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에게 충성 바친 북한공작원을, 통일을 꿈꾼 위인으로 조작50명 위인 중 김구는 있지만 이승만·박정희는 없어‘2009대한민국교육경영대상’ 수상
  • 7살 아들을 위해 어린이 偉人傳(위인전) 한 질을 들여다 놓았다. 가장 장 읽히는 책 중 하나라는데 현대사 위인 중 김구는 있어도 이승만·박정희는 빠져 있다. 놀라운 것은 윤이상이다. (주)기탄교육이 출간한 이 전집은 50명의 위인전으로 구성돼 있는데 그 중 한 명이 “통일을 꿈꾼 음악가 윤이상”이다.

    이 책은 윤이상을 가리켜 “끝까지 조국을 사랑하고 음악을 통해서 조국의 통일을 위해 힘쓴 음악가랍니다”라고 적고 있다. 윤이상이 연루된 67년 동백림 사건에 대해서는 이런 설명을 덧붙였다.

    “동백림 사건이란? 우리나라에 불리한 한일수교와 대통령 부정선거가 잇따라 일어나자 국민들은 저항운동을 벌이기 시작했어요. 그러자 정부는 국민들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거짓으로 이 사건을 꾸며 냈지요...윤이상은 조작된 ‘동백림 사건’ 때문에 죽는 날까지 조국 땅을 밟지 못하는 불행을 겪었답니다.”

    “그는 조국을 사랑했지만 고분 벽화 ‘사신도’를 보기 위해 북한에 다녀온 일로 간첩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했어요. 감옥에서 풀려난 뒤에는 독일로 돌아가 평생 그 곳에서 살았답니다. 윤이상이 조국을 방문하려고 할 때마다 정부에서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면서 못 들어오게 했기 때문이지요...그렇게 윤이상은 죽기 직전까지도 조국을 사랑하고 그리워했지요.”

    “한국의 형사들은 아무도 모르게 윤이상을 한국으로 끌고 왔어요. ‘나는 그냥 음악을 사랑하는 작곡가일 뿐입니다’ ‘거짓말하지! 너는 북한 간첩이지?’ 윤이상이 아무리 진실을 말해도 소용없었어요...형사들은 막무가내로 윤이상을 간첩으로 몰아붙였지요.”

    이 책을 보면 박정희 정부는 “우리나라에 불리한 한일수교”를 하고 “대통령 부정선거를 잇달아 하고”, “거짓으로 (공안) 사건을 꾸며 내고”, “애국자 윤이상에 간첩 누명을 씌우고”, “막무가내로 간첩으로 몰아붙인” 사악한 정권이다. 반면 윤이상은 온갖 핍박 속에서도 대한민국을 끝까지 사랑한 애국자이다.

    어린이를 상대로 한 이 끔찍한 서술은 물론 사실이 아니다. 윤이상은 동백림 사건 이후에도 북한을 17차례(확인된 횟수) 이상 오가며 죽는 날까지 親北(친북)성향 단체와 利敵(이적)단체 범민련 등에서 활동했다. 윤이상은 92년 ‘오길남 간첩사건’에서도 “북한의 對南(대남)공작원”으로 다시 확인됐던 인물이다.

  • 윤이상은 북한의 자금을 받아 在獨 한국학술연구원(KOFO) 등을 만드는가 하면 김일성을 접촉하며 김일성 75회 생일선물로 “나의 땅 나의 민족이여”라는 노래를 선물하기도 했다.

    김일성은 윤이상을 극찬해왔다. 예컨대 2000년 북한이 펴 낸 김일성 敎示集(교시집) ‘재(在)서독교포 윤이상 일행과 한 담화’·‘재(在)서독 교포 윤이상과 한 담화’ 등에 따르면, 김일성은 윤이상이 “祖國統一(조국통일) 위업에 커다란 공적을 쌓아올렸다”며 그를 “祖國統一(조국통일)을 실현하기 위하여 활동하는 애국지사”로 격찬했었다.

    윤이상이 “祖國統一(조국통일)을 위해 앞으로 힘과 재능을 다 바치겠다고 했다”는 김일성의 언급도 나온다.

    북한정권은 윤이상을 “애국자”로 칭송하면서, 윤이상음악당·윤이상음악회·윤이상음악연구소 등을 만들어 운영 중이다. ‘음악연구’ 2000년 28호 등 북한 문건에는 “윤이상 선생은 열렬한 애국자”, “애국애족의 충정으로 불타는 윤이상 선생”,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윤이상 선생의 애국충정을 헤아려 윤이상 음악 연구소를 꾸려주었다” 는 식의 등의 내용이 자주 나온다.

    북한의 ‘문학예술출판사(주체92(2003)년 출간)’가 펴 낸 ‘영원한 추억’이란 책자에는 김일성 사망 당시 윤이상이 썼다는 편지도 수록돼 있다. 윤이상의 편지는 “길이길이 명복을 비옵니다. 끝없이 우리 민족의 광영을 지켜주소서”, “우리 력사 상 최대의 령도자이신 주석님의 뜻을 더욱 칭송하여 하루빨리 統一(통일)의 앞길을 매진할 것을 확신합니다”는 등 김일성에 대한 찬양일변도이다.

    윤이상은 김일성에 충성하며 일평생 反(반)대한민국 활동을 벌여온 인물이다. 그가 추구한 통일은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 통일도 아니고, 그가 지향한 애국의 대상도 대한민국이 아니었다.

    북한정권의 對南적화공작에 힘을 실어 온 사람이 건국과 부국을 이룬 지도자마저 제치고 어린이 위인전에 등장하는 게 오늘날 한국의 현실이다. 정부가 손을 놓고 있다면 누군가라도 나서 바로잡아야 할 일이다.

    문제의 위인전은 ‘2009대한민국교육경영대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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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5년 11월4일 사망한 윤이상(尹伊桑)은 소위 ‘세계적음악가(?)’로 국내에 선전돼 있다.

    그러나 그의 음악성과는 별도로 윤이상은 널리 알려진 반한(反韓)인사이다. 그는 67년 「동백림 사건」에 연루됐었다. 이 사건은 당시 유럽에 유학했던 유학생 등을 중심으로 동백림(동베를린) 주재 북한대사관과 북한을 왕래하며 벌어진 간첩사건이었다. 윤이상은 이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2년 후 刑집행 정지로 석방됐었다.

    윤이상의 반한(反韓)행적은 동백림 사건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는 이 사건 이후에도 죽는 날까지 북한을 오가며 친북(親北)성향 단체에서 활동해왔다. 「민건회(민주사회 건설협의회)」회장, 「한민련(민족민주통일 해외한국인연합)」구주본부의장, 「한국학술연구원(KOFO)」원장, 「유럽민협(재유럽 민족민주운동협의회)」고문 등 직함도 다양했다. 윤이상은 90년 11월20일 독일 베를린에서 남북, 해외범민련의 3자기구로 설립된 이적단체(利敵團體) 범민련의 공동의장직에 취임하기도 했다.
     
     <『너는 칠보산연락소 비밀 빼간 미제(美帝)간첩이다』>
     
    윤이상의 실체는 92년 「오길남 간첩사건」으로 다시 확인됐다. 오길남 박사는 독일유학 中 정치망명한 뒤 85년 아내와 두 딸을 데리고 입북(入北)해 한민전 대남흑색방송요원으로 활동했다. 그는 86년 11월「재독유학생포섭 대동(帶同)입북지령」을 받고 덴마크로 침투하던 중 코펜하겐 공항에서 홀로 탈출에 성공했다. 이후 吳박사는 독일 등지를 떠돌며 가족의 구명을 위해 애를 쓰다 92년 5월 결국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현재 서울에서 거주하고 있다.

    윤이상은 북한과 연계해 吳박사의 입북(入北)을 적극 권유 및 주선했고, 吳박사가 탈출 후 독일에 체류하는 과정에서도 갖은 협박을 하며 再입북을 권유했다. 윤이상이 독일에서 설립한 한국학술연구원(KOFO) 역시 북한 대남공작기구의 자금을 받아 설립, 운영된 조직이라는 사실도 밝혀졌다.
     
    정부는 92년 국가안전기획부가 발간한 <入北자수간첩 오길남 사건내용>이라는 수사결과에서 『윤이상은 북한의 정치노선에 따라 활동하고 있는 북한의 문화공작원』이라고 판단했다. 또 17회에 걸쳐 입북(入北)하여 김일성을 접촉하고, 김일성 75회 생일선물로 『나의 땅 나의 민족이여』라는 노래를 선물했던 사실도 적고 있다. 일부를 인용하면 아래와 같다.
     
     《윤이상은 △80.11 북한 조국통일 민주주의 전선 중앙위로부터 『고려연방제 창립준비위원회 결성을 위해 해외대표로 참석하라』는 서신을 받는 등 북한의 정치노선에 따라 활동하고 있고, △84.12 평양에 북한의 해외문화 공작전위조직인 『윤이상 음악연구소』를 설립하였고, △88.7 동경에서 정부의 대북교류 및 개방화 추세에 편승, 휴전선에서 「남북 합동음악제」개최를 제의, 북한 측으로부터 즉각적 찬동을 얻는 등 북한의 문화공작에 따라 남북음악제를 추진한 바 있고, △ 한편 지금까지 밝혀진 바로는 17회에 걸쳐 음악제 구실 등으로 입북(入北), 김일성을 접촉하는 한편, 김일성 75회 생일선물로 작곡하여 바친 반미, 반파쇼, 통일투쟁을 내용으로 한 『나의 땅 나의 민족이여』 등 자작곡을 10회에 걸쳐 연주회를 개최하는 등 윤이상은 북한의 조종을 받아 활동하고 있는 북한의 문화공작원임.
     
    윤이상의 친북(親北)행적은 오길남(吳吉男) 박사가 93년 서울에서 출간한「김일성주석 내 아내와 딸을 돌려 주오」라는 수기에 자세히 적혀 있다. 吳박사는 85년 자신의 入北과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윤이상 씨가 내게 편지를?」 나(오길남)는 놀람 반 불안 반으로 편지를 받았다. 왜냐하면 윤이상이 北과 내통한다는 걸 독일에 사는 우리들은 모두 알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는 거물이었다.「...간난신고 끝에 학위를 취득한 것을 축하합니다...이제는 민족통일운동에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때라고 생각하오. 그러니 북한으로 가서 그동안 배운 지식을 동포를 위해 썼으면 하오...」...(중략)...윤이상씨는 내게 거듭 권했다. 「고생하지 말고 북한으로 가시오. 거기가면 오 박사는 대접을 받으면서 학문을 이룰 수가 있소」
     
    윤이상은 86년 吳박사가 북한을 탈출한 뒤 『은혜를 베풀어 준 김일성 주석을 배반했을 뿐 아니라 칠보산연락소(한민전 산하 대남흑색방송 구국의 소리를 전담하는 곳)비밀 소지자이므로 가족을 인질로 잡아둘 수밖에 없다』며 다시 북한에 돌아갈 것을 회유했다고 같은 책에서 밝히고 있다. 윤이상은 북한에 동조하지 않는 吳박사를 힐난하며 이렇게 말하기도 했던 것으로 적혀 있다.
     
     《내 말을 듣지 않고 다시 경솔한 짓을 하면 당신 가족을 가만두지 않겠소. 왜 사람들을 집적거리고 다니며 北을 욕하는 거요. 가족을 잃어야 정신을 차리겠소? 통일운동에 나서라고 하지 않았소? 왜 좋은 글을 써서 신문이나 학술잡지에 내지 않소? 그렇게 하지도 않으면서 통일운동을 자꾸 훼방 놓고 다니면 당신 가족은 죽는 줄 아시오
     
     <오길남氏 가족은 수용소로, 아내는 수차례 자살 시도>
     

  • 윤이상의 공갈은 단순한 공갈이 아니었다. 吳박사는 1992년 귀국한 탈북자들로부터 가족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는데, 그 내용이 처참했다. 가족이 모두 정치범 수용소에서 생활했고 아내는 자살을 시도했다는 얘기까지 듣게 된다. 아래는 92년 11월29일자 서울신문에는 탈북자 안혁, 강철환씨가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의 참상을 폭로하며 증언한 吳박사 가족의 이야기이다.
     
     《...그들은 지난 4월 독일 주재 우리 대사관을 통해 귀순한 경제학 박사 오길남씨의 부인 신숙자씨와 두 딸 혜원, 규원이었다...신 아주머니는 수용소의 첫날밤부터 목 놓아 울었다. 「어린 딸들과 이곳에서 짐승 같은 생활을 하다가 죽게 되다니...」그러나 혹독한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 온종일 작업을 하느라 녹초가 된 사람들은 신아주머니의 구슬픈 하소연과 울음소리에 신경 쓸 처지가 못 됐다...이튿날 새벽녘 간밤의 울음소리와 다른 여자 아이들의 날카로운 울부짖음에 놀라 눈을 떴다. 방문을 열어젖히자 이불보를 말아 만든 끈에 신아주머니의 목이 매달려 있었다...그러나 이날의 자살은 실패로 돌아갔고 그 후에도 그녀는 몇 차례 더 자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신아주머니가 수용소에 들어온 지 석 달째쯤이었다. 새벽녘에 「불이야」하는 소리에 깨어났다...판자문을 열자 방안은 연기와 불길로 가득 차 있었고 신아주머니가 두 딸을 겨드랑이에 꼭 낀 채 머리카락과 얼굴, 손발이 불에 그을려 실신해 있었다. 신 아주머니를 밖으로 끌어냈다. 그녀는 발버둥 치면서 울부짖었다. 「죽는 것이 행복한데 왜 말리느냐!」그날 이후 신아주머니는 실성한 듯 웃으며 말하고는 했다. 「여기는 마음대로 죽을 수도 없는 곳이니 할 수 없이 살아가야지...
     
     <『윤이상 선생은 열렬한 애국자』 북한서 칭송받는 윤이상>
     
    윤이상과 북한과의 커넥션을 입증하듯, 북한에서는 20여 년 전부터 「윤이상 음악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으며, 평양에서는 매년 「윤이상 음악당」에서「윤이상 음악회」가 열린다. 2008년 제27회를 맞이한 「윤이상 음악회」는 같은 해 10월15일~17일 개최됐다. 조선중앙통신이 보도한 바에 따르면, 『개막 공연에는 북한의 중앙예술단체와 윤이상음악연구소 관현악단, 김원균명칭 평양음악대학 관현악단 예술인들이 출연했고...윤이상 선생의 부인과 딸, 신계륜 이사를 단장으로 한 남측 「윤이상 평화재단」 참관단이 공연을 관람했다.』
     
    92년 북한은 윤이상을 모델로 한 「민족과 운명」이라는 영화를 만들기도 했다. 황장엽 前북한로동당 비서는 자신의 책 「북한의 진실과 허위」에서 『김정일이 애국적 민주인사들을 끌어당기기 위하여 「민족과 운명」이란 제목 밑에 윤이상 선생에 대한 영화까지 만들도록 하였다』고 언급하고 있다.
     
    김정일이 직접 지도한 多부작 극영화 「민족과 운명」은 해외로 망명, 친북으로 변신한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북한체제를 홍보하는 선전물이다. 99년 북한의 「조선대백과사전」은 「민족과 운명」에 대해 『우리 수령(首領), 우리 당(黨), 우리 인민, 우리 사회주의 조국이 제일이라는 조선민족제일주의 사상을 반영하는 작품』으로 정의하고 있다.
     
    같은 사전은 윤이상 편을 다룬 세 편의 영화(14부~16부)에 대해 『남조선 사회를 등지고 해외에서 살면서 정의로운 음악창작활동으로 조국통일 위업에 적극 이바지한 재능 있는 음악가』가『사회주의 조국의 품에 안겨 작품을 더 훌륭히 되살리어 중앙무대에 내놓게 되며 인민들로부터 찬사를 받게 된다』는 내용으로 설명한다.
     
    북한이 펴 낸 「조선영화(93년 10, 11, 12호)」는 이들 세 편의 영화에 대해『남조선괴뢰도당의 반민족적 분열주의 책동을 예리하게 까밝히면서 사회주의 조국의 품이야말로 개인의 희망도, 포부도, 재능도 활짝 꽃피워주는 참된 삶의 품이라는 것을 힘 있게 확증해주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북한정권은 윤이상을 애국자로 칭송한다. 북한 문건에는 『윤이상 선생은 열렬한 애국자』,『애국애족의 충정으로 불타는 윤이상 선생』,『경애하는 장군님께서 윤이상 선생의 애국충정을 헤아려 윤이상 음악 연구소를 꾸려주었다』는 식의 등의 내용이 자주 등장한다. 일부 내용을 인용하면 아래와 같다.
     
     《열렬한 애국자가 아닌 작곡가는 애국주의적인 작품을 창작할 수 없으며 민족을 사랑하지 않는 예술가 역시 민족을 위한 예술을 창작할 수 없다. 우리 민족이 낳은 세계적인 작곡가 윤이상 선생은 열렬한 애국자이며 저명한 반전파쑈민주인사인 것으로 하여 그처럼 숭고한 애국애족의 리념과 온 민족의 열렬한 지향과 념원 그리고 세계평화를 수호하려는 인류공동의 념원을 진실하게 반영한 음악작품들을 수많이 창작할 수 있었으며 우리 인민과 세계평화애호인민들의 그처럼 높은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이다(북한 발간 「음악연구」 1990년 2호, 「윤이상음악연구소 연구사, 리차윤」의 글 中)
     
     《바로 교성곡 「나의 땅, 나의 민족이여!」는 애국애족의 충정으로 불타는 윤이상 선생의 숭고한 민족적 량심에서 터져 나온 걸출한 작품으로서...이 교성곡에 담겨있는 숭고한 애국애족의 리념은 무엇보다 먼저 작품의 주제에서 강하게 표현되고 있다(출처 上同)
     
     《「나의 땅, 나의 민족이여!」는 애국애족의 충정을 담은 작품의 고상한 사상성과 작곡가의 뛰어난 작곡기법에 의하여 담보된 높은 예술성이 훌륭하게 결합된 것으로...온 겨레들을 자주와 통일 구국에의 성전에로 불러일으키는 높은 사상예술성을 가진 걸출한 작품으로서 앞으로 우리 민족의 지상의 임무인 조국통일을 앞당겨 오는데 거대한 기여를 하게 될 것이다(출처 上同)
     
     《그것(공연 성공)은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우리에게 안겨주신 뜨거운 사랑과 배려의 결과로 이루어진 담력입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일찍이 윤이상 선생의 애국충정과 재능을 헤아려 우리 조국의 수도 평양에 관현악단을 갖춘 일류급의 윤이상 음악 연구소를 꾸려주시고 연구소의 관리와 운영에 이르기까지 세심히 보살펴주시지 않았더라면 오늘과 같은 성과를 거둘 수 없었을 것입니다...이 세상에 나라도 많고 민족도 많지만 우리처럼 한 작곡가를 위해 크나큰 사랑과 배려를 돌려주시는 위대한 령도자를 모신 그러한 인민은 어디에도 없습니다.(북한 발간 「음악연구」 2000년 28호, 「윤이상관현악단 악장 김철룡」인터뷰 中)
     
     <김일성 앞에서 『조국통일을 위해 힘과 재능을 다 바치겠다?』>
     
    김일성은 윤이상을 극찬해왔다. 예컨대 2000년 북한이 펴 낸 김일성 교시집(敎示集) 「재(在)서독교포 윤이상 일행과 한 담화」「재(在)서독 교포 윤이상과 한 담화」등에 따르면, 김일성은 윤이상이『조국통일 위업에 커다란 공적을 쌓아올렸다』며 그를 『조국통일을 실현하기 위하여 활동하는 애국지사』로 격찬했었다.
     
    윤이상이 『조국통일을 위해 앞으로 힘과 재능을 다 바치겠다고 했다』는 김일성의 언급도 나온다. 윤이상은 『주체사상은 현시대에 맞는 사상』이라고 말했고, 김일성은 『그것은 옳은 말』이라고 화답했다는 내용도 수록돼 있다.
     
    조선로동당은 당(黨)규약에서 『조선로동당의...최종목적은 온 사회의 주체사상화와 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하는데 있다』고 명시하고, 이를 위해 「고려민주연방공화국」이라는 소위 연방제 통일을 주장해왔다. 논리적으로, 김일성이 말한 조국통일이란 적화(赤化)통일, 공산(共産)통일이다. 따라서 윤이상이 『힘과 재능을 다 바치겠다』고 다짐했다는 조국통일 역시 적화통일, 공산통일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아이러니한 것은 대한민국이다. 북한정권의 『애국지사』 윤이상을 기념하는 음악당 건립에 1480억 원의 국고를 사용한다는 것이다.
     
    상술(上述)한 교시집에서 교시집의 일부 내용을 인용하면 아래와 같다.
     
     《윤이상 선생은 범민족통일음악회의 성과를 통하여 조국통일 위업에 커다란 공적을 쌓아올렸습니다....선생은 범민족통일음악회를 통하여 북에서 남조선당국자들의 기만선전을 깨는데도 크게 이바지하였습니다....선생이 조국통일을 위해 앞으로 자기의 힘과 재능을 다 바치겠다고 하는데 대단히 좋은 일입니다. 나는 선생이 이 사업에서 큰 성과를 거두리라고 믿습니다(재서독교포 윤이상 일행과 한 담화 주체89-2000년 1월20일)
     
     《선생이 민족의 단결과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위한 북남동포호의 소집문제를 제기하였는데 그에 대하여 간단히 말하겠습니다. 나는 북남동포회의를 하자는 선생의 제의가 매우 좋은 발기라고 생각하면서 전적으로 지지합니다...나는 선생과 같이 민족분렬을 끝장내고 조국통일을 실현하기 위하여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애국지사들이 있기 때문에 조국통일 위업은 반드시 앞당겨지리라고 확신합니다(재서독교포 윤이상과 한 담화. 2000년 1월20일)
     
     《선생이 주체사상(主體思想)은 현시대에 맞는 사상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옳은 말입니다. 우리가 혁명과 건설에서 백전백승하며 커다란 승리를 거두고 있는 것은 주체사상(主體思想)을 지침으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아무 때든지 선생이 다시 와서 만날 기회가 있기를 바랍니다(재서독교포 윤이상과 한 담화. 2000년 1월20일)
     
     《위대한 김일성 대원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내가 윤이상 선생을 아껴야 한다고 한 것은 음악계에서 그런 재간 있는 사람을 찾아보기 드물기 때문입니다...그는 우리 민족의 귀중한 재산이고 재간둥이입니다」(북한 발간 음악연구 2000년 28호, 리철우가 쓴「내가 체험한 윤이상 음악」中)
     
     <『위대하신 수령님 영생불멸(永生不滅)하십시오』>
     
     북한의 「문학예술출판사(주체92(2003)년 출간)」가 펴 낸 「영원한 추억」이란 책자에는 김일성 사망 및 사망 1주년 당시 윤이상과 부인 이수자氏가 썼다는 편지도 수록돼 있다.
     
     윤이상의 편지는 『길이길이 명복을 비옵니다. 끝없이 우리 민족의 광영을 지켜주소서』,『우리 력사 상 최대의 령도자이신 주석님의 뜻을 더욱 칭송하여 하루빨리 통일의 앞길을 매진할 것을 확신합니다』는 등 김일성에 대한 찬양일변도로 돼 있다.
     
     사진으로도 촬영돼 있는 부인 이수자氏의 글은 김일성 사망 5년을 맞아 금수산기념궁전 방명록에 적은 것이다. 이 글은 『아-수령님, 수령님, 위대하신 수령님!』,『부디 평안을 누리시고 영생불멸하십시오』,『수령님을 끝없이 흠모하며 수령님 령전에 큰절을 올립니다.』등의 내용으로 돼 있다. 「영원한 추억」에 수록된 윤이상 부부의 편지를 인용하면 아래와 같다.
     
     《아- 수령님, 수령님, 위대하신 수령님!… 수령님께서 떠나신지 벌써 어언 5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대를 이으신 장군님께서 한 치의 빈틈없이 나라 다스리심을 수령님께서 보고 계실 것입니다. 부디 평안을 누리시고 영생불멸하십시오. 우리의 강토를 지켜주시고 민족의 념원인 통일됨을 열어주십시오. 수령님을 끝없이 흠모하며 수령님 령전에 큰절을 올립니다. (주체88년 7월 8일 리수자)
     
     《하늘이 무너진 듯한 충격과 이 몸이 산산이 쪼각나는 듯한 비통한 마음으로 위대하신 수령님의 서거의 통지를 접하고 허탈상태에 있는 이 몸이 병중에 있으므로 달려가 뵈옵지 못하는 원통한 심정을 표현하며 전 민족이 한결같이 우리 력사상 최대의 령도자이신 주석님의 뜻을 더욱 칭송하여 하루빨리 통일의 앞길을 매진할 것을 확신합니다. (1994.7.9 빠리에서. 치료 중에 있는 윤이상 부부)
     
     《위대한 김일성주석님의 서거 1돐을 맞이하여 그 영령 앞에 심심한 애도와 흠모를 절감하오며 길이길이 명복을 비옵니다. 끝없이 우리 민족의 광영을 지켜주소서. 도이췰란드 베를린의 병원에서 윤이상 삼가 올립니다. (1995년 7월 8일)
     
     《수령님! 위대하신 수령님! 수령님께서 사랑하시고 아끼시고 민족의 재간둥이라고 부르시던 저의 남편 윤이상은 오늘 병원 병석에 누워있어 저와 같이 수령님 령전에 가서 수령님을 뵙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주만사의 원리라고는 하지마는 수령님께서 저희들 곁을 떠나신지 벌써 1년이란 세월이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저희들은 항상 수령님께서 저희들 곁에 계심을 느끼며 수령님을 추모할 때마다 그 인자하시고 인정 많으시고 눈물 많으신 우주와 같이 넓으신 덕성과 도량, 세상의 최고의 찬사를 올려도 모자라는 수령님, 살아계셨어도 그러하였고 돌아가신 뒤도 부디부디 불우한 저의 민족의 운명을 굽어 살펴주소서. 수령님 령전에 무한한 평화와 명복을 빕니다. (1995년 7월 8일. 리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