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탈옥했다가 다시 체포되다

       병원에 숨어 갑갑하게 지내고 있던 1899년 1월 9일, 의료 선교사인 해리 셔먼으로부터 환자를 왕진하는 데 같이 가자는 제의를 받았다. 통역으로서 이승만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승만은 괜찮을 것 같아 바람도 쏘일 겸해서 따라나섰다. 그러나 병원을 나서자마자 사복 경찰들에게 체포당하고 말았다. 
       셔먼 박사는 즉시 미국 공사 알렌과 함께 외부(외무부)를 찾아가 이승만의 석방을 요구했다. 이승만은 자기의 통역이었을 뿐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래서 셔먼을 비롯한 미국인 선교사들은 이승만이 고문을 당하지 않도록 면회를 자주 가는 길 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1899년 1월 30일 경무청 고문인 미국인 스트리플링(설필림)이 이승만을 면회하러 왔다. 그 때 독립협회 동지 주시경이 따라왔다가, 두 자루의 권총을 몰래 전달하고 갔다.
       면회자들이 돌아가자마자, 이승만은 <매일신문>에서 같이 일했던 최정식, 그리고 군수 출신의 서상대와 함께 권총으로 간수들을 위협하면서 감옥을 빠져나왔다.
       최정식과 서상대는 배재학당 구내의 영국인 엠벌리 집에 숨어들었다. 그리고는 한 달 가량 머물었다.
       그런 다음, 어느 날 밤 서양 여자 옷으로 갈아입고 몰래 서대문을 빠져 나갔다. 두 사람은 북쪽으로 향했다.
       서상대는 무사히 만주로 탈출했다. 그러나 최정식은 진남포의 일본인 여관에 묵었다가 주인의 밀고로 체포되어 서울로 끌려오고 말았다.

    고종 폐위 음모 사건에 연루되어 사형 직전까지 가다

       감옥을 탈출할 당시 이승만은 두 사람과 같이 행동하지 않았다. 그는 시위대가 모여 있다는 종로로 달려갔다. 그러나 시위대는 없었고, 이승만은 다시 체포되었다.
       한성감옥서로  끌려온 그는 황국협회 회원들에게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두 팔이 묶이고 양다리에 주리를 튼 상태에서 손가락 사이에 대나무를 넣어 비트는 잔혹한 고문이었다. 매일 곤장을 맞아 몸은 상처투성이었다. 
       저녁이 되면 발을 족쇄로 묶고 손에 수갑을 채우고 목에 나무칼을 씌워 독방에 내던져졌다. 나무칼을 쓰고서는 누울 수도 없었기 때문에 반쯤 앉은 자세로 밤을 새워야 했다. 그러다가 날이 밝으면 다시 끌려나와 고문을 당했다.
       이때부터 평생 그에게는 감정이 격해지면 무의식적으로 망가진 손가락 끝을 입으로 부는 버릇이 생겼다.  
       이승만이 고문으로 죽었다는 신문기사가 나서, 놀란 아버지가 시신을 걷우러 감옥으로 찾아오기도 했다.
       이제 24세의 청년에게 남은 것은 죽음뿐인 것 같았다. 절망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는 동안 그의 머릿 속에는 배재학당 예배 시간에서 들은 설교 내용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그 내용들을 곰곰이 음미해보았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그는 강렬한 삶의 기쁨을 느꼈다. 그 순간 그는 고개를 숙이고 "하나님, 내 나라와 내 영혼을 구하옵소서"라고 크게 외치면서 간절히 기도 했다. 오랫동안 기도했다. 그러자 까닭 모를 평온함이 그를 감쌌다.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된 것이다.

  • ▲ 이승만이 감옥에 갇혀있을 때 이승만의 출옥운동에 앞장섰던 미국인 선교사 존스.
    ▲ 이승만이 감옥에 갇혀있을 때 이승만의 출옥운동에 앞장섰던 미국인 선교사 존스.

       마침내 탈옥 사건에 대한 재판이 시작되었다. 판사는 공교롭게도 그의 정적인 홍종우였다. 홍종우는 고종의 환심을 얻기 위해 갑신정변의 주모자인 김옥균을 상해에서 암살할 정도로 잔인한 인물이었다.
       재판정에서 서상대는 살기 위해 모든 책임을 이승만에게 떠넘겼다. 이승만은 너무 지처 있었고 모든 것을 포기한 상태였다. 그 때문에 제대로 진술조차 하지 못했다.
       다행히 증거물로 제시된 권총이 한 발도 발사되지 않은 사실이 밝혀짐으로써, 이승만은 사형만은 면했다.  1899년 7월 11일 그는 종신형과 함께 곤장 100대가 선고되었다. 
       그러나 진남포에서 체포되어 온 독립협회 동지 최정식은 사형을 당했다.
       이승만은 7개월만에 일반 감방으로 옮겨졌다. 그리고는 5년 7개월의 옥살이가 시작되었다.

    5년 7개월의 감옥생활에서 만난 은인들
     
       감옥에 있는 동안 이승만은 많은 은인들을 만났다. 감옥서장 김영선과 감옥 부서장 이중진은 수시로 찾아와 이승만을 위로하고 편의를 봐 주려고 했다.
       배재학당 교사 D.A.벙커 박사, 그리고 장로교 선교사로서  경신학교 설립자인 호레이스 언더우드 박사, 그리고 연동교회 목사인 제임스 게일도 면회를 자주 왔다.
       제중원의 애비슨 박사는 감옥으로 의약품을 보내기도 했다. 아펜셀러는 굶주리고 있는 이승만의 가족에게 생활비를 보내기도 했다. 
       감옥 안의 정치범들 가운데는 배재 동문인 신흥우를 비롯해 이상재(李商在), 이원긍, 김정식, 홍재기, 이준, 양기탁, 안국선과 같은 독립협회 동지들이 있었다.
       한성감옥 안의 정치범들 가운데는 교육 수준이 높은 양반 출신 개화파가 많았다. 특히 나중에 미국에서 깊은 인연을 맺게 될 박용만(朴容萬), 그리고 거물급 개화파 정치인인 유길준의 동생인 유성준(兪星濬)과 가까이 지냈다. 
       이승만은 배재학당에서 배운 영어를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캐나다 선교사 해로이드 양이 넣어준 영어 신약성서를 큰 소리로 읽었다. 고문 후유증으로 손가락을 제대로 쓸 수 없었기 때문에, 감방 동료가 책장을 넘겨주어야 했다.
       감옥서장의 협조로 많은 책과 잡지들이 이승만에게 전달되었다. 미국인 선교사들은 <아우트루크>와 같은 미국의 인기 잡지, 그리고 피터 발리의 《세계사》, 윌리엄 스윈튼의 《세계사 개요》, 로버트 매켄지의 《19세기 역사》와 같은 영문 역사책을 넣어주었다.
       이승만은 영문 잡지 내용 가운데 필요한 구절은 무조건 외웠다. 그 때문에 그의 영어 실력과 서양에 대한 지식은 놀랄 만큼 늘어 갔다.

  • ▲ 옥중에서 이승만이 기독교로 개종한 경위를 밝힌 <옥중전도>라는 글이 실린《신학월보》(1901). 이승만의 친필이 보인다.
    ▲ 옥중에서 이승만이 기독교로 개종한 경위를 밝힌 <옥중전도>라는 글이 실린《신학월보》(1901). 이승만의 친필이 보인다.
       밤에는 몰래 들여온 양초에 불을 밝히고 책을 읽었다. 그리고 몰래 들여온 염료로 잉크를 만들어 불편한 손으로 잡지 책에다 쓰기 연습을 했다. 간수들은 보고도 모른 척해주었다.
       그렇게 쓴 글은 감옥 밖으로 몰래 내보내져, 자신이 전에 발행을 시작했던 <제국신문>, 그리고 감리교계 잡지인 <신학월보>에 실렸다.
       이름을 밝히지는 않았지만, 글의 필자가 이승만이라는 것은 웬만한 사람이면 다 알고 있었다.
       이승만의 글을 읽는 독자 가운데는 고종의 후궁인 엄비(嚴妃)도 있었다. 엄비는 감옥 서장 김영선과 잘 아는 사이였으므로 이승만을 잘 보살피도록 특별히 부탁했다.
       이승만은 감옥안의 정치범들의 도움을 받아 옥중학교를 열었다. 학교는 15명의 어린이를 가르치는 일로 시작했다. 어린이들은 죄수인 부모를 따라 감옥생활을 하게 된 죄수 아닌 죄수였다. 교육 내용은 서예, 산수, 지리, 일본어, 역사였다. 그리고 그것은 성인교육으로 발전했다.
       선교사들로부터 기증받은 책으로 감방 도서실도 열었다.
       이승만은 중국에서 발간된 청일전쟁의 교훈서인 《청일전기》도 번역했다. 그 원고는 1917년 하와에서 출간되었다.  
  • ▲ 이승만의 옥중동지들. 왼쪽 중죄수 복장을 하고 서있는 이가 이승만이다. 앞줄 왼쪽부터 강원달, 홍재기, 유성준, 이상재, 김정식, 뒷줄 왼쪽부터 안명선(안경수의 아들), 김린, 유동근, 이승인(이상재의 아들), 그리고 부친대신 복역했던 어느 소년.
    ▲ 이승만의 옥중동지들. 왼쪽 중죄수 복장을 하고 서있는 이가 이승만이다. 앞줄 왼쪽부터 강원달, 홍재기, 유성준, 이상재, 김정식, 뒷줄 왼쪽부터 안명선(안경수의 아들), 김린, 유동근, 이승인(이상재의 아들), 그리고 부친대신 복역했던 어느 소년.

    감옥에서 갖게 된 기독교 신앙

       감옥 생활 중에 이승만에게 일어났던 가장 큰 변화는 기독교 신앙를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배재학당을 다닐 때 이미 이승만은 미국의 자유와 평등과 같은 자유민주적 가치들이 개신교(Protestantism)와 관계가 있다는 것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감옥에서 선교사들이 넣어 준 미국 책들을 꼼꼼히 읽으면서, 개신교와 민주주의의 관련성을 더욱더 분명하게 알게 되었다. 그것은 기독교 신앙을 받아 들이는 과정에서 깨달은 사실이었다.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되면서,그는 자신의 삶이 하나님에 의해 미리 예비된 것일 뿐만 아니라, 항상 돌보심을 받고 있는 고귀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칼빈의 예정설을 믿게 된 것이다.
       그렇게 되자 그는 삶의 기쁨을 느끼고 삶의 목표를 갖게 되었다. 그에 따라 그의 감옥생활은 아침 기도로 시작해서 밤 기도로 끝나는 희망으로 가득찬 신앙인의 생활이 되었다. 
       감옥 안에는 군주제와 봉건제의 악폐에 대항해 싸웠던 개화파 정치범들이 많았다. 그들은 감옥생활의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이승만이 읽어주는 성경을 아무 생각 없이 들었다. 간수들도 이승만의 감방 앞에 와서 들었다.
       그러다가 40여 명이 기독교로 개종하는 기적적인 결과가 나타났다.
       그 때문에 서양 선교사들도 이승만의 전도 방식에 큰 관심을 가졌다. 중국과 일본에서 몇 년을 선교해도 신도 1명을 확보하기 어려웠던 서양 선교사들에게 이승만의 선교 업적은 관심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이승만이 감옥에 있는 동안(1899.1∼1904.8) 밖에서는 대한제국이 망해 가고 있었다. 일본과 러시아는 북위 39도를 경계로 한반도를 분할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1903년 3월에는 콜레라가 전국을 휩쓸었다. 그에 따라 감방에서도 수십 명이 콜레라로 쓰러졌다. 이승만은 몸을 아끼지 않고 헌신적으로 환자들을 돌보았다.
       제중원의 애비슨 박사에게 급히 구호를 요청했지만, 미국인 의사의 진료가 허락되지 않아 약품만 보내왔다. 이승만은 애비슨의 지시대로 환자들에게 약을 먹였다.
    <이주영 /뉴데일리 이승만연구소 공동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