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일 오전 10시, 남산 안중근의사기념관에서 열려
  • 일본 제국주의의 선봉장이었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그는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 장군에게 [처형] 당했다.
    104년 전의 일이다.

    중국 하얼빈 역에서
    일본 제국주의의 선봉이었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사살,
    우리 민족의 독립의지를 만천하에 알린
    [안중근 의사 의거 104주년 기념식]이
    오는 26일 오전 10시,
    남산에 있는 안중근 의사 기념관 강당에서
    (사)안중근 의사 숭모회(이사장 안응모) 주관으로 열린다.

    기념식에는
    <최완근> 국가보훈처 차장,
    독립운동관련 단체장, 광복회원,
    시민, 학생 등 400여 명이 참석한다.

    안중근 의사 기념관장의 약전봉독,
    학생대표의 의거 이유 낭독,
    숭모회 이사장의 기념식사,
    보훈처 차장, 광복회장의 기념사,
    장학금 수여, 기념공연,
    안중근 노래 합창, 만세삼창 등 순으로 진행한다.

    <안중근> 의사는 1879년 황해도 신천에서 태어났다.

    <안중근> 의사는
    1905년 을사늑약 소식을 듣고
    중국 상하이로 건너갔다가
    부친상을 당하고 돌아와서는
    사재를 털어
    삼흥(三興)학교, 돈의(敦義)학교를 세워
    인재교육에 힘썼다.

    그러나 광무황제 폐위, 군대 해산 등
    일제가 우리나라를 병탄하자
    다시 해외로 나가
    <이범윤>, <김두성>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키고,
    1908년 의군장이 되어
    의병부대를 거느리고 함경북도로 진입해
    경흥, 회령 등에서 대일항전을 전개했다.

    그 후 다시
    러시아 블라디보스톡, 연추(煙秋) 등을 왕래하면서
    항일투쟁방안을 강구했고,
    1909년에는
    <김기열(金基烈)>,
    <백낙길(白樂吉)>,
    <박근식(朴根植)> 등
    동지들과 함께 단지(斷指)동맹을 결성했다.

    1909년 9월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하얼빈으로 온다는 소식을 듣고
    <우덕순> 등과 함께 거사 계획을 세웠다.

    10월 26일 오전 9시 무렵,
    하얼빈역에서 기차에서 내려
    러시아 군인들의 경례를 받으며
    각국 영사들이 있는 곳으로 향해 걸어가고 있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향해
    총을 쏘아 3발 모두 명중시켰다.
    일제 헌병이 체포하려고 하자
    [코레아 우라(대한 만세)]를 크게 세 번 외쳤다.

    1909년 11월
    러시아 헌병대에서
    뤼순(旅順)에 있는
    일본 감옥으로 이송돼
    심문과 재판을 받았다.

    이때도
    일본의 부당한 침략행위를 공박하고,
    한국 독립과 동양 평화의 정착을 주장해
    일제 경찰과 판사도 감복했다고 한다.

    하지만 <안중근> 의사는
    1910년 2월 14일 사형을 선고받고
    1910년 3월 26일 순국하셨다.

    정부에서는
    <안중근> 의사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