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광장이 붉은 광장이 되고,서울 한 복판에서 ‘김정일 만세’를 부르는 참담한 사태는 반드시 막아야 한다"
  • 부조리한 현실에 자신을 맡길 수 없었던 왕충(王充, 27~104)은 ‘가짜가 진실한 것보다 잘난 체 하고 진짜가 거짓에 의해 난도질을 당하는데도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고, 옳고 그름이 바로 잡히지 않는 것’에 분노해 논형(論衡)을 썼다고 했다. (김종민 교수의 ‘논형’ 해석 참조)

    아마 왕충이 살았던 後漢(후한)도 오늘의 한국처럼 거짓이 진실을 덥고 부도덕한 인간들이 도덕을 들먹이며 세상을 어지럽혔던 모양이다. 정의를 앞세워 협박 공갈로 금품을 갈취하는 모리배들이 득세하는 세상이었던 것 같다.

    지식인 최고의 덕목은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라고 가르치며 ‘진실 속에 양심이 있다’고 믿는 왕충이 현재 한국에 살고 있다면 제2의 ‘논형’을 쓰며 보다 혹독한 비판의 글을 남길 것이다.

  • ▲ 박원순 후보ⓒ
    ▲ 박원순 후보ⓒ

    ‘非理(비리)도 잘하면 출세한다’고 호언하는 민주당 박지원의 두꺼운 얼굴과 함께 떠오르는 것이 선량한 시민운동가로 위장한 친(親)김정일주의자, 박원순의 두 얼굴이다. 그의 얼굴에 번지는 그 야릇한 웃음이 김대중의 사기성 웃음을 빼 닮았다는 인상에는 섬뜩한 느낌마저 든다.

    지금 한국 사회는 거짓과 위선, 비리와 부패로 큰 몸살을 앓고 있는 가운데 평양발 김정일 쓰나미에 기둥뿌리가 뽑혀나갈 지경이다. 민주와 희망과 정의로 위장한 시민운동과 아름다운 나눔으로 덧칠한 從北主義者(종북주의자)들의 노골적인 정치참여는 나라를 더욱더 혼돈으로 몰아가고 있다.

    이런 가운데 안보불안(安保不安)과 정치불신(政治不信), 그리고 부정부패로 인한 사회불안이 가져온 예측불가능의 불안정 속에 치러지는 ‘10·26 서울시장 보궐선거’는 잊혀져 가던 패망직전의 월남을 다시 연상케 한다.

    1967년 월남 대통령 선거에서 차점으로 낙선한 야당지도자 쭝딘쥬가 대표적인 간첩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가. ‘10·26 서울시장 보궐선거’를 계기로 짚어보는 한국의 安保不安(안보불안) 상태가 어쩌면 패망 직전의 월남과 그리도 닮은 꼴인지 온 몸이 얼어붙는 것 같다.

    “월남은 힘에 의해 망한 것이 아니라, 시민단체와 종교단체는 물론 정부 구석구석까지 침투해 국가의 온 신경망을 장악한 간첩들에 의해 망했고, 그 간첩과 공산주의자들은 하나같이 민족주의자, 평화주의자, 인도주의자로 위장해, 민족공조를 내세우며 반미를 외치고 선량한 국민을 선동해 극성맞은 데모를 주도하며 대중 지지기반을 넓혀 나간 그 선동주의자들에 의해 망했다”는 이대용 장군의 증언을 듣고도 깨달음이 없다면 우리의 미래는 누가 보장한단 말인가.

    월남은 그 막강한 미국의 힘을 등에 업고도 떨어진 군화도 제대로 신지 못한 越盟軍(월맹군)에게 망해 역사의 무대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한국의 현실이 패망직전의 월남과 무엇이 다른가. 분에 넘치는 풍요에 젖어 흥청대며 위장평화와 경제력만 들먹일 때가 아니다.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른다’는 속담은 바로 우리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하며 병든 민족혼의 내일을 점쳐 본다.

    어느 시대, 어느 국가에나 조국에 상처를 주고 적을 이롭게 하는 반역기질에 찌든 고약한 정치인, 언론인, 종교인, 지식인, 비평가는 있다. 다시 말해 떨어진 구두창에 최고 명품 양말로 대변되는 그런 위선자 말이다.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저들이 누리는 자유(自由), 평화(平和), 豊饒(풍요)는 결코 공짜로 얻어진 것이 아니며, 김정일 추종세력을 위한 것은 더더욱 아닌데도 저들이 어느 것 하나 거칠 것 없이 자유롭게 反逆(반역) 질을 할 수 있는 것은 대한민국이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사실만은 인정해야 하는 것 아닐까.

    칠흑같이 캄캄했던 해방정국에서 대한민국을 건설하고 숫한 고난의 길을 헤치고 여기까지 온 역사의 길에는 우리가 지고 온 그 역사의 무게만큼의 고통과 희생, 천년미래를 설계한 건국주역들과 함께 대한민국 탄생의 터전을 닦으며 흘린 선열들의 거룩한 희생과 눈물과 땀과 열정이 녹아 있다.

    이렇게 탄생된 대한민국의 가치는 결코 떨어진 구두로 짓밟을 수 있는 ‘조선민주주의인민 공화국’ 같은 불량품이 아니다.

    그런데 ‘10·26 서울시장 보궐 선거’의 뒤틀린 흐름은 대한민국의 가치를 부정하는 김정일 세력이 득세하는 쪽으로 흐르고 있다. 이것은 우리 민족의 敍事詩(서사시)에 또 하나의 상처를 입히는 역사적 죄악이다. “민족의 서사시를 기억 못하는 민족은 언젠가는 반드시 망한 다”고 했는데 말이다.

    참여연대, 한마디로 정의와 아름다움으로 덧칠하고 시민운동을 벌이는 단체다. 지금까지 격렬하게 反대한민국 운동을 펼치며 북한 주장을 대변해 온 단체다. 그 중심에 ‘시민후보’ 박원순이 있다. 그는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부정하고 反美(반미)를 외치며 국가보안법 철폐를 주장하는 친(親)김정일 집단 편에 서온 반(反)대한민국 사람이다.

    앞에서는 기업을 상대로 정의와 공정의 깃발을 들고 협박과 공갈을 하고, 뒤로는 돈주머니 들고 금품을 뜯어내는 조폭 같은 시민단체를 이끌며 떨어진 구두창에 최고급 브랜드 양말을 신고 다니는 시민운동가, 그것이 진짜 박원순의 실체가 아닐까.

    박원순이 주장하는 대로 대한민국이 극우 독재국가라면 과연 그의 일파가 기업을 공갈쳐 그처럼 엄청난 150억에 가까운 돈을 뜯어낼 수 있었을까. 그의 마음의 조국인 김정일의 북한에서도 박원순은 그런 일이 가능하다고 믿는가. 그에 대한 궁금증과 그의 입가에 번지는 야릇한 웃음의 속내를 통 가늠할 수가 없다. 김대중의 얼굴을 뜯어보면 짐작은 할 수 있겠지만.

    따지고 보면 우리나라 기업윤리의 실종이 바로 박원순 같은 시민운동가를 길러내는 원천이 아닌가 한다. 따라서 기업인들은 결코 이 부조리한 반사회적 기업문화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 아름다운 시민운동으로 위장한 친북시민단체에는 그처럼 엄청난 뇌물성 기부를 바치는 반면 지금까지 보수우익단체가 그런 기부를 받았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이것은 한국기업의 부도덕성이 얼마나 심각한 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세계에서 가장 무서운 나라는 핵(核)으로 장난치는 북한 같은 깡패나라가 아니라 도덕적 힘을 가진 나라다. 우리는 이제 기업인을 비롯해 사화지도급 사람들이 윤리적(倫理的) 자유(自由)와 도덕적(道德的) 자유(自由)의 진정한 가치를 무시한 채 반 기업문화와 반국가적 풍토에만 안주한다면 대한민국의 미래는 없다고 경고하는 시대의 메시지를 속죄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또한, 박원순 일파가 주관하는 공식 행사에는 태극기와 애국가가 없다. 2006년 6월 광주에서 열린 ‘6·15 민족통일대축전’을 기억하는가. 김일성의 주석단(귀빈석)이 등장하고, 평양식 대남전략의 상투적 용어인 화해, 협력, 민족끼리의 함성이 하늘을 찌른 그 광란의 ‘6·15 민족대축전’ 말이다.

    그 현장에는 태극기는 없고 정체불명의 한반도기가 광주 하늘을 뒤덮었고, 애국가 대신 북한국가 가사를 적은 전단지가 뿌려졌다. 이 행사에 참가한 단체와 인물은 국내 입국이 금지됐던 해외 친북인사와 대법원이 이적단체로 규정한 한총련, 범민련 등, 종북단체들 뿐이었다. 모두가 박원순과 직간접으로 연관된 인물과 단체들이다.

    박원순이 서울시장이 되었을 때 서울시청 지붕에 정체불명의 ‘한반도기’가 펄럭이고 서울시청 안에서 ‘임을 향한 행진곡’이 울려 퍼지지 않는다고 누가 보장할 수 있는가.

    서울을 잃으면 전부를 잃는다. 그런데 10·26 서울시장 보궐선거’에 목숨을 거는 저들을 대처하는 한나라당의 행태는 실망을 넘어 분노까지 느끼게 한다. 이처럼 역사적 격동기엔 그 어떤 가치도 국가안보보다 상위에 놓일 수 없는데, 의지도 열정도 이념도 없는 한나라당이 과연 이 절대가치를 지켜낼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서울 광장이 붉은 광장이 되고, 서울 한 복판에서 ‘김정일 만세’를 부르는 참담한 사태는 반드시 막아야 한다. 마음으로는 북한을 조국으로 섬기면서 진보와 개혁의 탈을 쓰고 시민운동을 벌이는 종북좌파의 서울시장 진출만은 절대 허용해서는 안 된다.

    한나라당이 서울을 잃으면 전부를 잃는다는 위기의식을 어느 정도 심각하게 느끼고 있느냐, 가짜 시민운동가의 선동과 선전이 그처럼 국민들의 마음을 사게 된 동기가 무엇인가를 바로 깨닫지 못하면 희망이 없다.

    ‘서울을 잃으면 전부를 잃는다’는 절박감을 가슴으로 느낄 때 내년 총선과 대선도 희망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