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느 쌍용차 근로자의 유서

     

  • ▲ 류근일 뉴데일리 고문/전 조선일보 주필ⓒ
    ▲ 류근일 뉴데일리 고문/전 조선일보 주필ⓒ

    이론을 현실에 맞추지 않고 현실을 이론에 맞추려 하는 게 설익은 ‘주의자(主義者)’들의 고질병이다.
    쌍용차 근로자 류 모씨는 자살을 기도했을 때 한 통의 유서를 남겼었다.
    요지는 노동운동가들과 정치권의 ‘현장(現場) 무시’ 작태를 비판한 것이었다.

    그들이 이념적 정치적 외곬 관념에 집착한 나머지,
    회사의 ‘더 많은 수익’과 근로자의 ‘더 많은 수입’을 가로막았다는 원망이었다.

    극열 노동 운동가들과 정치권 나부랭이들이 입만 벙긋했다 하면 근로자를 위합네 하면서,
    실제로는 “회사가 잘돼야 내가 잘 된다“고 생각한 성실한 ‘근로자 +가장(家長)’ 한 사람을 자살 직전까지 몰아갔다는 이야기다.

    이것은 지난 200년간의 근현대사를 통해 시장경제와 산업화와 자유무역으로 오늘의 선진국을 이룩한 나라들의 극열 노동운동사와 사회주의 운동사에 숱하게 있어왔던 고전적인 사례였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답시고 거창한 이론을 만들고 강철 같은 비밀결사를 꾸리고, 그 이론에 따라 피어린 혁명을 일으키고 하며 난리법석을 떨었지만, 결국은 오히려 가난한 사람을 더 불행에 빠뜨린 사례가 한 둘이 아니었다.

    공산주의가 그 대표적인 경우다.
    하느님 아닌 일개 인간이 만든 ‘이론’을 마치 하느님의 창조 행위인 것처럼 신성시(神聖視)해서, 살아 움직이는 현실을 그 ‘이론 틀’에 억지로 두드려 맞추려다가 결국은 인간을 오히려 학정(虐政)과 굶주림에 시달리게 만든 게 소련 공산주의의 역사였다.

    그래서 소련 공산주의는 폭삭 망했다.
    공산주의가 잘 했고 잘 됐으면, 왜 스스로 망했겠는가?

    미국 이나 영국이 총을 쐈나, 대포를 쐈나?
    자유국가들이 그냥 열심히 ‘삶의 질(質)' 경쟁을 하다 보니, 어느 날 갑자기(?) 공산당이 제풀에 나자빠졌다 뿐이다.

    왜?
    현실을 이론에 맞추려 한 것, 즉, 안 되는 것을 된다고 했던 탓이다.

    문제는 이 생생한 역사적 경험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극열 운동권이 그 잘 못된 전철을 따라간다는 사실이다.
    딱히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라 해도 “기업의 이윤추구와 근로자의 이익은 상충(相衝)한다"고 하는 고정관념에 있어서는 한국의 극열 운동권도 ‘현실을 이론에 두드려 맞추는’ 오류에 빠져 있다.
    이게 한국 극열 운동권의 구닥다리 사고요 시대착오적인 행태다.

    그러다가 그들은 쌍용차의 한 선량한 근로자의 피맺힌 원망을 듣고 말았다.

    젊은이들이 ‘진보’에 관심을 갖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진보’를 자처하는 것들 중에도 오류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그들은 알아야 한다.
    이게 참 공부하는 자세다.

    이 자세가 없으면 구도(求道)를 한다고 하다가 사이비 종교에 빠지는 격이 될 수 있다.
    사이비 종교에 빠지는 것은 구도 자체를 아예 시작하지 않는 것보다 못하다.
    다단계에 빠지는 것은 돈을 벌려고 아예 시작하지 않는 것보다 못하듯이.

    왜 이 간단한 이치를 많은 젊은이들이 반복해서 까먹는 것일까?
    쌍용차 근로자 류 모씨의 유서에서 우리 젊은이들이 깨치는 바가 있어야 할 것이다.

    류근일 /뉴데일리 고문/ 전 조선일보 주필
    류근일의 탐미주의 클럽(cafe.daum.net/aestheticismclu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