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선진화포럼(이사장 남덕우)은 30일 서울 명동 은행회관에서 제64차 월례토론회를 개최했다. 이날 토론회는 정치 분야 전문가로 구성된 패널이 ‘대한민국의 진정한 보수란 무엇인가’란 주제에 대해 논의한 뒤 각계 인사, 대학생 등 참석자가 질의응답을 통해 의견을 나누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토론회는 이병혜 명지대 디지털미디어학과 교수의 사회로 진행됐으며 박성현 정치평론가(뉴데일리 논설위원)가 주제발표를 맡았다. 패널로는 강규형 명지대 기록정보과학 전문대학원 교수, 김영호 성신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가 참여했다.

    박성현 평론가는 주제발표에서 한국 보수와 진보의 의미를 다시 정립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보수와 진보라는 구분 대신 개혁을 지향하는 리버럴과 과거 및 전통을 지향하는 보수로 나눠야 맞다”고 밝혔다. 이어 “자유민주주의 국가와 세계시장 진출, 4.19 이후 민주화 흐름은 보수가 아닌 개혁 리버럴이 이끈 것”이라고 강조했다.

    박 평론가는 “1980년대부터 종북 운동권이 이 개혁 리버럴에서 이탈했다”고 구분한 뒤 “종북 운동권이 정계에 속속 입성하는 가운데 주류 제도권은 자신의 무능함을 통렬하게 반성하며 자생초 정신 같은 도덕철학을 확립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강규형 교수는 “자칭 보수라 주장하는 상당수를 비롯한 기득권이 자신들의 인생을 신나게 사는 것에만 관심이 있어 ‘생각 없는 얌체’에 불과하다”며 “급변한 시대정신도 파악하지 못한 채 권력의 보호막 속에서 안주해 야성적으로 성장한 좌파에 비하면 무력하다”고 덧붙였다.

    강 교수는 “좌파가 1980년대 이후 밑바닥에서부터 치열하게 사회운동을 전개해 성공했다”며 “한국 보수가 거듭나려면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며 그들과 경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영호 교수는 “양극화가 심각해진 가운데 복지 포퓰리즘이 국가재정에 부담을 주고 성장 동력을 저해하지 않도록 한국 보수가 더 나은 대안으로 사회안전망 확충에 힘써야 한다”고 밝혔다. 그는 한국 보수주의가 과거사에서 버릴 것은 버리고 계승할 것은 계속 발전시키려는 노력이 부족했다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또 “한국 보수 세력은 관용의 정신으로 진보와 건전한 담론 경쟁을 벌일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며 “보수와 진보가 공존하고 경쟁하면서 국민에게 이념적, 정책적 선택의 폭을 넓혀 줘야 한다”고 덧붙였다.

    <발제문 전문>

    보수는 ‘주의’가 아니라 화두이다

    박성현(정치평론가/뉴데일리 논설위원)


    • 가짜진보와 짝퉁보수
     YS 정부 때부터 우리 정치는 진보-보수 구분틀을 사용해 왔다. 그런데 전 세계의 살만한 나라 중에 이 구분틀을 널리 사용하는 사회는 우리 밖에 없다. 다른 선진국에서는 진보-보수 구분틀이 아니라, 리버럴-보수 구분틀을 사용한다. 진보-보수 구분틀은 착각이다. 진보는 가짜이고, 보수는 짝퉁이기 때문에.

    차라리 반동이라 불러라
    진보(progressive)는 처음부터 마르크스-레닌 전체주의자들의 개념이었다. 진보는 항상 ‘인류 역사’를 떠벌이기 때문이다. 개인이 아니라 인류를 이야기하고, 삶이 아니라(추상화된, 신격화된) 역사를 이야기한다. 그들은 ‘나’--1인칭단수(the first person singular)를 “문법적 허구”(grammatical fiction)라고 불렀다. ‘나’는 문법에서나 존재하는 개념일 뿐, 현실적 존재가 아니라는 주장이었다. 현실적 존재는 ‘인류의 역사’ 뿐이라는 것. 그 역사가 사회주의를 향해 ‘진보’한다는 것. 그래서 진보의 반대말은 보수가 아니라 ‘반동’(reactionary)이다. 역사 진보의 법칙에 대해 ‘반작용’하는 것—이것이 반동이다. 그렇다면, 스스로 진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마땅히 상대방을 ‘반동’이라 불러야 한다. 네 글자--‘반동분자’(reactionary element)라고 부르면 뜻이 더 명확해진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는 전혀 다른 일이 벌어졌다. 1991년에 소련이 붕괴한 직후, 즉 YS 때에 운동권은 족보도 없는 구분틀인 ‘진보-보수’를 꺼내놓았다. 그리고 우리 사회의 천박한 제도권 언론은 날름 이 구분틀을 받아먹었다. 왜 그랬을까? ‘보수’가 되는 것이 우리 사회 상류층의 꿈이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 상류층의 로망은 바로 “유서 깊은 보수가 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상대방이 꺼내놓은 진보-보수라는 해괴망측한 구분틀을 냉큼 받아들였던 것이다!

    대한민국은 개혁 리버럴이 만들었다
    “대한민국은 지난 67년 동안 일련의 경제적, 정치적 개혁을 이루어냄으로써 스탈린-모택동-김일성 식 적화를 막고, 전 세계에서 가장 빨리 번영한 국가가 되었다”

    앞으로도 상당기간 동안 대한민국은 개혁 외발 자전거를 타야 한다. 그 길 밖에는 없다. 대한민국 사람은 태생적으로, 과거/전통 지향적인 보수가 아니라 개혁 리버럴들이다. 이승만과 박정희의 정신세계는 개혁 리버럴이다. (사사오입 개헌 이전의) 이승만과 (유신 이전의) 박정희는, 당시 시대의 기준으로 보면 엄청난 리버럴이었고 개혁가였다. 이승만은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바탕한 단독정부 수립에, 박정희는 세계시장 체제를 겨냥한 수출 공업화에 민족의 운명을 걸었다.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노선은 사실상 정치적 자살에 가까운 행보였다. 그는 존재하는 현실을 인정한 것이 아니라, 현실 안에 잠재된 가능성(latent possibility)에 모든 것을 걸었다. 이는 개혁이고 리버럴이다. 박정희 역시 마찬가지이다. 1960년대 초의 후진국 공업화 이론은 죄다 ‘수입대체’(import substitute) 뿐이었다. 당시의 세계시장이란, GATT에 의해 커버되는 북미, 일본, 서유럽뿐이었다. 지금 우리가 보는 세계시장, 글로벌문명은 훨씬 나중에 발전된 체제이다.
     지금의 글로벌문명(global civilization)은 1991년 소련 해체에서 1994년 WTO 체제의 출범을 거쳐 1995년 인터넷의 상업화—이 해에, 그 동안 인터넷 망을 운영해 오던 미국의 국가과학재단망(NSFNET)이 해체되고 영리 목적의 인터넷 통신서비스가 탄생하게 되었다—를 통해 시작됐다. 1991년에서 일어난 이 세가지 변화를 나는 ‘글로벌문명의 확립 분수령’이라고 본다.

    운동의 에너지 역시 개혁 리버럴이다
     이승만과 박정희가 이끄는 ‘위로부터의 개혁’만 존재했던 것이 아니다. 특히 4.19 이후 민주주의, 즉 정치 개혁을 향한 거대한 각성과 움직임이 있었다. 이후 80년대 초중반까지 약 4반세기 동안 운동의 근본 페이소스(pathos)는 무엇이었던가? 개혁 리버럴 정신에 대한 호소 아니었던가? 그것이 김수영, 김지하, 김민기의 정신세계 아닌가? 그러나 1980년대 중반부터 종북이 운동권을 장악하면서 운동권에는 전체주의 패거리 근성, 떼근성이 뿌리박았다. “진실에 대한 존중”, “개인 실존에 대한 존중”이 사라지고 “떼에 유리한 것을 ‘진실’이라 부르는 습관”과 “떼에 대한 존중”이 자리 잡았다. 이승만과 박정희가 개혁 리버럴 정신에서 이탈함으로써 스스로 오욕의 길로 들어섰듯이, 운동 역시 개혁 리버럴 정신을 포기함으로써 종북의 길로 타락했던 것이다.
    4.19 이후 대한민국 운동의 역사는 ‘종북이 개혁 리버럴의 운동에너지를 장악해 간 역사’였다. 이 장악은, 1991년 김지하가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란 글을 쓴 이유로 운동권에서 매장되었던 사건에 의해 일단 완성된다. 종북이 완벽히 승리했던 것이다. 이제 우리 사회에서 진보는 ‘평양을 옹호, 변호하는 데에 급급한 태도’를 가리키는 단어가 되고 말았다. 진보의 핵심에는 종북—평양을 숭배하고 추종하는 집단—이 들어 있다. 그러나 지금 종북의 뿌리—평양이 붕괴해 가고 있다. 이제 ‘시민사회 형성에 관한’ 개혁 리버럴 정신이 부활해야 한다. 그래서 ‘국가 발전에 관한 개혁 리버럴’ 에너지를 부추기고 강화하는 역할을 해 주어야 한다. 그 때 우리는 비로소 통일 한반도를 감당할 수 있는 [정신의 힘]을 갖출 수 있다.

    강철서신과 잠수정
     통합진보당의 핵심에는 북한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조직에서 핵심적 역할을 했던 사람이 다수 있다. 대표적인 인물이 ‘재건민혁당’ 경기남부위원장이었던 이석기이다. 그는 통합진보당의 비례대표 2번을 맡아 19대 국회에 당당히 입성했다. 우리 사회의 종북 인맥은 인혁당-통혁당-남민전으로 이어지는 60~70년대의 종북—나는 이를 ‘구세대 종북’이라고 부른다—이 있고, 1980년대 중반 이후에 만들어진 ‘386 종북’이 있다.
     구세대 종북의 핵심은 통혁당이다. 구세대 종북 3대 사건 중에, 북한으로부터 ‘지하당’ 자격을 인정받은 유일한 조직이 통혁당이다. 통혁당에 대해 주목할 점은, 1955년에서 1956년에 걸쳐 김일성이 남노당 계열을 대대적으로 숙청한 다음에, 최초로 김일성체제에 충성을 맹세한 남측 조직이었다는 점이다. 북으로 넘어간 선배들을 개죽음시킨 체제를 상전으로 모시는, 정신적 마조키스트 전통을 세운 것이 바로 통혁당이다. 386 종북은 1985년에 김영환이 물고를 텄다. 김영환은 이 해에 ‘강철서신’이라는 팜플렛을 썼다. 이 팜플렛은 “1955년에 김일성에 의해 미 제국주의의 간첩으로 몰려서 죽은 박헌영은 정말 미국의 간첩이었을까?”라는 문제를 제기한 후 “간첩이었다”고 결론을 내리면서, 김일성체제를 상전으로 받들어 모실 ‘마음의 자세’를 준비시키는 문건이었다.
     김영환은 1991년에 강화도에서 잠수정을 타고 월북해서 김일성을 만나고 북한 노동당에 입당한 후 미화 40만 달러의 공작금을 받아서 민혁당을 조직한다. 그러나 그는 줄곧 ‘수령의 무오류성(infallibility)’—수령의 행동과 말은 절대적 진리이다 라는 믿음—에 대해 의문을 제기해 오다가 1997년에 스스로 민혁당을 해체하고 전향한다. 이때 해체에 반대한 인물들이 독자적으로 간첩과 접선해서 북한과의 연결선을 확보하고 지하당을 재건한다. 이것이 재건민혁당이다. 이 인물들이 바로 하영옥, 이석기 같은 사람들이다. 요즘 신문 지상에 떠들썩한 ‘경기동부연합’은, 재건민혁당의 경기남부위원회가 활용한 대중 공개조직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정신이상자와 배부른 돼지들
     재건민혁당 관련자들처럼 진한 종북주의자들이 이제 정당정치의 전면으로 나서고 국회의원 뱃지를 달려고 하고 있다. 밝혀진 사실로만 보아도, 이들은 불과 10여년 전까지 간첩과 접선하는 지하당 활동을 하던 사람들이다.
    도대체 우리 사회 주류(主流)는 얼마나 무원칙하고 무능하길래, 종북활동가들이 대한민국 정치를 쥐락펴락하는 상황이 되었단 말인가? 세계 7, 8위의 무역대국이고, 선진국 진입을 눈앞에 두고 있는 고도 지식기반사회(knowledge-base society)임에도 불구하고, 거덜난 전체주의 체제를 추종하는 정신이상자들이 정치권의 전면에 나서서 정치를 뒤흔드는 상황 아닌가! 종북을 탓하기에 앞서서 주류 제도권(mainstream establishment) 내부를 통렬하게 반성해야 한다. 우리 사회의 주류 제도권은 윤리, 가치, 이념이 실종된 무척추, 무뇌아에 지나지 않는 것 아닌가? 자기 자신의 원칙과 기준을 정립하지 못 한 배부른 돼지들 아닌가? 무엇인가 근본적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 다가오고 있다. 태양이 머리 위 천정(天頂)에 떠서 사물의 그림자를 걷어버리고 진실을 명명백백하게 드러내는 순간—위대한 정오(正午)가 다가오고 있다. 그 때 우리 건강한 시민들은, 정신이상자들에게는 정신과 입원 치료를, 배부른 돼지들에게는 울타리가 튼튼히 정비된 돼지우리를 제공할 것이다.

    보수주의는 예외적 성공이다
     보수주의 정치사상은 우리에게 맞지 않는다. 너무 찬란하고 너무 유서 깊고 너무 고귀한 역사적 배경, 역사적 토양 위에서만 자라는 희귀 생명종이기 때문이다. 선진국 중에서 보수주의 정치사상이 뿌리박은 나라는 영국과 미국, 두 나라 밖에 없다는 점만 보아도 이를 알 수 있다. 현실 정치에서 보수주의 정치사상이 뿌리박으려면 그 정치문화가 엄청나게 성숙해 있어야 한다. 지금으로부터 2백여 년 전 버크(E. Burke)는 다음과 같은 유세 연설을 하고도 브리스톨(Bristol)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여러분! 저는 여러분의 대리인(delegate)으로서 국회의원이 되는 것이 아니라 대표자(representative)로서 국회의원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지역의 이익과 국가의 이익이 충돌할 때에 저는 서슴없이 국가의 이익을 옹호할 것입니다.”

    버크의 다음과 같은 연설은 인류가 (그의 시대로부터 120년 후에) 전체주의로 치달을 것이라는 점을 정확하게 경고하고 있다. 그래서 버크는 ‘신들린 예언자’(The Divine Prophet)이라고 평해진다.
    “지금 부수고 만들겠다는 것이 벽돌 쪼가리나 통나무를 그 재료로 삼은 것입니까? 사람이 재료가 된 것 아닙니까? [자의식이 있는 존재](sentient being)에 대해, 그의 상태, 여건, 습관을 갑작스레 바꿀 것을 강제하게 되면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불행하게 됩니다. 아, 그러나 지금 파리의 국회의원들 사이에는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혹함과, 어떤 모진 짓이라도 해낼 수 있는 자신감이 가장 중요한 자격 조건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들에게는 개인의 의지, 희망, 필요, 자유, 노력, 희생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들이 만들어낸 정치체제에서는 개체성(individuality)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국가만 있을 뿐이다. 모든 것은 ‘힘’을 위해 존재한다. 모든 것은 ‘힘’의 사용을 위해 희생된다. 이러한 국가는 그 체제 원리, 슬로건, 정신, 운영 등 모든 측면에 있어 선군(先軍) 원칙−군사를 최우선적인 것으로 삼는 원칙−이 지배한다. 이런 국가의 목적은 지배와 정복이다. 세뇌에 의해 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하고 총칼에 의해 사람들의 몸을 지배한다.”

    도대체 버크는 이 같은 깨달음을 어디서 얻었을까? 그의 정신은 그의 시대로부터 6백여 년 전인 대헌장(Magna Carta)까지 쉽게 거슬러 오른다. 6백 년 세월에 걸친, 당당하고 자랑스럽고 고귀한 전통이 바로 버크의 정치사상—영미 보수주의—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이 같은 사정은 링컨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링컨은 미국 공화당을 만든 핵심 멤버 중의 한 명이고, 공화당이 배출한 첫 대통령이다. 그는 “건국의 아버지들의 정신을 중시한다”라는 미국 보수주의 전통을 확립시킨 사람이다.
    링컨 시대의 최대의 쟁점은 새로 개척되는 변경주(準州, territory)에서 노예제를 둘 것인가 말 것인가라는 이슈였다. 이에 대해 링컨은 건국의 아버지들의 사상과 행적이, “가능하면 노예제도를 확대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에 있었다는 사실을, 역사적 증거를 통해 밝혔다. 노예제를 변경주로 확대하지 않는 것, 인간 사이의 불평등을 악화시키지 않는 것이 바로 미국의 공화주의 가치(republican value—다수결로 흔들거나 도전해서는 안 되는 가치)라는 것을 밝혔던 것이다.
    링컨 공화주의(미국 버전의 보수주의)의 뿌리는 짧게는 미국독립혁명 시절, 길게는 16세기 초부터 시작된 이민자 사회의 탄생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들은 그리스 로마 시대 이래 다져진 유럽 사상을, 신천지 아메리카 대륙에서 구현했던 것이다. 이렇듯 영미 보수주의는 최상의 전통과 토양에서 자라난 가장 예외적이며 가장 고귀한 정치사상이다.

    정치사상은 미덕에 관한 스토리이다
     정치사상은 강력한 실천력을 가진 도덕철학(moral philosophy)에서 나온다. 도덕철학은, 미덕(virtue)에 관한 입맛(taste)이며 가치평가(evaluation of values)이다. 니체(F. Nietzsche)의 철학에서도 명확히 나타나듯이, 살아있는 맹렬한 도덕철학은 삶과 죽음을 가르는 기준—미덕 체계, 즉 정치사상을 만들어낸다. 정치사상은, 도덕철학에서 만들어지는, ‘미덕에 관한 스토리’인 것이다. 영미 보수주의는 첫째, ‘예로부터 다져져서 내려온 제도를 중시하는 태도’를 미덕으로 보았다. 그러한 미덕을 ‘입맛에 맞는다’ 혹은 ‘가치 있다’고 본 것이다. 이를 ‘전해져 내려온 제도에 관한 존중’(philosophy of prescription)이라고 부른다. 둘째, 예로부터 다져져서 내려온 가치를 “입맛에 맞는다” 혹은 “가치 있다”고 본다. 이를 ‘전해져 내려온 가치에 관한 존중’(presumptive virtues)이라고 부른다. 이 두 개의 미덕이 바로 영미 보수주의의 내용이다. 보수주의 정치사상이 영미 보수주의를 떠나서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 두 개의 미덕이 바로 보수주의 정치사상의 내용이다.

    정신의 귀족
    사람들은 흔히, 보수주의를 영국과 미국이라는 토양과 분리해 내서, ‘예부터 내려온 제도와 가치에 대한 존중’을 뜻하는 태도로서 고스란히 수입할 수 있다고 착각한다. 그 착각이 빚어낸 우스꽝스런 희비극이 미시마 유키오의 죽음이다. 미시마 유키오는 심미주의자이고 스타일리스트였다. 그는 보수주의의 핵심이 ‘예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제도와 가치에 대한 존중’임을 깊게 이해했던 사람이었다. 그 때문에 그는 일본 전통 제도—천황제도를 찬양했으며, 일본 전통 미덕—사무라이 정신에 집착해서 1968년 파리 데모 이후 일본에서 급진 좌파의 움직임이 최고조에 달하자, 1970년 11월 25일에 그는 4명의 동료와 함께 자위대 동부사령부 산하 토쿄 기지에 들어가서 배를 그었다. (버크가 사자후를 토했던 1800년을 기준으로) 영국의 6백 년 세월, (링컨이 대통령 선거에 진입했던 1860년을 기준으로) 미국의 3백 50년 세월 동안 다져진 것과 같은 빛나는 전통에 버금가는 것이 아니라면, 예부터 내려온 제도와 가치를 본받겠다고 설칠 일이 아니다. 미시마 유키오는 ‘과거를 본받는 것’을 숭배했지만, 그 과거의 컨텐츠 자체가 별로 숭고하지 못 하다는 점은 깨닫지 못 했던 것이다. 보수주의는 수십 년이 아니라, 수백 년에 걸친 과거가 숭고하고 고귀한 전통을 가진 땅, 이 과거로부터 내려온 제도와 가치가 곧바로 현재에 적용될 수 있는 땅에서만 뿌리박을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보수주의 자체를 수입할 처지가 못 된다. 그렇다면 이제, 툭툭 털고 “보수여, 안녕!”을 외치면 될까? 아니다. 보수주의 정치사상이 우리의 척박한 역사적, 문화적 배경에 맞지 않는다면 보수주의를 만들어낸 정신세계 자체를 통째로 소화하면 될 것 아닌가?  우리에게 보수주의는 정치사상이 아니다. 보수주의를 만들어낸 특정 도덕철학으로 이끌어 주는 화두가 되어야 한다. 이 특정 도덕철학은 ‘정신의 귀족’을 만들어내는 도덕철학이다. ‘정신의 귀족’에 이르게 해주는 것—이것이 바로 ‘화두로서의 보수주의’가 해내는 역할이다. 일찍이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그래! 형제들!/새로운 귀족 집단이 필요한 거야!/폭도의 지배를 막기 위해서./폭군의 지배를 막기 위해서./새 율법 서판에 새 율법을 이렇게 써 넣기 위해서./“고귀하게 되어라!”/아! 형제들!/나는 자네들을 새로운 귀족이 되는 길로 이끌어 귀족에 봉(封)하는 거야!/자네들은 미래의 씨를 뿌리고 미래를 낳고 미래를 키워야 돼./내가 봉한 귀족은 돈으로는 살 수 없어./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은 전부 싸구려뿐./어떤 집안, 어떤 핏줄 출신인지가 아니라,/“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 ”를 귀족으로서 자네의 명예로 삼아야 돼!/현재의 자기 자신을 [넘어서기] 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자네 의지와 발걸음을 귀족으로서 자네의 명예로 삼아야 돼!
    (‘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다’, 56:77~56:90, 박성현 번역)

    자생초: 자유, 생명, 촛불
    정신의 귀족을 만드는 도덕철학, 즉 (보수주의 정치사상을 만들어낸 것과 동일한 문맥에 있는) 도덕철학, 버크와 링컨의 정신세계와 동일한 문맥에 있는 도덕철학에 대해선 아직 이름이 없다 그래서 뒤늦게 이곳 한국에서, 이를 ‘자생초 정신’—자유, 생명, 촛불 정신이라고 이름 지었다.  ‘자생초 정신’이라 부른 이 도덕철학은 버크/링컨의 정신세계(영미의 온건 Episcopalian 프로테스탄티즘에서 출발한, 개인 존엄성 및 생명흐름에 관한 존중), 니체의 실존적 개인주의(진실옹호를 통해서만 나다움에 이를 수 있다는 관점), 드러커(P. Drucker)의 ‘사회생태주의’(Social Ecology, 사회의 지속과 변화를 통합하여 보는 관점)를 융합한 철학이다.

    첫째, 자유.
    자유는 개인실존의 존엄성을 뜻한다. 개인실존은 우주, 세계와 분리된 ‘나’를 느끼는 상태이다. 이 ‘나’가 인간조건(human condition)의 출발점이고 종착점이다. 전체주의 인간심리를 고발한 세계적 명작 ‘Darkness at Noon’(‘한 낮의 어둠’으로 번역되어 있음)에서, 스탈린 숙청으로 사형수가 된 ‘혁명원로 볼셰비키’ 루바쇼프(Rubashov)는 처형을 몇 시간 앞두고 개인실존을 깨닫는다. 작품은 이렇게 그린다.
    그는 벽을 두들겨서 옆방 죄수에게 한 단어로 된 짧은 메시지를 보냈다. 2번 그리고 4번. 영문 알파벳 25자를 다섯 글자씩 다섯 줄로 배열한 문자표. 2행의 4번째 문자. ‘I’(나)…그는 이제까지 한 번도 마음먹고 ‘I’를 두들긴 적 없었다. 아마 무의식 중에서라도 한번도 두들긴 적 없었을 것이다…루바쇼프는 생각했다.
    “인류의 고통을 없애는 거대한 사회혁명—사회적 수술을 집행한다고? 그런 수술이 과연 정당화될 수 있을까? ‘인류’라는 추상 개념을 대상으로 한다면 아마 정당화될 수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나’—1인칭 단수에 적용된다면? 2번-4번 두들김이 뜻하는 ‘나’에 대해 적용된다면? 뼈, 살, 피, 피부로 이루어진 진짜 사람에 대해 적용된다면? 혁명은 우스꽝스런 짓이라고 결론지을 수 밖에 없는 것 아닌가!”
    자유는 인간이 사회의 부속품, 혹은 전체주의 체제의 좀비(zombie)가 아니라, 개인실존으로서 자기자신을 느끼고 살아가기 위한 조건이다. 그래서 자유가 소중하다. 버크와 링컨의 정신세계를 살피다 보면 인간을 개인실존으로 파악하고, 바로 그 때문에 ‘자유’를 소중한 것으로 보는 관점을 느낄 수 있다.  자유를 “향유하는 방종”이 아니라 “개인실존으로서 자기자신을 느끼고 살아가기 위한 조건”으로 보는 순간 자유민주주의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이해된다. 자유민주주의라는 정치체제를 만들어낸 도덕철학적 원리가 보이기 시작한다. 이 도덕철학적 원리가 내면화(internalize), 개인화(personalize) 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속삭임이 들리기 시작한다. 이 속삭임은 이미 정치체제의 차원이 아니라, 개인의 가장 내밀한 미덕—세상과 인생을 보는 관점(Perspective, Point of view, Optik)—에 관한 호소이다.
    나를 완성시켜 줘. 나를 너의 철학으로 받아들여 줘. 나를, 너의 삶의 원칙으로 받아들여줘. 그 때 내 모습은 이미 정치체제에 관한 용어—‘자유민주주의’가 아니야. 그보다 훨씬 더 개인적인 것—미덕(virtue)이 되지. 도덕철학(moral philosophy)이 되지. ‘개인 실존의 존엄성과 자긍심’이 되지. 나 자유민주주의는 그것을 장려하고 부추기는 제도의 이름일 뿐이야.

    둘째, 생명.
     생명은 흐름이다. 버크는 ‘영구사회계약론’(contract of eternal society)을 주장한다. 즉 사회계약은 당대의 살아 있는 사람 사이의 계약이 아니라, 까마득한 선조에서 까마득한 후손에 이르기까지 맞닿아 있는 계약이라고 말한다. 또한 진실이 생명이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진실은 생명이 생존하고 번영하는 조건을 조명해주는 지식과 정보이다. 과학은 엔지니어링에 대해 아무런 고려를 하지 않는, 무심하고 냉정한 상태에서 추구되듯이, 진실은 생명(혹은 생명번영)에 대해 아무런 고려를 하지 않는, 무심하고 냉정한 상태에서 추구된다. 그러나, 과학을 떠나 엔지니어링이 성립할 수 없듯이 진실을 떠나 생명(혹은 생명의 번영)이 벋어갈 수 없다. 그래서 진실이 생명이다.
    생명존중은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유기견을 동정하는 태도가 아니다. 그것은 ‘생명이 벋어갈 수 있는 현실조건을 냉정하게 직시하는 태도’이다. 앞서 밝힌 것처럼, 지금은 글로벌문명(세계시장 체제, 지구척 차원의 분업-교환-소통의 급속한 발전이 이루어지는 체제)이다. “생명은 진실을 따라 벋어간다”는 깨달음 위에 진실을 옹호하는 사람은 글로벌문명에 대해 다음과 같은 내면화(internalize), 개인화(personalize)된 가치판단을 하게 된다. 글로벌문명의 활용은 ‘기능적, 정책적 선택’을 훌쩍 뛰어넘은 근본적 가치판단의 문제가 되는 것이다.
    글로벌문명을 적극 활용하는 것이 곧 생명의 길이요, 진실이다. 이는 곧 재정건전성의 유지와 교육개혁으로 귀결된다. 지구 60억명의 인구가 고도의 분업-교환-소통 체제를 발전시키는 상황에서 우리는 가장 튼튼한 ‘배’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셋째 촛불.
     촛불은 각성이며 자아이다. 그래서 교회와 사찰에 촛불을 켠다. 정치 행동에 있어서는 광우병 패닉(panic) 발작이 아니라 ‘각성된 자아가 생명에 대해 깊은 애정을 가지고 지킴이 역할을 하는 상태’(vigilance)를 가리킨다. 무엇이 각성이며 자아인가? 개인실존으로서, 자기 자신의 불이익,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생명과 진실을 옹호하는 것—이 길만이 ‘자아됨’(becoming oneself)을 성취할 수 있는 방법이다. 이것이 버크와 링컨의 정신세계이며 니체의 ‘실존적 개인주의’ 철학의 핵심 이다. 촛불은 바로 자아됨을 상징하는 것이다. 버크는 이 상태를 ‘기사도’(chivalry)라고 불렀다. 약자와 생명을 옹호하는 것을 스스로의 자긍심과 명예로 삼는 용감한 태도를 뜻한다.
    영미 보수주의 안에 개혁코드가 내장되어 있는 것은 보수주의가 자생초 정신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버크의 경우, 생전에는 ‘보수주의’라는 단어조차 없었다. 그는 개혁의 화신이었다. 왕권을 축소하고 왕실재정과 국가재정을 분리했다. 보스정치를 뛰어넘어 정당정치를 실현했다. 인도의 식민지지배를 대대적으로 개혁하려는 시도에 평생을 바쳤다. 미국 독립전쟁 전에, 북아메리카에 대해 획기적인 자치권 부여와 세금 면제를 주장했다. 링컨의 개혁성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어쩌면 마르크스가 “나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다”라고 했듯이, (만약 버크 당대에 ‘보수주의’란 말이 있었다면) 버크는 “나는 보수주의자가 아니다”라고 말했을지 모른다.

    부족한 자생초 정신, 강력한 경제 펀더멘탈
    자생초는 보수주의 정치사상이라 불릴 수 없다. 정치사상보다 훨씬 더 근본적인, 인간 존재에 관한 관점이요 도덕철학이다. 영국과 미국에서 자생초 정신은 보수주의를 만들어냈다. ‘예부터 내려온 제도와 가치에 대한 존중’이라는 미덕을 만들어냈다. 프랑스 혁명의 물결이 영국을 위협했을 때 영국의 자생초 정신은 두 개의 미덕(예부터 전해 오는 제도에 대한 존중, 예부터 전해오는 가치에 대한 존중), 즉 보수주의를 만들어냈다 미국의 자생초 정신은 링컨 공화주의(미국의 보수주의의 완성판)를 만들어냈다.
    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무엇을 만들어낼까? 어떤 미덕, 어떤 정치사상을 만들어낼까? 대한민국의 기초를 만들고 번영을 이루게 해 온 두 개의 국가발전전략—자유민주주의와 세계시장체제의 적극활용(인류적 차원의 분업-교환 체제 발전 경향의 적극활용)—이 도전 받고 있는 이 한심한 상황은, 우리의 미덕이 미약하고 타락해 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붕괴해 가고 있는 평양 수령전체주의와 연결된 종북주의자들이 대한민국의 두 가지 근본원리를 조롱하고 약화시키고 있는 위기에서 우리의 자생초 정신은 어떤 미덕을 만들어낼 것인가? 무엇을 ‘미덕’이라 부르고 숭상하는 기풍을 만들어낼까?
     고백하자. 우리에게 자생초 정신은 부족하기 짝이 없다. 그런 정신의 힘이 존재했다면, 수령전체주의와 연결된 정신이상자들이 대한민국 정치를 농단하는 어이없는 일은 애초에 벌어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우리에게 자유는 개인실존의 생존조건이 아니라, ‘향유하는 즐거운 방종’으로 타락했으며, 생명은 ‘진실의 길을 따라 벋어가는 것’이 아니라 ‘싸구려 연민의 대상’쯤으로 치부되고 있으며, 촛불은 ‘각성된 자아’의 상징이 아니라 “청산가리가 미국 쇠고기보다 안전하다”는 엉터리 소리에 속아서 떼를 이루어 울부짖는 패닉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 되고 말았다. 그렇지만 우리는 운이 좋다. 정확히 말하면 땀을 제대로, 아주 많이 흘려놓았다. 그래서 도시무역국가가 아닌 나라로서는 유일하게, 세계시장 체제와 합일체(合一體)를 이룬 상태에 도달했다. 일본이나 독일조차 우리와 비교하면, 세계시장 체제와의 결합 정도에 있어서 만큼은 ‘아직 한참 뒤떨어진 상태’에 있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
     2008년 세계 금융공황에서 대한민국 경제가 보여준 성공적 적응 케이스는, 노벨 경제학상을 받을 논문의 소재가 되고도 남는다. 금융공황이 시작되었을 때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이, “한국은 세계시장 체제와 지나치게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가장 심각한 타격을 받을 것이다”라고 예측했었다. 그러나 실제로 진행된 상황은, “세계시장 체제와 밀접하게 결합한 경제체제가, 자기 내부의 건전성과 역동성을 강력한 수준에서 유지하고 있다면, 세계 경제위기에 대해 오히려 가장 잘 적응할 수 있다”는 새로운 진실을 보여 주었다. 이는 노벨 경제학상을 받을 연구 테마이다.
     세계시장 체제는, 앞서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1991년~1995년 사이의 세 가지 거대한 변화—소련 붕괴, WTO 체제의 출범, 상업적 인터넷 통신의 시작—에 의해 ‘글로벌문명’이라 불러야 마땅한 상태로 진입했다. 약 80년 전만해도, 토인비는 당시 세계를 지배하는 문명을 다섯 개로 나누었다.
    서구문명, 그리스-러시아 문명, 이슬람 문명, 극동 문명, 힌두 문명. 지금 우리는 이 모든 문명들이 녹아서 하나의 ‘글로벌문명’으로 변환되어 가고 있는 드라마를 보고 있다. 만약 토인비가 지금 세상에 대해 글을 쓴다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제 세계에는 하나의 문명—글로벌문명—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의 최대 행운은, 자생초 정신이 준비되어 있지 않음에도, 글로벌문명에 있어 가장 유망한 성공을 거두었다는 점이다. 그 덕에 우리의 머리는 덜 깨어 있지만, 우리의 몸은 매 순간 세계시장 체제에서 땀 흘려서 살아가는 것에 익숙해져 있는 상태가 되었다. 우리 사회의 자생초 정신이 각성된다면, 바로 이 ‘몸이 흘리는 땀’ 덕분이다. 보다 정확하게는, 우리의 생존방식/번영방식이 우리의 정신적 각성을 요구하고 있는 상태이다. 정신의 힘이 아직 턱없이 부족하지만, 몸이 정신의 각성을 끊임없이 요구하는 상태—우리는 이 상태에 접어든지 이제 20년 가까이 되어 간다. 글로벌문명이 본격화된 1990년대 중반 이후, 우리는 내내 이 상태에서 살아왔던 것이다!

    자생초 정신이 만들어내는 미덕: 직업윤리와 대중소통
     지금 사회는 ‘글로벌문명’(인류적 차원의 분업-교환-소통 체계의 급격한 발전)일 뿐 아니라, 지식기반사회(knowledgebase society)이다. 이는 경영학을 만든 사회사상가 드러커(P. Drucker)가 지금으로부터 반세기 전에 정립한 개념이다. “전문지식노동자의 비중이 점점 높아지고, 지식노동이 노동의 일반적 형태가 되어가고 있다”는 지적이었다. 따라서 자생초 정신에서 도출되는 미덕 역시 위 두 가지 특징과 연관되어 있어야 한다. 이 미덕은 둘이다. 하나는 직업윤리(professional ethics). 다른 하나는 대중소통이다.

     첫째, 직업윤리.
    지금 우리 사회의 가장 심각한 위기는 직업윤리의 타락이다. 회계사가 회계데이터를 조작하고, 여검사가 벤츠를 뇌물로 받고 몸을 팔고, 의사가 의료윤리를 어기고 MRI를 빼내고, 의사 및 보건검역학자들이 광우병 패닉에 대해 입도 벙긋하지 않고, 현직 부장판사가 중국공산당 식 사법주권(judicial sovereignty)을 떠들 때 법학자들이 이에 대해 지적하지 않고, 전문경영자가 자신이 봉직하고 있는 회사 M&A에 개입해서 천문학적 뒷돈을 챙기고, 원자력 발전소 운영 엔지니어가 거짓 보고서를 작성하고, 교사는 공교육의 붕괴에 대해 무관심한 채 자신의 철밥통만 챙기고…
     대한민국의 직업윤리는 바닥에 떨어져 있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지금 대한민국 사회를 위협하는 루머, 거짓의 99%는 사회 각부문의 전문지식인들이, 자신의 불편함과 불이익을 감수하고, 용기를 가지고 나서면 해결될 일들이다. 종북주의자라 불리는 정신이상자들이 대한민국 시스템을 조롱하고 헐뜯으며 온갖 교만을 떨고 있는 지금 상황의 뿌리에는 바로, 전문지식층의 직업윤리가 깊게 타락해있다는 심각한 원인이 존재한다.

     둘째, 대중소통에 대한 열정.
    우리 사회를 위협하는 가장 심각한 결핍증상은, 제도권 전문지식층이 대중소통에 대해 아무런 열정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이른바 온건한 보수 혹은 제도권 성향 전문지식인 중에 대중소통에 온 정렬을 기울이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눈을 씻고 보아도 찾아보기 어렵다.
     나날이 고도화되어 가고 있는 글로벌문명 속의 지식기반사회. 지식노동자는 그러한 문명, 그러한 사회의 가장 중요한, 가장 숫자가 많은 구성원들이다. 그 중에서도 많이 배우고 많이 아는, 전문지식인들이 직업윤리를 갖추고, 진실을 대중에게 소통하려는 열정을 가지는 것은 너무나 중요한 일이다. 전문지식층의 직업윤리가 타락한 사회, 대중소통에 대한 열정이 턱없이 부족한 채 오직 ‘전문가의 용어’(jargon)만 사용해서 자기들끼리만 쑥덕거리는 사회, 공교육이 붕괴한 사회, 조금이라도 여유가 있는 집은 자녀를 모두 해외에 빼돌린 채 ‘붕괴한 공교육’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사회는 학벌이 짧고 집안 재산이 부족한 수많은 젊은이들에게 이런 메시지를 끊임없이 보내고 있다.“너는 이 글로벌문명에서, 영원토록 3류 부품으로살아야 하는 신세야. 너무 열 받지 마. 세상이란 게 원래 그런 것 아니겠어?” 이 상태의 심각성을 직시하는 것—이것이 바로 자생초 정신의 각성이며 직업윤리와 대중소통이라는 두 가지 미덕의 출발점이다. 좌, 우, 진보, 보수, 정의, 민족—이런 용어들은 이 두 개의 근본 미덕 앞에서는, 케케묵은 피상적 정치 수사(rhetoric)에 지나지 않는다.

    미덕은 공화(共和) 가치와 맞물린다
     ‘생명이 번영하는 조건’을 국가적 차원에서는 ‘국가발전전략’이라고 부른다. 상당한 시일을 두고 국가발전전략이 성공적이었음이 증명되어,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사용해야 할 전략으로 확립되면, ‘공화주의 가치’로 승화된다. 이 같은 공화주의 가치가, 링컨이 주장한 공화주의 가치(republican value)이다. 감히 다수결을 통해, 머릿수를 내세워 흔들려고 시도해서는 안 되는, 한 국가의 근본 가치이다. 이때 공화주의는 루소(J. J. Rousseau)와 자코뱅(Jacobin)이 만들어낸 전체주의적 공화주의가 아니다. 링컨의 공화주의이다. 다수결, 머릿수를 내세워서 도전하거나 훼손해서는 안 되는, 한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몇 가지 근본 가치를 뜻한다. 공화주의 가치에 대한 도전은 “내전을 하자”는 이야기이다.
     ‘국가발전전략’은 이제 ‘공화주의 가치’가 되어야 마땅한 상태가 되었다. 하나는 자유민주주의. 다른 하나는 글로벌문명(세계시장 체제)의 적극 활용(인류 차원의 분업-교환-소통 체계의 적극 활용)이다. 이 두 공화주의 가치는 사회적 차원에서 표현된 자생초 정신에 다름 아니다. 자유민주주의가 소중한 것은 개인실존의 존엄성을 확보할 수 있는 체제이기 때문이다. ‘방종을 향유하는 상태’가 아니라, ‘개인실존의 존엄성이 순조롭게 실현될 수 있는 상태’—우리는 이를 ‘자유’라 부른다.
    글로벌문명을 적극 활용하는 것을 옹호하는 까닭은, 그것이 생명, 특히 한반도 사람들의 생명이 벋어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통일 한반도는, 세계를 누비는 역동적 인간들의 발진 기지가 되어야 한다. 그 때 비로소 우리는 5천년 동안 무지막지한 블랙홀의 중력으로 우리를 끌어당겨 왔던 ‘대륙의 폭력성’(continental violence)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

    촛불은 내려가며 탄다
         욕망, 시비,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세상 속으로 뛰어든다. 종종 자기 자신의 이익, 입장, 관점을 뛰어넘어 진실과 생명을 옹호한다. ‘머리의 정직성’(intellectual integrity)과 ‘진실에 대한 용기’(courage for truth)는 때로 그를 세상과 정면 충돌시켜서 ‘비극적 운명’으로 완성시킨다. 이 과정에서 그는 ‘그 자신인 존재’—나다운 존재—자아(becoming oneself)—로 단련되어 간다.
    이것이 자생초—정신의 귀족이 이해하는 ‘삶’이다. 정신의 귀족인 사람에게는, 이같은 삶이, ‘가치 있는 삶’이 성립할 수 있는 유일한 행태이다. 이런 삶에 대해 정신의 귀족은 이렇게 말한다. (니체의 말이다) “그게 인생이었어? 좋았어! 한 번 더!”
     우리는 보수주의라는, 따라 입을 길 없는 무거운 갑옷을 탐낼 필요가 없다. 우리 선배 세대가 증명해낸 공화주의 가치—자유민주주의와 글로벌문명의 활용—를 옹호/강화하는 직업윤리와 대중소통으로 충분하다. 이 두 개의 한없이 경쾌한 듯 보이는, 한없이 기능적으로 보이는 미덕으로 충분하다. 이 미덕은 촛불이 될 때 완성된다. 욕망, 이해관계, 시비가 사납게 날뛰며 충돌하는 먼지구덩이 (시인들은 이를 ‘도도히 흐르는 생명의 강’이라고 불렀다) 속에서 자기 자신의 이익, 편견, 이해관계를 뛰어넘어 생명과 진실을 옹호하는 존재—‘나다운 존재’, 즉 ‘자아다운 자아’가 될 때 자생초 정신과, 그것이 만들어낸 미덕(정치사상)이 완성된다.
     자생초 정신을 도덕철학으로 삼은 시민은 한편으로는—즉 국가운영원리의 차원에서는—공화주의 가치(자유민주주의 강화, 글로벌문명의 적극활용)를 옹호하고, 다른 한편으로는—즉 개인의 행태 차원에서는—양대 근본 미덕(직업윤리와 대중소통)을 소중히 여긴다. 이는 나라/사회를 위하는 마음에서 나온 태도/행동이기 이전에 자기 자신의 실존적 존엄성과 자긍심에 관한 문제이다. 그에게 공화주의 가치와 양대 근본 미덕은, ‘나다운 존재’(becoming oneself)가 되는 ‘촛불의 길’일 뿐이다. 이 가치와 미덕은 그의 존재 이유, 존재 양식과 직결되어 있는, 내면화(internalize)되고 개인화(personalize)된 가치요 미덕이다 그래서 자생초 시민은 맹렬하다. 이 맹렬한 ‘정신의 귀족’이 지금 속속 등장하고 있다.

    • 부록: ‘2012 봄’을 위한 메모
    • 자생초 시민은 생태계를 원한다
    자생초 시민은 특정 정당, 특정 정치인에 대한 지지보다는 시스템적인, 생태계적인 관점을 취한다 즉 대한민국 정당정치의 프로세스가 발전하기를 원하며, 시민사회(civil society)가 형성되기를 바란다. 또한 이들은 [담론, 대중문화, 소통 (DCC: Discourse, pop Culture, Communication)의 지배력(hegemony)을 둘러싼 싸움]을 중시한다.
    자생초 시민은 독립적이다 이들은 과거의 ‘빠돌이’ 타입이 아닌 ‘자아’들이다 향후 180일 안에 이들의 힘과 규모와 지능성은 지금보다 훨씬 더 커질 것으로 예측된다. (예: 4월 18일 효자동 중국대사관 앞 보니엠/저격수다 프로젝트: 해외 유명 연예인 국내 예술가 대중 ‘인터넷 TV’ 오프라인 조직 SNS 맹렬사용자 인터넷 언론 조중동 등의 복합적 구조)
    자생초 시민의 에너지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이것이 정당의 과제 중 하나이다. 이 과제는 한없이 쉬울 수도 있고, 한없이 어려울 수도 있다. 자생초 시민은 명확한 가치/원칙 지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정당이 이 가치/원칙을 옹호하면 쉽게 그 지지를 받을 수 있다. 반면에 이 가치/원칙을 옹호했을 때 치러야 하는 대가(현재적, 잠재적 일부 지지층의 이탈 및 소외)를 막기 위한  상징/소통의 고도화를 이루어 내야 한다는 점에서는 만만치 않은 일이다.

    • 자생초 시민이 바라는 가장 이상적인 전망
     자생초 시민은 새누리가 명확하게, 또한 강력하게 자유민주주의를 옹호하고 글로벌문명을 활용하는 정책을 표방하고 추구하기를 원한다. 또한 자생초 시민은 야권에서 다음과 같은 변화가 일어나기를 갈망한다.
       • 온건하고 합리적이며 현실적인 정치인들이 분리독립하는 것
          (독립파: 평양/종북으로부터의 독립, 함몰된 자아로부터의 독립)
       • 독립파가 광우병 패닉과 천안함 루머에 대해 정식으로 사과하는 것
       • 독립파가 한미FTA와 강정 해군기지를 적극 지지하는 것
       • 독립파가 그 본질에 있어, 위 새누리의 정책방향과 동일한 스탠스를 취하는 것
     위 두 가지 변화가 선행한 다음에, 여권과 독립파가 [선의의 경쟁을 하는 상태]—이것이 자생초 시민이 꿈꾸는 상황이다. 이때 우리 자생초 시민은 “짝퉁보수에서 명품이 나왔고, 죽음진보에서 생명이 부활했다”라고 말한다. 이 같은 일이 일어난다면, 우리는 통일을 감당할 수 있는 사회가 되고, 통일한반도는 세계 초일류 강국으로 날아 오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