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 평등의 또 다른 이름 '복지 평등'...공산주의가 자유를 억압할 수 밖에 없는 이유다
  • 자유가 없는 곳엔 민주도 평등도 없다 
      
    자유민주에서 자유를 빼면, 민주는 목소리 큰 자에게 짓밟히고 평등은 힘센 자에게 백지위임된다. 
    최성재   
     
      아리스토텔레스는 <<윤리학>>과 <<정치학>>에서 미덕(arete)과 텔로스(telos)를 핵심 주제로 삼았다. 그에게 미덕(美德, virtue)은 개인의 출세나 가문의 이익보다 그리스인의 공동체, 폴리스(polis)의 이익과 발전을 우선하는 것이었다. 공동체의 공동 목표이면서 공공선(公共善)이자 정체성(identity)이 바로 텔로스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미덕은 정의(正義)의 단초인데, 그것은 가정의 훈육과 사회의 교육과 개인의 수양으로 텔로스를 내면화한 것이다. 미덕과 텔로스와 정의는 결국 이름만 다를 뿐 동일한 것이다. 귀족도 부모의 보살핌과 사회의 가르침으로 15살이 되어야 비로소 스스로 텔로스를 실천할 수 있게 되므로 시민 자격도 이때부터 갖춘다. 그러므로 귀족이나 부자가 아니지만, 농부나 장인이나 상인도 텔로스를 내면화하면 선거권이 있는 시민이 될 수 있다.
     
      역사적으로 솔론의 개혁에 이어 클레이스테네스가 서민층과 손을 잡고 민회를 확대개편하고 민회에게 실질적 힘을 줌으로써 아테네는 귀족과 서민 사이의 갈등을 줄이고 텔로스에 합의를 볼 수 있었다.
    후에 페리클레스는 비옥한 스파르타와 달리 척박한 아테네에서 상공업을 중심으로 일자리를 대대적으로 창출하여 현대적으로 말하면 서민들에게 적극적 자유(positive liberty) 또는 공화적 자유(republican liberty)를 줌으로써 개인의 이익과 폴리스의 이익을 일치시켰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귀족정을 선호했지만, 아테네의 이런 역사적 사실에 철학적 기초를 마련했다.
     
      대한민국의 텔로스는 무엇인가? 대한민국의 공동 목표는 무엇인가? 대한민국의 공공선은 무엇인가? 대한민국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그것은 헌법에 명시되어 있다. 자유민주와 시장경제, 이것이 대한민국의 텔로스다. 대한민국의 공동 목표이다. 대한민국의 공공선이다. 대한민국의 정체성이다.
     
      자유와 민주를 결합시켜 자유민주를 탄생시킨 것은 18세기 유럽의 계몽주의다. 자유의 선구자는 홉스와 로크였지만, 자유는 몽테스키외(Montesquieu)의 <<법의 정신>>에서 구체화되었다. 그것은 삼권분립에 기초한 법률 안에서의 자유다. 개인이 아무 거나 하는 싶은 대로 하는 게 아니라 법을 어기지 않는 한 무엇이든 생각할 수 있고 말할 수 있고 행할 수 있는 권리가 자유다. 입법, 사법, 행정이 서로 견제하지 못하는 국가에선 법이 얼마든지 자의적일 수 있으므로 그것은 악법이고 그런 법에는 저항할 수 있고 저항해야 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귀족 출신으로 전제주의(despotism)가 아닌 한 군주정(monarch)이나  귀족정(aristocracy)도 용납한 몽테스키외와는 달리, 서민 출신인 루소는 삼권분립보다 당시로선 너무도 비현실적으로 보였지만 다수결에 기초를 둔 민주(democracy)를 제창했다. <<사회계약론>>에서 루소는 이 다수결에도 일정한 제한을 두었다. 그는 국가를 다스릴 대표를 뽑는 선거는 변덕스러운 개별 의지가 아니라 다수가 원하고 다수에게 이익이 되는 일반 의지를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유민주가 최초로 탄생한 곳은 유럽이 아니라 아메리카였다. 영국의 아메리카 식민지였다. 거기서 자유는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는 것이었다. 스스로 과세(taxation)도 하고 스스로 법률도 제정하고 스스로 군대도 보유하고 스스로 전쟁도 하려면, 식민지의 독립 곧 자유를 쟁취하지 않으면 불가능했다. 그래서 미래의 미국은 영국의 최대 라이벌 프랑스와 손잡고 그들의 힘을 빌려 피로써 독립을 쟁취했다. 다행히 미국에는 왕족도 없었고 귀족도 없었다. 루소가 말한 타고난 평등이 고대 설화가 아닌 현실에 존재했던 것이다. 그래서 미국은 자연스럽게 민주를 택했다. 이 경우에도 자유가 없었다면, 민주가 존재할 수 없었다.
     
      근대 민주는 1215년 영국의 대헌장(Magna Carta)에서 시작된다고 하지만, 이것은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귀족이 왕권을 일부 제한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왕건의 고려도, 이성계의 조선도 그 정도의 민주는 있었다. 마그나 카르타는 고대 그리스의 민주에도 한참 못 미쳤다. 1689년 명예혁명에 따라 왕이 군림할 뿐 통치하지 않게 되면서 비로소 영국의 민주는 제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것은 넓은 의미에서 귀족정에 지나지 않았다. 투표권은 극소수 귀족과 부자에게만 있었다. 세 사람이 다섯 명의 의회의원을 선출하기도 했다. 그 정도로 투표권은 근대 초기의 민주정에선 어마어마한 특권이었다.

    노예와 여자는 제외되었지만, 일반 시민도 선거에 참여한 신생 독립국 미국에서 비로소 민주가 제 모습을 갖추었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영국에선 자유가 귀족과 부자에게만 있었기 때문이다. 자유가 없는 곳에서는 현대적 의미의 민주가 존재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해방(자유)도 미국에 의해서 달성되고 민주도 미국에 의해 도입된 한국은 주체할 수 없는 자유민주를 누렸다. 건국 60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주체하지 못해, 숫제 자유민주 자체를 부정하는 무리들이 자유민주에서 자유를 빼라고 윽박지르고 있다.
     
      자유민주의 사상이 프랑스에서 결실을 맺었지만, 그것이 프랑스에서 현실화되는 과정은 독립이 곧 자유였던 미국보다 훨씬 험난했다. 1789년 프랑스 혁명으로 왕정은 타도되었지만, 일반 시민에게는 자유가 너무 생소했던 것이다. 귀족과 지주와 승려의 기득권 못지않게 무질서와 혼란, 폭력과 증오가 난무했다. 결국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불러들였고 새로운 황제를 맞아들였다. 그러나 그런 과정에서 일반 시민의 자유가 점점 커졌다. 농지개혁과 국민교육 등의 조치로 평등도 조금씩 현실화되었다. 민주의 발판이 마련되었다.
     
      19세기에 자유보다 평등을 앞세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가 맹위를 떨치기 시작하면서, 자유가 위협을 받고 민주도 흔들렸다.
    몽테스키외는 일찍이 ‘불평등 의식(the spirit of  inequality)’과 ‘극단적 평등 의식(the spirit of extreme equality)’을 동시에 경계했는데, 전자는 개인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심보이고 후자는 국가 제도 자체를 부정하고 모든 걸 자기들끼리 결정하려다가 도리어 전제주의를 불러일으킨다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서 법치를 따르지 않는 이기적 자유나 인간사회에서 절대 불가능한 절대 평등을 추구하려는 욕구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불러일으키고 결국 최악의 독재를 자초한다는 의미다.
     
      절대평등을 추구한 공산주의는 자유를 억압할 수밖에 없었고 그것은 곧바로 대량학살과 불법구금과 강제노동과 인간성 상실로 이어졌다. 히틀러의 국가사회주의(나치) 뺨치는 좌파 전체주의를 낳았다.

    소련제 탱크에 무참한 살육을 당하고 중공의 100만 대군에게 주머니에 다 들어온 자유민주통일을 빼앗기고, 일제시대보다 가혹한 폭정에 시달리는 동족은 한사코 외면하고 이제 핵폭탄을 머리에 이고, 그 핵폭탄에 머리를 조아리며,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부정하고, 자유민주에서 자유를 쏙 빼어 북한의 독재정권도 쓰는 ‘민주’만을 교과서에 못 박으려는 시도가 공공연히 벌어지고 있다. 제2 야당까지 발끈하며 ‘민주 만세’ 공세를 퍼붓고 여당은 ‘딴 나라’ 일인 양 뒷짐을 지고 곁눈을 흘기고 있다.

    극단적 평등의 또 다른 이름, 경제 체력에 현저히 부치는 ‘나라 말아 먹기’ 복지 빚잔치에 야당에 이어 여당도 다투어 붉은 깃발을 들고 100미터 달리기하듯 미친 듯이 달려가고 있다.
     
      베트남이 좋은 반면교사가 된다. 막상 적화통일되어 자유를 잃자 베트남 국민은 어떤 압제도 공포에 질려서 공산체제를 무조건 민주로 받아들이고 결사든 집회든 시위든 시도조차 못한다. 민주를 외치며 어여쁜 여학생이 꽃바구니 안에 수류탄을 넣어 요인을 암살하고, 민주를 외치며 승려가 자신의 몸에 불을 붙여 산 채로 다비식을 거행하고, 민주를 외치며 농민이 낫으로 같은 농민의 목을 따서 대지의 여신에게 바치고, 민주를 외치며 반체제 인사가 대통령 선거에 나서던 일이 다시는 불가능하게 되었다. 삼권분립이 전혀 이뤄지지 않은 나라에서 공산당만이 유일한 권력이 되었기 때문이다.
     
      자유민주가 조롱거리로 전락한 월남과 달리 대한민국은 자유민주가 건국 초기부터 꾸준히 발전했다.
    1948년부터 바로 성인 남녀 모두 선거권을 가졌고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농지개혁도 이뤄서 사유재산이란 실질적 자유를 얻었고 200만 농가가 거의 동일한 토지를 소유함으로써 어떤 나라보다 평등하게 되었다.

    건국 후 2년 만에 김일성과 스탈린과 모택동이 자행한 공산침략으로부터 공산주의가 강변하는 민주란 것이 얼마나 허황되고 기만적이라는 것도 피로써 배웠다. 자연스럽게 한국에선 자유민주가 반공으로 통할 수밖에 없었다. 절로 그것은 대한민국의 텔로스가 되었다. 정권이 이용한 것도 있지만, 그것은 국민의 일반의지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또한 한국은 5.16 이후 비로소 법치(法治)를 달성함으로써 법 안에서의 자유도 누렸다.
     
      법치는 90년대 이후에 오히려 후퇴하거나 답보했다.

    노조와 시민단체와 정당은 특권계급으로서 치외법권을 누렸다.
    정당한 공권력이 허수아비로 전락했다.
    간첩이 민주인사로 둔갑했다.
    마침내 오로지 공포의 주먹과 기아의 몽둥이로 통치했고 통치하는 민족반역자 김일성과 김정일에겐 엉뚱생뚱 민족이란 면죄부를 상납하고 그들을 절대 비판하지 못하는 자들이,
    북한인권에 대해서는 내정간섭이라며 눈으로 확인할 수 없다는 궤변으로 철저히 외면하는 자들이
    자유대한의 자유를 한껏 악용하여
    아예 자유민주에서 자유를 빼는 것이 진정한 민주라고 강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