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5사변, 악마의 숨결과 천사의 손길  
      
    김일성이 서울에 3일 미적거린 이유는?
    김일성이 모택동의 인천항과 군산항 요새화를 거부한 이유는?
    스탈린이 휴전을 계속 미룬 이유는?
    미국이 스탈린이 차지한 만주를 모택동에게 선물한 이유는?
    중국 측 자료에서 비밀이 드러난다. 


    최성재    
      
    원제: 6.25사변, 어제는 지옥 오늘은 천당 내일은 연옥(재록)
     
     
    [힘없는 민족의 갈대 운명]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할 힘이 없었던 한민족은 식민지의 2등 족속으로서 쌀을 바치라면 쌀을 바쳤고 쇠를 바치라면 쇠를 바쳤고 사람을 바치라면 사람을 바쳤다. 노래를 부르라면 일본 천황에게 목숨을 바치러 가는 조선의 아들을 위해서 장행가(壯行歌)를 불렀고, 시를 지으라면 일본 군대에게 몸을 바치러 가는 조선의 딸을 위해서 위안부(慰安賦)를 지었다. 고작 식민지 20년 만에 독립운동은 더 이상 마음속 울화통 전선에서 이뤄지는 일이었지, 청산리나 봉오동, 압록강이나 두만강에서 벌어지는 실제 무장투쟁이 아니었다.
    만주의 100만 관동군과 조선의 5만 일본 군대에 맞서 싸울 군대는 식민지 30년 만에 근근이 양성한 광복군 5천이었다. 그나마 장개석의 힘과 동정에 절대적으로 의지했고 수만 리 중국의 오지에 있어서 바위에 부딪치는 계란의 역할도 못했다. 일제 말에 이르면, 조선이나 만주에서 일본의 헌병 1명, 경찰 1명 죽이는 것도 청사에 길이 빛날 일이었다. 한민족은 그토록 나약했다. 일본의 230만(중국에만 120만) 중무장 대군을 물리칠 수 있는 강대국의 은총이 아니고는 한민족의 운명은 어둠의 골짜기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언감생심 한 발짝도 벗어날 수 없었다. 
     
       해방 후에도 무궁화 강산은 강대국의 손에서 벗어날 길이 없었다.
    처음에는 일본군을 홀로 물리친 미국과, 히로시마에 '리틀 보이'(원자탄)가 터지고야 부랴부랴 참전해 어부지리를 취한 소련의 입김이 절대적이었고, 나중에는 일본군이 쫓겨난 중원에서 통일의 꽃사슴을 잡은 중공의 손이 한반도를 향해 미소 양국에 못지않은 유형무형의 북서풍을 일으켰다.
    샘 아저씨는 압도적인 힘을 가졌지만 한반도에 대한 무관심과 턱없는 정보 부족 탓으로, 19세기 이래 150여 년간 오매불망 동아시아에 부동항(不凍港)을 확보하려던 슬라브족과, 영원한 아시아의 맹주를 자처하는 되놈에게 번번이 의표가 찔렸다. 다행히 미국은 실수를 금방 알아차리고 이내 실수를 만회했다. 미국의 실수 만회와 ‘잘 살아 보세’ 한국의 용수철 도약으로 휴전선 이남은 지상낙원이 되었지만, 중소(中蘇)의 신제국주의와 ‘때려잡자’ 북한의 자유낙하로 휴전선 이북은 생지옥이 되었다. 
      
      [스스로의 힘을 과소평가하는 황소 한국]
      
      경제는 한국이 대(對)중국과 대(對)홍콩 합해서 연간 500억 달러의 흑자를 보고, 군사는 국군이 미군과 연합하여 중국의 해방군과 북한의 인민군과 러시아의 극동군에 조금도 밀리지 않는다. 안타깝게도 한국은 스스로의 성취에 자긍심이 없고 미국의 안보 울타리에 감사할 줄 모른다. 기아와 공포의 생지옥 북한, 공산당과 공안(경찰)의 나라 중국, 올리가르히(권력형 독과점 재벌)와 비밀경찰의 나라 러시아에 스스로 코뚜레를 꿰고 리모컨 고삐를 넘겨 주려고 안달이다. 
      
      [중국의 남침 인정]
      
      60주년 6.25사변을 맞이하여 중국은 처음으로 남침을 인정했다. 신화통신이 발행하는 국제선구보도((國際先驅導報)와 인민일보의 해외판 환구시보(環球時報 Global Times)에 실렸다. 이 중 국제선구보도 기사는 국내에 소개되자 곧바로 중국의 모든 인터넷에서 사라졌다. 다행히 BBC 중문판에서 인용 보도한 것은 BBC 소관이라 그런지 지워지지 않았다. 국제선구도보에는 평론 몇 편을 소개한 다음, 마지막에 6.25대사기(大事記, 약사略史)를 실었는데, 그 중에 이런 대목이 있다. 
     
       1949년 소련과 미국의 점령군이 차례로 철수했다. 한반도 북부는 당시 13만 5천 명의 훈련된 군대가 있었는데 무장이 잘 갖춰졌지만, 한반도 남부는 9만 8천 명의 (오합지졸) 군경 집단이 있었다.
     
     1950년 6월 25일 바로 그 날 한국의 부대 가운데 절반이 주말 휴가를 떠난 사이, 북한군이 조직적으로 기습했다.
     
     1950년 6월 28일 북한군이 한국의 수도 한성(漢城, 서울)을 점령했다. 
     
      1949年苏联和美国占'046军先后撤走。朝鲜半岛北部此时拥有一支13万5千人的训练有素,军备充足的部队;半岛南部只有一支9万8千人的军警队伍。
      1950年6月25日正当南部的韩国一半的部队周末休假,北部的朝鲜军队实施了有组织的突"989行动
      1950年6月28日朝鲜军队攻占韩国首都汉城(今首尔)。
     
       환구시보(2010/6/18)에는 냉전 전문가 심지화(沈志華) 중국 화동(華東)사범대 교수와의 대담 기사를 통해 교묘하게 남침을 인정했다. 중국어와 영어 둘 다 실렸는데, 영어는 요약문이다. 중문에는 환구시보의 기자가 심지화를 소개하면서 제 입으로 남침을 인정했지만, 영문에는 그 부분은 쏙 빼고 심지화의 개인 견해라는 조건을 달고서 ‘김일성이 남침했다’고 실었다. 중어 원문에는 앞에 몇 번 김일성이 남침했다는 말이 나오지만, 그렇게 단정적으로 나와 있지 않다. 다만, 심지화는 처음부터 중국어 교과서와는 달리 남침을 부정하는 사람은 이제 아무도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전쟁 도발의 책임자보다는 오히려 남침의 동기가 이제는 학술적 논점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소련의 부동항 욕심과 김일성의 적화 야욕을 거론했다. 
      
      编者按: ... 冷战结束后,随着苏联档案材料的解密,已可以确定当年是北朝鲜首先进攻南朝鲜。(편집자 주: ... 냉전이 끝난 후, 소련의 비밀문서가 해제되면서, 그 해에 북한이 한국을 침략한 것이 확실히 밝혀졌다.)
      중문: 朝鲜战争在1950年6月25日爆发了。(한국전쟁은 1950년 6월 25일에 발발했다.) 
     영문: Kim launched the war on June 25, 1950. (김일성이 1950년 6월 25일에 그 전쟁을 감행했다.)
      
     [6.25 비사秘史]
     
       위에 언급한 중국의 두 신문에 바탕을 두고 한국과 미국 자료와 소련 자료만으로는 알 수 없었던 몇 가지 6.25 비사를 재구성해 보겠다. 한민족의 의지와 관계없이 막후에서 한민족의 운명은 알려진 것보다 훨씬 여러 번 천당과 지옥을 오갔다. 이런 상황은 중국의 경제력이 러시아에 이어 일본도 능가하면서 오늘날 한반도를 중심으로 재현되고 있다. 안타까운 것은 한국은 어느 모로 보나 세계 10대 강국으로 발돋움했지만 스스로의 힘을 모르는 황소처럼 아직도 자신을 고작 세계 100위 정도의 약소국으로 인식하고 대한민국을 욕하고 저주하는 세력이 득세하면서 힘을 한데 모으지 못하고 미래의 운명을 다시 강대국의 손에 전적으로 맡기고 있다는 것이다. 
      
     [미소(美蘇) 철수 직후 3개 정예 사단을 북한에 몰래 보낸 모택동]
     
       6.25 사변 후반 이승만의 빼어난 외교력이 빛을 발했고, 사변 초기에 모택동이 1949년에서 1950년 초에 보내 준 중공군 소속이었던 조선군 3개 사단(제5, 6, 7사단)과 소련의 무기 덕분에 김일성이 반짝 기고만장했던 적이 있지만, 미국과 중공과 소련이 거의 전적으로 전쟁을 주도했다. 그 중에서 모택동의 역할이 알려진 것보다 훨씬 컸다. 
      
      중국이 좀처럼 인정하지 않는 것이 소련군과 미군이 철수한 후 조선족으로 구성된 정병(精兵) 3개 사단을 6.25 전에 보낸 사실이다. 이것을 국제선구보도에 실린 평론 가운데 하나에서 밝혔다. 필자는 미국에 거주하는 하청련(河淸漣)이다. 그는 이 글에서 김일성의 남침도 단정적으로 인정했다. 
      
      김일성의 거듭된 요구에 따라, 중국 인민해방군 제4야전군의 임표 소속 부대에서 중국 국적의 조선족 3개 정예 사단이 1949년과 1950년초에 조선에 들어가 조선 인민군에 편입되어 김일성에게 제공되었다. 이것은 김일성이 한국을 침략하는 데 주력부대가 되었다. 소련과 중국의 지지를 받아, 김일성은 1950년 6월 25일, 계획적으로 준비를 갖추어 남한을 침략하는 전쟁을 도발했다. 북소리 한 번 울리고, 김일성은 3일 만에 한국의 수도 서울을 공략하여 세계를 경악시켰다. 
      
      在金日成的再三要求下,中国人民解放军四野林彪所部中国籍朝鲜族的三个精锐师在1949和1950年初调入朝鲜,编入朝鲜人民军,供金日成调遣,成为金日成进攻韩国的主力部队。 有了苏中支持,金日成在1950年6月25日,有计划有准备地发动了入侵南韩的战争,一鼓作气在三天之内攻下韩国首都汉城,世界为之震惊。
     
       다른 졸고에서도 누차 밝혔지만, 6.25 전에 모택동이 3개 사단을 지원하지 않았다면, 김일성이 감히 남침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것은 인천상륙작전 후 모택동이 100만 대군을 보낸 것 못지않은 큰 의의를 갖는다. 중국은 압록강과 두만강 바로 위에 최소 30만 대군을 지금도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지리적으로 사실상 북한에 인민해방군을 주둔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미국은 태평양 건너 수만 리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어서 지리적으로 항상 불리할 수밖에 없다. 형식상 중공군이 북한에 주둔하지 않는 것으로 북한과 입을 맞추어 중국이 주한미군 철수를 외치는 것은 멀쩡한 사람의 눈에 고춧가루를 뿌려 하늘을 가리는 일이다. 친북좌파가 그에 장단을 맞추는 것은 을사오적보다 사악하고 어리석은 매국적 행위다. 
     
       [6.25 전에 한국의 항구를 철옹성으로 만들어 주겠다고 제의한 모택동]
      
      모택동은 전쟁을 아는 자로서 전쟁을 모르는 김일성에게 남침 전에 또 한 번 엄청난 제의를 건넸다. 한국과 미국으로선 천행으로 김일성이 이를 거부했다. 심지화의 대담에 나오는 내용이다. 
     
       모택동은 일찍이 스탈린과 김일성에게 중국이 한반도의 연해지구와 주요 항구를 방어하는 걸 도울 수 있다고 표시했다. 그러나 처음에 김일성은 미국이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고 중국의 제의를 접수하지 않았다. 후에 전황이 악화되자 김일성은 중국의 원조를 희망했지만, 스탈린의 동의가 없는 상황에서는 감히 중국에게 직접 군사 파병을 요구하지 못했다. 
        
      毛泽东曾经向斯大林和金日成表示,中国可以帮助防守朝鲜半岛沿海地区和重要港口。但是起初,金日成认为美国不会干涉,因此没有接受中国的提议。随着战况的恶化,金日成希望得到中国的帮助,但是没有斯大林的同意,他不敢要求中国出兵。
      
      아찔한 순간이었다. 소규모 전투 외에는 실전 경험이 없던 김일성은 만약의 경우에 대비하기보다 중국의 입김이 커지는 것만 걱정했던 것 같다. 이것이 한미 양국에게는 천행이었다. 해군은 별것 없었지만, 중국은 능히 한국의 주요 항구와 해안 지역을 철옹성으로 만들 힘이 있었는데, 김일성이 굴러 온 복을 차 버림으로써 인류 역사상 길이 빛날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이 가능했던 것이다. 미국은 어리석은 김일성 덕분에 덩커크의 악몽을 피하고 한반도판 노르만디 상륙 작전에 성공했던 것이다. 후에(1950/7/2) 주은래도 주중 소련대사 로시친(Roshchin)에게 해안 봉쇄를 다시 제안했지만, 이번에는 스탈린이 우물쭈물했던 것 같다. 중국의 영향력을 염려하던 김일성은 팽덕회가 중공군을 몰고 오면서부터는 철저히 소외되었다. 사실상 소대장급으로 격하되었다.   
     
      [‘서울 3일’은 군사 작전 담당 소련군 고문이 없었기 때문]
     
       탈북 시인 장진성이 6.25 수수께끼의 단초를 하나 제공했다. 인민군이 서울 점령 후 사흘간 머문 이유에 대해 김일성이 내뱉었다는 말을 소개한 것이다. 그는 북한에서 극비로 이조실록을 본뜬 김조실록을 편찬하는 일에 간여했다고 한다. 거기서 그는 많은 1차 사료(史料)를 접한 모양이다.
     
     “소련 놈들이 무기를 제공하지 않았다!” 
      이것이 김일성의 말이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서 심지화가 보다 신빙성 있는 말을 전한다. 
      
      사실상 작전계획은 전부 소련의 참모가 세웠다. 북한의 인민군은 크든 작든 작전경험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스탈린은 소련의 병사가 절대 38선을 넘어 전투에 참여하지 못하게 했다. “혹시 체포되어 우리가 참전했다는 증거를 남길 수 있기 때문이다.” 38선을 넘은 후에는 소련 군사고문의 지도가 없었기 때문에 계속 남진하던 북한 군대는 완전히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事实上,作战计划全部是由苏联参谋制定的,因为朝鲜人民军并没有多少作战经'564。斯大林坚决不允许苏联士兵越?线或是直接参加战争,因为“我们不想留下证据被人家指控我们参与了这件事”。而越?线后,由于缺乏苏联'038问的指导,继续南进的朝鲜军队完全处于混乱之中。
      
      애초에 스탈린은 서울 점령까지만 작전을 세워 주었던 모양이다. 작전을 세울 소련 참모가 38선을 넘지 않았고 그 후의 작전에 대해 알려 주지 않았기 때문에, 김일성은 기쁨 속에서 갈피를 잡지 못했던 것 같다. 무기는 이미 스탈린이 원래 북한군만이 아니라 조선족 3개 사단까지 한국 지형에 맞는 무기로 중무장시켜 두었기 때문에 스탈린이 무기를 안 주어 진격할 수 없었다는 김일성의 말은 믿을 수 없다. 자존심 문제로 김일성은 작전계획에 대한 무능을 차마 말할 수 없어서 이를 에둘러 소련의 무기 지원 부족으로 돌렸을 것이다. 어느 쪽이든 넓은 의미에서 김일성의 서울 점령 후 소련의 지원이 부족했던 것은 틀림없었던 모양이다. 심지화에 따르면, 스탈린은 미국의 개입을 극도로 경계하여 심지어 미군이 1950년 10월 8일 연해주의 소련 공군 기지 7개를 아작낸 것에 대해서도 찍 소리 않았다고 한다. 미국은 그렇게 손쉽게 제공권을 장악했다. 
      
      [스탈린과 주은래의 흑해회담]
      
      인천 상륙 작전 후에도 아슬아슬한 장면이 벌어졌다. 결정적으로 이때도 모택동이 다시 한 번 한민족의 운명을 망쳤다. 
       인천 등 한국의 항구를 요새화하라고 권유하던 주은래는 맥아더가 바다에서 육지로 걸어 나오자 즉각 모스크바로 날아간다. 스탈린은 흑해의 다차(별장)에 있었다. 한국에는 알려지지 않은 흑해회담이 열리는 순간이다. 
       1950년 10월 11일, 주은래 등은 모스크바를 거쳐 코카사스의 흑해 해변에 위치한 스탈린의 별장에 날아가서 그 날 오후에 소련 국가 원수와 회담을 거행했다. 주은래는 중공중앙정치국 회의 내용을 소개하고 북한의 전황과 북한에 대한 원조 문제를 토론했다. 중국이 출병하는 문제는 실제로 아주 곤란하다고 설명했다. 소련이 무기와 장비 및 공군을 지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스탈린은 지적했다.
     
     “중국이 필요로 하는 비행기와 탱크와 대포 등 군사장비를 완전히 충족시킬 수도 있소. 그러나 소련의 공군은 준비가 미흡하오. 2개월 내지 1개월 반 안에는 출동할 수 없소.”
     
      거듭 토론한 후에 쌍방은 합의를 보았다. 두 대국이 모두 준비가 미흡하여 북한을 포기하는 게 좋겠다고. 김일성에게 조속히 안전하게 후퇴할 것을 알려 주자고. 스탈린은 최후 결정은 모택동이 내리라고 요구했다. 그러면서 만약 북한이 미군과 한국군에게 점령되면, 그것은 중국 책임이라고 윽박질렀다. 
      
      영문판을 보면 김일성에게 중소가 지원하려면 6개월이 걸린다고 핑계를 대기로 합의를 봤다는 말도 나온다. 
     
      10月11日,周恩来等人经莫斯科'134抵高加索黑海边斯大林的休养地,并于当天下午与苏联'046导人举行了会谈。周恩来介绍了中共中央政治局会议讨论朝鲜局势和出兵援朝问'064的情况,说明中国出兵将面临巨大的实际困难,强调需要苏联提供武器装备和空军支援。斯大林指出:可以完全满足中国所需要的'134机、坦克、大炮等军事装备,但是,苏联空军尚未准备好,'035在两个月或两个半月内才能出动。反复讨论以后,双方认为,既然大家都未做好准备,只好放弃朝鲜,及早通知金日成安排撤退。斯大林要求毛泽东作出最后的决定,这样如果北朝鲜最终被美军和南方占'046,责任就是中国的。
     
      After extended discussions, both sides agreed that since both could only be ready after six months when North Korea would have been occupied by South Korea and the US, they had to give up the country and inform Kim to arrange a retreat as soon as possible.
     
      마지막에 모택동이 흑해회담을 거부하고 1950년 10월 15일 북한으로 중공군을 보내기로 최종결정한다. 스탈린의 노회한 외교와 모택동의 아시아 패권에 대한 야망이 잘 드러난다. 
      
      [인천상륙 작전 성공 후 남북 총선을 제의한 스탈린]
      
      그 이전 10월 4일에 스탈린은 UN을 통해 미군이 38선을 넘지 않으면, 북한으로 하여금 무기를 버리게 하고, 아울러 국제연합위원회가 북한으로 들어가 총선을 실시하는 것을 주재할 수 있게 하겠다는 제의도 했다. 
      
      10月4日,联合国秘书处的一位苏联工作人员邀请挪威'547联合国代表共进午餐,希望他作为中间人向美国政府传话:如果麦克阿瑟同意在三八线止步,苏联将劝说北朝鲜人放下武器,并允许联合国委员会进入北朝鲜主持大选。
     
       미국은 이를 거부했다. 널리 알려졌다시피 모택동도 미군이 38선을 넘으면 좌시하지 않겠다고 여러 번 경고했지만, 미국은 이것도 무시했다. 인천상륙작전이 너무 빛났기 때문에 UN군에 의한 남북통일은 1950년 크리스마스 이전에 달성할 수 있다고 오판했던 것이다. 맥아더처럼 모택동도 처음의 성공에 도취되어 후에 영국이 중심이 되어 발의한 1.4후퇴 상황에서 휴전선을 긋는 문제를 거부했다. 서울이 적에게 넘어갈 수 있었던 상황이었다. 얼마든지 적화통일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장점은 유연한 민주적인 정책결정이다. 실수를 빨리 깨닫고 실수를 만회하는 의사소통이다. 트루먼은 맥아더를 더 이상 신으로 여기지 않고 쫓아낸 다음, 단호하고 영리한 리지웨이를 보내 중공군에게 본때를 보여 주었다. 
     
       [여순과 대련 대신 한국의 항구를 원했던 스탈린]
      
      스탈린은 1949년 개발한 핵무기를 믿었다. 그것만 있으면 미군은 만주로 진격할 리 없고 그것만 있으면 통일 중국과 세계최강 미국이 이전투구로 국력이 쇠잔시킬 수 있다고 믿었던 것 같다. 
      
     전략적 차원에서 소련이 가장 원한 것은 한반도의 부동항이었다. 미국의 원폭투하 후 전광석화처럼 170만 극동군으로 얼이 빠져 다리가 풀린 80만 관동군을 무장해제시켰지만, 소련이 얻은 것은 러일전쟁으로 일본에게 빼앗긴 여순과 대련 두 항구 및 만주의 중장(中長)철도 그리고 외몽골뿐이었다. 1945년 장개석과 맺은 중소우호동맹조약에 따른 것이었다. 여순과 대련은 30년간 조차하는 조건이었지만, 1949년 중공에 의해 중원이 통일되면서 그것은 두 공산국끼리 심각한 주권 문제로 대두되었다. 때마침 국제 압력이 가해졌다. 영국과 인도 등이 중공을 합법적 정부로 승인하려고 하고 미국도 우호적 신호를 보냈던 것이다. 신3국 간섭이었다. 결국 스탈린은 외몽골 외에는 중국에 모두 돌려 주기로 했다. 
      
      대신 스탈린은 이미 소련군 대위 김일성을 내세워 동구와 몽골처럼 소련의 위성국으로 만든 북한을 이용하여 절대 손해 볼 리 없는 게임 곧 6.25 불바다를 주도면밀하게 연출하여 김일성이 엉덩이에 뿔난 송아지처럼 날뛰게 만든다. 미국이 38선을 제의하자 동해 쪽으로 그 선을 연장하여 일본의 북해도까지 소련의 지배하에 두자고 제의했다가 일언지하에 거절당한 적이 있었던 스탈린은 완벽한 준비를 갖춘 다음 지정학적으로 절대 유리한 점을 이용하여 소련군을 먼저 철수시키고 미국이 아무 준비 없이 덜컥 미군을 철수하게 만든다. 앞서 얘기한 바대로 북한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중국과 소련은 철군해도 사실상 북한에 군대를 주둔한 것과 마찬가지인 점을 교묘히 이용한 것이다. 
     
       [이승만, 좌익 폭동 진압으로 통치권을 확보하고 토지개혁으로 민심을 얻다]
     
       스탈린과 김일성의 철권통치로 북한에는 우익이 처음부터 씨가 말랐지만, 트루먼과 이승만의 봄바람 통치로 한국에는 좌익이 서울과 대구와 여수, 태백산맥과 지리산과 한라산만이 아니라 군대에까지 들끓었던 것도 김일성이 적화통일에 대한 야심을 부채질했다. 이승만이 폭동과 반란을 제압하는 과정에서 군에 대한 통치권을 확보하고 세계 최고 수준의 토지개혁으로 민심을 얻었다. 소련과 중공과 북한, 동구, 후일의 공산베트남은 국가 노예제 형태의 토지개혁으로 민심을 완전히 잃고 노동자와 농민을 길게는 70년 짧게는 10년 기아에 허덕이게 만들었지만, 한국의 선무당들은 지금도 무상몰수 무상분배라는 허구적 논리에 입각하여 이를 정반대로 알고 신파조로 선전하고 있다. 막상 김일성이 남침하자 공산 봉기는 전혀 없었다. 도리어 한국의 청년들은 우리 토지와 우리 자유를 지키기 위해 맨주먹으로 악랄한 공산군과 싸웠다. 후일 월남과는 판이한 양상이었다. 그러나 6.25 당시 10대 의혹에서 드러나듯 공산당을 색출한 숙군(肅軍) 운동도 군부에 뿌리박은 남로당을 완전히 제거하는 데는 실패했다. 
      
      [6.25 직전보다 고약한 한국의 현실] 
     
       중국은 북한을 철저히 감싼다. 김정일은 이런 중국을 믿고 모택동의 문화혁명을 계속하고 스탈린의 강제수용소를 유지하고 마음대로 동북아 평화를 위협한다. 핵개발도 마음대로, 미사일 발사도 마음대로, 서해안 도발도 마음대로, 동해안 도발도 마음대로, 6자회담도 마음대로다. 북한이 저지르는 것은 모든 게 용서되지만, 물증 확실하게 한국의 해군 46명을 수장시켜도 귀신이 저지른 일로 두둔해 주지만, 한국과 미국은 한국의 영해 안에서 군사훈련을 실시해도 발끈한다. 더 큰 문제는 한국이다. 헛기침 한 번하고 슬그머니 물러난다. 정부가 헛기침하는 것도 전쟁을 불러일으킨다며 방송과 인터넷과 여러 신문이 태양처럼 촛불을 밝혀들고 펄펄 뛴다. 70만 대군이 휴전선 북쪽을 향해 총 한 발은커녕 발 한 번 일제히 구르지도 못한다. 숱한 군인들이 인터넷 괴담에 솔깃해 한다. 군대의 보고 체계를 대통령이 엉망으로 만들어 놓고 국방장관과 합참의장을 몰아세운다. 기껏 전시작전권 이양을 2년 반 연기한 걸로 책임을 다했다고 자화자찬한다. 2015년까지 매년 50%씩 늘려도 시원찮을 판에 군사비는 노골적 친북좌파 대통령이 계획한 것보다 적게 늘린다. 
     
       한반도를 둘러싼 열전과 냉전은 세계적 차원에서 보면 미국과 중국의 싸움이기도 하지만, 어디까지나 당사자는, 운명의 목숨이 걸린 당사자는 한민족이다. 인간의 생존권과 기본권을 전혀 누리지 못하는 북한주민이 아니라 자유와 풍요가 넘치는 한국인이다. 예전과 달리 한국은 옛날 수나라 당나라와 맞서던 고구려 못지않은 군사력과 1인당 부로 따지면 중국의 7배되는 경제력을 가졌다. 한국의 수호천사 미국과 개과천선한 일본과 손을 잡으면, 공히 인권 후진국 중국과 북한과 러시아의 코는 언제든지 쑥 들어가게 만들 수 있다. 
      
      대북 방송과 대북 전단과 대북 확성기 방송만 재개해도 김정일은 혈압이 올라 절로 쓰러질 수 있다. 덤으로 김정은을 대동강 오리 알로 만들 수 있다. 북한 내의 인권유린만이 아니라 중국 전역에서 떠도는 탈북자의 인권만 정부 차원에서 낮은 목소리로 조목조목 제기해도, G2의 한 봉우리에 서서 세계적 지도자인 듯 황제의 미소를 띠고 손을 흔드는 호금도는 사색이 노래진다. 호금도야, 북핵을 계속 두둔하겠다면, 좋다, 나 이명박은 미국의 핵무기를 한반도에 재배치할 수도 있다, 독일 통일의 주역 디트리히 겐셔가 서독 내 반핵 무리에 맞서 과감히 미국의 중거리 핵미사일 퍼싱2를 독일에 배치함으로써 소련의 기를 사정없이 꺾고 결국 총 한 방 안 쏘는 자유통일의 기초를 놓은 걸 늦었지만 이제라도 본받겠다, 이렇게 말하면, 김정일이 연일 서울 바다 불바다를 외치고 야당과 학생과 시민단체가 365일 광화문에서 서울시청 앞에서 중국산 촛불을 들고 야간집회를 열어도, 대한민국은 안보의 반석 위에 올라서고 북한은 안보의 솜사탕 위에 올라선다. 중국은 춤출 곰이 없어 돈을 못 번다. 
      
      러시아는 영원히 부동항에 대한 미련을 못 버리고, 중국은 영원히 한반도 지배에 대한 야욕을 버리지 못한다. 그것이 지정학적 숙명이다. 그러나 미국은 언제든지 셰인처럼 떠날 수 있다. 멕시코라면 모르겠지만, 한국은 미국 편에서 보아, 전혀 사활적 이해가 걸려 있지 않다. 잘못을 깨닫고 악당을 잡는 데 협조해 주면 세계의 보안관으로서 평화를 찾아 주겠지만, 싫다면 그 전이라도 언제든지 떠날 수 있다. 새로 평화가 오면, 군정을 끝낸 후 일체 간섭 안 했던 이전처럼 표표히 떠난다. 미국을 부르는 먼 언덕은 세계 곳곳에 널려 있고, 미국은 거대한 대서양과 태평양이 영원히 지켜 주므로 중국이 아무리 팔팔 뛰고 러시아가 아무리 씩씩거려도 속으로는 그들을 전혀 겁내지 않는다. 즐거운 마음으로, 종교적 신념으로 중국과 북한에 놀아나는 한국의 이른바 자주파(대중국 대북한 골수 사대주의자)가 언젠가 제2의 6.25를 자초할 것이다.   (2010. 7. 15.)
    [조갑제닷컴=뉴데일리 특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