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일 '제2회 납북자 기억의 날', 서러움과 아픔 함께 나눠이미일 이사장 "납북이 아니라는 北 주장 방관·묵인 안돼"
  • “61년 전 9월 9일을 나는 80살을 바라보는 지금까지 단 하루도 잊지 못한다.”

    윤정우(76)씨는 중학교 2학년이던 15살에 아버지를 잃었다. 6·25 전쟁이 일어난 해인 1950년, 북한군에게 서울을 빼앗긴 뒤 낙동강 전선에서 인천상륙작전을 준비하던 때였다.

    서울이 수복되기 전 어느 날 갑자기 북한 군인들이 서울 낙원동 자택에 찾아와 아버지를 체포해 납북해갔다.

    멋모르던 시절이었지만, 그 순간을 윤 씨는 아직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당시 대한민국 하와이영사를 지내고 한국으로 귀국한 아버지 윤병수(당시 나이 44)씨는 북한에서도 탐을 낼만한 인물이었다. 아마도 북한이 서울을 내주기 전 국가 건설에 필요한 인재를 확보하기 위해서였을 것으로 윤 씨는 보고 있다.

    아버지가 없는 서러움이나 그에 따른 경제적 궁핍보다 더 서러운 것은 아무도 아버지의 납북을 인정해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서러움을 가슴에 품은 윤씨와 같은 납북자 가족들이 27일 한자리에 모였다.

  • ▲ 27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제2회 납북자 기억의 날에 모인 가족들이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뉴데일리
    ▲ 27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제2회 납북자 기억의 날에 모인 가족들이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뉴데일리

    이날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제2회 납북자 기억의 날' 행사에는 부모나 형제의 생사도 모른 채 61년을 살아온 이들이 그날의 추억을 떠올리며 함께 위로의 말을 건넸다.

    행사를 주최한 6·25전쟁납북자가족협의회 이미일 이사장은 개회사에서 "납북돼 희생되신 것만도 억울한데 납북이 아니라는 북한의 거짓 주장을 방관하거나 묵인하는 것은 희생자의 마지막 명예조차 박탈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 이사장은 "6·25전쟁 납북피해 및 납북피해자 명예회복법 시행을 계기로 올해부터 납북자 신고를 받기 시작했다"면서 "너무 오랜 세월이 지난 탓에 신고 건수가 저조하지만 이 법이 잘 시행될 수 있도록 부탁드린다"고 당부했다.

    현병철 국가인권위원장은 격려사를 보내와 "납북자는 물론 그 가족들이 겪어온 고통을 생각하며 깊은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면서 "문명사회에서 납치는 있을 수 없는 가장 극악한 반인륜적 범죄"라고 말했다.

    이날 행사는 전시납북자에 대한 기억을 고취시키기 위한 음악회 형식으로 진행됐다. 소프라노 김호정 씨가 '그리움' '님이 오시는지' 등의 노래를 독창했고, 색소폰 연주자 이인수 씨는 '단장의 미아리 고개' 등 두 곡을 연주했다.

    참가자들이 납북자들의 사진에 헌화를 하고 6·25전쟁납북자가족협의회원들이 '만나야 하리'를 합창하며 서로의 아픔을 보듬었다.

    끝으로 납북자 가족들은 혹시나 모를 송환을 대비해 유전자 채취를 하는 것으로 행사가 마무리됐다.

    <미니 인터뷰> 이미일 6·25전쟁납북자가족협의회 이사장

    납북자에 대해 북한은 단 한 차례도 공식적으로 인정한 적이 없다. 더 안타까운 것은 뻔히 보이는 사실임에도 우리 정부도 그동안 이를 등한시했다는 것이다. 이 같은 정부 태도를 바꾸기 위해 지난 10년간 백방으로 공을 들인 사람이 6·25전쟁납북자가족협의회 이미일 이사장을 비롯한 가족회원들이다.

    이런 노력으로 정부는 지난해 3월 한국전쟁납북자 관련 특별법을 시행했고 국무총리실 산하의 전쟁납북피해 진상규명위원회를 출범시켰다.

    시작부터 지금까지 가족회를 이끌어온 이 이사장을 만났다.

  • ▲ 이미일 전쟁납북자가족협의회 이사장은 지난 10년간 납북자가족들을 이끌며 관련 법률 제정에 힘써왔다. 사진은 이 이사장(오른쪽)과 한 납북자 가족회원 ⓒ 뉴데일리
    ▲ 이미일 전쟁납북자가족협의회 이사장은 지난 10년간 납북자가족들을 이끌며 관련 법률 제정에 힘써왔다. 사진은 이 이사장(오른쪽)과 한 납북자 가족회원 ⓒ 뉴데일리

    당시 납북은 누가 지시했나?

    -북한인민군, 정치보위부원, 내무서원 등이 북하 김일성과 조선노동당의 지시로 이뤄졌다.

    어떤 사람들을 납북했나?

    - 비무장상태의 남한민간인들로 각계각층의 지도자들을 비롯한 지식인들(공무원, 법조인, 언론인, 학자, 의료인, 사업가, 종교인)과 전쟁수행과 전후복구에 필요한 청년들을 납북했다.

    전체 납북자의 98% 이상이 남성이었고, 85%가 16세 이상 35세 미만의 청장년층이었다.

    왜 납북했나?

    - 북한의 국가 건설에 부족한 인재를 충원하고 남한에서 반동분자로 보이는 사람들을 납치해감으로써 분열과 해체를 유발시키고 남한을 확실하게 지배하기 위해서다. 납북한 남한 유명인사들을 월북으로 위장해 북한체제 선전 목적의 이유도 있었다.

    언제 어디서 납북되었나?

    - 6·25 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부터 9월까지 3개월 동안 전체의 88.2%가 납북됐다. 대부분(80.3%) 납북자의 집이나 집 근처에서 납북됐다. 납치지역은 북한이 점령한 남한 전역이지만, 그 중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이 42.3%나 된다.

    어떻게 납북되었나?

    - 대부분 지방좌익의 협조로 무장한 북한인민군·정치보위부원·내무서원들이 피랍자를 경찰서, 형무소, 기타 구금시설로 강제로 끌고가 구금했다가 손을 묶어 야간에 도보로 강제 북송했다.

    송환된 이는 없나?

    - 단 한명도 없다. 분명하고 객관적인 증거가 있음에도 북한은 납치를 인정한 적도 없다. 물론 북한은 납북자의 생사조차 전해주지 않고 있다.

    어렵게 위원회가 발족되었는데, 앞으로 계획은?

    - 올해부터 2013년 12월까지 납북자 가족 등록 절차가 진행되고 있다. 그런데 정작 이 납북자 가족들이 큰 관심이 없다. 세월이 아무리 많이 흘렀다고 해도 내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북한에 강제로 끌려갔는데 이를 모르고 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대국민 인식의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다. 국민들 모두의 머릿속에 북한의 만행을 담아야 한다.

    일례로 올해 일본의 대지진이 일어난 와중에도 NHK는 한국까지 와서 납북자 가족 등록 과정을 취재해가고 방영까지 했다. 하지만, 우리나라 언론들은 큰 관심이 없는 것 같다. 공영방송인 KBS마저도 위원회 발족 당시 잠깐 관심을 가진 뒤 요즘에는 취재조차 하지 않는다.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