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통이라 쓰고 굴복이라 읽는다


    왕따 작전에 불통 대장이 혼비백산 
    소통 개구멍으로 기어들면,
     산 채로 사로잡는다.


    최 성 재


  • 뭉크(Edvard Munch 1863~1944)의 <절규>는 현대인의 소외와 불안을 섬뜩하게 형상화한다. 판화 포함 다섯 버전 중 가장 나중 작품인 1910년판은 <자연의 절규>란 제명을 달고 있지만, 붉은 노을과 칙칙한 다리를 소재로 삼았을 뿐, 그림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내면을 화폭 가득히 담고 있다(expressionism). 표현주의의 선구자 고흐는 변형되긴 했지만 자연의 형태를 그런 대로 살렸지만, 뭉크는 아예 아름다운 노을을 핏빛 하늘로, 유혈낭자함으로 떡칠한다. 셋이서 다리를 건너다가 ‘우울함’(뭉크의 메모)이 엄습하여 두 친구를 멀찍이 뒤에 두고 허겁지겁 달려온 해골바가지는 비명을 지르며 두 귀를 손으로 꽉 틀어막는다.

    처음 이 그림이 전시되었을 때는 그 추악함에 사람들이 경악했지만, 1세기가 지난 지금은 오슬로에 가서 직접 본 사람이야 별로 없겠지만 사진으로 너무 자주 보아서 그런지 전혀 추악하게도 보이지도 않고 별로 어렵게도 느껴지지 않고 화가의 의도가 한 눈에 들어온다. 이발관 그림처럼 진부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어쨌건 2012년 유일한 개인 소장의 파스텔화 <절규>가 1억 2100만 달러에 거래되어 2014년 현재 비싼 그림 10위를 기록하고 있다.

    뭉크의 <절규>를 소통과 연결해 보면 어떨까. 해골바가지 뭉크와 소통이 가능할까. 무슨 까닭인지 모르나 정신분열증에 가까운 소외감과 불안감을 느낀다면, 그는 누구와도 소통하지 못할 것이다. 일단 해골바가지는 비수 같은 남의 말은 절대 안 듣고 대포 소리 같은 자연의 음악도 절대 안 듣고, 비명을 지르든, 욕을 퍼붓든, 신세를 한탄하든, 누가 듣든 말든 아랑곳없이 속이 시원하도록 일방적으로 괴성을 지를 것이다.

    소통은 쌍방향을 전제로 하니까, <절규>의 해골바가지와는 소통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할 것이다. 그렇다, <절규>의 해골바가지는 불통이다. 불통이라, 이것 어디서 귀가 따갑도록 듣던 말 아닌가. 이 말을 하기 전에 잠깐! 그런데 누가 해골바가지를 만들었을까. 해골바가지의 불통이 그 자신의 잘못일까.

    아마 뭉크는 해골바가지로 표현된 자신을 피해망상에 사로잡힌 정신병자로 생각하진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자신이 정상이고 자신을 그렇게 만든 미친 시대와 악한 세상을 향해 절규했을 것이다. <절규>를 보는 대부분의 현대인도 해골바가지에 자신을 대입하면서 시대와 세상을 비정상으로 생각하지, 자신을 비정상으로 생각하진 않을 것이다.

    소통은 지난 20여년간 친북좌파의 요란한 깃발이었다. 불통은 지난 20여년 간, 특히 지난 10여년 간 친북좌파가 정통우파 또는 정통우파 편인 듯한 권력을 향해 무차별로 쏘아댄 불화살이었다. 악마 낙인찍기요, 마녀 낙인찍기였다.

    “이회창 불통, 이명박 불통, 박근혜 불통!”

    (김대중 소통, 노무현 소통, 문철수 소통~^.^)

    “조중동 불통, 종편 불통, 일베 불통!”

    (한겨레 소통, 지상파 소통, 오유 소통~^.^)

    “반공 불통, 북한인권 불통, 5.24 불통!”

    (햇볕 소통, 한국인권 소통, 6.15 소통~^.^)

     이재오, 황우여, 원희룡, 김무성, 남경필 등 친북좌파의 앵무새들은 적진에 있을지라도 소통의 달인으로 환영받지만, 그렇지 않으면 싸잡아 불통 세력으로 다짜고짜 타도 대상이 된다. 사법부나 검찰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부실한 증거로 합리적 의심을 구름같이 뭉게뭉게 피워도 검찰이 친북좌파가 떠들어대는 대로 기소하면, 소통 검찰이 되지만, 합리적 의심의 구름을 걷어내고 차마 기소하지 못하면, 불통 검찰이 된다. 권력의 시녀가 된다. 특검, 특검! 소통 대통령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리면 소통 사법부가 되지만, 불통 대통령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리면 불통 사법부가 된다.

    소통의 기준은 친북좌파 저들 자신이다.

     민주, 자주, 평화, 진보, 환경처럼 소통도 저들이 선점한 아름다운 명분일 뿐, 사실 저들은 소통이 뭔지도 모른다. 소통은 쌍방향이란 걸 저들은 모른다. 떼법과 불법시위와 선전선동은 일방적이므로 그것이 바로 불통의 표본이다. 소통의 깃발을 요란스레 내걸었지만, 귀는 일제히 사오정 귀로 성형 수술하고 입은 일제히 딱따구리 입으로 성형 수술하고, 저들은 바로 떼법과 불법시위와 선전선동으로 밀어붙인다.

    이처럼 저들이야말로 불통의 올림픽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법치와 경찰저지선과 토론은 쌍방향이므로 그것이 바로 소통의 기준이다. 애국세력은 법을 준수하고 사실을 존중하고 논리를 앞세운다. 그러나 그들은 이런 애국세력을 수구꼴통이라며, 고집불통이라며 답답해한다. 증오한다. 저들은 준법보다 항상 법 위의 정치를 앞세우고, 소통의 최대 광장인 국회는 1년 내내 외면하고 불통의 막장인 길거리 천막으로 기어들어간다.

    불통은 입만 있고 귀가 없는 것인데, 저들이 바로 그 표본이다.

    그들은 절대 다른 의견을 듣지 않는다. 다른 의견은 악마의 속삭임이나 천사의 변절로 보아 절대 용납하지 않는다. 좌파사관으로 도배한 교과서 외에는 단 한 교과서도 용납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애국사관은 불통사관이고 친북사관은 소통사관이다. 떼로 몰려가 협박하고 욕하고 모함하는 깡패 수법으로 단 하나의 예외도 허용하지 않는다. 그게 바로 다른 사람의 입은 모두 틀어막는 독선의 표본임을, 불통의 표본임을 그들은 모른다. 도리어 승리했다고 의기양양해 한다.

    바로 이것이다.
     그들은 소통이 뭔지도 모르고 소통을 원하지도 않는다.
    승리를 원할 뿐이다.
     그들이 낙인찍은 악마나 마녀의 굴복을 원할 뿐이다.
    자신들은 승리, 정적은 패배!

    자신들은 입, 정적은 귀! 불통 대통령이 무릎 꿇고 빌기를 원할 뿐이다.
    무릎 꿇고 손이야 발이야 빌면 용서해 줄까. 천만에, 그 다음에는 즉각 손과 발을 스스로 절단하길 원한다. 영원히 입을 봉하길 원한다.

    수백만 표를 도둑질한 김대업의 선전선동은 위대한 내부고발이지만, 위대한 소통이지만, 단 한 표라도 끌어갔을까, 의심스러운 특정할 수 있는 국정원의 댓글 수십 개는 천인공노할 불법이다. 민주의 근간을 흔드는 불법이다. 그걸 알고도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 것은 앞뒤 꽉 막힌 불통이다. 두 번이나 수백만 표를 눈 번히 뜨고 빼앗긴 정통우파가 깨끗하게 승복한 것은 당연지사지만(굴복했으므로), 단 한 표도 못 끌어들였을 댓글 몇 개로 1년이 넘도록 물고 늘어지는 것은 불통 대통령을 소통 대통령으로, 제2의 아침이슬 대통령으로 만드는 위대한 투쟁이다. 선전선동과 궤변과 생떼로 그렇게 잔 다르크를 마녀로 낙인찍어 굴복시키는 것이, 화형 시키거나 생매장시키는 것이 저들의 최종 목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