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좌파교육감들이 학교 폭력의 원흉 
      
     학생인권조례가 원인. 진보(좌파)교육이 학생들에게 규율을 무시하는 편법을 가르치고 대한민국의 현대사에 대한 자부심 대신 수치심을 심어줌으로써, 누구에게도 감사할 줄 모르는 학생들이 국회의원과 불법 시위대의 떼법과 폭력을 고스란히 본받고 있다.

    최성재   

     
      2011년 12월 대구에서 왕따(따돌림) 당하던 소년이 자살한 사건이 일어난 후, 학생 폭력이 전국적으로 조명되고 있다. 그 동안 쉬쉬하던 실태가 하나하나 드러나면서 온 국민이 경악하고 있다. 냄비 국민이 아니랄까 봐, 섣부른 원인 진단과 즉흥적인 대책이 연일 쏟아진다. 왕따 가해자 학생들로 대안학교를 만들겠다는 안도 나온다. 그러다가 대안학교가 일반학교보다 많아지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예전에는 학교 폭력이라면 대개 두 가지 중 하나였다. 첫째는 교사가 학생에게 가하는 폭력이었고, 둘째는 일진회를 비롯한 극소수 학생 폭력 조직이 각개 격파로 학생에게 가하는 폭력이었다. 이제는 교사 폭력은 거의 거론되지 않는다. 대신 학생 폭력은 만연하여 일진회만이 아니라 부모나 교사가 도저히 그러리라고 상상도 못할 ‘지극히 정상적인’ 학생들까지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없이 재미로 폭력에 가담한다. 그뿐만 아니라, 일그러진 뻣뻣 학생이 대충 눈 감아 주지 못하는 꼿꼿 교사에게 가하는 폭력도 날로 증가한다. 특수하던 학생 폭력이 일반화의 길에 접어들고 있다.
     
      경기도 교육청에서 시작된 학생인권조례 이후 교사 폭력은 사람이 개를 무는 것처럼 희귀한 뉴스가 되었지만, 학생 폭력은 급격히 늘었다. 일선 교사에 따르면, 학생인권조례니, 체벌(간접 체벌 포함) 절대 금지니, 하는 조치가 취하기 이전에도 학생 폭력은 이미 수위를 넘었다고 한다. 그것은 고등학교에서 중학교로 중학교에서 초등학교로 급격히 퍼져서 이제는 중학교와 초등학교에서 더 심하다고 한다. 여기에 좌파 교육감들이 진보라는 허울로 불난 집에 초강력 초대형 선풍기를 돌린 셈이다. 서둘러 불을 꺼야 하는 시점에서 드럼통으로 기름을 부은 격이다. 투표율이 30% 넘기도 힘든 무관심 선거에서 교육 권력을 움켜 쥔 자들이 자신들은 무결점 도덕주의자인 양 거드름을 피우며, 컴퓨터 마우스를 까딱하여 명령과 지시를 마구 내리먹이며, 학생 폭력의 불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는데도 아예 신고 접수도 안 받고 도리어 일선교사들의 손에서 소방 호스를 빼앗고 비상시에만 쓰라고 깨진 바가지를 주면서, 이미 교사 폭력의 큰 불은 다 잡히고 군데군데 연기만 피식피식 나건만 불자동차를 득달같이 보내서, 바로 거기 가느다랗게 연기 나는 곳에 거대한 소방 호스로 홍수가 날 듯 물을 퍼붓고 있다.
     
      학생 폭력은 진보(좌파)교육 사상이 주류로 올라선 나라에선 공통적으로 급격히 늘어났다. 가장 심한 나라가 미국의 공립학교와 일본의 공립학교일 것이다. 그것은 사상적으로 보면, 무엇보다 루소의 <<에밀>>에 나타난 인간과 교육에 대한 사상을 무비판적으로, 인간의 본성과 나라마다 다른 문화에 대한 이해 없이 곧이곧대로 적용한 데서 비롯되었다.
     
      계몽주의가 꽃 핀 루소의 시대만 하더라도 여자와 어린이는 인간이 아니었다. 가부장에 의한 발작적 처자식 매 타작, 교사에 의한 기분풀이 아동 학대는 전혀 사회적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가부장이 절대 권력을 가진 가정의 문제요, 비전문가가 왈가왈부할 수 없는 신성한 학교의 자체 문제일 따름이었다. 산업화 진전과 국민교육 확대, 민주주의 확산 등으로 19세기부터 유럽을 중심으로 이런 상황은 급격히 개선되었다. 1차 세계대전 후에는 서구 선진국은 여성의 사회활동이 급격히 늘었고 하나같이 여성이 참정권을 획득했고, 어린이는 대부분 정규교육을 받게 되었다. 가정에서 여성과 어린이는 더 이상 변덕과 착취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과 보호의 대상이 되었다. 2차 대전 후에는 공산권 외에는 대부분의 국가에서 여성이 참정권을 갖게 되었고, 동서(자본주의와 공산주의)나 남북(부국과 빈국)에 관계없이 어린이의 위상이 급격히 올라갔다. 특히 경제개발에 성공한 나라들에서 그러했다.
     
      ‘지극히 정상적인’ 학생들의 폭력이 발생한 것은 바로 이 시점이었다. 자유와 풍요가 넘친 서구 선진국에서 당연히 먼저 발생했다. 학생을 마냥 어리다고 과보호하면서, 사사건건 온정주의로 대하면서, 독버섯처럼 학생 폭력이 생겨나서 이윽고 학교에 경찰이 상주하기에 이르렀다.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선진국에 진입한 일본에서도 서구에 뒤이어 1970년대에 학생 폭력이 심심찮게 일어났다. 혹자는 그 당시를 폭력의 시대라고 한다. 정학 당한 학생이 야구방망이를 들고 와서 한 장 한 장 차례차례 학교 복도의 유리창을 모조리 깨어도 감히 말릴 사람이 없는 경우도 있었다. 1990년대에 접어들자, 한국에서도 폭력 조직에 가담한 특수 학생만이 아니라 일반 학생들에 의한 폭력이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경제적 풍요와 정치적 자유, 거기에 진보(좌파)적 교육 사상, 이 셋이 결합되면서 학생 폭력이 만연하게 된 것이다. 여기서 예외인 데가 있다. 그것은 전통(보수)적인 교육 방침을 고수하는 사립학교다. 거기도 학생 폭력이 없는 건 아니지만, 염려할 정도가 아니다. 충분히 자체 정화능력이 있다. 그러면 사립학교는 교사가 체벌을 자유롭게 가해서 그런가? 아니다! 서구와 일본의 사립학교도 이제는 체벌이 거의 없다. 한국에서도 선발권이 있는 사립학교는 학생 폭력 무풍지대다. 왜 그럴까?
     
      전 영국 수상 고든 브라운은 교육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는데, 그는 다우닝가의 홈 페이지에서 영국 교육의 병폐를 해소하기 위한 두 가지 방책을 제시했다. 첫째는 규율(discipline) 강화였다. 소수의 나쁜 학생이 다수의 선량한 학생을 물귀신처럼 흙탕물 속으로 끌고 들어가지 못하게 하겠다고 단언했다. 선량한 학생들에겐 내적 규율(internal discipline)을 체질화시키고 나쁜 학생에겐 강제로라도 규율을 지키게 하겠다는 뜻이었다. 둘째는 역사 교육(history education) 강화였다. 이것은 자부심과 애국심과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을 동시에 심어주는 1석 3조의 효과가 있다. 그 후 실지로 브라운이 교육에서 얼마나 성과를 거두었는지는 모르나, 그가 제시한 해법은 우리나라에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본다.
     
      여기에 하나 더, 좌파교육사상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필요하다. 좌파교육사상은 진보란 아름다운 가면을 쓰고 루소의 순진무구한 관념적 성선설(性善說)에 마르크스의 강제적 협동(enforced cooperation)을 덧보탠 사상이다.
     
      어린이의 욕구는 모두 순수하고 아름답고 선하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전혀 그렇지 않다. 어린이도 선한 욕구도 있고 악한 욕구도 있다. 선한 욕구는 들어주되, 악한 욕구는 들어주지 말아야 한다. 심심하다고 옆의 아이를 때리는 것을 그냥 내버려두면 안 된다. 배고프다고 남의 빵을 훔치거나 빼앗아 먹는 것을 귀엽다며 그냥 내버려두면 안 된다. 식당이나 지하철이나 박물관에서 천방지축 뛰어다니는 것을 기(氣) 안 죽인다며 그냥 내버려두면 안 된다. 숙제를 안 하고 오락만 하는 걸 저 나이에는 다 그렇다며 그냥 내버려두면 안 된다. 입만 떼면 욕하는 것을 신기하다며 앵무새가 사람 욕 흉내 내는 것을 보듯이 감탄의 눈길로 바라보며 그냥 내버려두면 안 된다. 설령 선한 욕구라도 다른 사람의 욕구와 충돌할 때는 그걸 조절하고 참는 것도 가르쳐야 한다. 수업 시간에 떠들고 조는 것도 애교 이상은 봐 주면 안 된다. 모름지기 규율 교육은 가정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조기교육이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규율 교육이다. 이것이 바로 민주시민 교육이다. 마음에 안 든다고 수업 시간에 운동장에서 시위하는 걸 장려하는 건 민주시민 교육이 아니라 독재선동 교육이다. 홍위병의 문화혁명이다.
     
      강제적 협동도 안 된다. 협동농장에 협동 없듯이, 시험도 없고 낙제도 없이 마냥 뛰놀게 하고 무엇이든 무조건 함께 하라며 모둠을 만들어 공부시키면 뺀질뺀질 아무 것도 않는 애들이 생기게 마련이다. 이윽고 이런 애들이 주류가 된다. 치열하고 짜릿짜릿하고 아름다운 선의의 경쟁을 통해 스스로 능력을 기르지 않으면, 결국 아무 것도 모르고 아무 것도 못한다. 그러면 3류 선수가 기회를 줘도 국가대표로 뛸 수 없듯이, 동급생끼리도 협동할 능력 자체가 없어진다. 그러다가 아무 것도 모르는 채 온정주의에 의해 중학교로 진급하고 고등학교에 진급하면, 생각나는 건 오락이고 야동이고 폭력영화이고 달콤새콤 유행가이다. 떠오르는 건 잡담이고 장난이다. 밀려오는 건 하품이고 잠이다. 근질근질한 건 욕설 전용 입이고 폭력 전문 주먹이다.
     
      한국은 전교조가 좌파교육사상을 확산시키면서 무엇보다 국가와 민족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 사랑이 사라졌다. 전 세계 개도국이 선망하고 서구와 일본이 경이의 눈으로 바라보는 한국의 현대사를 유독 한국에선, 올림픽 금메달을 시궁창에 집어던지듯이, 온통 비난하고 저주하고 개탄스러워한다. 그러면서 악 그 자체인 북한의 3대 세습 공산독재는 기껏 양비론(兩非論)으로 비판하는 척 흉내만 내고 민족과 평화의 이름으로 끝없이 용서한다. 폭력 학생을 두둔하듯이 도리어 온갖 도발의 책임을 대한민국과 미국의 정부에게 돌리고 상습 폭력전과자에게는 면죄부를 발부한다. 공산왕족과 공산귀족은 민족으로 우대하고 대신 그 아래서 기아로 신음하고 공포에 떠는 노예동포는 못 본 척한다. 북한인권 얘기가 나오면, 먼 산만 쳐다보다가, 작심하고 북한에 비해 수천 배 보장되는 한국의 인권상황을 물고 늘어진다. 인권을 빌미로 간첩도 민주화운동가로 둔갑시켜 통 크게 보상한다.
     
      공부도 않고 운동도 않고 예술도 않고 욕설만 일삼고 학생을 대상으로 심지어 교사를 대상으로 여차하면 폭력을 휘두르는 학생들의 인권은 보호하고 또 보호한다. 시대착오적인 이념으로 핵무장한 자들이 의무 없는 권리, 책임 없는 자유를 솔선수범한다. 불법 시위대와 국회의원은 떼법과 폭력과 부정부패로 타의 모범을 보인다. 모름지기 학생은 사회의 거울이라, 떼법의 어깨띠를 두르고 폭력의 완장을 차고 부와 권력과 명예를 독차지하는 국회의원과 귀족노조와 왕족시민단체를 우리 학생들은 열심히 본받는다. 학생들은 그리하여 할아버지와 할머니, 아버지와 어머니가 피와 땀과 눈물로 일군 자유와 풍요에 허우적거리면서도, 부모에게도 선생님에게도 지역사회에게도 국가에게도 도무지 감사할 줄 모른다. 바야흐로 학생들은 스스로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고 잘못된 것은 온통 남 탓으로 돌리고 불평불만만 늘어놓는다. 모처럼 대화하자고 조심스레 말을 건네면 5분도 안 되어 눈을 부라리며 가슴을 치며 소통이 안 된다고 분통을 터뜨린다. (2012. 1.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