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친북좌파야말로 친일파 판박이

    공산독재엔 아첨하고 북한인권엔 침묵하는
    친북좌파야말로 친일파 판박이다.

    최성재     
       
      한국인에게 친일파는 영원한 트라우마(trauma)다.
    자주독립의 빛을 찾은 지 두 세대도 더 지났지만,
    악의적 날조든 실체적 진실이든 조부모나 부모가 친일파로 의심받거나 낙인찍히면,
    후손은 자유민주에서 악법으로 규정된 연좌제의 천라지망(天羅地網)에 걸려
    후안무치의 무쇠탈을 쓰지 않는 한 아예 바깥출입을 못한다.

    2차대전 후 독일인이 겪은 심정도 이와 비슷했다.
    히틀러의 전체주의적 독재에, 특히 히틀러의 조직적 인권유린에 무지의 가면을 쓰고
    침묵으로 동조한 짓이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게 부끄러웠다.
    땅속 깊숙이 숨어들어 지각(地殼) 아래 섭씨 1300도의 마그마에 영혼을 정화해도
    양심의 가책에서 벗어날 수 없을 듯했다.
    그렇다고 모두가 장렬하게 죽을 수는 없었다. 그들도 살아야 했다.
    그래서 그들은 인도주의의 제단에 희생번제를 바치기로 했다.
    나치 잔당을 희생번제로 바치기로 했다.
    인류의 양심에 읍소하기 위해 나치 잔당에 대해서는 공소시효를 없애고
    그들을 땅 끝까지 쫓아가서 단죄하고, 그도 모자라
    누가 사죄하라는 말도 하기 전에 국가 원수가 앞장서서
    거듭거듭 따가운 눈총의 비로 철벅철벅해진 땅에 무릎을 꿇고 사죄한다.
    또한 사죄의 진실성을 입증하기 위해
    인권유린의 피해자나 그 후손에게 돈도 아낌없이 제공한다.

      왜 한국인이 일제시대에 대해 부끄러워하고 독일인이 파시즘에 대해 부끄러워할까.
    한국인은 민족 자존심 때문이고, 독일인은 민족 자괴감(自愧感) 때문이다.
    2천년간 한 단계 아래 야만인으로 봤던 왜구에게 속절없이 나라를 빼앗겨
    35년 동안 찍 소리도 못하고 살았다는 것이 한국인으로선 여간 자존심 상하는 일이 아니다.
    더군다나 광복도 99.99% 외세인 미국의 선물이었다는 것이 여간 자존심 상하는 일이 아니다.
    민족적 수치심은 청산리전투(1920년 10월)와 봉오동전투(1920년 6월) 이후에는
    사실상 독립운동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는 데도 있다.
    어부지리를 취하지 않는 한, 5억 중국인도 쥐락펴락하는 2백만 일본군에 맞서서
    오합지졸 2천만 한국인이 나라를 되찾는 일은 영원히 불가능하게 보였다는 데도 있다.

      독일인은 식민지의 쓰라린 경험을 겪었던 게 아니다.
    그와 정반대로 유럽 최강국으로서 두 번이나 제2의 로마가 되려다가 실패했다.
    후발 산업국가로서 경제와 군사는 유럽 최강이었지만,
    정치와 문화는 유럽의 3류였다는 것을 마침내 인식하게 되었다.
    상명하복(上命下服)과 멸사봉공(滅私奉公)의 게르만 문화는
    전체주의적 독재에 풍부한 자양분이었음을 비로소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영국이나 미국처럼 시끄럽고 더디지만 비판하고 저항하고 반대하고 창조하는
    다양성을 확보하지 않고는, 정치적 선진화가 요원하다는 것을
    게르만은 두 번의 패전을 통해 비로소 깨달았다.
    자유민주와 시장경제와 공동체의 조화로운 발전을 위해,
    독일인은 나치 잔당의 척결과 무한반복의 사죄에 그치지 않고
    극우(나치)의 발호를 기본법(헌법)에서 원천적으로 틀어막았다.

    독일인은 거기에 더하여 이름만 달리한 제2의 나치인 공산당도
    자유민주의 주적으로 명시해서, 서독의 이석기류는 한국의 국가보안법보다 
      훨씬   강력한  연방헌법수호법(Bundesverfassungsgesetz),  
      형법(Strafgesetz), 결사법(Vereinsgesetz) 등으로
    추상같이 단죄하고 그 단체는 바로 해산했다.

    오늘의 친일파는 누구일까.
    정치적 목적으로 해괴망측한 기준과 애매모호한 자료를 동원하여
    친일파로 단죄한 정적(政敵)의 후손일까.
    김희선, 신기남, 박원순, 정동영 등의 예에서 보듯이,
    악질 친일파는 어느 진영에 많은지 알 수도 없고
    설령 그들이 아무리 악질적인 친일파라고 하더라도
    대한민국은 빨갱이 사위도 대통령이 되는 나라니까,
    출신성분에 좌우되는 김씨조선이 아니니까,
    그것에 좌파든 우파든 연좌제를 들이댈 수는 없다.
    빨갱이에겐 연좌제 절대금지, 친일파(단, 애국 진영)에겐 연좌제 필수적용이란
    이중기준은 원천무효다.

      오늘의 친일파는 누구일까.
    그에 앞서 오늘의 일본제국주의자와 조선총독은 누구일까.
    90% 민초를 쓰레기나 벌레 취급하고,
    일본인과 조센징을 차별하듯이
    태어나면서부터 개인의 능력과 노력이 아니라 신분에 따라 인간을 철저히 차별하고,
    농산물을 거룩한 전쟁을 위한 거라며 강제로 공출하던 세력처럼
    자기 땅이 한 뼘도 없는 전 농민들로부터 무지막지하게 소작료조로 90% 빼앗아가는
    거대한 악의 세력이 누구일까.
    해외에 나간 노동자의 자유마저 원천 박탈하고
    그들의 피땀을 세계최강인 악의 제국과 맞서는 공화국을 위해 쓴다며
    90% 강제로 헌납 받는 세력이 누구일까.
    수백만을 굶겨 죽이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악의 세력이 누구일까.
    바로 이들이 오늘의 일본제국주의자요 오늘의 조선총독이 아닌가.

      그렇다면 오늘의 친일파는 누구일까.
    UN이 오늘의 친일파인가.
    김일성 일가의 조직적 인권유린에 대해 1997년부터 17년 동안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대북인권안을 결의한 UN이 오늘의 친일파인가.
    미국과 일본이 오늘의 친일파인가.
    2004년과 2006년에 보편적 인권 개념에 입각하여
    북한인권법을 제정한 미국과 일본이 오늘의 친일파인가.
    아니면, 친북좌파가 오늘의 친일파인가.
    유독 북한인권에 대해서는 철저히 침묵하거나 궤변으로 호도하며
    최고존엄 눈치 보기에 급급하여
    북한인권법을 한사코 저지하는 친북좌파가 오늘의 친일파인가.

      일제의 군국주의처럼 독재유지와 군사력 증강에
    유형무형의 예산 대부분을 사용하는 공산독재가 오늘의 민족주의인가.
    아니면, 빈곤은 풍요로 바꾸고 억압은 자유로 바꾸고
    무질서는 질서로 바꾸고 봉건주의는 자유민주로 바꾼 대한민국이 오늘의 민족주의인가.

    51개 출신성분으로 자자손손 공산귀족과 공산노예란 ‘넘사벽’을 만든 김씨조선이 민주인가,
    능력과 노력에 따라 누구나 오를 수 있는 출세의 사다리를 만든 대한민국이 민주인가.

    상위 10%에게 세금의 0%를 부과한 김씨조선이 평등인가,
    상위 10%에게 세금의 76%(근로소득세 기준)를 부과한 대한민국이 평등인가.

    공짜 에너지가 끊기자 300만을 굶겨 죽인 김씨조선이 자주인가,
    두 차례의 살인적 에너지 파동에도 세계 최고의 경제성장률을 달성한 대한민국이 자주인가.

      친북좌파야말로 오늘의 친일파다. 친일파의 판박이다.
    공산독재에 저들의 선전선동 용어인 민주와 민족과 자주와 진보를 헌납한
    친북좌파야말로 오늘의 친일파다. 친일파의 판박이다.

    공산독재에 반대한 이승만 정부에서 노태우 정부에 이르는
    자유대한에 독재와 친일과 친미사대와 수구보수를 적반하장 뒤집어씌운
    친북좌파야말로 오늘의 친일파이다. 친일파의 판박이다.

    자유통일은 쪽박이라며 결사반대하고 적화통일은 연합제와 낮은 단계의 연방제라며,
    대박이라며, 자유 취재는 단 1초도 못하고 조선동아 제외 46개 신문방송이
    평양에 가서 충성의 맹세를 굳게, 억세게 다짐하고
    그 다짐을 대를 이어 그대로 실천하고 있는
    친북좌파야말로 오늘의 친일파다. 친일파의 판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