조했다. 이 점은 뤼브케 대통령이나 게르슈텐마이어 하원의장도 똑같은 주장을 한 것으로 나는 기억하고 있다.

    이 말은 자립정신이 강하고, 스스로 돕는 자를 돕겠다는 것이 독일정부의 기본 방침이라는 뜻으로 나는 듣고 있다.

    자립경제를 이룩하기 위해서 무한히 노력하고 있는 한국은 독일의 원조대상국가 중에서도 가장 관심이 많은 나라라고 하면서도, 그들이 누차 강조하는 점은 한국국내 정치정세의 안정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문제라는 것이었다.

    독일에 도착하던 첫날인 12월 7일 저녁, 뤼브케 대통령부처가 주최한 만찬회가 개최되었다. 칠순의 노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한국의 학생문제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표시하면서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다음과 같이 얘기했다.

    “독일에서 학생운동이 전국적으로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킨 일은 1919년, 즉 제1차 세계대전 바로 직후 함부르크에서 영국 군함이 독일 상선에 대해 불법적인 가해를 입혔을 때 단 한번 있었다. 이후에도 정치적인 불안정은 있었으나, 학생들이 거리에 나와서 크게 말썽을 일으킨 일이 없었다.

    정치란 것은 오랜 경험을 가진 사람이라 해도 지극히 어려운 문제인데, 하물며 학생들이 정치의 제1선에 나와서 떠드는 일이란 지극히 위험한 일이다.”

    에르하르트 수상도 내가 초대한 만찬회 석상에서 뤼브케 대통령과 같은 취지의 이야기를 누누이 역설했다. 우방국가의 노정치지도자들의 진정한 충고라고 생각되어 그대로 전달하고자한다.
     


  • 이에 덧붙여서 그들 독일의 지도자들은 과거의 감정에 사로잡힌 국민은 위대한 국민이 될 수 없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하고, 과거의 감정을 잊을 수 있는 용기와 지혜를 가지고, 대국적으로 미래를 내다볼 것을 역설한바 있다.

    그들은 유럽의 안정이 아시아의 안정이며, 또한 아시아의 안정은 유럽의 안정임을 강조하면서, 아시아의 안정을 위해서는 인접우방국가간의 유대를 더욱 강화해야한다는 충고를 잊지 않았다. 이러한 지적은 한일관계를 비롯한 아시아 여러 우방과의 협력문제에 관하여 보다 새로운 우리의 자세를 촉구하는 바가 크다고 나는 느꼈다.
     
    이상은 독일정부나 국민들의 우리에 대한 관심과 태도를 솔직히 전달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우리처럼 국토분단의 공통 비극을 지닌 그들로서는, 우리의 국내문제가 안정되고 우리가 원조를 받을 태세가 완비된다면, 모든 면에서 원조를 아끼지 않겠다는 확고한 결심이 서있었다는 것을 나는 엿볼 수 있었다.

    이제 독일 경제력의 일면(一面)을 보고 느낀 점을 간단히 추려보고자 한다. 여기서 일면이라고 한 것은 짧고 바쁜 여정이었으므로, 세세히 보지 못했고 또 세밀히 보았다 하더라도 그 일부일지 모르기 때문이다.

    독일 경제력은 앞에서 언급했듯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폐허가 된 잿더미 위에서 그들의 피땀 어린 노력과 인내로 전쟁이 끝난 10년 후, 즉 1955년 벌써 전쟁전의 전성시대인 1935년대의 독일경제를 능가했던 것이다.

    물론 전체규모로 보아서는 독일의 경제는 미국이나 소련에 비해 아직 미흡하다고 하겠다. 그러나 분단된 반쪽 국토에서 60억불이라는 외화를 보유하고, 60여 개국에 원조를 제공할 정도가 되었다는 사실, 그들의 상품이 세계 각지에서 가장 양질의 상품이요 신용 있는 상품으로서 시장을 확대해 나가고 있다는 점들로 미루어 볼 때 오늘의 독일경제와 내일의 전망을 충분히 짐작해볼 수 있을 것이다.

     


  • 나는 이번 방문 기간 중 독일에서 유명한 몇 개 회사를 방문했다. 데마크, 지멘스, AEG 등 회사를 방문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지멘스 회사는 150년의 역사와 25만 명이나 되는 종업원을 가졌고, AEG 회사는 200년의 역사를 가졌다고 한다. 이들 두 회사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완전히 파괴된 것을 다시 완전히 복구하였다고 한다. 특히 지멘스 회사 본사는 서베를린 시내에 자리 잡고 있고, 베를린을 복구하는데 그들이 솔선해서 협력했다는 것을 자랑하고 있었다.

    조국이 있어야 회사가 있고, 민족이 있어야 회사도 필요하지 않느냐고 하는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우리의 기업인들에게 꼭 전하고 싶은 말이라고 생각했다.

    지멘스 회사를 방문했을 때, 사장으로부터 손으로 돌리는 자그마한 전화기 모형 하나를 기념품으로 받았다. 물어본즉 150년 전 이 회사가 처음 창설될 때 제작된 것이라고 한다. 문득 나는 150년 전, 1814년에 어떤 일이 일어났었는지를 생각해보았다. 바로 프랑스의 나폴레옹이 유럽을 석권하던 시대였다.

    그 시절에 그들 조상은 벌써 산업혁명을 하고, 이런 공장을 세우고, 각종 기계를 제작하고 있었으며, 산업의 근대화를 위해서 유럽 각국들이 서로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우리 조상들은 그때 무엇을 했는가? 조선 말엽 순조왕 시대에 양반들의 싸움은 고질이 되고, 조정에는 외척의 횡포가 극심했다. 관리들은 양민의 수탈에 혈안이 되고, 공직기강이 극도로 떨어졌다. 사정이 이러하니, 각지에서 민란이 일어나고, 1811년에는 홍경래의 난이 일어나서 어지럽기 한이 없었다. 그러했으니 오늘날 우리가 유럽 각국들에게 뒤떨어지지 않을 도리가 없지 않은가?

    어쨌든 우리가 그들보다 150년이나 뒤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이 150년이라는 낙후된 공백을 메우기 위해서 오늘날 우리가 그들의 몇 배 노력을 더 해야 하겠거늘, 과연 우리 국민들이 그러한 각오와 노력을 하고 있는가? 나는 우리 모든 국민들이 독일의 부흥이 결코 기적이 아니라는 점을  명심하고, 일대각성을 시작해야 할 시점에 서 있다는 것을 새삼 촉구하고자 한다.

  • 이들 회사를 방문하고 또 하나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그들이 어느 회사고 회사 내에 직장교육을 하는 학교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AEG 회사에서 그 교육상황을 보면, 15세부터 17-8세까지의 우리나라 초급중학교 정도를 졸업한 학생들이 3년간 교육을 받고 있었다. 이것은 완전히 숙련공을 양성하기 위한 실업교육으로서 학과보다 실습에 더욱 치중하고 있었다.

    기름 묻은 작업복을 입고 선반, 산소용접기 및 절단기로 철물을 깎는 일 등 공장에서 직공들이 일하는 것과 꼭 같은 실습이다.

    그들이 작업하는 책상위에는 모두 작업일지를 비치하고 있고, 하루 작업을 마치면 교육생은 작업을 한 설계도와 작업 내용을 기록하고, 하단에는 교관의 평점과 확인서명을 한다. 또 교관의 서명 옆에는 가정에 돌아가서 학부형들이 확인했다는 서명난이 있다. 그야말로 깨끗이 알뜰하게 기록돼있다. 3년간 수료를 하면 숙련공으로 합격증을 받으며, 이 증서는 국가에서 인정하기 때문에 어디든지 가서 직업을 얻어 일할 수 있다고 한다.

    이 회사가 제2차 세계대전 후에 양성한 숙련공만 해도 130만 명이라고 하니, 전국 각 회사에서 이같이 양성된 기술공이 얼마나 많겠는가 짐작되고도 남음이 있다.

    독일인들은 전부가 일인일기(一人一技)를 가진 숙련공이라고 생각하면 틀림없다. 그들의 공업이 발달하고, 산업이 부흥한 원인이 여기에 있다. 나는 우리나라의 교육정책의 방향을 다시 검토해야겠다는 것을 새삼 통감하게 된다.

    우리나라에도 독일정부의 기술원조에 의해서 인천 인하공대 내에 직업학교가 하나있다. 독일기술자들이 와서 독일과 똑같은 교육을 하고 있다. 앞으로 우리나라에 이러한 학교가 많이 생기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 나는 독일의 농촌 역시 도시 부럽지 않게 알뜰하게 꾸며져 나가고 있는 것을 보았다.

    독일은 전인구의 단지 8-9%만이 농사에 종사하고 있다하니 고도로 공업이 발달된 그 나라의 일면을 엿볼 수가 있다. 경작지, 목장, 임야가 확연히 구별되어 있고, 한 치의 땅도 놀리지 않고 알뜰히 가꾸고 이용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식량은 완전 자급자족이며, 채소, 육류 등 부식물은 일부 수입한다고 한다.

    좁은 땅에 5,700만 명이란 인구가 식량을 자급자족한다는 사실에서 그들이 얼마나 토지 이용도를 올리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볼 때 우리나라 토지도 우리가 잘 활용하면 아직도 얼마든지 이용도를 높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이다.

    특히 독일의 농촌은 중소기업과 유기적으로 관련을 맺게 하여 이를 발전시켜나가는데 주력하고 있다는 점이 특색이라고 하겠다.

    농촌과 공업이 상호의존해서 함께 발전을 이룩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배워야할 좋은 점이라고 보아야하겠다.
     
    농촌의 어디를 가나 삼림이 울창하고, 그들 국민들이 나무를 애호하는 정신을 엿볼 수 있는 것은 가장 부럽게 느낀 점의 하나가 아닐 수 없다.

  • 독일의 국민성은 상술한 바와 같이 근면하고, 검소하며, 또한 법질서를 존중하고, 단결심이 강하다는 것이 특징이다. 그들은 또한 이론적이고, 사색적이며, 철학적이라고도 하겠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 역사와 문화에 대해 높은 긍지를 갖고 있다.

    기원후 9세기부터 약 1,000년 동안 내려온 신성로마제국의 역사는 게르만 민족의 역사이다. 19세기 초 나폴레옹에게 일시적으로 유린당한 일이 있었으나, 그 후 프러시아를 주축으로 한 독일제국은 19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부터는 세계의 최대강국으로 등장했다.  

    20세기 초 제1차 세계대전의 전화에서 재기한 독일은 다시 제2차 세계대전을 겪음으로써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 그러나 불과 10년 후에는 또다시 세계에서 가장 부강한 국가로 재등장하기에 이른 것이다. 실로 칠전팔기라는 말은 독일국민을 두고 하는 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와 같은 독일의 힘이 어디에서 원천했을 것인가?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독일국민들의 불굴의 의지와 민족성에서 우러나온 것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다만 이와 같은 우수한 국민을 두 번이나 전쟁으로 이끌어간 당시의 지도자들을 원망스럽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의 독일 사회와 경제상은 목불인견이었다고 한다. 전 생산시설은 완전히 파괴되고, 실업자와 전상군인들은 거리에 넘쳐흘렀다. 식량기근이 왔고, 여러 가지 사회적 불안이 겹쳐서 닥쳤다.

    그러나 그들은 실망하지 않고 다시 재기할 것을 결심했다. 먹을 것을 먹지 않고, 입을 것을 입지 않고 비장한 결심으로 조국독일을 재건하기 위하여 또다시 단결하고 근면하고 내핍하고 건설하는데 총궐기했었다. 가정주부들은 스커트를 한 치씩 줄여서 입음으로써 천을 절약했다. 성냥 한 개비를 절약하기 위해서 세 사람이 모여야 담뱃불을 켰다.

    노동자들은 자기들끼리 결속해서 독일의 경제가 부흥될 때까지 노동쟁의를 하지 않기로 결의했다. 어떤 회사에서는 경영진이 노임을 인상하겠다는 것을 노동자들이 공장이 더 건전하고 충실해질 때까지 임금인상을 하지 말아달라고 결의한 일도 있다고 한다. 이러한 일들은 재건을 위한 그들의 모습의 한 단면을 소개하는 사례에 불과하다.

    독일인들은 오늘과 같이 그들의 경제가 부흥되었음에도 먹는 음식은 극히 간소한 것을 취하고 있다.

    이와 같이 검소한 생활을 통해서 절약한 것은 저축해서 생산과 건설에 투자한다.

    또한 그들은 독일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자랑할 만한 문화재의 보호와 수리에도 많은 힘을 기울이고 있다. 본이라는 시에 있는 악성 베토벤의 주택이 제2차 세계대전 중에 파괴된 것을 모든 국민들이 몹시 애석히 여기고, 베토벤이 사용하던 피아노와 기타 가구들이 소진된 것을 무엇보다도 아깝게 생각했었다고 한다.

    전쟁이 끝난 후 정부가 그 주택을 옛 모습과 똑같이 복원하였더니, 베토벤의 피아노와 가구 등 옛날 물건이 하나도 파손되거나 망실되지 않고 돌아왔다고 한다. 인근 주민들이 그것들을 전부 소개시켜 소중히 보관하다가 그대로 다시 가져왔던 것이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마음씨이며, 얼마나 자기나라의 문화재를 소중히 간직하는 착한 국민들인가! 독일의 귀중한 문화재들은 대부분 이렇게 보존된다고 한다.

    뮌헨에서도 옛 바바리아 왕궁이 많이 파괴된 것을 전후 수리해서 옛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파괴된 시가의 건물들도 본래의 모습대로 정성을 다해 복원되어 뮌헨은 일찍이 번영을 자랑하던 예술의 도시 뮌헨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뮌헨은 약 2,000년의 역사를 가진 고도시이며, 800년 전부터 바바리아의 수도였다고 한다.

    시내 중심지대에 높은 흑색 철제의 기념비가 서있는데, 모양은 미국의 워싱턴 시에 있는 워싱턴 기념비와 비슷하나, 그보다는 훨씬 작은 흑색 기념비이다. 안내하는 바바리아 주정부 관리에게 물으니, 19세기 초 나폴레옹이 이 지방을 점령했을 때 세운 전승기념비라고 한다. 독일을 침략한 적장의 기념비를 무엇 때문에 남겨 두냐고 물었더니, 그는 후손들이 저 기념비를 볼 때마다 우리는 정신을 차려서 다시는 외적에게 침략을 당해서는 안 되겠다고 하는 산 교훈이 될 것이라고 답했다.

    몇 년 전에 덴마크를 방문하고 귀국한 모 인사에게서도 이와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덴마크 사람들이 과거 독일 사람들로부터 침략을 당했을 때 그 상처의 한 모습을 그대로 남겨두고 후손에게 그것을 산 교훈으로 삼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독일이 역사적으로 우리나라보다도 많은 전화를 입었음에도 수백 년씩이나 되는 유적들이 도처에 잘 보존되고 있는 것은 가장 부러운 일의 하나이다.  5,000년 역사를 자랑하는 문화민족이라고 자처하는 우리나라에 이러한 문화재들이 얼마나 남아 있고, 또 있는 그 자체의 보존 상태를 생각할 때 부끄럽기 한이 없다.

    물론 문화재를 잘 보존하는 데는 막대한 예산이 소요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국민 각자가 이것을 알뜰히 보존하겠다는 마음씨가 더욱 중요하지 않겠는가?

    독일의 기후는 우리나라와 비슷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본(Bonn) 중심으로 흐르는 라인 강변에는 파란 잔디가 보이고, 강물은 1세기에 한 번 정도 밖에는 결빙하지 않는다니 우리나라보다는 약간 온화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기는 매일 안개가 두텁게 끼어서 우리나라와 같은 청명한 날씨는 매우 드물다고 한다. 이러한 대자연은 독일인들의 기질에도 영향을 미친 것 같이 느껴진다. 그들에게는 경박하고 사치한 점을 찾기 힘들다. 일반적으로 근엄하고 과묵하며 질박하고 강건한 점이라든가, 이론적이고 사색적인 그들의 기질의 특징도 그 나라의 자연적 조건에서 받은 것으로 느껴진다. 독일이 낳은 위대한 문호, 철학자, 예술가, 정치가, 군인 등 역사에서 배운 인물들을 상기해보고 독일의 대자연과 견주어 보기도 했다.   

    독일국민들은 또한 질서와 규율을 존중하는 좋은 습성을 가지고 있다. 그들의 이러한 국민성은 준법정신이라든가 사회공중도덕면에서도 여실히 나타나고 있거니와 일상생활면에서도 자율성이 높다는 것이다.

    나의 집안 질부 벌되는 이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었다. 금년 봄에 신병으로 프랑크푸르트의 모 병원에 입원했다고 한다. 병실에는 나의 질녀, 독일 부인, 각기 다른 유럽 국적의 부인 2명이 입원하고 있었다. 아침에 기상을 하니, 간호사가 와서 침상에서 일어나 간단한 보건체조를 하라고 지시하고, 다른 병실에 있는 환자에게 가면서 자기가 돌아올 때까지 체조를 하라고 일러 놓고 갔다.

    간호사가 나가자마자 유럽 국적의 부인 2명은 침대에 누워버렸으나, 독일인 부인과 내 질녀는 간호사가 돌아올 때까지 체조를 했다. 체조를 끝낸 독일 부인은 체조를 하지 않고 침상에 누워있던 두 부인에게 왜 체조하라는 지시를 따르지 않았느냐고 언성을 높이며 대들었다는 것이다. 간호사가 보든 안 보든 체조를 하라고 했으니 해야 될 것이 아니냐, 표리가 부동하다는 데 분개를 한 모양이다. 이것은 사소한 일 같지만, 나는 대단히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그들의 훌륭한 점의 하나라고 느꼈다.

    민주주의국가의 국민일수록 이와 같은 자율성이 무엇보다도 필요하다고 본다.

    법이 없으면 안하고, 법이 있어도 이것을 악용하거나 법망을 빠져 나가기만 하면 그만이란 사고방식이 지양되지 않고서는 진정한 민주사회가 이룩될 수 없지 않겠는가?

    프랑크푸르트시 근교에는 노동자들이 저녁에 가서 술 마시며 하루의 피로를 푸는 우리나라의 대포집이나 포장마차 같은 술집이 많다. 근면하고 일밖에 모르는 그들도 저녁에는 이곳에 많이 모여와서 술이 한 잔씩 들어가면 서로 어깨동무를 하고 노래를 부르면서 마음껏 떠들고 밤이 늦도록 논다고 한다. 그러나 그곳에서는 한 번도 그들이 서로 싸우거나 집기를 부수거나 하는 일이 없다고 한다. 그런데 간혹 그곳에 있는 우리 한국 학생들이 와서 놀다가 언쟁을 하거나 술잔을 던져서 부순 일이 몇 번 있었다는 얘기를 듣고 혼자 쓴 웃음을 지었다.

    자율과 자제, 모든 일에 한계를 분명히 한다는 것 역시 어려운 일이지만, 우리가 꼭 배워야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 두서없는 이야기가 너무 장황해지기 때문에 서베를린을 시찰한 소감 몇 마디를 쓰고 매듭을 지을까 한다.

    동서베를린을 합친 인구가 330만 명, 그중 서베를린의 인구가 220만 명이다. 자유 베를린은 제2차 세계대전 전보다 더 번화해졌다고 하는데, 현대도시로서 어느 도시에 비해도 손색이 없는 훌륭하고도 거대한 도시이다. 서베를린의 연간 예산이 10억불이라고 하니, 우리나라의 1961년도 예산 3억 4천만 불(한화: 850억 원)에 비교하면 이 도시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공산 동독의 한 복판에 붉은 장벽으로 둘러싸인 외로운 섬과 같은 도시이지만, 오늘날 자유의 상징으로서 또한 자유세계인 마음속의 수도인 베를린을 방문한 감회는 자못 착잡했다.
     
    동서베를린의 장벽을 따라 자동차로 달리면서 건너편의 어두운 또 하나의 세계를 바라다보며, 우리나라의 휴전선과 판문점을 연상했다.

    철조망 건너 멀리 바라다 보이는 동독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휴전선 북방에 살고 있는 우리 북한 동포를 생각했다. 일행은 모두 우울한 표정들이었다. 우리를 안내하는 서베를린 시 직원들도 우리와 같은 침울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철조망 하나를 사이에 두고 바로 어두운 두 개의 세계가 나뉘어져 있었다.

    서베를린에는 화려한 고층건물이 즐비하게 서서 동베를린을 위압하듯 내려다보고 있었다. 철조망 부근에 있는 동베를린 쪽 건물은 창문이란 창문은 전부 벽돌로 폐쇄해버리고 서쪽을 보지 못하게 해 놓은 것이 아주 대조적이었다.

    이 장벽이 철거되어 모든 독일 사람들이 마음대로 다니고, 마음대로 이야기하고,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그날이 하루빨리 도래할 것을 진심으로 기원하면서, 그때는 우리도 그렇게 되지 않겠는가 하는 막연한 꿈을 그려보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꿈이 아니고, 실현될 날이 반드시 오고 말 것이다. 또한 와야 할 것이다. 우리는 지금 그날이 빨리 오게 하기 위해서 전국민이 총력을 집중해야겠다는 것을 마음속으로 다졌다. 

    서독과 자유 베를린은 그 날짜만 기다리고 있는 것 같은 감을 받았다. 통독을 위한 독일 국민들의 염원은 열렬하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될 수 있는 대로 표시를 적게 하고 인내하며 참고 있다. 그들은 아마 힘에 자신이 만만하기 때문일 것이다. 통일을 위한 우리의 힘을 배양하는데 우리 국민 모두가 더욱 분발할 것을 바라는 마음 간절할 뿐이다. 
     


  • 방독기간은 비록 짧았으나, 나와 우리 일행의 이번 기회에 느낀 점, 얻은 점은 대단히 많았다고 생각한다.

    가장 큰 소득이라면 우리의 가장 성실한 벗을 또 하나 사귀게 되었다는 점일 것이다. 국토분단과 민족분열이라는 공동의 비극을 지닌 두 나라는 흉금을 털어놓고 서로를 쌍방을 이해하고, 고무하고, 격려하고 우의를 돈독히 함으로써 앞으로 공통의 운명을 개척하기 위해서 최대의 협조를 다짐했다는 사실일 것이다. 
     
    또 다른 소득은 국토통일이라는 지상과업을 달성하기 위해서 정부와 민간이 혼연일체가 되어 피눈물 나는 노력으로 오늘의 독일의 부흥을 가져온 그들의 재건상과 노력을 우리가 가서 직접 목격하고 배웠다는 것이다.

    파산상태에 빠진 한 가정을 재건하는데도 전 가족이 일심동체가 되어 장구한 시일과 노력을 경주해야만 이룩될 수 있겠거늘 하물며 한 민족국가의 재건을 이룩하자면 전 국민이 혼연일체가 되어 피눈물 나는 노력 없이 안이한 방법으로 이룩되기를 기대할 수 없다. 우리는 이러한 산 교훈을 우방 독일국민들로부터 배워야할 것이다.

    조국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자기 민족을 위하는 마음이 누가 없겠는가? 문제는 조국을 어떻게 사랑하고, 민족을 어떻게 위하는가 하는 방법론일 것이다. 애국애족이란 관념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말로만 되는 것이 아니다. 언행이 일치되어야하는 것이다. 말이 없으면, 행동만이라도 있어야 애국이 되는 것이다.

    독일국민들처럼 치마를 한 치 줄여서 입고, 성냥개비를 하나 절약하는 것이 위대한 애국의 실천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러한 행동은 국가의 법으로 강요되는 것이 아니라, 애국하는 모든 국민이 자기 마음에서 우러나서 스스로 행동해야만 한다.
     
    우리 대한민국 2,700만 동포들의 힘을 합치면, 위대한 힘이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한다.

    독일의 부흥을 기적으로 보지 말고 5,700만 독일국민들의 단결된 힘이, 그들의 피와 땀의 대가가 오늘의 독일을 가져왔다는 사실을 우리 동포들이 명심해주기를 다시 한 번 호소한다. 

    끝으로 나와 우리 일행을 따뜻하게 맞아 준 독일정부와 국민들에게 충심으로 뜨거운 감사를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