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北대남혁명의 전략방침: 地下黨 구축을 중심으로

    다양한 남한 내 조직에 침투, 그 내부에서 군중을 쟁취(爭取)·조직화

    정리/金泌材 

      
     


  • 북한은 남한 혁명을 성공시키기 위해 간첩, 지하공작원 또는 연락원, 護送員(호송원) 등을 남파시켜왔다. 1973년 중앙정보부가 발간한《북한대남공작사(제2권)》에는 북한의 대남(對南)혁명 ‘전략방침’ 및 ‘교육내용’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長期打算(장기타산): 혁명의 특수성 때문에 남한혁명은 장기성을 띠게 되며 艱苦(간고)하기 때문에 많은 난관과 隘路(애로)를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절대 조급해서는 안 되며 忍耐性(인내성)있게 꾸준히 실력을 배양해야 한다.

    ▲精幹隱蔽(정간은폐): 혁명을 성과적(成果的)으로 달성하기 위해서는 이를 조직지도하며 군중(群衆)을 결집시킬 수 있는 우수한 간부를 양성·확보해야 한다. 이 간부들은 노출되지 않게 隱蔽(은폐)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면 精幹(정간: 정예간부)은 어떤 사람이 적격인가?

    ① 성분이 좋은 자(者)
    ② 정치생활 및 경력이 순결한 者
    ③ 용공(容共的)이며 양심적이고 북한을 지지하며 생명까지라도 바꿀 사상적 준비를 갖출 수 있는 者
    ④ 정치조직적 능력과 합법적 직업을 가지고 생활할 수 있는 者
    ⑤ 비밀경찰과의 투쟁을 태연하게 진행할 수 있는 策略(책략)과 機智(기지)가 있는 者.

    이상의 여건을 갖춘 대상을 爭取(쟁취)해 어떠한 환경과 조건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당(黨)의 전략적 방침을 고수하도록 해야 한다.

    ▲長期埋伏(장기매복): 어떠한 풍파가 있어도 노출시키지 않고 자기의 신념을 고수하고 부단히 자기 역량을 축적보존해 박혀 있어야 한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전략적 배합이지 전술적 배합이 아니다. 때문에 시기가 올 때까지 장기매복을 위해서는 精幹隱蔽(정간은폐)하여 역량을 축적해야 한다.

    ▲力量蓄積(역량축적) 보존: 전략적 시기까지 꾸준히 忍耐性(인내성)있게 群衆(군중)을 爭取(쟁취)하여 역량을 확대·공고화시킴을 뜻한다. 즉 유형무형(有形無形)의 조직을 통해 군중적 地盤(지반)을 닦고 결집시켜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래와 같은 일을 해야 한다. 

    -多種多樣(다종다양)한 旣存(기존)조직에 침투해 그 내부에서 군중(群衆)을 쟁취(爭取)·조직화(組織化) 해야 한다.
    -합법적으로 공개적으로 활동 할 수 있는 각종 군중(群衆)조직을 모두 이용해 군중(群衆)을 쟁취(爭取)· 결속(結束) 시켜야 한다.
    -부단히 인간적 관계를 심화 발전시켜서 점차 정치적 관계로 이끌어 爭取 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군중투쟁(群衆鬪爭) 조직을 배제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승산이 있고 역량이 노출되지 않고 손실을 초래하지 않는 투쟁을 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꾸준히 실력을 양성해 조직을 노출시키기 않고 공개적이며 합법적 활동 토대를 구축하여 전략적 시기를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時機待機(시기대기): 혁명수행 또는 조국통일의 시기를 전략적 시기라고 말한다. 조국통일의 시기는 두 가지 측면으로 볼 수 있다. 평화적 조국통일의 시기와 혁명 또는 전쟁에 의한 조국통일의 시기가 그것이다. 만약 평화적 통일을 전제로 한다면 그것은 남북 總選擧(총선거)가 실시 될 때, 그리고 남북교류로 경제 문화 교류가 실시되며 각 정당·사회단체들의 민주주의적 자유가 보장되며 통일노선이 공고화 될 때라고 했다. 혁명 또는 전쟁에 의한 남북통일의 시기는 남한 내에서의 蜂起(봉기) 또는 국제정세를 이용한 남북전쟁 등을 의미한다. 

    ▲전략적 배합: 남한혁명의 주체는 남한이며 이것은 남한의 救國反帝(구국반제)역량과 북한의 民主基地(민주기지) 역량이 배합됨으로써 승리할 수 있다. 왜냐하면 남한에는 미군이 주둔하고 있으며 강력한 군사정권이 수립 되어 있기 때문에 남한 자체의 역량만으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혁명은 북한의 강력한 혁명적 민주기지 지원을 받음으로서만 승리할 수 있다. 그러므로 국제국내정세의 발전과 혁명역량관계와 역사적 현실의 구체적 조건을 과학적으로 정확히 분석한 토대위에서 전략을 수립, 혁명을 승리로 영도하는 黨이 있으며, 黨의 주위에는 철석같이 연결된 사회주의적 애국역량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전술적 방침은 대남(對南)공작에서 철저히 실천되어야 할 전략적 방침이며 이는 하나의 확고부동한 원칙으로 모든 지하당(地下黨) 사업이 여기에 복종해야 한다.

    과거 박헌영, 이승엽 등은 이 같은 전략적 방침을 반대 또는 부정 집행했기 때문에 남한에서의 노동운동과 혁명역량을 파괴시켰다. 그들은 남한혁명을 조급하게 생각했으며, 精幹(정간)을 隱蔽(은폐) 시키지 않고 소위 5倍加(배가), 10배가, 운동이라 하여 異色分子(이색분자), 不純分子(불순분자) 등을 의식적으로 흡수해 黨의 조직원칙을 난폭하게 위반했고, 당(黨)조직에서 複線組織(복선조직)을 하지 않고 지하당(地下黨) 간부들을 노출시켰으며 기구를 膨大(팽대)시키는 등으로 地下黨 핵심을 파괴시켰다.

    또한 당원들을 혁명의식과 혁명에 대한 충실성으로 교양하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변절자가 생겼다.

    군중(群衆)투쟁 조직에서도 승산없이 冒險主義(모험주의)적으로 내몰았기 때문에 많은 희생과 손실을 입었다. 그리고 黨에는 허위보고하고 시기가 성숙되지 않은 불리한 때에 투쟁을 조직·동원하여 群衆들과의 관계를 완전히 파괴했다.

    萬苦(만고) 이와 같이 하지 않고 혁명의 전략적 방침을 정확히 遵守(준수)했더라면 대남(對南)혁명은 벌써 승리했을 것이다. 이와 같은 경험과 교훈을 똑똑히 인식하고, 전략적 방침을 철저히 실천하는 것이 對南혁명에 있어서 혁명가들의 최대의무이며 과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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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괴(北傀)의 지령을 받는 종북(從北) 지하당(地下黨) 계보 

    김일성의 1961년 교시: 지하당(地下黨) 조직 강화지령

    조갑제닷컴 

  • 김일성은 전쟁수행을 위해 전투사령부가 필요한 것과 마찬가지로 남한 혁명을 위해서는 혁명을 주도하는 ‘혁명의 정치적 참모부’ 즉 ‘마르크스-레닌주의 黨’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혁명역량을 준비하기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혁명의 참모부인 ‘마르크스-레닌주의 黨’을 만들고 그 주위에 사회의 基本群衆(기본군중)인 노동자와 농민을 결속시켜 강력한 혁명의 주력군을 편성하는 것이 절실하다고 본 것이다.

    김일성은 레닌의《黨건설론》과 《소수 정예의 직업혁명가론》에 따라 6.25의 실패와 4.19를 결정적 시기로 연결시키지 못한 요인이 혁명을 지도할 地下黨(지하당) 부재에 있는 것으로 못 박고 간첩침투를 통해 지하당 구축공작을 집요하게 추진했다.

    실제로 김일성은 1961년 9월 제4차 노동자대회를 통해 4.19를 공산화혁명으로 유도하지 못한 근본요인이 남한 내에 ‘혁명적 黨’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결론짓고 ‘지하당 조직’ 강화지령을 하달했다.


    1960년대: 지하당 인혁당-통혁당 사건


    6·25전쟁 이후 남로당은 와해됐지만 그 잔존 세력은 인혁당-통혁당-남민전 등 북한 노동당의 지도성을 인정하는 ‘지하당’ 건설 사업을 꾸준히 전개해왔다.

    이들은 공안당국의 적발로 그때그때 조직이 와해됐고, 핵심 지도부는 사형과 장기 受刑(수형)으로 운동의 단절을 격지만 이념적, 역사적 맥은 지금껏 이어져 오고 있다. 패퇴한 남로당 세력의 첫 번째 공식적 재건은 1964년 검거된 인민혁명당(이하 인혁당)이다.

    인혁당은 남파간첩 김영춘에 포섭된 도예종·이재문 등이 조선노동당 강령을 토대로 작성한 정강에 기초해 1962년 1월 결성된 조직이다. 인혁당은 북한의 지령에 따라 간첩활동을 하다 1964년 중앙정보부에 의해 검거됐다. 도예종·이재문은 이 사건으로 각각 징역 4년과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도예종은 1973년 인혁당 재건을 꾀하다 결국 사형 당했고, 이재문은 1979년 남민전 사건으로 사형이 확정된 후 1981년 10월 서대문 구치소에서 病死(병사)했다.

    통일혁명당(이하 통혁당) 사건 역시 中央黨(중앙당)인 조선노동당 지시를 받는 지하당이었다. 통혁당은 1961년 12월 전남 무안 荏子島(임자도) 주민 최영도가 南派(남파)공작원 김수영에 포섭되며 시작됐다. 최영도는 평양을 오가며 조선노동당에 입당했고 이후 김종태를 포섭했다. 김종태도 평양을 오가며 조선로동당에 입당했고 이후 김질락·이문규 등과 통혁당을 조직한다.

    이 사건은 한명숙 민주통합당 前 대표와 韓 대표의 남편인 박성준이 연루됐다. 통혁당 조직원들은 美貨(미화) 7만 달러, 韓貨(한화) 3천만 원, 日貨(일화) 50만 엔의 공작금을 받으며 간첩활동을 하다 1968년 8월 중앙정보부에 검거됐다. A4 1000여 쪽에 달하는 판결문은 통혁당을 “남로당을 부활시킨 조직체”로서 “북한의 무력남침에 대비한 사전 공작 조직”이라고 정의했다.

    통혁당 사건의 주범인 김종태, 김질락은 사형됐다. 신영복, 박성준은 각각 무기징역,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20년과 12년을 복역했다. 韓대표 역시 징역 1년, 집행유예1년, 자격정지1년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1970년대: 지하당 남민전 사건


    통혁당의 이념적 흐름은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이하 남민전)으로 이어진다. 1979년 10월 검거된 남민전은 1964년 인혁당 연루자 이재문 등이 감옥에 나와서 결성한 또 다른 地下(지하) 공산혁명조직이다. 남민전은 인혁당 재건위 사형수 8명의 옷을 모아 北韓旗(북한기)를 모방한 남민전 깃발을 제작했다.

    남민전은 민중봉기로 공산혁명을 한다는 목표 아래 김일성에게 “피로써 충성을 맹세”하는 서신을 보냈고, 결정적 시기에 북한군 지원을 요청할 계획을 세웠다. 彗星隊(혜성대)라는 행동대를 조직, 기업인 자택·금은방에 침입해 금품을 강탈한 소위 ‘땅벌작전’도 벌였다.

    남민전 주범인 이재문·신향식은 사형선고를 받았고, 안재구(前 숙명여대 교수), 김승균(前 <사상계> 편집장), 임헌영(現 민족문제연구소장), 이학영(민주통합당 4·11총선 당선자) 등의 인물들이 구속됐다. 이학영은 남민전 사건에 연루돼 5년간 복역한 뒤 2011년 10·26 서울시장 보궐선거 당시 박원순 선거대책위원회에서 활동했다.

    남민전은 한국을 미국의 소위 “新식민지 사회”로 보았고 소위 미국의 “토착지배 체제”인 박정희 정권을 타도대상으로 삼았다. 이 같은 인식은 1980년대 NL주사파로 구체화된다.


    1980년대: 從北세력의 공개적 활동 시기


    1980년대는 국내 左派운동사에서 양적-질적으로 일대 전환을 가져온 시기이다. 1979년 10󈸪 사건 이후 1980년 초 소위 ‘서울의 봄’과 ‘광주사태’를 겪으면서 1980년대 중반 이후 左派(좌파)운동은 과거와는 달리 급속히 전국 규모화 되었고, 그 세력이 양적으로 확대됐다.

    질적으로는 사회주의 운동 성향이 단순한 민주화 투쟁에서 공개적으로 從北-계급투쟁성을 표방하며 사회주의 指向(지향) 투쟁으로 변화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남한판 사회주의혁명론 정립을 위한 치열한 사상투쟁이 전개됐으며, 1980년 중반 이후 從北세력이 운동권의 주류로 등장했다.

    NL주사파 계열은 전국반외세반독재 애국학생투쟁연합(애학투련), 서울지역대학생대표자협의회(서대협)을 거쳐, 1987년 8월 국내 대부분의 대학과 전문대학이 포함된 최대의 학생운동권 단체인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을 결성했다.

    ‘전대협’은 북한의 對南혁명노선을 수용해 한국사회변혁 운동론을 ‘자주·민주·통일’(일명 자민통) 운동노선으로 정립하고 親北(친북)편향의 각종 투쟁을 전개하며 1980년 후반 從北운동을 주도했다. 이 시기 운동권에서 활동하다 국보법 등 실정법 위반으로 사법처리 된 상당수의 인사들은 명확한 전향과정도 거치지 않고 사면-복권되어 이후 정치권으로 진입했다.


    1990년대: 지하당 중부지역당·구국전위·민혁당 사건


    남로당을 잇는 지하 공산혁명조직의 흐름은 1980년대 NL주사파가 加勢(가세)하면서 1992년 남한 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이하 중부지역당) 사건으로 재건된다.

    중부지역당 사건은 북한이 조선노동당 서열 22위 간첩 이선실을 남파, 1995년 공산화 통일을 이루는 전략 하에 남한에 조선노동당 하부조직인 중부지역당을 건설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중부지역당 총책 황인오와 김낙중, 이철우, 윤민석 등의 인물들이 구속됐다. 이들 가운데 이철우는 1993년 7월 징역 4년을 선고받아 복역했고, 1999년 2월 특별 복권되어 17대 국회에 입성했으나, 선거법 위반으로 의원직을 상실했다.

    그는 민주통합당 소속으로 4·11 총선에 출마했다가 낙선했다. 이철우는 2004년 12월, 1992년 당시의 중부지역당 행적이 언론에 보도돼 물의를 빚었던 인물이다. 그의 1심 판결문에 따르면 “피고인(이철우)은 북한 조선노동당旗(기)를 스카치테이프로 벽에 걸고, 그 밑에 김일성·김정일 초상화를 각각 전시한 다음 당기와 초상화를 바라보고 입당식을 거행했다”고 나온다. 
     
     

  • 구국전위는 주모자들이 북한에서 공작금 2억 900만 원을 받고 구축한 지하당으로 1994년 6월14일 공안당국에 의해 검거됐다. 구국전위의 창립선언문에는 ‘영생불멸의 주체사상으로 향도되고 있는 조국의 남반부 우리의 민족민주혁명’, ‘우리는 조국의 남녘땅에서 주체혁명 위업을 실현해 나가기 위하여 일심일체로 뭉친 김일성-김정일주의 정수분자들’ 등 김일성·김정일에 대한 충성심이 그대로 표현돼 있다.

    공안당국은 1999년 9월9일 민족민주혁명당(이하 민혁당) 간첩단 사건을 발표했다. 국정원은 당시 민혁당 뿌리를 1989년 NL주사파 계열의 운동권인 김영환(서울대 82학번), 하영옥(서울대 82학번), 이석기(한국외대 82학번) 등이 만든 ‘반제청년동맹’이라고 발표했다. 김영환은 1991년 강화도에서 북한 잠수함을 타고 황해도 해주에 도착한 뒤, 묘향산에서 김일성을 만났다.

    김영환은 1992년 3월 지하조직 민혁당을 결성했다. 민혁당의 지도이념은 김일성 주체사상이며 김영환과 하영옥을 중앙위원으로 하고 산하에 지역별 위원회를 두었다. 이후 민혁당의 리더였던 김영환은 김일성 사망 이후 북한 체제에 회의를 느껴 1997년 7월 민혁당을 해체하고 전향했다. 이에 불복한 세력은 하영옥을 중심으로 민혁당 재건을 시도했다.

    국기정보원은 1998년 여수에서 격침된 북한 반잠수정에서 하영옥과 북한 고정간첩이 연관된 증거를 잡고 수사해 관련자들을 검거했다. 기소를 맡은 검찰은 “김영환 씨 등은 과거의 잘못을 깊이 뉘우치고 사상을 전향한 데다 수사에 적극 협조하고 있다”면서 공소 보류하고 석방했다. 그러나 하영옥, 심재춘 등에는 “사상 전향을 거부하고 있다”며 기소했다.


    2000년대: 지하당 일심회 간첩단 사건


    일심회는 2006년 10월 국가정보원이 적발한 간첩조직이다. 당시 북한의 지령을 받은 장민호가 조직의 총책이었으며, 최기영(現 통합진보당 정책실장) 민주노동당(이하 민노당) 前 사무부총장과 이정훈 前 민노당 중앙위원 등이 이 사건에 연루됐었다.

    2007년 12월13일 대법원은 일심회 간첩단 사건의 주동자인 장민호에게 징역 7년에 추징금 1900만원, 자격정지 7년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으며, 함께 기소된 이정훈와 손정목(민노당 창당인사)에게 각각 징역 3년과 4년을, 이진강(일심회 조직원)에게 징역 3년을, 최기영 前 민노당 사무부총장에게는 징역 3년6월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재판부는 “북한이 국가보안법상 反국가단체에 해당한다고 한 원심의 조치는 정당하고 국가의 안전과 국민의 생존 및 자유 확보를 목적으로 하는 국가보안법을 위헌으로 볼 수 없다”며 “이를 전제로 피고인들에 유죄를 선고한 원심은 정당하다”고 판시했다.


    2010년대: 지하당 왕재산 간첩단 사건


    2011년 적발된 왕재산 간첩단은 민혁당을 지도했던 북한의 對南공작 조직인 ‘대외연락부’(現 225국)가 1993년 “남조선 혁명을 위한 지역 지도부를 구성하라”는 김일성의 지시를 받고, 남한에 조직한 지하당이다.

    왕재산은 북한에서 ‘軍 관계자를 포섭하고 주요 시설 폭파 준비를 하라’는 지령을 받았으며, 미군의 野戰(야전)교범과 군부대·防産(방산)업체의 위치 정보 등이 담긴 위성사진 등 군사정보도 북괴에 넘긴 것으로 조사됐다. 왕재산은 2014년에 인천을 거점으로 하여 인천 남동공업단지 등을 폭파시키는 것을 시작으로 유사시에 인천광역시의 행정기관, 軍 부대, 방송국 등을 장악한 이후 수도권에 대한 시위 형태의 공격작전 및 궐기대회를 실시할 예정이었다.

    6·25 전쟁 이후 남로당은 사라졌지만 인혁당-통혁당-남민전-중부지역당-구국전위-민혁당-일심회-왕재산 등의 ‘지하당’으로 그 이념적 흐름은 이어져왔다. 이들 지하당 잔존 세력들은 주사파 그룹과 함께 거대한 從北(종북)세력을 구축해 대한민국의 권력 탈취를 꾀하고 있다. <2012/08/03>

    정리/김필재 spooner1@hanmail.net
    [조갑제닷컴=뉴데일리 특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