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즘처럼 답답할 땐 조지 오웰을 읽는다!

    좌경지식인의 正體와 본질을 가차 없이 폭로한 聖者같은 작가
  • 趙甲濟    

    김일성이 죽어도 눈물이 나지 않던 청년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의 북경 특파원(前 서울 특파원) 바바라 데믹 기자가 쓴 '부러운 게 없어요-북한의 보통 삶'(NOTHING TO ENVY. ORDINARY LIVES IN NORTH KOREA)이란 책이 話題(화제)이다. 탈북자들이 북한에서 겪은 삶을 오랜 인터뷰를 통하여 재구성한 것이다. 月刊朝鮮이 1991년 신년호 부록으로 내어놓은 책('북한, 그 충격의 실상: 가 본 사람과 살아본 사람들의 이야기')과 비슷한 접근법이다. 모든 對北정책은 북한 사람들의 삶에 대한 파악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래야 진실에 기초한, 뿌리가 든든한 정책이 된다.

       이 책에는 준상이란 청년의 이야기가 나온다. 1961년에 북한으로 간 在日동포를 부모로 둔 청년이 1994년 7월9일 김일성 사망 발표일에 겪었던 일이 재미있게 그려져 있다.
       평양의 한 대학 재학생이던 준상은 토요일 오전 기숙사에서 책을 읽다가 "중대 발표가 있으니 운동장으로 집합하라"는 통보를 받는다. 그는 核위기가 드디어 전쟁으로 악화되는 모양이라고 생각하였다. 정오 무렵 운동장엔 약 3000명이 도열하였다. 정오가 되자 확성기를 통하여 여자의 떨리는 목소리가 햇볕이 내리쬐는 운동장을 울리기 시작하였다. 김일성이 죽었다는 발표였다. 학생들 사이에서 신음과 흐느낌이 터져 나왔다. 한 학생은 쓰러졌다. 다른 학생들은 무엇을 할지 몰라 머뭇거리다가 한 사람씩 머리를 감싸 안고 주저앉기 시작하였다.
       준상은 독재정권에 대한 비판의식을 가진 젊은이였다. 그런 그도 따라서 주저앉았다. 다른 학생들에게 그의 곤혹스러워 하는 표정을 보이지 않으려고 땅 바닥만 내려다 보았다. 그는, 다른 동급생들의 슬퍼하는 표정을 훔쳐보았다.
       그래도 눈물이 나지 않았다. 영화를 보고는 자주 울어 아버지로부터 "계집아이처럼 약하다"고 꾸지람을 듣는 그였지만 눈물이 나지 않았다. 눈가를 만져 봐도 눈물이 없었다. 그는 생각하였다. 나는 뭔가 잘못된 것인가? 김일성이 죽었는데도 왜 슬퍼지지 않는가? 김일성을 사랑하지 않았단 말인가?
      
       大兄은 사랑 받기를 원한다
      
       준상은 갑자기 무서워졌다. 고독감을 느꼈다. 위대한 수령의 突然死(돌연사)에 모든 학생들이 슬퍼하는데, 자신만 無心(무심)한 상태였던 것이다. 그는 여기서 울지 않으면 자신이 위험해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장래, 노동당 入黨(입당) 문제 등 생존이 걸려 있다. 이것은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라고 생각하니 준상은 겁이 났다.
       그는 해를 향하여 눈을 크게 뜨고 있으면 눈물이 솟아날 것이라는 계산을 하였다. 눈을 오래 뜨고 한 점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소리 지르면서 울기 시작하였다. 기계적 동작을 되풀이하였다. 갑자기 진짜 울음이 터져 나왔다. 그는 꿇어앉아 몸을 앞뒤로 흔들면서 진짜로 통곡하기 시작하였다.
       '부러운 게 없어요'라는 책의 著者 바바라 데믹 기자는 脫北하여 한국에 온 준상씨에게 영국 작가 조지 오웰의 '1984년' 번역본을 주었다고 한다. 준상씨는 이 책을 다 읽고는 북한의 전체주의 체제를 그린 것 같아 놀랐다는 평을 하더라고 한다.
       바바라 데믹 기자도 북한을 여행한 소감에서 '1984년'의 회색과 비슷한 色調를 느꼈다고 했다. 이 소설에선 선전 포스터만 천연색이라고 했는데 북한도 마찬가지였다.
       오웰의 소설에는 ‘2분간 미워하기’ 시간이 있다. 북한에서 벌어지는 自我(자아)비판 시간을 연상시킨다. 이 시간엔 전국의 직장 및 가정에 달려 있는 텔레스크린의 지시에 따라 敵을 규탄하는 행사가 벌어진다. 反혁명 분자의 얼굴이 등장하면 모든 사람들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괴성을 지른다. 이때 성의 없이 행동하는 자는 사상경찰에 끌려간다.
       <두려움, 복수심에서 나오는 쾌감, 殺意, 敵을 고문하고 얼굴을 망치로 때리고 싶은 욕망이 모든 사람들 사이로 電流처럼 흘렀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마음에도 없는 發狂과 발작을 하게 만들었다.>
       ‘미워하기 시간’에 조작되는 집단 히스테리는 순간적으로 미움의 대상이 변한다. 사람들은 마음속에서 그 미움을 大兄에게 발산하였다가 금방 大兄에 대한 존경심으로 바꾸기도 한다. 준상이 김일성 사망 발표일에 경험하였듯이 '1984년'의 사람들도 살기 위하여 감정을 스스로 조작할 수 있다. ‘1984년’의 무대인 오세아니아 사람들은 大兄에 복종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大兄을 사랑해야 한다.
       바바라 데믹 기자는 김일성도 복종에 만족하지 않고 사랑 받기를 원했다고 했다. 스탈린이 아니라 산타 클로스나 '자애로운 어버이'가 되고 싶어 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김일성은 일본의 천황과 더 비슷하다고 했다.
       '1984년'에도 준상씨처럼 체제에 의문을 품은 인물이 등장한다.
    인간성 말살의 전체주의 체제에서 살면서도 일말의 양심과 의문을 지녔던 윈스턴은 사상경찰에 붙들려가서 온갖 고문과 설득을 당하고 석방된다. 사상경찰은 윈스턴의 머리에서 문제의식, 비판의식을 지워버린 것이다. 그가 증오하던 大兄에 대한 생각도 바뀌었다. 윈스턴은 텔레스크린에 비친 大兄의 얼굴을 쳐다본다. 그는 후회한다. 40년 동안 大兄을 오해한 데 대하여 뉘우친다. 검은 콧수염 뒤에 숨어 있는 그 은은한 미소를 제대로 보지 못한 데 대하여 반성한다. 大兄의 포근한 품을 멀리 하고 그를 완강히 거부하였던 데 대하여 自責한다. 이 유명한 소설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다.
       <술 냄새가 나는 두 줄기 눈물이 코 옆을 흘러내렸다. 그런 건 괜찮아, 모든 게 괜찮아. 싸움은 끝났어. 그는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긴 것이다. 그는 大兄을 사랑하였다>
      
       읽는 것이 고통인 암울한 소설
      
       복종을 강요하는 체제와 사랑을 강요하는 체제는 질적으로 다르다. '1984년'의 오세아니아에선 연애도 금지된다. 사람들은 오로지 大兄(대형)만 사랑해야 한다. '1984년'에서 주인공인 윈스턴은 사상경찰의 고문과 설득을 이기지 못하고 두 가지를 포기한다. 줄리아라는 戀人에 대한 사랑과 '2+2=4'라는 진실이다.
       윈스턴을 신문하는 사상경찰관은 '2+2=5'를 진실로 받아들이라고 집요하게 압박한다. "진실은 객관적인 사실이 아니라 黨이 인정하는 것"이다. 윈스턴은 결국 '2+2는 4라고 말할 수 있는 사회는 희망이 있다'는 명제를 포기하고 '2+2는 5이다'고 말한다. 진실을 포기하는 순간 사랑도 사라진다.
       '부러운 게 없어요'에서 준상은 연인을 먼저 탈북시키기 위하여 자신을 희생한다. 한국에서 재회해 보니 연인은 결혼한 뒤였다. 준상은 두만강을 넘을 때 읊었던 헝가리 詩人 산도르 페토피가 쓴 詩의 한 구절을 생각했다고 한다.
      
       자유와 사랑
       이 둘을 나는 가져야 한다.
       내 사랑을 위하여 나는 내 생명을
       희생시킬 것이다.
       자유를 위하여 나는
       내 사랑을 희생시킬 것이다.
      
       ‘1984년’은 북한처럼 암울한 소설이다. 이 소설을 읽는 것은 하나의 고통이다.
       <1950년대에 일어난 核전쟁으로 1984년 현재 세계는 오세아니아, 유라시아, 이스트아시아의 세 초강대국으로 분할된 상태이다. 작품의 무대인 오세아니아(영국, 미국 등 영어권 나라를 통합)는 지금의 북한처럼 사상, 언어, 결혼 등 모든 생활이 통제되는 체제이다. 물자는 부족하고, 국민들은 屋內外(옥내외)의 도처에 설치된 텔레스크린(일종의 CCTV)의 감시하에 놓여 있다.
       런던에 사는 주인공 윈스턴 스미스는 眞理省(진리성:선전부)에 근무하면서 역사기록을 改造(개조)하는 일을 하고 있다. 오세아니아 성립 당시의 기록은 계속 고쳐지므로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지조차 알 수 없다. 윈스턴은 작업 중 정부의 선전과 배치되는 옛 자료를 접한 뒤부터 의심을 하기 시작한다. 일기도 쓰고 연애도 하는데 이는 모두 금지된 행위이다. 그는 ‘憎惡(증오)주간’에 만난 줄리아라는 여자와 사랑에 빠지고 텔레스크린의 감시를 벗어난 방을 발견하여 밀회를 즐긴다.
       윈스턴은 평소에 호감을 갖고 있던 黨內局(당내국) 간부 오브라이언을 만나 現체제에 의문을 갖고 있다고 고백한다. 오브라이언은 동지적 共感(공감)을 보이면서 反체제 지도자 골드스타인이 쓴, 금지된 책을 준다. 오브라이언은 사상경찰 간부인데, 윈스턴을 함정에 빠뜨린 것이다. 윈스턴과 줄리아는 함께 체포되어 愛情省(애정성:검찰)의 101호실에서 혹독한 신문을 받는다. 결국 윈스턴은 자신의 신념을 포기하고 사상적으로 改造되면서 줄리아를 배신한다. 윈스턴은 일단 석방된다. 그는 처형되는 날을 기다리면서 진심으로 大兄(대형)을 사랑하게 된다.>
      
       북한과 비슷한 이유
      
       ‘1984년’을 읽어내려 가면 북한체제와 너무나 비슷한 데 놀라게 된다. 權力(권력)구조와 생리, 그리고 인민들의 삶이 흡사하다. 오웰이 이 소설을 완성한 1948년엔 북한정권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란 이름으로 출범한 해이다. 오웰은 스탈린이 다스리던 소련 전체주의 체제를 참고로 하여 소설을 썼지만 결과적으론 북한체제를 모델로 한 셈이 되었다. 소련체제는 1953년 스탈린의 사망과 3년 뒤 흐루시초프 서기장에 의한 格下(격하) 연설을 계기로 변하게 된다. 강제수용소와 피의 숙청이 사라지고 反체제 운동이 일어난다. ‘1984년’의 오세아니아와는 다른 모습이 된 것이다. 김일성, 김정일이란 大兄이 모든 인민들의 公的, 私的 활동을 완벽하게 통제하는 북한만이 ‘1984년’에 부합된다. 체제의 작동 원리가 같다.
      
       *大兄과 김일성: 오세아니아 全域(전역)에 붙어 있는 ‘大兄이 당신을 보고 있다’(BIG BROTHER IS WATCHING YOU)는 포스터와 북한의 도처에 서 있는 김일성 동상은 우상이 다스리는 체제를 상징한다. 大兄과 김일성은 무서운 복종의 대상일 뿐 아니라 자애로운 지도자로서 모든 사람들은 그를 사랑해야 할 의무가 있다.
       *항구적 戰時(전시)체제: ‘1984년’의 오세아니아는 늘 戰時상태를 유지한다. 실제론 다른 두 강대국을 상대로 싸우는 척할 뿐, 긴장상태를 유지, 주민들을 통제하기 위함이다. 북한정권이 미국과 한국의 위협을 과장, 영구적 戰時상태를 조성, 체제를 유지하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憎惡(증오)의 과학: 오세아니아 주민들은 매일 2분씩 텔레스크린 앞에 모여 앉아 敵(적)을 향하여 집단 히스테리를 발산시킨다. 체제를 무너뜨리기 위하여 암약한다는 ‘인민의 敵’이 증오의 主대상인데, 실재하는지조차 애매하다. 북한정권이 미국과 한국, 그리고 있지도 않는 계급의 敵을 향하여 증오를 부추김으로써 주민들을 통제하는 수법이다.
       *常時(상시) 감시망: 오세아니아의 모든 시민들은 텔레스크린이란 일종의 쌍방향 CCTV 감시망 속에 놓여 있다. 思想(사상)경찰의 눈이 도처에서 번득인다. 북한엔 CCTV보다 더 강력한 신고망이 깔려 있다.
       *역사의 조작: 오세아니아에서 과거의 기록은 현재의 필요에 따라 끊임없이 고쳐진다.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하고 현재를 지배하면 과거를 지배한다’는 게 黨의 방침이다. 세계 어느 독재국가도 북한처럼 역사를 뒤집는 나라가 없다. 그들은 역사를 통제하면 사람의 가치관을 바꾸고, 그리하여 權力과 미래를 지배할 수 있다는 점을 알기 때문이다.
       *2중의 단절: 오세아니아와 북한은 외부세계와 단절될 뿐 아니라 역사 조작에 의하여 자신들의 역사로부터도 단절되었다. 주민들은 방향감각과 비교대상과 비판의식을 잃는다. 일종의 無重力(무중력) 상태에 빠진 것처럼 살아간다.
       *언어 조작에 의한 洗腦(세뇌): 오세아니아 정권의 구호는 ‘전쟁은 평화, 자유는 예속, 無知(무지)는 힘이다’. 북한도 민족을 말하면서 반역을 하고, 평화를 말하면서 전쟁을 하고, 화해를 말하면서 분열시키고, 민주의 이름으로 독재를 하고, 진보한다면서 퇴보한다. 오세아니아에선 ‘뉴스피크’라는 新語를 만들어 비판적 사고의 씨앗을 말살한다. 북한도 용어혼란 전술로 그렇게 한다.
       *프롤레타리아의 노예화: 오세아니아는 사회주의 체제의 주인이어야 할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짐승처럼 사는 곳이다. 북한에서도 노동자 농민계층이 가장 심한 억압을 당한다. 대기근 때는 이 계층 사람들이 주로 굶어죽었다. 오세아니아와 북한은 사회주의의 이름으로 사회주의를 배신한 점에서도 같다.
      
       주민을 상대로 한 전쟁
      
       조지 오웰이 이처럼 정확하게 북한체제를 예언한 능력은, 그의 문학적 천재성이라기보다는 知的(지적) 성실성으로 설명하는 게 맞을 것이다. 사회주의자인 그는 자신의 신념에 따라 스페인 內戰에 참전, 좌파 편에서 싸웠다. 그는 바르셀로나를 장악한 좌파정권 안에서 일어난 권력투쟁을 목도하였다. 스탈린의 지령을 받은 親蘇(친소)분자들이 동료 사회주의자들을 상대로 일으킨 무자비한 숙청과 학살을 체험하였다. 그 자신도 희생될 뻔하였다.
       공산전체주의의 악마성과 僞善(위선)을 발견한 그는 죽을 때까지 13년간 수많은 기사, 논평, 著作(저작)을 통하여 이 진실을 알리는 데 全力을 다하였다. 그는 폐결핵에 걸려 치료를 받으면서, 喀血(객혈)을 해가면서, 자신의 몸과 마음을 태워가면서 ‘1984년’을 완성하였고 1년 뒤 죽었다. 47세였다. 죽어가면서 쓴 것이 이 소설이다. 진실을 본 지식인으로서의 의무를 다한 殉死(순사)였다. 그런 점에서 ‘1984년’은 한 위대한 문학가가 韓民族(한민족)에게 선물한 ‘진실의 눈’인 셈이다. '1984년'이 아직도 有效(유효)한 곳은 한반도뿐이다.
       영국 作家 조지 오웰의 '1984년'은 오세아니아, 유라시아, 이스트아시아로 3分된 세계를 무대로 한 것이다. 이 세 나라는 전쟁상태이다. 하지만 서로 결정타를 날리지 않는다. 싸우는 척하는 것이 國內통치에 아주 유리하다고 암묵적 합의를 한 것이다. 오웰은 "이 전쟁은 속임수인데 싸우는 두 동물의 뿔이 상대를 해치지 않도록 각도를 맞춘 것과 같다"고 했다.
       오세아니아를 다스리는 黨(당)은 전쟁상태임을 국민들에게 끊임없이 선전하면서 독재체제를 강화해간다. 그렇게 함으로써 전쟁은 內戰化된다. 세 나라 지배층은 서로는 싸우지 않는 대신 자기 주민들을 상대로 전쟁을 한다. 오웰은 소설에서 이런 요지의 설명을 했다.
       <이 전쟁의 목적은 영토를 확보하는 게 아니라 사회구조를 수호하는 것이다. 전쟁이 지속됨으로써 진정한 의미의 전쟁은 없어졌다. 세 나라는 詐欺的(사기적) 전쟁상태를 지속함으로써 서로를 지켜주고 있다. 그래서 평화가 유지되는 것이다. 그러한 영구적인 평화는 영구적인 전쟁과 같은 의미가 된다. 黨의 구호인 '전쟁은 평화다'는 그런 의미이다. 전쟁상태를 유지하여야 지배층의 평화가 유지된다는 것이다.>
       黃長燁 선생도 비슷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무장한 김정일 정권은 비무장 상태의 북한주민들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고 있다는 것이다. 김정일 정권은 끊임없이 전쟁의 공포를 확산시킴으로써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한다. 식량이 부족하면 지배층끼리 나눠 가지고 주민들에겐 주지 않는다. 그리하여 300만 명이 평화시에 굶어죽었다. 이들은 黨이 주민들을 상대로 벌인 餓死(아사)전쟁의 戰死者(전사자)이다. 그래서 북한의 평화는 '공동묘지의 평화'라는 것이다.
      
       사람을 가두어놓고 기억력까지 말살
      
       '1984년'의 사람들은 외부뿐 아니라 과거와도 단절되어 있다. 時空間의 2중적 폐쇄상태이다.
       <黨員(당원)들이 프롤레타리아처럼 현재의 생활 상태를 견디는 것은 비교의 기준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黨員들은 외국과는 접촉을 해서는 안되듯이 과거로부터도 단절되어야 한다. 그렇게 해야 그들은 선조들보다 자신들이 잘 살고 있으며, 물질적 풍요가 점점 향상되고 있다고 믿게 된다. 이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黨의 무오류성을 지키기 위하여는 과거를 재조정하는 게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역사 기록은 지속적으로 수정된다. 眞實省(진실성)에서 오늘의 필요에 맞추어 과거를 조작하는 것은, 愛情省(애정성)에서 하는 주민감시나 억압만큼 정권의 안정을 위하여 필요하다. 과거는 기록 및 기억과 부합해야 한다. 黨이 모든 역사기록과 주민들의 마음을 완벽하게 통제하므로 과거는 黨이 선택하는 방향에 맞추어진다.>
       북한주민들도 외부세계와 단절되어 있을 뿐 아니라 한국의 역사와도 단절되어 있다. 그들이 제대로 배우는 역사는 조작된 김일성 父子의 역사뿐이다. 한글을 세종대왕이 만들었다는 史實(사실)도 배우지 않는다. 주민들이, 김일성보다 더 위대한 왕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비교 대상이 생기기 때문이다. 사람을 폐쇄공간에 가두어놓고 기억까지도 없애버리니, 방향감각과 비교기준을 잃어버리고 노동당정권에 대한 비판의식이 생기지 않는다.
       정보화가 深化된 한국에서도 이와 비슷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젊은 세대를 건전한 국민으로 키우는 데 가장 필요한 韓國史와 國語 교육이 質(질)과 量的으로 매우 낮은 수준이다. 정부와 언론이 漢字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아 과거, 즉 漢字문화에 기반을 둔 전통문화와 역사로부터 단절되고 있다. 좌경세력은 한국사의 내용을 조작, 왜곡하여 가르친다. 과거를 조작하는 세력은 현존하는 권력이다. 과거를 조작하는 이유는 그런 조작으로 좌경화된 국민들을 量産(양산)하여 미래의 권력을 계속 잡겠다는 것이다. 한국에선 이런 과거 조작이 개방된 민주사회에서, 정보화 시대에 이뤄지고 있다는 점에서 '白晝(백주)의 암흑'이라 할 만하다.
       오웰은 이렇게 설명하였다.
       <바깥 세상 및 과거와 단절된 오세아니아 사람들은 별과 별 사이의 공간에 사는 사람처럼 어느 쪽이 아래이고 어느 쪽이 위인지를 분간하지 못하게 된다. 그런 나라의 지도자들은 절대적 존재가 된다>
      
       "2+2는 4라고 말할 수 있는 사회는 걱정 없다."
      
       '1984년'은 북한정권과 남한의 從北(종북)세력을 본질적으로 이해하는 데 가장 유효한 안내서이다. 문학의 天才(천재)는 그 어떤 학자나 정치인보다도 인간과 역사에 대하여 先見力(선견력)이 있다는 사례가 오웰의 경우이다.
       이 책의 名言들을 소개한다.
       "오늘의 기준으로 본다면 中世의 천주교는 너그러운 편이었다. 그 한 이유는 과거엔 정부가 시민들을 항상 감시할 수단이 없었기 때문이다. 출판이 시작되면서 여론을 조작하기가 쉬워졌다. 영화와 라디오는 이런 경향을 강화시켰다. 텔레비전 기술의 발전으로 私생활은 없어졌다."
       언론의 발달은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한다고만 알려져 왔다. 오웰은 言論을 공산주의자가 장악할 경우, 사상통제의 兇器(흉기)가 될 수 있음을 지적하였다. 오웰이 예로 든 출판, 라디오, 영화, 텔레비전에 지금은 인터넷이 더해졌다. 이 매체들이 좌경화되면 중세 암흑시대보다 더한 무지몽매한 세상이 된다. 문명의 利器(이기)에 의하여 연출되는 이런 사태가 '白晝(백주)의 암흑'(공산주의자였다가 전향한 헝가리 作家 아서 케스틀러의 소설 이름)이다.
       "의식화되기 전에는 그들이 절대로 반란을 일으킬 수 없다. 그런데 그들이 반란을 일으킨 후가 아니면 의식화될 수가 없다."
       ("Until they become conscious they will never rebel, and until after they have rebelled they cannot become conscious.")
       북한주민들이 의식화되어야 수령독재체제를 반대하는 행동을 할 터인데, 그런 의식화는 행동을 통하여서만 만들어질 수 있다. 이런 악순환의 구조를 깨려면 외부에서 정보가 들어가야 한다. 對北(대북)풍선날리기나 휴전선의 對北방송이 그런 역할을 한다.
       "자유란 2 더하기 2는 4라고 말할 수 있는 자유를 의미한다. 그렇게 하는 게 허용된다면 다른 모든 것은 따라오게 되어 있다."
       ("Freedom is the freedom to say that two plus two make four. If that is granted, all else follows.")
       '2 더하기 2는 4'라는 것은 '해는 동쪽에서 뜬다'처럼 증명된 진실을 상징한다. '6·25는 南侵(남침)이다' '천안함 爆沈(폭침)은 북한 소행이다' '김정일은 나쁜 놈이다' '李承晩과 朴正熙는 위대하다'는 것도 증명된 진실이다. 이런 진실을 두려움 없이 말할 수 있는 사회, 즉 언론자유가 보장된 사회는 공산화나 독재화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6·25는 南侵이다' '천안함 爆沈은 북한 소행이다' '김정일은 나쁜 놈이다'는 말을 하는 게 조심스러워지기 시작한다면 그런 사회는 위험해진다. 한국 사회는 그 단계에 進入(진입)하였다.
      
       언어조작으로 의식을 개조, 물질을 지배
      
       "우리는 인간의 마음을 통제함으로써 물질을 통제한다. 현실은 머리 속에 있다."
       ("We control matter because we control the mind. Reality is inside the skull.")
       思想(사상)을 바꾸면 현실을 改造할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오웰은 사상을 바꾸는 가장 유력한 수단이 언어 조작임을 간파하였다.
       이 나라의 거짓말 전문 선전부서의 이름은 眞理省(진리성)이다. 침략 전쟁을 좋아하는 국방부의 이름은 平和省(평화성)이다. 양심수들을 고문, 처형하는 법무부의 이름은 愛情省(애정성)이다. 물자 부족으로 시달리는 나라의 경제부처는 풍부省이다.
       지금 한반도의 김정일 세력이 쓰는 國語사전도 의미가 거꾸로 되어 있다.
       "퇴보는 진보이고, 살인마는 위원장이며, 화해는 도발이고, 통일은 분열이다."
       '1984년’의 나라 오세아니아에선 '뉴스피크'라는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 보급함으로써 비판적 思考(사고) 자체의 씨를 말리려 한다. '뉴스피크' 사전의 특징은 비판적 의미를 지닌 단어수가 점점 줄어들고 略語(약어)가 많아진다는 점이다. '뉴스피크'가 정착되면 사람들은 黨의 오류를 비판하려고 하여도 단어가 떠오르지 않아 할 수가 없다. 아니 그런 생각 자체가 떠오르지 않는다. 한글專用의 확산이 한국인을 그렇게 만들지 모른다.
       '뉴스피크'라는 新言語(신언어)의 문법엔 '二重사고'(Doublethink)가 있다. 두 가지 모순되는 의미를 모순을 느끼지 않고 容認(용인)하는 사고방식이다. 'blackwhite'라는 단어는 다음과 같은 의미로 쓰인다. 먼저 敵에게 적용될 때는 '검은 것을 희다고 우기는 억지'란 의미이다. 이 단어가 黨員(당원)에게 적용될 때는 '黨이 원하면, 검은 것을 희다고 말할 정도의 무조건적인 충성심'을 의미한다.
       천안함 爆沈이 북한 소행임을 부정하는 자들 속에서 이런 二重사고를 볼 수 있다. '천안함 폭침'이란 단어가 이들에겐 '천안함이 북한에 의하여 폭침되었다고 우기는 억지'라는 의미를 갖는 동시에 '필요하다면 천안함이 북한에 의하여 폭침된 것이 아니라고 우길 수 있는 신념'이란 의미도 띤다. 이런 자들에겐 거짓과 진실이 의미가 없다. 이들은 자신의 신념에 맞추어 언어의 의미를 자유자재로 변환시킨다. 신념이 사실을 改造하는 것이다.
      
       카탈로니아 讚歌
      
       스페인 內戰(내전)을 다룬 유명한 소설과 實錄(실록)이 있다. 미국 작가 헤밍웨이가 쓴 소설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와 조지 오웰이 쓴 넌 픽션 ‘카탈로니아 讚歌(찬가)’가 그것이다. 관점은 다르다. 헤밍웨이는 좌파에 동정적이고, 오웰은 좌파 편에서 싸웠지만 반대파를 숙청하고 헤게모니를 잡은 親蘇派(친소파)를 파쇼와 같은 집단이라고 비판한다. 역사적 관점에선 오웰의 知性이 헤밍웨이의 낭만주의를 압도한다.
       오웰이 스페인 내전에 참전하지 않았더라면 공산주의의 본질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즉, '카탈로니아 찬가'가 없었더라면 '동물농장'과 '1984년'이란 인류의 유산도 만들어질 수 없었다.
       ‘카탈로니아 찬가’의 무대는 이 지방의 중심 도시인 바르셀로나이다. 이 도시를 여행할 때 이 책을 갖고 다니면서 읽으면 80년 전의 역사적 현장감을 느낄 수 있다. 이 책에 자주 나오는 람블라스 거리는 바르셀로나 한 가운데에 난 번화가이다. 카페와 식당이 즐비한 곳이고 밤늦게까지 사람들이 붐빈다. 이 바르셀로나를 무대로 하여 벌어졌던 ‘內戰 속의 內戰’이 ‘카탈로니아 찬가’의 主題(주제)이다.
       오웰은 스탈린식 전체주의를 고발하는 두 편의 소설- ‘동물농장’과 ‘1984’- 때문에 反共(반공)자유민주주의자로 잘못 알려지는 경우가 있다. 그는 사회주의자였다. 1936년 프랑코 장군이 좌파정권을 타도하기 위하여 쿠데타를 일으켜 內戰으로 치닫자 오웰은 바르셀로나로 가서 좌파 민병대에 자원, 입대한다.
       ‘카탈로니아 찬가’의 도입부는 노동자 계급이 정권을 잡은 바르셀로나의 활기찬 모습을 그리고 있다. 성당은 파괴되고, 팁은 없어지고, 상류층의 사치스런 옷차림은 사라지고, 하층민들은 당당해졌다. 오웰은 프랑코 군대와 대치한 戰線(전선)에 투입되어 지루한 참호전을 하게 된다. 敵(적)과의 實戰(실전)보다는 이와 쥐를 상대로 한 싸움이 더 처절하다. 그는 바르셀로나로 휴가를 나왔다가 ‘內戰 중의 內戰’에 휘말린다. 바르셀로나의 좌파정권 안에서 내분이 일어났다. 스탈린의 지령을 받은 세력이 다른 사회주의자들을 숙청하기 시작한 것이다.
      
       공산주의와 파쇼는 같다
      
       오웰은 자신의 계보와 신념에 따라 反蘇 사회주의 진영에 서게 된다. 親蘇派(친소파)가 시가전에서 승리하는 것을 보고 오웰은 전선에 복귀한다. 여기서 목을 관통당하는 총상을 입었다. 병원으로 후송되어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진 그는 바르셀로나에 돌아와 除隊(제대)와 출국을 꾀하게 되는데 그는 쫓기는 신세가 된다. ‘反蘇분자’로 지목되어 언제 끌려가 총살될지 모르는 상황이다. 스페인에 동행하였던 부인은 호텔에 연금되고, 오웰은 露宿(노숙)을 해가면서 거리를 방황한다.
       경찰은 밤에만 설치고 낮은 자유롭다. 오웰이 안전한 낮 시간에 여기저기 들르는 카페와 음식점 이야기는 바르셀로나 관광 가이드이다. 목숨이 오고 가는 살벌한 분위기이지만 독일이나 소련과는 다르다. 오웰은 스페인 사람들은 절대로 파쇼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 책에서 스페인 사람들은 살벌한 상황에서도 너그러움을 잃지 않는 사람으로 그려져 있다. 오웰은 ‘스페인에 대하여는 나쁜 기억이 많지만 스페인 사람들에 대한 나쁜 기억은 없다’고 말한다.
       親蘇派 형사들이 오웰의 부인이 묵던 호텔 방을 급습, 두 시간 동안 수색을 하는데 부인이 누워 있는 침대는 건드리지 않는다. 사실은 이 침대 밑에 불온문서와 무기가 숨겨져 있는데도 그들은 남자의 명예심을 지킨다.
       ‘카탈로니아 찬가’에서 오웰은 親蘇派가 스탈린의 꼭두각시가 되어 노동자 계급을 탄압함으로써 계급해방이란 사회주의 혁명을 배신하였다고 개탄한다. 바르셀로나에서 親蘇派가 정권을 독점한 뒤엔 노동자들이 다시 탄압을 받고 자본가들이 回生한다. 형사들은 노동자風의 사람들을 검문하여 잡아들이고 부유층 같아 보이는 이들은 조사도 하지 않는다. 그가 바르셀로나에서 얻은 교훈은 스탈린주의와 파시즘은 똑같은 巨惡(거악)이란 깨달음이었다.
       ‘카탈로니아 찬가’를 읽는 독자들은 오웰 부부가 기차 편으로 스페인을 벗어나 프랑스로 빠져나오는 장면에서 안도의 한숨을 쉬게 된다. 시가전, 암살, 투옥, 처형의 바람이 휘몰아치는 스페인을 떠나 7개월 만에 영국으로 돌아온 오웰은 평온하기 짝이 없는 조국의 모습을 보고 걱정한다.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다.
       <깊게 잠들어 있는 영국을 보면서 두려워지는 것은, 폭탄이 터지는 소리에 놀라 잠자리에서 튀어나오기 전엔 잠에서 결코 깨어나지 않을 것이란 예감 때문이다.>
       오웰의 이런 예감은 곧 적중하였다. 1939년 8월 스탈린은 히틀러와 손잡고 獨蘇(독소) 불가침 조약을 맺음으로써 유럽의 진보적 지식인들을 배신하고 독일이 전쟁으로 달려가는 길을 열어준다. 그해 9월 독일이 폴란드로 쳐들어가자 영국은 비로소 평화至上주의의 깊은 잠에서 깨어난다.
      
       머리를 써야 공산주의에 이긴다
      
       1938년에 출판된 ‘카탈로니아 찬가’는 주목을 받지 못하였다.
    전담 출판사가 스탈린 비판 내용 때문에 출판을 거부, 다른 회사를 찾아서 낸 책인데, 1951년 再版(재판)이 나올 때까지 초판 1500부가 다 팔리지 않았다. 오웰은 1950년 47세로 죽었는데, 그때까지 번역판은 이탈리아어뿐이었다. 오웰은 죽기 직전까지 초판의 잘못을 바로잡는 데 신경을 썼다.
       그 뒤 바르셀로나도 많이 바뀌었다. 프랑코 시절에 핍박을 많이 받았던 카탈로니아 사람들은 2002년 월드 컵 8강전에서 스페인 팀이 승부차기로 한국 팀에 지자 환호했다. 지난 월드컵 결승전에서 스페인 팀이 우승하자 바르셀로나 사람들은 처음으로 ‘스페인 만세’와 ‘카탈로니아 만세’를 같이 외쳤다. 바르셀로나 출신 선수들이 대표팀의 主力이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면 한국이 떠오른다.
    6·25 남침을 前後(전후)하여 박헌영의 남로당이 김일성에게 배신당하고 숙청당하는 과정과 흡사하기 때문이다. 남로당 후손들 중에서 오웰 같은 양심가가 나와서 김일성주의를 비판하는 名作(명작)을 남길 때도 된 것 같다.

       구글에서 조지 오웰의 語錄(어록)을 검색하니 이런 말이 나왔다.
       "詐欺(사기)가 판을 치는 시절엔 진실을 이야기하는 게 혁명이다."
       (During times of universal deceit, telling the truth becomes a revolutionary act.)

       위선자들이 판을 치는 한국에서 "李承晩과 朴正熙가 한국 민주주의의 건설자이다"라고 하면 화들짝 놀라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빗댄 것 같기도 하다.

       그는 親知(친지)한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공산주의 및 파시즘과 싸우려면 우리도 같은 정도의 狂信(광신)을 가져야 한다는 말에는 同意(동의)할 수 없다. 狂信者들을 이기려면 우리는 狂信者가 되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머리를 써야 이길 수 있다.>
      
       知的 성실성
      
       그는 '동물농장'을 위한 서문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출판인들과 편집자들이 어떤 기사들을 싣지 않기로 한다면 이는 고발을 당할까 봐 겁이 나서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 여론이 두려워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이 나라에서 이러한 知的(지적)인 비겁성은 작가나 언론인들이 직면해야 하는 最惡(최악)의 敵이다.>

       오웰은 "자유란, 사람들에게 듣고싶어하지 않는 것들을 말할 수 있는 권리를 의미한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조지 오웰의 一生을 다룬 영화에는 그가 자신의 글을 거부하는 편집자에게 이렇게 항의하는 장면이 나온다.
       "자네는 신념을 사실보다 더 重視(중시)하는 사람인가?"
       이 질문은 글을 써서 먹고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던지는 도전장이기도 할 것이다.
    50을 채우지도 못하고 죽은 조지 오웰의 가치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빛나는 것은,
    그리하여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知性으로 평가되는 것은, 자신이 발견해낸 불편한 사실들을 자신의 신념보다 늘 우선시키면서 생각을 고쳐간 知的 성실성 덕분일 것이다.
       그는 1946년 트리뷴紙에 기고한 글에선 이렇게 주장하였다.
       <사람들은 사실이 아니란 것을 알고 사실이 아님이 증명되어도 사실을 왜곡하여 자신들이 옳다는 주장을 한다. 知的으론 이런 과정을 무한대로 끌고 갈 수 있다. 이런 행동을 견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런 가짜 확신이 확고한 현실과 충돌할 때인데, 보통 戰場에서 그렇게 된다.>
       그렇다면 말장난과 僞善의 곡예를 펼치는 한국의 좌경적 지식인들이 꿈에서 깨어날 때는 그들이 불러일으킨 전쟁의 피비린내를 맡으면서일까?
      
       "나는 왜 글을 쓰는가?"
      
       미국 예일 대학 역사학 교수 존 루이스 가디스의 名著(명저) '冷戰'의 프롤로그는 조지 오웰로부터 시작한다. 오웰이 스콧랜드의 주라 섬에서 '1984년'을 쓸 때 그는 急死(급사)한 부인과 자신의 폐결핵으로 인생의 終章을 예감하고 있었다. 전화도, 전기도 들어오지 않고 車道도 없는 외딴 섬을 집필 장소로 고른 것이다. 2차 대전이 끝나자 말자 核전쟁의 위험으로 치닫고 있던 유럽은 희망이 없어보였다. 오웰은 유럽 문명과 자신의 생애가 끝나기 전에 소설을 완성해야 한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1984년'은 주인공 윈스턴의 패배로 끝나지만 冷戰은 자유진영의 승리로 끝났다.
    그 1984년 미국에선 레이건 대통령이 웃어가면서 소련 공산주의를 무너뜨릴 방도를 연구하고 있었다. 1년 뒤 고르바초프가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되어 공산帝國을 내부로부터 해체해가기 시작하였다(그가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 8년 안에 유럽과 소련의 공산정권들은 모조리 무너졌다.
    오웰의 '1984년'은 유럽에선 현실화되지 않았지만, 2010년의 한반도에서는 지속되고 있다.

       오웰은 '나는 왜 글을 쓰나?'라는 수필에서 사람들이 글을 쓰는 네 가지 공통된 동기가 있다고 했다. 순전히 이기주의로 글을 쓰는 경우, 美學的 열정, 後代를 위해 기록을 남기려는 역사적 충동, 그리고 정치적 의도. 그는 책을 쓰는 것은 '긴 鬪病생활과 같은 끔찍하고 기진맥진한 싸움'이라고 표현하였다.
    오웰은 '거부할 수 없는 어떤 惡靈에 씌워지지 않고는 그런 일을 시작하지 않을 것'이라면서도 '좋은 散文은 (세상을 잘 보게 하는) 통유리와 같다'고 했다. 그는 뒤돌아보니 정치적인 의도를 갖지 않고 쓴 글일수록 형식적이고 生氣가 없더라면서 글을 쓰려면 정치적 목적의식이 분명해야 한다는 권고도 하였다.

       오웰은, 공산주의의 본질을 가장 깊숙한 곳에까지 들어가 본 사람이었다.
    그가 '1984년'에 담고자 하였던 '정치적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글의 힘으로, 진실의 힘으로 거짓의 공화국을 해체하는 데 '1984년'을 무기로 이용하라는 게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1984년'은 한반도의 知性人을 위하여 쓴 책인 셈이다.

    그가 '머리를 써야 공산주의를 이길 수 있다'고 했을 때 그 '머리'는 오웰의 삶과 글이 보여주는 '정직한 知性'이거나 레이건과 같은 '위대한 人格'일 것이다.
    至誠의 知性으로 大兄을 쳐라!
    (2011.4.7)

    [조갑제닷컴=뉴데일리 특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