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진중 사태에 등장한 주요인물들...역시나 그 사람들
  • 한진重 사태에 등장한 주요 인사들의 前歷(전력) 
      
     '反美(반미)' 문정현, '國保法(국보법) 폐지' 김세균, '南民戰(남민전) 연루' 홍세화 등이 주도
    趙成豪(조갑제닷컴)    
     

    6월27일 노조의 총파업 철회로 부산 한진중공업 노사분규가 일단락 됐다. 총파업 돌입 6개월 만의 일이다. 한진중공업 사태가 과거의 노사분규와 다른 점은 타협이 이뤄졌음에도 그 불씨가 가라앉고 있지 않다는 것. 7월 중순에 접어든 현재도 일부 左派(좌파) 성향 인사들이 한진중공업을 이슈로 삼고있다. 이제는 야당의 중진 국회의원들까지 한진중공업을 앞 다투어 방문하고 있다.

    민주노총을 비롯한 일부 좌파(左派)세력은 ‘희망버스’를 기획해 일반 시민도 한진중공업을 방문 할 수 있도록 유도하고 있다. 노조 활동가ㆍ장애인ㆍ성적소수자ㆍ철거민ㆍ이주노동자 등 사회적 약자들도 투쟁에 참여하도록 한다는 것이 희망버스의 취지다.

    이번 한진중공업 사태의 가장 큰 논란은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지부 지도위원의 고공 크레인 농성이다. 김진숙 위원은 1981년 입사했다가 1986년 해직됐다. 한진중공업 홈페이지 확인 결과, 김진숙 씨가 해고된 1986년은 한진중공업이 아닌 (주)대한조선공사 시절이었다. 이 회사가 한진그룹 계열사로 편입된 것은 1989년의 일이다.

    2010년 12월 중순, 한진중공업 사측이 생산직 직원 400명 희망퇴직 계획서를 노조에 통보하자 노조원 1,100여명이 집단 반발했다. 노조원들은 12월28일부터 4일간 정리해고 반대 철야농성을 벌였다. 2011년 1월6일, 김진숙 위원이 갑작스럽게 등장했다. 그는 고공 크레인 올라 약 6개월 간, 그 곳에서 숙식하며 ‘정리해고 반대 농성’을 계속했다. 해직된 지 25년 만에 등장해 자신이 몸 담았던 회사가 아닌 다른 회사의 노사분규에 개입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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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거 反美(반미)선동 시위 때 등장했던 문정현 씨는 이번 한진중공업 사태 현장에도 어김없이 나타났다. 문 씨는 2002년 미군 장갑차 여중생 사망사건, 2005년 평택 대추리 미군기지 사건(이 때 문 씨가 평택범대위 상임대표 역임) 등 미국과 관련된 시위마다 참여했던 人士(인사)다. 그는 일관되게 반미(反美)ㆍ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해 왔다. 그는 2002년 11월21일, 동두천 여중생 추모집회에서 “인간 白丁(백정) 주한미군”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또 2002년 5월22일, 경북대학교에서 열린 ‘제1기 통일아카데미’에서는 “김일성 장군 조금만 오래 사시지 아쉽습니다”라는 親北的(친북적) 발언도 여과없이 했다.

    문 씨는 지난 7월9일, 한진중공업 공장 앞에서 “자본과 권력 피도 눈물도 없는 저것들… 저것이 무슨 지랄이냐”고 비난했다. 이어 한진중공업 입구를 막은 전경들을 가리키며 “저 새파랗게 젊은 아들들을 저기다 세워놓고 무슨 짓거리야. 이 잔인한 새끼들아”라고 소리를 질렀다. (발언출처: 2차 희망버스 당시 촬영된 유투브 동영상)

    백기완 민족문제연구소장도 반미(反美) 발언을 한 적이 있다. 2010년 11월30일, 연평도 포격 이후 서울프레스센터에서 열린 ‘한반도 평화를 위한 비상 시국회의’에서 백 소장은 “한반도에서의 전쟁은 1945년부터 전쟁이 도발되었다. 도발 元兇(원흉)은 미국”이라고 했다. 그는 “미국이 한반도 지배전략을 철회하지 않으면 전쟁도발의 위험한 상태는 종식되지 않을 것이다. 전쟁반대를 얘기하려면 미국에 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진중공업 사태 때 그는 “80 평생을 독재정권과 싸우며 피눈물을 흘리다 늙어버린 나에게도 경찰은 소환장을 보내왔다. 경찰은 한진중공업 노동자의 몸부림을 파괴하는 만행을 즉각 중단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발언출처: 민중언론-참세상, 2011년 7월5일字)

    문정현 씨와 백기완 씨는 7월5일, 부산 영도경찰서로부터 폭력행위등처벌에관한법률위반(집단, 흉기 등 주거침입) 혐의로 경찰 출석요구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김세균 서울대 정치학과 교수도 한진중공업 사태에 개입했다. 그는 “한진중공업 사업장은 희망버스가 도착하기 전날 이미 용역깡패들로 인해 폭력행위가 난무하는 현장이었다. 희망버스 탑승자들은 경찰 대신 현장에 들어가 폭력 없는 장소로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김 교수는 “이는 경찰의 할 일을 대신한 것으로 불법이 아니라 오히려 포상해줘야 할 정당한 활동”이라고 덧붙였다. (발언출처: 울산노동뉴스 2011년 6월15일字)

    김 교수는 줄곧 국가보안법 폐지와 사회주의 수용을 주장해 왔다. 그는 2004년 6월9일, 경향신문에 기고한 칼럼에서 “국보법은 자유를 억압하고, 현존 질서 속에서 기득권을 누리는 사람들의 이익을 체제 수호의 이름으로 옹호하는 ‘수구적인 반(反)민주적 악법’”이라고 비판했다. 2010년 7월16일,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는 “사회주의 정치활동 보장이 자유민주주의 체제냐 아니냐의 기준이 될 수밖에 없다”는 주장도 펼쳤다.

    한겨레신문의 칼럼리스트이자 《나는 파리의 택시운전사》의 著者(저자) 홍세화 씨도 칼럼 등을 통해 한진중공업 사태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드러냈다. 홍 씨는 2011년 5월30일 한겨레신문 칼럼에서 “자본가에게 노동자는 애당초 감히 일자리를 옮길 자유를 획득한 하인이었다. 그렇다면 고분고분 말 잘 듣는 노동자로 바꿀 자유가 자본가로선 당연한 권리였다. 이런 평등 논리 아래 자본에겐 인간의 얼굴을 가질 양심이 없었고 정치권력에겐 노동 편에 서는 견제력이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김진숙은 오늘 절벽 앞에 선 한국의 노동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6월12일 새벽, 경찰과 시위대가 대치하고 있는 틈을 타 문정현, 백기완 등과 함께 사다리를 넘어 한진중공업 내부로 들어가기도 했다. 홍 씨는 1979년 11월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사건’에 연루돼 프랑스로 亡命(망명)한 전력이 있다. 그는 공소시효가 만료된 1999년 한국으로 돌아왔다. 남민전 사건은 1960년대 인혁당, 통혁당 사건 관련자들이 출감 후 노동자ㆍ농민ㆍ청년ㆍ학생을 규합해 북한과 연계 속에 결성한 지하공산혁명 조직이었다. 관련자만도 100명이 넘을 정도로 규모가 큰 간첩단 사건이었다. 이들은 공작금 마련을 위해 금은방에 강도로 잠입한 적도 있었다.

    이 같은 공안 사건이 당시 정부에 의해 조작됐다는 說(설)이 있었다. 좌파진영에서 전향한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시대정신 이사장)는 자신의 著書(저서) 《한국 민주주의의 기원과 미래》에서 “남민전은 처음부터 북한을 혁명기지로 보고 연합전선을 구축하려 애썼지만 성공하지는 못했다. 특히 핵심인물인 이재문은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께’라는 신년하례 전문(全文)과 혁명에 성공하면 중앙청에 내걸 깃발까지 만들어 보관했었다”고 밝혔다. 이 사건이 실체가 있는 것임을 분명히 했다. 그는 “당시 정보·수사기관이 조사해 발표한 보도 내용이 거의 사실이었다”고도 증언했다.

    한진중공업 사태를 취재한 한 인터넷 신문의 기자는 “이 사건이 지방에서 일어나 서울과 수도권 시민들은 정확한 실상을 모르고 있다. 지방에서 일어난 사건에 관심을 갖지 않는 기성언론의 책임이 크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미 노사 간 타결이 이뤄졌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노사분규가 이어지고 있는 줄 안다. 이 사건의 본질은 일부 좌파(左派)세력이 한진중공업 파업을 빌미로 反정부 투쟁을 위한 해방구를 만들려고 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시위 진압을 담당했던 경찰 간부의 증언도 들을 수 있었다. 부산 지방경찰청 관계자는 <조갑제닷컴>과의 전화통화에서 “시위대들은 경찰차 주변에 벽돌 등을 쌓아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일종의 공무집행 방해를 한 셈이다. 경찰 병력 15명도 시위대의 벽돌, 주먹, 우산 등에 맞아 부상을 입었다”고 당시의 상황을 설명했다. 그는 “언론이 집중적으로 부각시킨 최루액 분사도 사전 경고를 몇 차례 한 뒤 (분사) 한 것이다. (일부 언론보도처럼) 과잉진압은 없었다”고 거듭 강조했다.

    이 관계자는 “특히 김진숙 씨의 안전을 최대한 보장하기 위해 타워 크레인 주변에 매트리스를 깔고 안전망을 설치하려 했지만 일부 세력은 경찰의 접근을 막았다”고 증언했다. 김 씨의 안전을 보장하라면서 정작 경찰의 안전조치는 방해한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