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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만과 그의 시대> 연재를 시작하며

    우리가 잊어버린 '대한민국의 시조'

    “여보게 백범. 김일성은 왜 만나러 가나? 갈 테면 모스크바 가서 스탈린과 담판해야지...”
    이승만이 이렇게 말려도 김구는 평양에 갔다. 김일성이 벌여놓은 , 남북좌우합작 속임수, 1948년 4월 날조된 수백개 정치사회단체 궐기대회에 참석한 김구는 연설조차 막힌채 김일성만 만나고 돌아왔다. 남한의 총선거 방해 작전이었다. 전국의 남로당 폭동과 제주 4.3폭동. 돌아 온 김구는 총선거 반대 성명을 발표했다. 제헌국회가 구성되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어도 김구는 남북합작을 고집했다. 유엔의 대한민국 정부 승인조차 반대하고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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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왜 그랬을까? 그 내막은 북한 ‘로동신문’(1997년5월26일자)이 스스로 폭로한 바 있다.(참조: '이승만 다시 보기' p177~185. 기파랑刊).
    해방 후 3년간은 소련의 한반도 분단이 고착되는 기간이다. 새로운 식민제국주의 '국제공산주의'를 내세운 스탈린은 동유럽 여러나라와 함께 ‘좌우합작’ 수법으로 한반도 전체를 위성국 만들려다 실패했다.
    순전히 이승만 때문이다.
    이승만의 힘! 그는 왜 미국과 그토록 싸우면서까지 남북 좌우합작을 반대했던가?
    이것이 바로 운명의 갈림길. 우남 이승만과 백범 김구의 차이. 인간과 철학 차이. 시대인식능력과 역사관 민족관 국가관의 차이. 전략전술의 차이. 민족이 죽느냐 사느냐의 차이였다.
    그때 이승만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은 생겨날 수 없었다. 이승만이 없었다면 김구와 김일성이 손잡은 통일정부, 소련 위성국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들은 그래서 이승만을 저주한다. 소련이 저주하고 김일성이 저주하고 김구파가 저주하고 종북파가 저주하고---왜 그들은 지금까지도 줄기차게 저주를 퍼붓고 있는가?
    건국64년 대한민국, 스탈린과 모택동과 김일성의 6.25남침 전쟁이래 최대의 위기상황에 빠져들고 있다.
    북한과 남한의 종북세력은 해방후 3년간처럼, 아니 건국후 현재까지 일관된 통일전선 투쟁을 벌인다. 퍼주기로 개발된 북한 핵을 앞세워 도발 선동 심리전을 더욱 강화하고 있다.
    그들은 대한민국 건국은 부정하면서 상해임시정부만 옹호한다. 당시 상해서 김구 주석이 공산당과 합작, 입각시켰기 때문이다. 공산주의를 비판하는 이승만은 진작부터 중상모략으로 밀려났다.
    건국초기 ‘국회프락치사건’ 당시처럼 지금 국회에 대거 진출한 통합진보당은 이름도 아예 ‘진보당’으로 바꾼다. 이승만 시대 '종북혐의'로 사형된 조봉암의 진보당이 재탄생되는 목적은 무엇인가. 오늘도 친북매체들은 '이승만 죽이기‘로 '대한민국 허물기'에 여념이 없다.
  • ▲ <이승만과 그의 시대>저자 이주영 교수.
    ▲ <이승만과 그의 시대>저자 이주영 교수.

    이에 뉴데일리 이승만연구소는 총서시리즈로 출간한 이주영 박사의 저서
    <이승만과 그의 시대: 2011.기파랑刊/사진>를 연재하기로 했다.
    거짓과 중상모략으로 사라지는 현대사, 역사의 진실을 있었던 그대로 알고 나서 이야기 하자.
    인류사에 유례를 찾을 수 없는 건국 드라마,  ‘이승만의 나라세우기, 나라 지키기, 나라 키우기’ 파노라마를 읽고 나면, 몰랐던 역사와 잊었던 대한민국의 자유정신이 다시 살아난다. 또한 파란만장한 ‘이승만의 90년 인간사’는 미래를 개척하는 젊은이들에게 용기를 주고 ‘롤 모델’로 다가설 것이다.
    특히 4강 맹수들의 사면초가 속에서 '자유 독립국가'를 창조해내는 불굴의 의지와 비전, 신생 약소국 대통령의 지도자 조건, 각국 지도자들이 따르고 존경한 이승만만의 글로벌 리더십이야말로 시급히 연구 정립해야할 현대사 최대 과제이다. 좌파들의 '친북사관'이 판치는 우리 역사학계가 하루 빨리 정상화되는 것이 선결문제임은 물론이다. 눈앞에 벌어지는 미중(美中) 패권경쟁시대, 이 시대가 이승만의 리더십을 간절히 요구하고 있다.

    인보길 /뉴데일리 발행인/이승만 연구소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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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재] 이승만과 그의 시대(2)--이주영 /건국대 명예교수, 이승만연구소 공동대표

    백재학당 입학, 영어조교...상투를 자르다

    한국 언론사상 최초의 일간지 '매일신문' 창간

    과거시험에 모든 희망을 걸다

       그의 집안은 당시의 모든 조선인들처럼 유교의 가르침에 따라 살았다.
       어머니는 당시의 보통 아낙네들처럼 어린 아들을 데리고 절에 다녔다. 그 절들은 북한산 대남문 밑의 문수사와 옥수동의 미타사였다.
       나중에 그가 대통령으로 있던 1957년에 82세의 나이로 문수사까지 걸어 올라갔고, 그 때 써 준 현판이 그 절에 아직 보존되어 있다.   
      그런 전통적인 집안에서 서양 의학을 알게 된 것은 큰 충격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당장 집안에 무슨 변화가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변화의 불씨를 던져준 것만은 분명했다.
       어머니의 유일한 희망은 어린 이승만이 빨리 과거시험에 합격해서 어려운 집안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그래서 없는 살림에도 10년을 서당에 보냈던 것이다.
       한시라도 빨리 과거시험에 합격시키려는 마음에서 13살이 되는 1887년부터 과거에 응시토록 했다. 본래는 15살이 되어야 응시자격이 주어지는 것이었지만, 그 해만은 왕세자의 나이와 동갑인 14살까지 허락했다. 그러나 마음이 조급했던 이승만의 부모는 한 살을 늘여 응시를 하게 했던 것이다.
       과거를 보는 날 이승만은 신무문을 통해 경복궁으로 들어갔다. 가난했기 때문에 굽 높은 나막신을 신고 들어가다가 문지기 포졸의 제지를 받자, 그것을 벗고 맨 발로 들어갔다.
       그러나 시험결과는 불합격이었다.
       그 후로도 그는 계속 응시를 했지만, 헛수고였다. 당시는 정부의 부패로 돈과 권력이 없이 과거에 합격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던 것이다.
       그처럼 부패한 과거제도마저도 1894년의 갑오경장으로 폐지되었기 때문에, 19세의 이승만은 삶의 목표를 잃게 되었다.

  • ▲ 이승만 10세때, 1885년 8월 미국 선교사 H.G.아펜셀러가 세운 배재학당. 1886년6월 고종이 '배재학당'이란 이름을 내렸다. ⓒ
    ▲ 이승만 10세때, 1885년 8월 미국 선교사 H.G.아펜셀러가 세운 배재학당. 1886년6월 고종이 '배재학당'이란 이름을 내렸다. ⓒ

    영어나 배운다는 생각에서 배재학당에 입학

       그때 도동서당 친구였던 신긍우가 찾아 와서 미국 북감리교 선교사 헨리 아펜셀러가 세운 신식학교인 배재학당(培材學堂)에 가자고 끈질기게 권유했다. 그 친구는 나중에 배재학당 교장과 주일대표부 대사를 지낸 신흥우의 형이었다.
       이승만은 영어를 배운다는 가벼운 기분으로 1895년 4월  2일에 배재학당에 입학했다. 물론 부모에게는 알리지 않았다.
       배재학당에서 이승만은 영어에 대한 특출한 재능을 나타냈다.
    그는 방과 후에 미국인 교사들을 찾아다니며 궁금한 것을 물으면서 영어를 익혔다. 그리하여 입학 6개월 만에 신입생들에게 초보 영어를 가르치는 조교가 되었다. 

  • ▲ 이승만 10세때, 1885년 8월 미국 선교사 H.G.아펜셀러가 세운 배재학당. 1886년6월 고종이 '배재학당'이란 이름을 내렸다. ⓒ

     영어는 그에게 생계 수단이 되기도 했다. 새로 온 미국인 선교사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면서 용돈을 벌었기 때문이다. 
       그가 진고개의 제중원에 의료선교사로 온 조지아나 파이팅 양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고 받은 20달러라는 큰 돈을 집에 내놓자, 온 가족이 깜짝 놀랐다. 그 때서야 비로소 이승만은 배제학당에 다닌다는 것을 가족에게 말할 수 있었다.
       당시 배재학당에는 나중에 한글학자로 유명해진 주시경(周時經, 1876-1914), 당시의 이름은 주상호)도 다니고 있었다. 그래서 “주시경은 한글을 연구하러, 이승만은 정치를 하러 배재를 다닌다”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이충구, 이익채, 유창렬과 같은 개화당의 열혈 청년들과 어울리면서 국가의 장래를 걱정했다.   
       이승만은 배재학당에서 발행하는 학생 신문<협성회보>의 편집장을 맡았다. 그 논조는 정부에 비판적이었다. 따라서 아펜셀러는 학생들이 정부와 충돌하는 것을 막기 위해 기사를 검열하려 했다.
       그러자 이승만 등은 학교의 간섭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신문을 만들고 싶어 했다.
       그들은 10년 전 일본에서 들여온 인쇄기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그것을 찾아냈다. 그리고는 우리나라 최초의 일간지인 <매일신문>을 한글과 영문으로 발간했다. 언론인으로서의  첫 걸음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 ▲ 이승만이 발행한 신문들. 배재학당 토론모임 협성회 대표로서 '협성회보'를 발간했다. 졸업후 이승만이 창간한 '매일신문'과 '제국신문. 이것은 한국 언론사상 최초의 민간 일간지들이다.
    ▲ 이승만이 발행한 신문들. 배재학당 토론모임 협성회 대표로서 '협성회보'를 발간했다. 졸업후 이승만이 창간한 '매일신문'과 '제국신문. 이것은 한국 언론사상 최초의 민간 일간지들이다.

    [편집자 주] 이승만은 배재학당 재학시절부터 언론인으로서 개화,구국운동에 전념하였다.
    배재학당 청년모임 협성회 회장이던 이승만은1898년에 주간지 협성회회보를 창간했고, 매일신문, 제국신문을 연달아 창간 발행하였다. 열렬한 논객 이승만은 주간지에 만족못하고 스스로 일간신문 '매일신문'을 창간하여 사장 겸 기자로 활약했다. 날마다 구국의 열변을 신문에 쏟아내는 이승만 기자, '기자'(記者)'라는 칭호를 처음 사용한것도 이승만이다. 1898년 4월9일 창간한 '매일신문'은 우리나라 언론사상 최초의 일간지다. 이승만이 서재필과 함께 발행하던 '독립신문'은 주 2~3회 배포되다가 독립협회 해산뒤 일간지로 전환했으나 끝내 폐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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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로운 문명에 적응하기 위해 상투부터 자르다
      
       배재학당에서 이승만은 훌륭한 서양인 교사들을 만났다. 특히 미국인 W.A. 노블 박사와 D.A. 벙커, 영국인 F. 올링거 박사 등과 가깝게 지냈다. 그는 선교사들로부터 영어로 된 책과 신문을 빌려 읽었다.
       제중원의 의료선교사로서 나중에 연희전문학교 교장이 된 O.R. 애비슨 박사와는 매주 일요일에 만나 대화를 나누었다. 이승만의 과격한 성격을 걱정한 애비슨은 그에게 신중하도록 권유하기도 했다.
       또한 이승만은 영문으로 ⟪조선역사⟫를 쓰고 있던 호머 헐버트 박사에게는 수시로  만나 한국의 문화에 대해 자문해주었다.
       애비슨과 헐버트는 한국이 해방을 맞아 이승만이 대통령이 될 때 까지 오래 살면서 이승만을 도왔다.   

  • ▲ 이승만에게 영어와 신문명을 가르쳐준 미국 선교사 노블 박사, 한국식 예복을 입고 배재학당 직원들과 찍은 사진.
    ▲ 이승만에게 영어와 신문명을 가르쳐준 미국 선교사 노블 박사, 한국식 예복을 입고 배재학당 직원들과 찍은 사진.


       이승만이 훗날 회고했던 대로, 그가 미국인 선교사들로부터 배운 내용 가운데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정치적 자유’의 개념이었다.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평등하고 동등한 권리와 기회를 갖고, 정부를 선택할 권리를 갖는다는 미국인들의 자유주의 사상과 민주주의 제도는 군주제와 신분제의 굴레 속에서 살아온 이승만에게는 너무나 새롭고 놀라운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승만은 사회를 바꾸려 하기 이전에 우선 자기 자신부터 변하려고 했다. 인습의 굴레로부터 벗어나려는 태도를 보이기 위해 우선 생각해 낸 것이 상투를 자르는 일이었다.
       결심이 서자, 그는 양녕대군을 모시기 위한 사당인 지덕사로 달려가서 조상들 위패 앞에 엎드려 시대의 변화에 따르겠다는 선고식을 마첬다. 그리고는 O. R. 애비슨 박사의 집으로 가서 그의 도움으로 상투를 잘랐다.
       그것은 개화파 청년으로서 개인의 차원에서나마 근대화에 착수해 보려는 결단에서 나온 과감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자신과 가족에게는 너무 큰 충격이었기 때문에 며칠 동안은 집에 갈 용기를 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