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神社(신사)참배 거부 殉敎(순교)정신을
    이어가는 고신파(高神派) 60주년 기념예배 

     
     趙甲濟   
     
     나는 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파 교회인 서울靈泉(영천)교회(종로구 무악동 46-1728. 02-736-6528)에 다닌다. 고신파(高神派)는 고려신학파의 略字(약자)이다. 일제(日帝) 시대 신사(神社)참배를 우상숭배라고 거부, 獄死(옥사)한 목사와 신도들이 약 50명이다. 1945년 8월15일 해방으로 감옥에서 풀려난 목사와 신도들이 뭉쳐서 만든 교파가 고신파이다. 순교적 기독교 정신을 이어가면서 개혁적 보수 신앙을 지켜가는 정통 기독교단이다. 전국에 약 1,700개 교회를 갖고 신도수는 약 50만 명이다. 경상도 지방에 약 70%의 敎勢(교세)가 집중되어 있다.
     
     오늘은 교단(敎團) <고신재단> 창립 60주년 기념예배가 전국(全國) 고신파 교회에서 일제히 열렸다. '은혜의 세월 60년'이란 같은 주제의 설교가 전국적으로 있었다. 영천교회 이용호 담임목사는 고신파 총회장을 지낸 분이다. 그는 "하나님이 한국에 고신파 교회를 세운 이유와 우리의 사명은 무엇인가"를 중심으로 고신파의 역사를 설명해갔다. 잘 요약된 한국의 基督敎史(기독교사) 강의 같았다.
     
     "130년 한국 기독교 역사에서 치욕적인 일이 벌어졌습니다. 1938년 조선장로회 총회는 신사참배를 결의하였습니다. 이는 다른 신(神)을 섬기지 말고,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십계명을 어긴 背敎(배교)행위이고 씻을 수 없는 범죄행위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에 대하여 준엄한 심판을 내리신 흔적을 여기저기서 찾을 수 있습니다. 주기철, 한상동 목사 같은 분들이 신사참배에 대한 항거운동을 벌이다가 투옥되어 50여 명이 순교하였습니다. 한국의 기독교는 당시 신사참배를 하는 이들과 이를 거부, 핍박받는 이들로 갈라졌습니다."
     
     <1935년부터 조선 총독부는 각 종교와 학교에 신사 참배를 강요했으며 가중되는 압력에 못 이겨 천주교와 개신교 교단들이 신사 참배는 종교적 행사가 아니라는 명분으로 이를 받아 들였다. 1935년 12월 안식교단에서는 신사참배를 결의하였고 성결교단도 탄압에 못이겨 참배하였다. 천주교에서는 1936년 5월 교황청으로부터 지시를 받고 신사참배를 시행하였다. 기독교계에서는 1938년 2월 6일 전국에서 가장 교세가 큰 장로교 평북노회가 일제에 굴복하여 신사참배할 것을 결의했다. 같은 달 이승만계의 흥업구락부사건으로 일제에 구속된 윤치호(尹致昊) 등도 석방의 대가로 기독교를 통해 내선일체의 실시에 힘을 다할 것을 서약하고, 조선 기독교청년회(YMCA)의 일본 YMCA로의 통합, 조선감리교회의 일본감리교회로의 합동을 결의했다. 7월에는 신사참배에 협력한 각 교회와 단체들의 전국대회가 개최되었고, 9월 장로교 총회에서는 전국 23노회 중 17노회의 찬성으로 신사참배와 국민정신총동원운동에의 적극 참여를 결의했다. 같은 달 감리교도 총리사 양주삼(梁柱三)의 명의로 신사참배를 결의했다. 이를 전후하여 기독교계열 각종 연합단체의 해산, 세계조직에서의 탈퇴, 조선기독교의 일본기독교로의 통합이 이루어졌다.> (두산대백과사전)
     
     조선장로회뿐 아니라 천주교 등 타(他)종교도 거의가 일제(日帝)의 강요로 신사(神社)참배를 하고 있는 가운데 목숨을 건 순교정신으로 이를 거부, 고통을 받은 소수의 의인(義人)들이 있었기에 한국 기독교의 정통(正統)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진 것이다. 1945년 8월15일의 해방을 맞아 옥중에서 5~6년간 고생하던 주남선, 한상동 목사 등과 신도들이 풀려났다. 투옥된 이들중엔 경상도 평안도 출신들이 특히 많았다. 고신파가 지금 부산을 비롯한 경상도에서 특히 강한 뿌리를 갖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출옥한 성도들은 일본 귀신에 절을 한 타락한 기독교를 개혁하여 한국 교회를 재건해야 다시 살려낼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조선신학교를 중심으로 한 기성세력엔 자유주의 신학이 들어와 신사참배에 대하여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있었습니다. 출옥 성도들은 우선 신학자 박윤선 박사를 모시고 개혁주의 신학의 중심으로서 1946년 9월20일에 부산에서 고려신학교를 설립, 개교(開校)하였습니다."
     
     나는 1960년대 부산 성산교회에 붙은 집이 우리 집이라 이 교회에 다녔다. 담임목사가 바로 박윤선 박사였다. 그는 신구약(新舊約) 성경 註釋(주석)을 완성한 세계적 신학자였다. 고려신학교에서 고신파(高神派)란 말이 생기는데. 이 학교는 개혁적 보수신앙의 보루 역할을 맡는다.
     
     <이 학교는 곧 경남노회의 인준과 협력을 받고, 교회 재건을 위한 사역자 양성에 들어갔다. 이 학교에는 전도사로 봉사하다 5년 이상 옥고를 치르고 나온 손명복·이인재 같은 분들이 학생으로 등록해 학내(學內)는 순교적 신앙 분위기가 형성돼 있었다.
     
     하지만 이 학교의 길은 그렇게 평탄하지 않았다. 지난날 일제(日帝)와 타협하고 신사참배를 해온 분들이 이 학교를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이 학교를 무너뜨리기 위해 갖은 방법을 다 동원했으며, 이 학교를 지원하는 경남노회(老會)에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해방이 되자 일제에 타협하고 신사참배했던 교회지도자들이 속속 자기 자리를 확보하기 위해 정치적으로 기민하게 움직였다. 당시 평안도와 경상도 지역에서는 출옥한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일제 때 범한 죄과를 회개하고 교회를 재건하자는 신앙운동이 일었다.
     
     그러나 서울을 중심으로 한 중부지역에서는 옥고를 치른 분들이 별로 없고, 일제와 타협하며 살아온 분들이 주동되었기 때문에 단지 제도면에서의 교회 재건과 교권(敎權) 확립을 위한 운동을 전개할 뿐이었다. 이들은 지난날 총회가 공적(公的)으로 신사참배를 결정한 일에 대하여 공적(公的)으로 회개하기를 원하지 않았다.>(허순길 전 고려신학대학원 원장)
     
     이용호 목사는 이렇게 설교를 이어갔다.
     
     "고려신학교를 지원하던 장로회 경남(법통) 노회는 장로회로부터 축출당하게 됩니다. 1952년 9월 출옥성도들은 진주 성남교회에 모여 '고려파'라고 불리는 새로운 교단을 출범시킵니다. 그 이후 60년간 우리 고신파는 순교적 신앙을 지켜가면서 눈부신 발전을 하였습니다. 신사참배를 거부, 옥중에서 고생하셨던 고신(高神) 1세대는 모두 돌아가셨습니다. 2세대는 현역에서 은퇴하시고 돌아가신 분들도 많습니다. 저는 高神 3세대입니다. 고신파의 교세(敎勢)는 신도순으로는 열번째이고, 약70%가 영남지방, 15%가 수도권, 호남에 약10%, 중부권에 5% 정도 분포되어 있습니다. 고신파는 한국 기독교에 아름다운 유산 네 가지를 남겼습니다."
     
     첫번째 유산은 '순교신앙'이라고 이용호 목사는 강조하였다.
     "이는 한국 기독교가 공인(公認)하는 것입니다. 목숨을 걸고 신앙을 지켰습니다. 고신파는 그런 면에서 한국 기독교의 정통교회입니다. 우리 고신파의 정체성의 본질은 '타협 없는 신앙'이고 '순결한 생활'입니다."
     
     두번째 유산은 '개혁주의 신학(神學)'이다.
     "개혁주의 신학은 하나님 말씀 중심입니다. 하나님 말씀은 절대 진리이고, 구원의 진리이고, 신앙의 기준입니다. 하나님 말씀, 즉 성경에 위반되는 행위는 용납할 수 없습니다. 목사가 하나님 말씀에 위반되는 행동을 할 때는 성도가 탄핵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말씀 안에서만 자유입니다. 하나님 말씀의 바깥에 가면 부자유를 느낍니다. 천주교는 교황주의이므로 교회가 하나님 말씀 위에 있습니다. 인간의 말씀이 하나님 말씀 위에 가면 안 됩니다. 하나님 말씀에 반하는 목사가 있다면 신도들이 추방운동을 해도 교회법에 어긋나지 않습니다."
     
     고신파가 한국 기독교에 남긴 세번째 유산은 '세계선교의 모범'을 보인 점이라고 했다. 고신파는 출범 5년 만에 대만으로 선교사를 보낸 이후 50여 개국에 347명의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선교의 내실(內實) 면에서도 모범적이다.
     
     네번째 유산은 '교육'이다.
     "가르쳐 지키게 한다는 것이 고신파의 교육명령입니다. 특히 학생신앙운동으로 SFC 운동을 시작, 115개 대학과 123개 중고등 학교에 조직을 만들었습니다. 부산엔 종합병원인 복음병원과 의과대학이 있습니다. 복음병원 암센터는 우리나라 의료발전에 큰 기여를 하였습니다."
     
     고신(高神)재단에서 운영하는 복음병원 원장으로 오래 근무한 분은 聖醫(성의)로 불리기도 하는 장기려(張起呂) 박사이다. 그는 북한에 두고 온 부인을 누군가가 돌보도록 하려면 자신은 남한에서 불우한 환자들을 도와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장(張) 박사는 청십자 운동으로 의료보험을 처음으로 실험한 이다.
     
     이용호 목사는 "고신파는 한국 교회를 움직이는 신학적 동력(動力)이다"면서 "순교신악, 개혁신학, 순결한 생활태도를 견지, 교회 속으로 들어가 한국 교회를 淨化하고 세상속으로 들어가 세상을 신앙적으로 정복하여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고신파(高神派)의 순교적-보수적 개혁신앙은, 종교개혁을 주도한 마르틴 루터, 프로테스탄트의 윤리를 정립하고 자본주의 정신을 키워냈다는 칼빈주의, 미국의 독립정신을 함양한 청교도의 맥을 잇는 것이다. 이런 복음주의 신앙은 엄격한 정교(政敎)분리 원칙을 지키지만 종교의 자유를 침해하는 권력엔 저항한다. 신사참배 거부 운동이 그런 예이고, 북한인권(人權) 운동과 북한정권 반대 운동도 같은 선상이다.
     
     영천교회의 고신파 60주년 기념예배에서 진정식 장로는 기도를 통하여, "또 다시 도발을 위협하는 김정은 정권을 무너뜨려 북한동포들을 구원해주시고, 자유통일 하여 지하교회의 신도들이 믿음의 자유를 누리게 해주십시오"라고 했다. '김정은이 회개하도록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하는 것과 '김정은을 무너뜨려주십시오'라고 기도하는 것은 신학(神學)이 다르기 때문이다. 김일성 세력을 용서할 수 있는 '원수' 정도로 보느냐, 용서할 수 없는 '사탄의 세력'으로 보느냐의 차이이다.
     
     오늘 부른 찬송가 585장은 '내 주는 강한 성(城)이요'로서 마르틴 루터가 1529년에 작사, 작곡한 것이다. 1절엔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 되시니/큰 환난에서 우리를 구하여 내시리로다"라는 대목이 있다.
     
     루터는, "惡魔(악마)를 쫓아내는 가장 좋은 방법이 있다. 성경을 읽어줘도 굴복을 하지 않으면, 야유하고 조롱하라. 악마(惡魔)는 경멸을 견디지 못한다"고 했다. 루터는 惡魔를 물리치는 가장 좋은 방법은 惡魔가 시키는 것을 거꾸로 하는 것이라고도 했다.
     
      "악마(惡魔)가 당신을 괴롭힐 때마다, 친구를 만들고, 술을 퍼 마시며, 농담을 하고 실 없는 소리도 하면서 즐겁게 살아라. 惡魔가 사소한 것들로 우리의 양심을 어지럽히지 못하게 하려면 우리는 때로는 暴飮(폭음)을 하고, 잘 놀고, 죄도 적당히 저지를 필요가 있다. 의식적으로 죄를 짓지 않으려고 애를 쓰면 惡魔한테 넘어간다. 惡魔가 너에게 술을 마시지 말라고 하면 이렇게 말하라. '너가 마시지 말라고 했으니 나는 멋대로 마시겠다'"
     
      로마서 12장17절은 "아무에게도 악(惡)을 惡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善)한 일을 도모하라"라고 했고, 로마서 12장21절은 "惡에 지지 말고, 善으로 惡을 이기라"고 했다. 조지 오웰은 "공산당 같은 광신자들과 싸울 때는 우리도 광신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는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머리를 써야 한다"고 했다. 괴테는 "어려움을 당할 때는 선의(善意)를 버리지 말고 꾸준히 노력하면 반드시 구제 받는다"고 했다.
     
      고신파(高神派)는 사람이면서 스스로 하나님을 참칭한 일본의 천황과 김일성이란 두 종류의 광신적 우상을 상대로 싸우면서 선의(善意)를 잃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