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대문 옷가게서 만난 그 미싱사 / <분리될 수 없는>을 읽고
  • 그들이 가족과 교회를 저주하는 이유  
      
     제임스 로비슨(James Robison), 제이 리처즈(Jay Richards) 共著
    <분리될 수 없는>(Indivisible)을 읽고


  • 황성준/ 미래한국 편집위원/ 뉴데일리 객원논설위원
      

    모처럼 옷을 사기 위해 동대문 패션 타운에 갔다. 날씨도 화창하고 주말인 탓인지, 매장마다 인파로 가득 찼다. 한국인만 많은 것이 아니었다. 미국인, 일본인은 물론 중국인, 러시아인, 그리고 그 밖의 여러 인종의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꼭 옷을 사기 위해서만도 아닌 것 같았다. 윈도우 쇼핑 자체를 즐기는 데이트족들도 많아 보였다.

    필자도 그리 서두르지 않았다. 그러다가 마음에 드는 청바지가 있어서 구매한 다음, 단을 줄이기 위해 수선실에 갔다. 계산을 하고 옷을 맡기는데 그 곳에서 재봉틀로 작업을 하고 있던 한 중년여성이 필자를 보더니 흠칫 놀라며 눈길을 피하는 것이었다.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인데...옷을 고치는 시간 동안 같은 건물 안에 입주해 있는 한 커피 전문점에서 카페라테를 마시면서 생각에 잠겼다.

    그 중년여성을 처음 만난 것은 84년 1월 일명 ‘가오리’(가리봉 5거리) 부근에 위치한 영세 봉제공장에서였다. 당시 필자는 겨울방학을 이용, 이른바 ‘공활’ 중이었다. 공활이란 ‘공장활동’의 줄인 말인데 대학생 신분을 속이고 공장에 취업, 공장생활을 통해 노동자적 계급의식을 함양하기 위한 훈련을 일컫는 운동권 은어이다. 주로 여름방학 동안에 행하는 ‘농활’(농촌활동)과 유사한 활동인데 농활은 공개적으로 그리고 대대적으로 이뤄진 반면 공활은 은밀하게 소수에 의해 진행됐다. 좌우간 이때 한 달 간의 공활은 필자의 사고방식을 완전히 뒤흔들어 놓았으며 이를 계기로 마르크스-레닌주의자가 됐다.

    80년대 ‘공활’ 통해 마르크스-레닌주의자가 되다

    비교적 곱게(?) 자란 필자의 공장생활은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었다. ‘시다’ 중에서도 가장 무능한 시다였다. 일이 서툰 탓에 온갖 구박을 받아야 했으며 심지어는 ‘다소 모자란 사람’ 취급을 받기도 했다. 그러니 노동자를 ‘조직’하기는 커녕 다른 노동자들에게 무시당하지 않으면 다행일 정도였다. 이때 필자를 대표적으로 못살게 굴던 미싱사가 있었는데 그 미싱사가 바로 수선실의 그 중년여성이었다. 솔직히 고백컨대 당시 공활은 정말 힘들었다. 겨우 가까스로 한 달을 채운 뒤 나왔다. 이때 손에 쥔 돈은 8만3천원. 잔업 및 야근 수당까지 모두 합친 금액이었다.

    이 미싱사를 다시 만나게 된 것은 84년 9월. 이른바 ‘청계피복노조 복구’를 요구하는 격렬한 시위가 동대문에서 벌어졌다. 최루탄과 짱돌, 그리고 화염병이 난무한 이날 시위 현장은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이날 경찰차도 몇 대 불탄 것으로 기억한다. 해가 저물고 경찰의 진압작전이 본격화되자 학생과 노동자로 이뤄진 시위대는 점차 흩어지기 시작했다. 혜화동에서 돈암동 방면으로 이동하고 있던 도중에 누군가가 어깨를 치기에 쳐다보았더니 바로 그 미싱사였다. 이 미싱사는 이른바 ‘선진 노동자’(노동자 계급의식을 가진 조직 노동자)였으며 필자가 ‘학출’(학생 출신의 줄임말로 대학생 출신의 위장취업자)이란 사실을 ‘공활’ 당시에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세 번째로 만난 것은 87년 1월로 기억한다. 구로공단 야학팀으로부터 연락을 받고 ‘가오리’에 위치한 디스코텍에 갔다. 당시 토요일 저녁만 되면 가오리는 젊은 아가씨들로 넘쳐흘렀다. 공장에서 일하던 아가씨들이 나름 잔뜩 멋을 내고 거리로 쏟아져 나와 배회했다. 그곳의 허름한 디스코텍들도 토요일 저녁만큼은 불야성을 이루며 만원이었는데, 8:2 혹은 7:3의 비율로 여성이 남성보다 많았던 점이 특징이었다. 이곳의 많은 젊은, 아니 ‘어린’ 여공들은 외로움에 시달리고 있었고 이에 젊은 남성들의 유혹에 약한 경우가 많았다. 바로 이런 점을 노리고 건달들이 이곳 디스코텍에서 여공을 유혹한 다음 고생해서 번 돈을 다 털어먹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이날 지원(?)을 나간 것은 야학팀의 한 여공이 건달에게 속아 이른바 ‘몸도 돈도 다 털린’ 일이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털리기만 했어도 그나마 다행인데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임신까지 한 사실이었다. 이 여공은 지난 2년 동안 밥도 제대로 먹지 않고 모은 돈을 한 건달에게 모두 갖다 바쳤는데 이 건달은 단물을 다 빼먹은 것을 알고 다른 사냥감을 찾아서 다시 디스코텍에 출몰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던 것이다. 회의 끝에 응징하기로 결정했다.

    한 여공을 데리고 디스코텍을 빠져 나온 건달을 미행했다. 그리고 자취방으로 들어가는 그 건달을 습격해 미리 준비한 각목으로 두들겨 팼다. 이 건달은 비명을 지르며 “너희는 누구냐? 어느 파냐?”고 외쳤다. 엉겁결에 “운동권파다”라고 대답했는데 지금 생각해도 웃음이 새어 나오곤 한다.

    “너 아직도 빨갱이냐? 난 예수쟁이 됐어”

    ‘응징’ 이후 수술비를 마련해 임신한 여공과 함께 당시 여공 임신중절수술로 악명이 높았던 부천의 모 산부인과로 갔다. 이때 이 임신한 여공(당시 만17세)을 데리고 나온 사람이 바로 앞서 이야기한 미싱사였다.

    이날 간호사의 표정은 지금 생각해도 끔찍하다. 징그러운 하급 동물을 바라보는 것 같은 경멸조의 표정! 이 간호사는 그 태아의 아버지가 필자라고 확신했던 것 같다. 수술을 마치고 택시에 태워 돌아오는 길에 미싱사가 씩 웃으며 필자에게 말했다. “학출치곤 제법 깡다구가 있는데...”

    그 후 그 미싱사를 보지 못했다. 그러다가 거의 25년이 지난 뒤에 우연히 조우한 것이었다. 청바지를 찾으러 갔을 때 그 미싱사가 예전처럼 씩 웃으며 말했다.

    “너 아직도 빨갱이냐?”

    조금 당혹스러웠다.

    “그렇게 말하는 누님은?”

    “나? 난 예수쟁이 됐어.”

    그녀는 필자의 눈치를 살피며 말을 이었다.

    “너 00(임신중절수술한 여공) 기억하지? 그 년 그 이후에도 내가 아는 것만 해도 수술 2번 더 했어. 미친 년. 그렇게 외로움에 떨더니. 하기야 내가 빨갱이 물들어 날뛴 것도 다 외로움 때문이었지. 가 봐! 지금은 일이 바쁘니까. 아니, 솔직히 말하면 그때 알던 사람들 만나기 싫어. 참! 나 너희들이 욕하던 부르주아 됐다. 못 벌어도 한달에 500, 잘 하면 1,000만원 넘게 가져가. 아니지, 임금액수가 기준이 아니라고 했지. 그래! 난 지금 생산수단도 가지고 있고, 임금 노동자도 고용하고 있어. 이쯤 되면 완벽한 부르주아 아니야?”

    ‘외로움’, 어떻게 보면 이것이 수많은 혁명가들을 양성해 낸 원동력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이예크가 일찍이 갈파했듯이 ‘거대한 질서’로 구성된 현대 문명사회는 ‘이타심’이나 ‘연대의식’이 아닌 ‘자기이익’(self-interest)에 의해 유지되고 있으며 또 그래야만 번성할 수 있는 체제인 것이다. 그렇지 않고 이 거대한 질서 전체를 이타심이나 연대의식으로만 유지시키려고 한다면 그 문명은 붕괴되고 말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시장질서’야말로 현대 인류문명의 발전을 보장해 주는 기본 원리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인간은 공동체적 질서로 회귀하고 싶은 본능적 욕구를 항시적으로 가지고 있는 존재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장질서가 아니라 이타심과 연대의식이 보다 강한 동력이 되는 ‘소규모 질서’가, ‘거대 질서’를 유지시키기 위해서라도 공존해야 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소규모 질서의 대표적 형태가 ‘가족’과 ‘교회’(신앙공동체), 그리고 ‘동아리’ 등이다.

    가족과 교회 vs 이념과 혁명

    70년대와 80년대 한국 노동자들은 엄밀한 의미에서 산업 프롤레타리아라기보다는 ‘도시 농민’(urban peasant)에 가까웠다. 배고파서 더 나은 삶을 찾기 위해 도시로 공단으로 몰려왔다. 가족으로부터 이탈된 그들을 기다린 것은 비정한 도시의 질서였다. 농촌 공동체에 익숙해져 있던 이들에게 차가운 익명성과 비정한 돈의 논리는 참기 힘든 것이었다. 그렇기에 도시와 자본을 저주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농촌으로 돌아간 것도 아니었다. ‘콩조각도 나눠먹는’ 고향마을에 대한 아련한 향수에 취해 보기도 하지만 고향마을의 본질은 지긋지긋한 가난이었던 것이다. 박탈당한 ‘소규모 질서’의 이타심과 연대의식에 대한 그리움은 어느 누구에게는 ‘이성(異性)에 대한 눈 먼 사랑’으로,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는 ‘이념 추구’와 이를 통한 ‘동지애’와 ‘혁명운동’으로 발현된 것이었다.

    사회주의 이념이 가족과 교회를 그렇게 싫어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시장질서라는 거대 질서를 붕괴시키기 위해서라도, 이 거대 질서의 필수 보완제인 기초적 소규모 질서를 파괴해야 하는 것이다. 가족과 교회가 붕괴되면, 바로 그 자리를 사회주의 이념과 조직이 차지하고 들어 올 수 있기 때문이다. 사회주의자들은 가족을 해체시키고, 그 자리를 ‘유모 국가’(nanny state)로 채우려고 시도한다. 왜냐하면 ‘건강한 가족’에 대한 대안은 ‘해방’이 아니라 ‘강제개입 국가’(intrusive state)이기 때문이며 사회주의 혁명가가 원하는 것은 ‘고립된 개인으로 구성된 대중’(a mass of isolated individuals)이기 때문이다.
       

  • 가정의 달을 맞이해 제임스 로비슨과 제이 리처즈가 공저한 <분리될 수 없는>(Indivisible)이란 책을 읽어 보았다. “너무 늦기 전에 신앙, 가족, 그리고 자유를 회복하자”는 것이 이 책의 주제이다.

    이 책은 미국의 대표적 보수주의 개신교 지도자와 가톨릭 지도자가 함께 쓴 책이다. 저자들은 ‘사실상의 무신론’(practical atheism) 현상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 1주일에 하루, 그것도 잠깐만 ‘신앙인’이고, 그 밖의 다른 모든 시간에는 ‘무신론자’와 마찬가지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그릇된 행태에 대한 지적이다.

    국가가 줄 수 있는 건 ‘행복’이 아니라 ‘행복 추구권’

    또 많은 현대 국가는 ‘정교 분리의 원칙’이란 미명 하에 ‘비공식적 국가 무신론’(unofficial state atheism)을 사실상의 국교(國敎)로 채택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교회가 국가를 대체하는 신정정치를 하자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국가와 교회는 엄연히 분리돼야만 한다. 그러나 이것이 교회는 개인의 사적 영역에만 머물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교회가 사적 영역에만 머문다면 그 교회는 ‘기복신앙’과 ‘사실상의 무신론’의 기이한 혼합 형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오류를 범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만약 종교가 정치에 개입하는 것이 엄격히 금지돼야 한다면 좌익들이 정치에 개입하는 것 또한 금지돼야 한다. 바로 그들에게 있어서 ‘이념’과 ‘정치’가 바로 그들의 ‘종교’이기 때문이다.

    혹자는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라는 구절을 인용하며 교회의 정치적 중립을 주장하기도 한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가이사(welfare state)가 하나님의 것을 침범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진정한 행복은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다. 그런데 국가가 행복을 주겠다며 ‘바벨탑’을 쌓고 있다. 국가가 보장할 수 있는 것은 행복이 아니라 ‘행복 추구권’이다.

    황성준 /미래한국 편집위원 /동원대 초빙교수/뉴데일리 객원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