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전-선동? 팩트로 막는다!
  • 유해사이트 or 유익사이트 or 우익사이트

    "우파는 온라인에서 약하다" 고정관념 극복


    이원우 미래한국 기자


  • ▲ 일베 회원이 만들어 올린 패러디ⓒ
    ▲ 일베 회원이 만들어 올린 패러디ⓒ

    2012년 11월 28일. 이 날은 18대 대선후보들의 TV광고가 처음으로 공개된 날이었다. ‘연설’이라는 제목이 붙은 문재인 후보 측의 광고는 서울 종로구 구기동의 자택 내부를 비췄다. 영상 속에서 문 후보는 의자에 앉아 졸거나 업무를 하는 모습을 연출하며 친근감을 자아냈다.

    그런데 광고가 공개되고 불과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사태가 완전히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문 후보가 앉아 있던 의자가 인터넷으로 구매해도 760만 원 정도에 거래되는 명품으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이는 문 후보의 서민적 이미지와 정면으로 배치되며 언밸런스한 느낌을 자아냈다. 그 날 포털사이트 검색창은 온통 ‘문재인 의자’로 도배됐고 문 후보 측은 해당 광고를 더 이상 내보내지 않는 것으로 방침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몇 초 되지도 않는 광고 속 의자의 ‘정체’를 밝혀낸 것은 누구였을까. 모든 것은 ‘일베(일간베스트 저장소)’라고 하는 사이트의 정치게시판에서 시작됐다. 일베는 그 의자가 ‘임스 라운지 체어’라는 브랜드의 제품이라는 사실은 물론이고 문 후보의 안경테와 패딩점퍼 가격까지 전부 조사해 게시판에 늘어놓았던 것이다.


    유머사이트에 ‘선전포고’한 민주통합당


    민주통합당은 이 문제에 대해 “새누리당의 네거티브가 심각한 수준”이라고 비판성명을 내놓았다. 그러나 일베는 여기에 대해서도 팩트로 맞섰다.

    2012년 초 불거졌던 ‘이명박 손녀 명품 패딩’ 해프닝에 대해 민주통합당이 “이명박 대통령 손녀의 명품패딩 논란은 서민들의 마음에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됐다”고 거론했던 사실을 끄집어낸 것이다.

    사실 민주통합당과 일베의 ‘악연’은 그 이전부터 이미 시작돼 있었다. 11월 25일 진성준 민주통합당 대변인은 논평을 통해 ‘일베’라는 이름을 직접 거론하며 “일베저장소가 박근혜 후보를 지지하기 위한 여론조작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 진상조사를 할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제1야당의 대변인이 ‘선전포고’를 한 것에 대해 일베의 분위기는 오히려 ‘응전’으로 달아올랐다. 문재인 후보의 신생아실 촬영 논란, 의자 논란, 안경테와 패딩점퍼 논란은 이와 같은 분위기 속에서 점화된 것이다. 이 밖에도 최근 진보계열 인사들의 표리부동을 가장 많이, 가장 깊게, 가장 지속적으로 까발린 것은 언제나 일베였다.

    일베는 정말로 누군가의 사주를 받아 움직이는 여론조작의 메카일까. 그렇다고 하기엔 일베에는 나름대로의 ‘자생적 역사’가 있다. 일베의 모(母) 사이트로 꼽히는 곳은 대표적 인터넷 커뮤니티인 디씨인사이드(디씨)다. 디씨는 익명의 네티즌들로부터 가장 많은 지지를 끌어낸 게시물을 ‘일간베스트’로 지정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자료들이 지나치게 선정적이거나 유해한 것으로 판단되는 경우가 많았다는 점이다. 그래서 ‘일간베스트’ 게시물은 관리자에 의해 삭제되는 사례가 많았다.

    일베는 이와 같이 삭제된 게시물들을 보관하기 위해 이름 그대로 ‘저장소’의 개념으로 만들어졌다. 당연히 선정적인 자료들이 집중배치돼 있을 수밖에 없었다. 즉, 일베는 태생부터 ‘19금’이었던 셈이다.

    이와 같은 19금 문화의 명맥은 현재까지 일베에서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일베에서 여전히 자행되고 있는 여성비하, 지역주의, 고인비하, ‘신상 털기’ 등의 행태는 가히 목불인견 수준이다.

    일베에서 활동하는 네티즌을 ‘일베충(蟲)’이라고 비하하는 사람들이 많은 이유, 일베에서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오프라인에서는 그 사실을 숨기는 경우가 많았던 것도 그래서다.

    그런데 이 ‘숨김’의 메커니즘이 새로운 전개를 태생시켰다. 하수구처럼 온갖 자료와 여론들이 이합집산되다 보니 그 안에서는 루저(loser) 정서가 생겨날 수밖에 없었다.

    이 사실은 우파 여론이 인터넷에서 명백한 열세(劣勢)라는 사실과 맞물리며 일베를 우파 여론의 장으로 바꿔놓기 시작했다. 일베의 여러 게시판 중에서도 정치 게시판은 우파 진영에서 이미 나름의 지분을 확보한 상태다.


    ‘팩트’를 대령하라


    일베 정치게시판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여론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가는 사람이 따로 없다는 점이다. ‘새부’라는 이름의 운영자를 제외한 어떤 사용자도 그저 평등한 이용자일 뿐이다. 누군가 조작을 하고 있다는 민통당의 심증에 일베가 오히려 자신감으로 화답한 것도 그래서였다.

    일베 정치게시판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 뿐이다. 팩트(fact)를 들고 오는 것이다. 명백하게 검증 가능한 팩트를 들고 오면 일베인들은 추천을 눌러 해당 게시물을 ‘일베로’ 보낸다(대신 성향에 맞지 않는 게시물을 올리면 게시물은 ‘민주화’된다).

    4월 총선과 12월 대선이 맞물리며 ‘정치의 해’가 돼버린 2012년, 일베 정치게시판의 메커니즘은 빛을 발했다. 막대한 숫자의 팩트 체킹이 이뤄짐으로써 주류 언론사와 정치인들까지 주목하는 게시판으로 거듭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일베의 정치 게시판만큼은 상당 부분 자기 정화를 완료한 상태다.

    지난 10월 하순에 있었던 ‘일베 학력인증 대란’은 더 이상 루저 사이트로만 남아 있지 않겠다는 일베의 일대 선언이었다. 루저들만 모여 있어 주목할 가치가 없다는 세간의 평가에 대해 천 명 가까운 일베인들이 화려한 학력과 경력을 인증사진으로 쏟아내기 시작한 것이다.

    이 시도를 조작으로 폄하하려는 시선도 있었지만, 일베인 중 한 명인 네티즌 ‘간결(미국 펜실베니아대 석사과정)’이 얼굴을 드러내고 진중권과의 NLL 토론에 임하면서 일베의 ‘커밍아웃’은 더욱 가속화됐다. 비록 간결은 진중권과의 토론에 참패하면서 얼굴을 붉혔지만, 그의 토론이 변희재-진중권의 ‘사망유희 토론’으로 연결되며 유의미한 성과를 거뒀다는 것이 중론이다.

    아직도 일베인들은 루저 정서를 공유하고 있다. 이것은 마치 진보진영의 ‘나꼼수’와도 비슷하다. 그러나 나꼼수가 ‘돌격 앞으로!’ 형의 리더십을 앞세워 인해전술을 선보이는 중국 스타일이라면, 일베는 이스라엘의 소규모 공동체 키부츠를 연상시키는 형태로 막대한 생산성을 자랑한다. 뚜렷한 리더는 없지만 각자 영리하고 효율적으로 활동하는 공동체를 지향하는 것이다.

    대선이 끝난 뒤부터 일베는 다시금 시험대에 오를 것으로 보인다. 커다란 정치적 이벤트가 없는 기간에도 일베는 진보진영의 선동을 막는 팩트 체킹의 보루로 남을 것인가?

    메칼프의 법칙에 의하면 한 네트워크의 효용성은 사용자 수의 제곱에 비례한다. 이미 많은 숫자의 우파 지식인들이 일베를 주목하게 된 지금, 일베는 유해사이트로 추락할 것인가, 유익사이트로 거듭날 것인가, 우익사이트로 지속적인 역할을 수행할 것인가?

    이 기사의 출처는 <미래한국>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