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朴正熙, "反共도 관광자원이다."

    趙甲濟    


  • 朴正熙 대통령은
    근대화 혁명이란 가장 급진적인 개혁을 추진하면서도
    말은 아주 신중하게 했고,
    방법은 점진적이었다.
    말이 앞서지 않았다는 것이다.

    최근의 소위 민주투사 출신 대통령들은
    당장 내일 정의가 실현될 것처럼
    과격한(본인들은 멋지다고 생각하는 듯) 말로써
    개혁 아닌 改惡(개악)을 한 경우가 많은데
    우리 민족사에서 가장 성공한 개혁가는 말을 아꼈다.

    한국인들은,
    특히 말로써 먹고사는 지식인과 정치인들은
    말에서 지기 싫어하기 때문에 과격하고 단정적이며
    그러다가 보니까
    현실과 괴리된 과장된 말들을 쏟아놓는다.
    행동으로 뒷받침될 수 없는 이런 말의 잔치가 국민들의 불신을 산다.

    개발年代(연대)의 신문 인사(人事) 프로필 기사를 읽다가 보면
    [과묵한 실천력]이란 말이 많이 나온다.
    말과 글을 실천보다 중시했던
    조선조의 양반정치를 극도로 경멸했던 朴正熙가
    추진력 위주로 사람을 썼기 때문일 것이다.

    1977년 朴正熙는,
    청와대를 찾아온 대구사범 시절의 일본인 교사 기시에게 이런 말을 했다. 


    일본에는 문화를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 우수한 민족성의 기반이 있습니다.
    한반도에서 문화인과 기술자가 일본에 건너가서 정착하여
    이들이 또 독자적인 일본 문화를 만들었지요.

    유교로 말할 것 같으면
    本山(본산)인 중국에서는 쇠퇴하고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일시적으로 눈부신 발전을 했지만 여기서도 형해화하고 말았고
    유독 일본에서만 일본유학으로서 大成(대성)하였습니다.
    한국의 유교는 공자묘 등 각지에 형식상 남아 있기는 하지만
    본질은 이미 죽어버렸습니다.

    대구사범시대에 배운 이야기 가운데 지금도 잊지 않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에도의 學塾(학숙)에서 孔孟(공맹)의 가르침을 강론하는 자리에서
    야마자키라는 사람이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만약 공자 맹자가 군대를 이끌고 일본을 침략해 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제자들은 대답을 잘 하지 못했습니다.
    야마자키 선생이 말하기를,

    [우리는 즉시 공맹을 맞아 싸워 그들을 포로로 삼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공맹의 가르침이다]라고 했습니다.
    학문이란 것은 이렇게 살려가지 않으면 안됩니다.



    朴正熙는,
    조선조 선비들에게 같은 질문을 던졌다면
    그들은
    [공맹한테 어떻게 저항할 수 있나. 부모님 나라인데 당장 항복해야 한다]
    답했을 것이라는 뜻을 깔고서
    그런 말을 한 것이다.

    朴대통령의 이 例話(예화)가 암시하는 것은 간단치 않다.
    한국인들은 외래사상을 받아들여 교조화하는 악습이 있다.
    주자학, 민주주의, 마르크시즘까지도 한국으로 들어오면 우상이 된다.
    본래의 취지는 죽어버리고 형식화되어
    政敵(정적)을 치는 흉기가 된다.

    왜인가.
      
    주체성이 약한 지식인들은
    조국이 처한 현실을 무시하고 수입품을 무조건 좋은 것이라고 우기면서
    이에 반대하면
    독재니 이단이니 반동이니 斯文亂敵(사문난적)이니 하여 말살하려 든다.
    현실적이고 애국적인 異見(이견)을
    외래사상의 힘을 빌어 억누르는 이것이
    진정한 사대주의이다.
    독일계 유태인이 만든 사회주의의 힘을 빌어
    동족의 살 길을 막아버린 김정일(金正日)이 그런 인간이다.

    朴대통령이 가장 통탄했던 것은
    그런 반역적 사대주의였다.

    외래사상으로서의 주자학, 민주주의, 마르크시즘을 우상화하면
    공허한 논리의 관념론에 빠진다.
    그런 사상이 만들어진 외국의 풍토를 무시하고
    이론만 수입했고 그 이론만 떼어내어서 연구하기 때문이다.

    관념론은 또 과격하다.
    말로써야 무슨 짓을 못하겠는가.
    총 한방 쏠 줄 모르는 사람도
    선언문이란 관념 속에서는 [최후의 일인까지 싸운다]고 큰 소리 친다.
    온갖 위선과 부패를 다 저지른 정치인도
    말로써는 [행동하는 양심]이라고 우긴다.

    朴正熙 대통령은 항상 실천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말을 조심했다.

    예컨대 1969년9월25일 <저축의 날> 치사에서
    그는 [조국 근대화가 통일의 중간목표임]을 강조했다.
    朴대통령은,
    한국에서 근대화가 이뤄지면
    그 경제역량과 민주역량을 기반으로 한 남한이 통일전략 추진의 기지가 되어
    북한을 자유화할 수 있다고 보았다.

    朴대통령은
    한반도에서 평화만 유지된다면
    체제대결에서 한국이 승리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자신의 아내를 앗아가고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였던 金日成과의 대화도
    인내심 있게 모색하면서
    평화의 시간을 길게 가져가려고 했다.
    시간은 한국 편이란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朴대통령은 그러나 인내와 자제에는 한계가 있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는
    [6.25와 같은 전면전쟁을 도발하여 올 때는 우리도 모든 것을 송두리째 희생하는 한이 있더라도 일보의 양보가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1969년4월25일 기자회견).
      
    朴대통령은 실무와 각론에 강한 사람이었다.
    주자학적 관념론에서 해방되어 유연한 지식체계를 가진 덕분이었다.

    주자학적 관념론에는 총론밖에 없다.
    이런 전통을 이은 소위 민주투사 출신 대통령들은 [세계화]를 외치면서도
    그 실천방법을 몰라 외환위기를 부르고,
    민족화해를 주장하면서 민족반역자를 돕고,
    인권을 중시한다면서 북한동포에 대한 인권탄압을 방치했다.
    좋은 말만 하면 그것이 자동적으로 실천된다고 착각하거나
    실천을 위한 각론에는 무능하니까
    말로써 때우는 데 이력이 난 탓이다.

    1968년 5월22일 朴正熙 대통령은
    강원도 삼척군 北坪(북평)읍의 雙龍(쌍용)시멘트 東海대단위 공장을 시찰했다.
    그는 보고회에서 직접 매직펜을 들고
    「북평읍의 도시계획은 이렇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권고했다.

    조선일보 정치부 崔秉烈(최병렬) 기자(전 한나라당 대표)가 쓴 정치면 가십란에는
    이런 지적이 있었다. 


    이곳 관리들은 (대통령으로부터) 브리핑을 듣는 입장에 서고 말았다.
    서울 외곽의 도시계획도
    대부분 朴대통령의 아이디어에 따라 하는 것이라는데,
    그 실력이 여기서 처음으로 공개된 것이다.
    朴대통령은
    금년 8월부터 연간 180만t을 생산하여
    동양 제1을 자랑하게 되는 쌍용(雙龍)시멘트가
    오는 1971년부터는 연간 420만t 생산으로 규모를 확대 ,
    단위 공장으로는 세계 제1의 규모가 된다는 보고를 받곤
    철도수송은 물론 해상수송 등에 정부가 만반의 뒷받침을 해주라고 지시.

    朴대통령은
    특히 고속도로가 서울 - 삼척 간의 육상수송에 도움이 된다는
    金成坤(김성곤) 의원의 말을 듣고는
    『雙龍이 주동이 되어 민간자본을 동원,
    民營(민영)고속도로를 건설하는 것이 어떻겠는가』라고 한마디했다.


    흔히 朴대통령의 국가발전 전략을 국가주도라고 한다.
    朴대통령은
    그러나 민간의 창의성과 자발성을 최대한 살리는 방향으로
    국가가 개입해야 한다는 생각을 일찍부터 했다.
     
    朴대통령은
    [反共(반공)도 관광자원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돈벌이를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주자학적 선비정신의 핵심은
    淸貧(청빈)사상이고 이는 돈벌이를 거의 죄악시했으나
    군인출신 개혁가는 격전지까지도 관광자원으로 이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1965년 2월 그는 춘천댐 준공식에 참석해 이런 요지의 말을 한다.


    앞으로 많은 관광객,
    특히 수학여행을 이 춘천댐으로 誘引(유인)시켜
    우리의 기술을 자랑하고
    또 우리의 힘으로 이루어진 업적들을 보도록 할 것을 당부합니다.
    우리나라의 반공(反共) 業績(업적)은 훌륭한 관광자원이라고 생각하며,
    또 이는 반공사상을 鼓吹(고취)하는 데 큰 도움이 되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판문점, 휴전선, 평화선, 자유센터 등을 資源(자원)으로 하는 관광개발에
    종합적 계획이 있기를 바라며,
    특히 이 지점들에 적절한 시설(전망대, 休息所, 관광 코스와 버스 등)을 함으로써
    훌륭한 관광지대가 될 것입니다.
    이에 대한 적극적 조치 있기 바랍니다.


    朴대통령은,
    1964년 10월26일에는 부산의 UN묘지를 방문한 뒤 다음과 같은 지시를 내린 적이 있다.

    UN묘지는
    우리나라의 하나의 성지이며,
    또 부수적으로는 관광자원인 것입니다.

    따라서 UN묘지 周邊(주위)의 도시계획에 있어서는
    상당한 국가적 配慮(배려)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의 말대로
    외국인들도 많이 찾는 판문점을 비롯해 휴전선, 임진각, 땅굴,
    이제는 소원해졌지만 「평화의 댐」 등은
    훌륭한 관광자원이 되었다.
    그에게 반공(反共)은 안보이면서도 돈벌이고 교육소재도 되는 「자원」이었다.

    군인 출신 대통령들이
    민간인 출신보다도 실제적이고 추진력도 있었으며
    더 유연하고 개방적이었다는 이 점이
    한국 현대사를 보는 하나의 키 포인트이다. 


    [조갑제닷컴=뉴데일리 특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