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는 요즘 극단주의 이념주의자들이 쏟아내는 거친 언어들을 보면서 가슴이 조여드는 것 같은 답답함을 느낍니다. 이 답답함은 미국과 한국을 사이에 두고 정반대의 이념들이 대립하고 있어서 제 자신을 더욱 갈등케 하고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러시 림바우(Rush Limbaugh)’나 ‘시안 헤너티(Sean Hannity)’ 같은 극단주의 보수주의 논객들에게 고통을 느끼고, 한국에서는 ‘나꼼수’나 ‘가카새끼’ 의식 문화를 만들어 내는 극단적인 진보 논객들에게 절망을 느끼고 있습니다. 림바우나 헤너티는 1천만명이 넘는 고정 고객을 가지고 있는 미국에서 가장 청취자가 많은 토크 쇼 진행자들입니다. 이들은 뛰어난 말솜씨와 탁월한 논리로 청취자들을 사로잡고 열광시키고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극우적인 사람들입니다. 이들의 극단성에 환멸을 느끼다가도 한국의 인터넷 미디어를 들어 가서 이른바 ‘나꼼수’나 ‘딴지 일보’ 아류들이 뱉아내는 언어들을 마주치면, 림바우나 헤너티는 아주 수준이 높다는 역설을 느끼게 됩니다.
     
    저는 가끔씩, “왜 나는 미국의 극단주의 우파들에게 좌절하고, 한국의 극단주의 좌파들에게 절망하는가?” 하는 질문을 제 스스로에게 합니다. “나는 이념의 척추가 없는 사람인가?”하는 자성을 하면서, “신념의 선택 때문에 내 인생이 여러번 곡절을 겪지 않았는가?” 하는 반문을 위안으로 삼지만, 이런 갈등은 저로 하여금 이념의 방황을 하게 하기도 합니다. 저는 미국의 잇슈를 선택할 때 어떤 것은 진보이고 어떤 것은 보수입니다. 그래서 지도자를 뽑을 때도 상황과 여건에 따라 보수 정치인과 진보 정치인을 왔다 갔다하는 이른바 ‘독립적인 유권자’ ‘중도적인 이념주의자” 입니다.
     
    제가 이념과 지도자를 선택할 때 그 시대의 상황과 여건에 따라 달라지지만, 또 한가지 기준이 있습니다.
    지도자의 ‘격’ 입니다. 지도자가 외치는 주장에 공감이 가도 그 사람의 품격과 품질이 낮으면 제 생각과 달라도 ‘격’이 있는 사람을 택합니다. 격이 낮은 사람의 이념이 일시적으로 그럴듯 해 보여도, 장기적으로는 나라에 해가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지도자의 격이 아무리 훌륭해도 타협하거나 양보할 수 없는 이념과 신념이 있기 때문에 이런 선택은 때로 심한 홍역을 겪습니다. 이념이나 신념은 시대와 상황과, 국가와 장소에 따라 다르고, 다르게 선택해야 그 사회와 국가가 바로 갈 수 있습니다.
     
    제가 지도자의 격을 선택의 중심에 두는 것은 품격과 품성이 높고 깊어야 이념이 정제되고 신념이 진실하게 되고, 거기서 나오는 정책이 성실하고 신뢰성을 주기 때문입니다. 제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지도자의 ‘격’에 으뜸을 차지하는 것이 절제력과 진정성입니다. 절제력과 진정성이 있는 사람은 자기의 이념이 있더라도 국가를 위해 도움이 되고 민족의 역사를 위해 바른 길이라고 판단되면 자신의 신념을 뛰어 넘고, 자신의 이념을 이탈했다는 비판까지 받아가면서 민족의 길과 국민을 위한 정책을 택합니다. 이것이 지도자의 용기이고 지도의 진정한 격입니다.
     
    한국의 좌파를 대변해 주는 ‘나꼼수’나 ‘딴지일보’는 명칭 자체가 포르노 수준입니다.
    이런 명칭을 붙인 것은 스스로 저속한 미디어가 되기를 작심한 것이고, 여기를 드나드는 고객들의 정신과 인격의 수준을 도색화 시키려는 것입니다. ‘나꼼수’나 ‘딴지’ 같은 부정적이고 냉소적인 표현을 이름으로 내 건 자체가, 그것을 만드는 사람들의 마음이 비뚤어지고 왜곡된 것을 말해주고, 여기서 생산되는 내용물들이 심성과 인성을 갉아먹고 파괴시킨다는 것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 맹목적으로 춤추고 열광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무지한 사람들은 어느 시대, 어디서나 있습니다. 마음이 꼬이고 분노한 열등주의자들이 많을 수록 이런 파괴적인 언어와 독소적인 표현들은 독버섯처럼 기승을 부립니다. 음습하고 불결한 곳에서 이 독버섯은 무럭 무럭 자라서 시대와 땅을 병들게 하고 수많은 중독자들을 생산해 냅니다.
     
    한국의 ‘나꼼수’나 ‘딴지’들이 음지에서만 활개치는 것이 아니라 백주의 대로에서 주류 언론처럼 판을 치는 것은 한국 의식의 풍토가 얼마나 병들어 가고 있는 지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분노와 욕구불만으로 가득찬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을 유혹하는 이들 정신적 도색물들은 이성을 잃은 군중의 분노와 증오와 결합되어 광기를 증폭시키고, 극단주의를 확대 재생산 시킵니다. 멀리 외국에서 한국의 숲을 바라보고 있으면 정치, 언론, 법조, 학계 곳곳에 비뚤어진 ‘나꼼수’ 아류의 지식인들이 사회를 잘못 이끌어 가고 있다는 생각을 들게 합니다.
     
    대통령을 ‘가카새끼’라고 말할 수 있는 법관이 있고, 이들을 옹호할 수 있는 독버섯들이 열광할 수 있는 사회는 미래의 타락이 눈에 보이는 미쳐가는 사회입니다. 시대의 흐름에 냉철하고 서릿발 같은 분별력으로 자신의 독선과 독단과 싸워야 하는 법관의 입에서, 그것도 버젓이 공개적인 글에서 제 나라 대통령을 ‘가카새끼’라고 할 수 있는 사회는 정상이 아닙니다. 대통령이 아무리 못 마땅하고 마음에 들지 않아도 ‘가카새끼’라고 냉소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자기 얼굴에 침을 뱉는 자기 모멸이고 자기 부정입니다. 대통령직이 존중되고 대통령의 권위가 높이 서야 국가와 민족의 자존이 서는 것입니다.
     
    많은 한국 이념주의자들은 보수와 진보가 뭔지도 모르고, 극좌와 극우가 무엇인지도 구별하지 못하면서 덩달아 춤추고 욕하고 있습니다. 과거 독재시대에는 무지한 보수들이 권력의 시녀가 되어 춤을 추었고, 오늘에는 천박한 진보들이 이념의 홍위병이 되어서 시대를 어지럽히고 있습니다. 한국의 보수 세력은 부패하고 이기적이고, 진보 세력은 극단적이고 천박해 지고 있습니다. 진보든 보수든 오늘의 한국 이념 주의자들에게 가장 시급한 것이 ‘격’입니다. 진보의 격, 보수의 격을 높이지 않고는 한국은 민주주의 꽃을 피울수가 없습니다.
     
    오늘의 한국 민주주의를 제도적으로 정착시키는데 진보 세력이 중추적인 공헌을 했기 때문에 한국 민주주의 성숙을 위해서는 특히 진보의 절제와 진중함이 더욱 절실합니다. 독재와 싸울 때는 신실해 보였던 진보 세력이 민주화가 되면서 오만과 독선으로 돌변하고 용기가 만용으로 변했습니다. 그동안 진보 세력의 경망스러움과 천박함으로 인해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한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이 헌신짝처럼 딩굴고 있습니다. 민주주의를 외쳤던 사람들이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아이러니가 오늘의 한국입니다. 민주주의를 외쳤던 진보 세력이 민주주의를 품격과 품성으로 승화시키지 못했기에 민주주의를 욕되게 하고 민주주의 본질을 흔들고 있습니다.
     
    한국인의 심성에는 자리잡고 있는 극단성과 감정주의에 편승해서잘못 가고 있는 좌파에 제동을 걸 수 있는 진중하고 사려깊은 진보의 출현이 시급합니다. 한국의 진보는 갈수록 야비하고 경망스러워지고 있습니다. 한국의 진보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한국의 장래를 위해서 분별있고 사려깊은 진보 세력, 품격과 진정성이 있는 진보세력이 출현해서 한국 정치에 보수와 진보의 양대 세력을 구축해야 합니다. “인류의 역사는 남자와 여자의 두 날개가 있고”(압둘 바하 Abdul Baha), “새는 두개의 날개로 난다”(매그너센 Warren Magnuson)고 했듯이, 나라의 번영은 보수와 진보의 두 날 개로 날고, 진보와 보수의 두 수레바퀴로 굴러갑니다. 나라가 분단되고 극단성이 강한 한국의 의식 풍토에서, 나라의 장래를 위해서는 진보적인 보수 세력, 보수적인 진보 세력이 요구됩니다.
     
    광적이고 극단적인 좌파 세력에 밀려 침묵하고 있는 온건한 진보 세력이 과거 독재 정권에 저항했던 용기와 신념으로 한국의 왜곡된 진보 풍토를 개혁하고 쇄신해야 합니다. 진보의 재건을 위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격’을 세우고 ‘격’을 깊게 하는 것입니다. ‘나꼼수’나 ‘딴지’ 같은 사이비 진보와 ‘가카새끼’와 ‘잡놈’ 같은 병든 진보 세력을 청소하고 품위와 품격이 있는 진보의 깃발을 올려야 합니다. 이것을 실기하면 한국의 진보는 빈수레처럼 소리만 요란한 ‘나꼼수’와 ‘잡놈’이 되어 스스로를 비하시키고, 한국의 국격을 격하시킬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