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민대통합, 탕평책 쓰면 실패한다

      
  • 송 복 (宋 復 /연세대 명예교수)

    선거를 치르면서 「통합(統合)」이 시대정신이고 시대의 화두(話頭)처럼 되었다. 너도 나도 통합을 말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보수든 진보든 우파든 좌파든 모두 통합을 말한다. 심지어 여당도 야당도 한결같이 통합을 부르짖는다.

    도대체 투표를 하면 국민의 의견은 두 쪽이든 세 쪽이든 나눠지게 되어 있다.
    투표결과 어느 한 의견을 채택한다 해도 나눠진 의견은 나눠진 대로 있는 것이다. 아무리 다수의 의견을 택했다 해도 소수의 의견은 소수의견대로 상존(常存)하는 것이다.
    그것이 민주주의고, 그것이 민주주의 하는 나라의 「정상」이다. 이때의 「정상」은 어디든 일정하게 늘 있는 상태라는 의미의 정상(定常)이고 그것이 옳다거나 바르다거나 제대로 된 상태라는 의미의 정상 (正常)은 아니다.

    민주주의는 군주제나 전체주의 처럼 하나로 합침을 전제로 한 사상이 아니고,
    여러개로 나눠짐을 전제로 한 사상이다.

    민주주의는 「합(合)」의 정치사상 정치제도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분(分)」정치사상 정치제도다.
    사회든 개인이든 여러개로 나눠지면 싸우는 것이다. 나눠진 만큼 가치가 다르고 의견이 다르고 요구가 다르다. 다른 것만큼 자기 것을 더 많이 관철하기 위해 싸움은 불가피하다.
    그래서 민주주의는 생래적(生來的)으로 갈등구조다.

    민주주의는 만들어질 때부터 싸움하는 사회, 싸움이 구조화된 사회다. 이유는 민주주의(자유민주주의)가 산업화의 정치 사상이며 정치제도이기 때문이다. 산업사회는 제조업을 기본으로 하는 철저한 경쟁구조다. 더 좋은 상품을 만들어 더 많은 이익을 획득하기 위해 다른 지역, 다른 집단, 다른기업과 끊임없이 경쟁을 한다. 말이 경쟁(競爭)이지 경쟁이란「싸움」하는 것이다. 그 싸움에는 오직 룰(rule)이 있다는 것뿐이고, 그 바탕에는 글자 그대로 다툴 경(競) 다툴 쟁 (爭)의 싸움이 기본이다.

    우리가 「통합」을 말할 때 우리가 사는 이 민주주의 사회가 그 태생부터 「싸움하는 사회」- 갈등구조 라는 것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그래서 갈등이 병리현상이 아니라 정상 현상이라고 인식될때 비로소 갈등관리가 된다. 갈등 관리는 일어나는 갈등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갈등의 열도를 식히는 것이다.
    격화된 갈등을 완화시키는 것이고, 그 높아진 갈등의 수준을 낮추는 것이다.

    갈등을 없애자는 것은 민주주의 사회를 부정하는 것이고,
    공산주의 전체주의 사회를 만들자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통합을 말 할때 으레 통일을 생각한다.
    통합은 통일(統一)과 완전히 다른 개념이다.

    통일은 두 개 혹은 세 개, 네개로 갈라진 것을 하나로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두 개 혹은 세 개 네 개 가 가졌던 각개의 정체성(正體性)도 모두 없어지고 오직 하나의 정체성만 남는 것이다. 이른바 영어로 유니피케이션(unification).

    반대로 통합은 여러개가 되는 것이다.
    몇 개로 나눠지든 나눠진 상태 그대로 존속해서 각개의 고유성 정체성을 더 강화하고 더 발휘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나눠진 여러개가 치열하게 경쟁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서로 의존하고 서로 적응하고 서로 협동해서 결과적으로 「응집된 전체(cohesive whole)」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이 오직 하나로 합쳐지는 유니피케이션과 정 반대되는 여러개 나눠진 상태에서 응집하는 인테그레이션(integration)「통합」인 것이다.

    통일이 후진국 현상이라면 통합은 선진국 현상이다.


    통일이 전근대 사회의 염원이라면, 통합은 현대사회의 비전이다.
    「하나 가되자」「우리민족끼리」가 통일 주창자의 구호라면
    「여러개가 되자」「세계화 하자」가 통합지향자의 사고며 행태다.

    통합은 단일화 획일화이고, 통합은 다원화 다양화이다.


    지금 우리는 우리사회 통합의 키워드로 인사 탕평책을 내세운다. 지역 이념세대 성별을 아우르는 인사기용을 주창한다. 이런 탕평책은 1700년대의 영조시대에도 주창됐고 정조 시대에도 주창됐다. 1948년 대한민국이 건국된 이래 내내 똑같이 절규 되었다. 얼마나 기나긴 역사의 탕평책이었는가. 그럼에도 한번이라도 성공해 본 일이 있는가. 마치 절벽 앞에 서 있듯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지 않았는가.

    왜 그러한가, 탕평책은 본질적으로 실패를 안고 있는 정책이기 때문이다.


    어떤 유능한 지도자도 절대로 성공시킬수 없는 인사 정책이다. 그것은 소외되고 패배한 사람들의 마음을 일시적으로 달래 줄 수는 있다. 탱천한 분노와 사무친 원한을 극히 잠정적으로 회유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 약효는 길지 않다. 너무나 한계가 분명한 포퓰리즘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영‧ 정조시대나 쓰던 전근대적 포퓰리즘이다. 현대사회의 인사 등용책과는 완전히 동떨어져 있는 것이다.

    탕평책은 통일지향과 지위지향 사회의 유물이다.

    둘다 현대사회의 지향(志向)과는 정 반대다.

    통일 지향은 앞서 말한대로 「모두 하나가 되자. 한마음으로 뭉치자. 각자의 정체성을 뭉개고 하나의 정체성을 수립하자」의 지향이다. 이 때 부득이 해서 내 놓는 정책이 탕평책이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그 시대에 살고 있지 않다. 세상이 천만번 바뀌어도 결코 그런 시대로 환원될수 없는, 강 저편 언덕에로 사회지향과 구조를 가진 다양성의 시대며 다원주의 시대에 살고 있다.

    지위지향은 역할지향과 반대되는 지위점유의 사회지향이다.


    어느 사회든 사람들은 사회적 삶에서 지위(자리)냐 역할(일)이냐, 두 개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게 되어있다.
    지위지향은 누가 어느 지위에 앉느냐의 자리를 중시하는 마음가짐(의식지향)이고,
    역할지향은 지위보다 그 지위에서 요구되는 역할(일)을 누가 잘 해낼 수 있느냐를 중시하는 마음가짐(의식지향)이다. 역할지향은 높은자리 낮은 자리 좋은 자리 나쁜 자리가 아니라 그 자리에서 그 사람이 얼마만큼 유능하게 일을 해낼수 있느냐이다.

    탕평책은 정부 주요자리에 지역 이념 세대(性)에 따라 사람을 골고루 안배하는 인사정책이다.
    그것은 지위지향이다.

    우리는 아직도 그런 전근대적이며 후진적인 의식구조를 가지고 있고, 그것을 대통령에게 요구 하고 있다.
    그래서 틈만 나면 「기득권 내려놓아라」라고 소리를 높인다. 기득권은 그 사람이 이미(旣) 차지하고 있는(得) 자리(權)다. 그 자리에서 그가 얼마나 역할을 잘 했느냐를 따지기 전에 오래 앉았으니 내 놓으라는 것이다.
    그래서 아무리 대학을 잘 개혁한 총장도 4년이 넘으면 이제 다른 사람으로 자리 바꾸자한다. 대학 교수들까지도 그런 지위지향 의식이 골수에 박혀있다.

    이런 사회 의식구조에 대통령이 편승하는 한, 우리 정부 인사는 언제나 실패한다.

    우리가 어떻게 산업화에 성공할 수 있었는가.
    박정희 시대에 탕평책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위지향이 아니라 역할지향을 하고, 통일지향이 아니라 통합지향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산업화의 영웅 박태준 남덕우 김정렴 오원철 같은 인물이 나왔다. 물론 그 외에도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전두환 시대는 김재익이 있었다.
    민주화 이후 상징하는 인물은 고사하고 기억하는 인물이 있느냐. 미상불 이명박 정부는 박재완 장관을 기억 할 것이다.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정권은 탕평책을 쓰지도 못하고 탕평책 의식에만 갇혀 있다가 철저히 실패한 인사 기용이 됐다.

    삼성이 어째서 삼성이냐, 탕평책을 쓰지 않아서 삼성이다.


    맹자(孟子)에 입현무방(立賢無方)이라는 말이 있다.
    출신성분을 따지지 말고 얼마나 역할을 잘 해낼 수 있느냐, 그 역할수행 능력을 따져 사람을 쓰라는 말이다.
    2천년이상 그 글을 읽고도, 우리도 중국도 그대로 못해서 얼마나 많은 고통 속에서 백성들이 살아야 했느냐, 사회통합은 오로지 이 역할 지향의 현대적 인사 등용책을 쓸 때만 가능하다.

    <대한언론www.kjclub.or.kr  2013.1.1.특별기고 전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