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양의 운명은 서울에 달렸다.  
      동독의 붕괴를 결정한 서독, 북한의 유지를 꾀하는 한국...親北청산 여부가 統一의 관건
    金成昱  /리버티헤랄드 대표, 뉴데일리 객원논설위원 
      
     김정일 정권의 운명은 여의도에 달렸다. 從北·親北주의 척결 여부가 저들의 生死(생사)를 가를 것이다. 독일의 경우가 그랬다. 東獨(동독)은 국운이 다해갈 무렵 西獨(서독)에 집요하게 매달렸지만 서독은 ‘근본적 변화’를 對동독 지원의 조건으로 내걸었다. 그리고 몰려드는 동독주민을 조건 없이 받아들였다.
     
     서독정부가 동독정권을 대놓고 무너뜨리려 한 건 아니다. 실제 콜 서독 수상은 동독의 안정을 바랬다. 그는 1989년 9월5일 의회연설에서 “이들의 탈출결정은 존중하지만 동독을 떠나 서독으로 넘어오도록 유도하는 것이 독일정책의 합리적 목표가 될 수는 없다”며 “동독 문제는 동독에서 해결해야지 본(서독 수도)에서 해결할 수는 없다”고 했다. 89년 11월22일 스트라스부르 유럽의회에서도 “유럽통합이 진일보해야만 독일통일이 완성될 수 있다”고 일갈했다. 동독정권 붕괴에 따른 비용부담을 두려워 한 것이다.
     
     그러나 급증하는 동독 탈출민 앞에서 서독인은 상식적으로 思考(사고)했다. ‘자국민(?)’ 송환을 요구한 동독의 요구에 자이터스 서독 장관은 “우리에게 속한 독일인들(동독 탈출민)을 돌려보내라고 요구하는 것은 동독이 우리의 내정에 간섭하는 것(89년 9월14일 의회 연설)”이라고 화답했다.
     
     콜 수상은 社民黨(사민당)의 ‘接近(접근)을 통한 변화’를 “求乞(구걸)을 통한 변화”로 비하하기 시작했다. 사민당은 콜 수상이 소속된 基民黨(기민당)에 비해 상대적으로 좌파색채 정당으로서 동독정권의 정통성을 인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의 민주·민노·한나라당 일부 세력들처럼 북한정권을 맹목적으로 옹호하는 파렴치한 정치집단은 아니었다.
     
     서독은 1983~84년 19억5000만 마르크라는 대규모 차관을 동독에 제공했었다. 그러나 콜 수상은 對동독 경제 지원을 ‘동독 내 여행자유화’ 및 ‘동독인의 서독방문 자유화 그리고 ‘국경 지역 자동 발사 장치 제거’, ‘정치범석방’ 등 인권개선과 연계시켰다.
     
     89년 여름을 지나며 동독이 한계에 도달한 정황이 명확해지자 콜 수상은 동독의 ‘根本的(근본적) 개혁’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이것 없는 경제지원·물적지원·군사분야 협력 모두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콜 수상은 동독에 정치범 석방은 물론 여행·언론·정보·노조의 자유 보장, 공산당 권력독점 포기·독립정당 인정, 자유·비밀·평등·보통 선거 보장, 계획경제 폐지와 시장경제 구축 등을 요구했다.
     
     동독은 끝까지 버티려 했다. 89년 11월 서독으로 이어지는 국경통과소 33개를 추가 개방했지만 같은 달 20일 동서독 頂上회담 당시 “동독은 사회주의 국가로 남을 것이며 주권국이고 독일통일은 고려 대상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탈출행렬은 동독에서 서독으로 끝없이 이어졌다. 1989년 10월에서 1990년 1월까지 4개월 간 30만 명이 이주했고 시위·소요가 확산됐다. 이듬 해 1월15일 10만 명의 군중이 슈타지 본부 건물을 점거하고 2월13일 동독 라이프치히 월요데모는 “마르크가 오지 않으면 우리가 거기로 간다.”는 과격한 구호로 변했다.
     
     대세는 거스를 수 없었다. 1990년 3월 동독 총선거에서 조속한 동서독 화폐·경제통합을 공약으로 내 건 ‘독일동맹’이 압승을 거두고 동독 基民黨 드메지어가 수상으로 선출됐다. 드메지어 수상이 이끄는 동독 인민의회는 같은 해 8월23일, 10월3일자로 동독이 서독 기본법 적용영역에 가입한다는 동서독 통일을 결의한다.
     
     독일 통일 과정을 보면 자연스럽다. 동서독 교류가 늘면서 동독 주민은 서독의 실상을 보고 소위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의 허상도 깨닫게 되었다. 1960년 1985년까지 서독을 방문한 동독인 숫자는 100만 ~ 160만, 1986년 200만, 1987년 500만, 1988년 675만 명을 넘어섰다. 80년대 중반 이후 89년 까지 5년 여 동안 중 성인 4인 중 1명이 서독을 방문했다.
     
     1000번의 말보다 강력한 것이 체험이다. 동독 주민은 그들의 사회주의 조국이 아황산가스 공기오염은 서독의 5배에 달했고, 서독 테러리스트 본거지였으며, 물은 1/5을 먹을 수 없는 상태였음을 알게 됐다. 東베를린 쇠네펠트 공항은 마약 밀수 중심지였다. 동독 주민은 분노했고 통일을 외쳤다. 동독 정권은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며 소위 ‘인도적 지원’을 요청했지만 서독 정부는 단호했다. 근본적 변화 없는 지원은 안 된다는 것이었다.
     
     동독과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망해 버린 북한이 아직도 버티는 이유가 여기 있다. 서독은 우리와 같은 親北·從北주의자들이 적었다.
     
     김정일 사망을 앞둔 북한은 앞으로 더욱 급격히 몰락해 갈 것이다. 그러나 북한이 아무리 끝으로 간다 해도 제도권 내 親北·從北주의자들이 약화되지 않거나, 親北·從北정권의 재등장 또는 한나라당 정권이 親北·從北化된다면 자유민주주의 통일은 요원한 일이 될 것이다. 전쟁은 휴전선이 아니라 서울, 여의도 바로 이곳에서 펼쳐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