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기 장군, 광복군 중장, 초대 국무총리 역임한 ‘애국자’추모식, 11일 오전 11시 국립서울현충원 현충관서 열렸다
  • 좌파 진영은 늘 이승만 정부를 ‘친일독재정권’으로 폄훼한다. 이승만 정부 초대 내각의 총리가 청산리 대첩의 주인공이자 광복군 중장 출신이라는 점은 왜 외면할까.

    국가보훈처(처장 박승춘)는 “청산리 전투를 대승으로 이끌고, 광복 후 초대 국무총리를 지낸 ‘철기 이범석장군 40주기 추모식’이 지난 11일 국립서울현충원 현충관에서 오전 11시 철기이범석장군기념사업회(회장 서영훈) 주관으로 열렸다”고 밝혔다.

    추모식에는 최완근 서울지방보훈청장, 국회의원, 육ㆍ해ㆍ공군 장성, 기념사업회원, 광복회원, 유족 등 200여 명이 참석했다. 서영훈 회장의 추모식사, 사업회 이사의 약력보고, 새누리당 대표(김을동 의원 대독)․국방장관(인사복지실장 대독)․서울지방보훈청장․광복회장의 추모사와 헌화․분향, 조총발사 등의 순으로 진행됐다.

  • 철기 이범석 장군은 1900년 10월 20일 서울 종로에서 태어났다. 1915년 여운형을 만나 중국으로 망명할 것을 결심했고, 중국에서 신규식을 만나 6개월간 항주군관예비학교를 거쳐 운남강무당(雲南講武堂) 기병과(騎兵科)를 졸업했다.

    졸업 후 1919년 5월에는 만주로 옮겨 신흥무관학교 교관으로 독립군을 양성했으며, 1920년 3월에는 왕청현에 있던 북로군정서 연성대장이 됐다.

    1920년 10월 20일 스무번 째 생일날 보병 1개 대대를 인솔하고 청산리 백운평에서 일본 토벌군 주력부대를 강타해 수천 명의 사상자를 내고 물러나게 만들었다.

    1923년 5월에는 김규식, 고평 등과 함께 고려혁명군을 조직했고, 1934년 낙양군관학교 내에 한국독립군 양성을 위한 특별반이 설립되자 이청천 장군 아래서 교육대장을 맡아 독립군 간부 양성에 총력을 기울였다.

    1940년 9월 17일에는 한국광복군 참모장으로 임명됐고, 1942년 4월에는 광복군 총사령부의 핵심부대인 제2지대장으로 항일투쟁을 전개하다가 1945년 8월 광복군 중장 계급을 달고 귀국했다.

    1946년에 조선민족청년단(朝鮮民族靑年團)을 창설했고,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초대 국무총리와 국방장관을 겸임했다. 1952년에는 자유당 부(副)당수 및 내무장관을 역임했다.

    1960년에는 충청남도에서 자유연맹(自由聯盟) 소속 참의원(參議員)에 당선되는 등 이후 꾸준히 정치인으로 활동하다 1972년 5월 11일 심근경색으로 사망하였다.

    정부에서는 1963년 장군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수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