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S 한밤중에 전화 걸어 “살았습니다. 고맙습니다” 감사 인사“北, 남북정상회담 제의했으나 거절”…한반도비핵화 선언 “내 결단”
  • 노태우 전 대통령이 1992년 대통령 선거에서 김영삼 당시 민자당 후보에게 선거자금으로 3,000억원을 지원했다고 밝혔다. 자신이 당선된 1987년 대선에서는 전두환 당시 대통령이 지원한 1400억원과 당에서 모은 500억원을 포함 총 2,000억원의 선거자금을 썼다고 했다.

    노 전 대통령은 9일 정치자금과 북방외교를 비롯한 6공화국의 비화를 담은 <노태우 회고록> 상‧하권을 조선뉴스프레스를 통해 출간했다.

    특히 대선 비자금을 상세히 공개하면서 “비자금으로 파생된 일들로 함께 일한 많은 사람과 국민에게 걱정과 실망을 안겨준 데 자괴할 따름”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제 역사를 위한 기록을 남기는 자리이니만큼 핵심적인 내용은 밝혀두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노 전 대통령은 1995년 11월 수감 직전 ‘나 혼자 모든 책임을 지겠다’고 밝힌 뒤 비자금에 관한 침묵을 지켜왔다.

    “87년 2,000억…YS, 92년엔 3,000억 썼다”

  • ▲ 노태우 전 대통령이 9일 <노태우 회고록>을 펴냈다. ⓒ 뉴데일리
    ▲ 노태우 전 대통령이 9일 <노태우 회고록>을 펴냈다. ⓒ 뉴데일리

    노태우 전 대통령은 “내 재임 시까지 여당 정치자금 대부분은 대기업들로부터 충당해왔다. 5·6공화국 시절 정치자금 창구는 청와대로 단일화 돼 있었다"고 밝혔다

    그는 “김영삼 총재는 1992년 5월 민자당 전당대회에서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 뒤 나에게 (대선에서) ‘적어도 4,000억~5,000억원은 들지 않겠습니까’라고 했다. 금진호 전 상공부 장관과 이원조 의원을 김 총재에게 소개시켜주고 이들을 통해 2000억원을 지원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대선 막바지에 김 후보로부터 자금이 모자란다는 SOS(긴급요청)를 받고 금 전 장관을 통해 한몫에 1,000억원을 보내줬다. 김 후보는 한밤중에 전화를 걸어 ‘이제 살았습니다. 고맙습니다’라고 감사인사를 했다”고 밝혔다.

    1987년 자신이 대통령 후보로 나섰을 때에는 전두환 전 대통령으로부터 선거자금으로 1,400억원을 지원받았고 당 재정위원 및 후원회 등에서 모은 500억원을 더해 2,000억원 정도 선거자금을 사용했다고 공개했다.

    靑, 정치자금 창구 단일화…“YS위해 금고에 100억 남겼다”

    노 전 대통령은 “5공화국 시절 민정당 대표로 있을 때 당 운영비는 사무총장이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수령해서 집행했다. 내가 국정을 책임진 후에도 이런 관례를 그대로 유지했다”고 했다.

    그는 “나의 재임 시까지 여당의 정치자금은 대부분 대기업으로부터 충당했다. 기업들은 정부의 국책사업에 참여함으로써 얻은 이익을 상당 부분 정치자금으로 내놨고 정권 측에서는 이 자금을 정치 또는 통치에 필요한 여러 용도로 사용했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서울올림픽 이후 기업인들 면담 신청이 들어오기 시작했는데 면담이 끝날 때쯤 그들은 ‘통치자금에 써달라’며 봉투를 내놓곤 했고 기업인이 자리를 뜨면 바로 이현우 경호실장을 불러 봉투를 넘겨줬다”고 말했다.

    그는 청와대 금고에 대해 “청와대에서 김영삼 대통령 취임식장으로 떠나기 전 그 금고에 100억원 이상을 넣어뒀다”고 전했다.

    노 전 대통령은 비자금 사건 당시 자신이 관리한 금액이 “이자를 제외하면 현금 1,218억원, 기업주에 대한 채권 1,539억원으로 원금만 2,757억원이었다. 대선에서 모두 사용될 것으로 생각했는데 예상외로 큰 돈이 남았다”고 밝혔다. 또 “모은 돈은 훗날 유용하게 쓰자고 생각했다”고 덧붙였다.

    그는 자신을 감옥에 보낸 김영삼 전 대통령과 관련된 비자금은 상세히 기술한 반면 1997년 대선 당시 문제가 됐던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준 '20억+α' 부분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北, 남북정상회담 제의했으나 거절”

    노 전 대통령은 북방외교와 얽힌 비화도 공개했다. 그는 한‧중 수교 과정에서 “중국 측이 ‘북한에 사전 통보하지 않을 테니 한국도 어느 나라에도 (수교 협상을) 알리지 말라’고 강력히 요청해 대만에 알리지 못했다. 그 결과 대만이 수교 단절 등의 조치를 하게 됐다”고 말했다.

    남북관계에 있어서는 “1992년 봄 윤기복 조평통 위원장이 김일성의 특사로 친서와 초청장을 갖고 서울에 왔다. 하지만 초청 시기가 김일성 생일과 맞물려 있었고, 당시 박철언 체육청소년부 장관이 ‘돈과 관련이 있다’고 해서 거절했다”고 소개했다.

    한반도 핵(核) 문제에 대해서는 “1988년 취임 직후 릴리 주한 미 대사와 메네트리 미8군 사령관으로부터 `대한민국에 (미군) 전술핵이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언론에서 핵무기가 여러 군데 배치된 것처럼 보도됐지만 실제로는 한 곳뿐이었다”라고 밝혔다.

    이후 1991년 가을 김종휘 외교안보수석으로부터 ‘미국이 전 세계에 배치한 전술 핵무기를 철수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한국에서도 철수할 것 같다’는 정보보고를 받았고, 북한이 핵무기를 만들지 못하도록 주도권을 잡겠다는 생각에 그해 11월 8일 한반도 비핵화 선언을 발표했다고 회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