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의 안중근 장군 모독을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 들어가는 말

      4월 5일, 국내 한 TV가 안중근 장군의 하얼빈 의거가 한일 강제병합의 원인이었다는 주장까지 일본 교과서 검정을 통과했다는 뉴스를 단독으로 보도했다.

      최근 일본이 당한 재난에 대해서 우리 국민과 정부가 각별한 연민의 정을 표하고 남다른 지원을 하던 중에, 독도 영유권에 관한 일본 교과서 왜곡 문제가 불거져 우리를 분노케 하더니 이제는 별 해괴한 주장까지 접해야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 중대한 시점에 필자는 우리 스스로에게 묻고 싶다. 안중근 장군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 혹시 “안응칠 역사”를 단 한번이라도 처음부터 끝까지 정독해 본 적이 있는지? 아니면 혹시나 그저 주변에서 듣거나, 대한민국 교과서에서 읽고 배운 알량한 지식을 가지고 그분을 알고 있다는 착각 속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는 작년에 그분의 순국 100주년을 그렇게도 보람도 없이 허망하게 보내지는 않았을 것이며, 더구나 올해 그분의 순국 101주년을 맞아 TV는 물론 신문 등 온 나라가 북새통을 떨며, 그분을 욕되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4001”과 “안응칠 역사”


      안중근 장군 순국 101주년을 꼭 나흘 앞둔 지난 3월 22일, 학력위조 및 고위인사와의 스캔들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여인이 돌아왔다. 이번에는 자신의 죄수번호가 디자인 된 책자를 들고 나타났다.

      그녀는 수많은 기자들 앞에서 전직 대통령, 전직 총리, 현직 국회의원을 수컷 본능을 주체하지 못하는 환자로 만들어버리는 여성 독립운동가(?)로 변신해있었다. 죽은 사람은 말이 없었고, 산 사람들은 입을 닫았다.

      그녀의 발언은 언론에서 특종으로 다뤄졌고, 그녀의 책은 발간된 지 하루도 안 돼 수만 부나 팔려나갔다고 한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초판을 5만부 찍었다는 출판사의 믿기지 않는 얘기까지 뉴스거리가 되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참으로 예견 능력이 있고, 용기 있는 출판사다.

      그런데 이런 소란의 와중에 혹시 우리는 안중근 장군의 기일을 생각은 해 보았는가? 나아가 헛된 기대인지 알지만, 대한 독립운동의 상징인 안중근 장군의 자서전 “안응칠 역사”를 읽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머릿속에 떠올려 본 우리 국민은 과연 얼마나 될까?

      “안응칠 역사”는 1978년에 발굴되어 1979년 9월 2일, “안중근의사 자서전”이라는 제목으로 발간된 후, 몇 종류의 번역본으로 출판되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32년 동안의 총 판매부수가 앞서 얘기한 여인의 책이 하루 만에 판매된 부수를 넘지 못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애통한 심정으로 필자는 아직도 “안응칠 역사”를 읽지 않은 독자들을 위해서, 안중근 장군이 자서전에 분명히 기록해 두었지만, 그간 우리가 소홀하여 간과했던 점에 대해서 소개해 보고자 한다.  

    ■ 안중근과 조지 워싱턴

      1세기 전, 한반도에 미국의 조지 워싱턴을 어느 누구보다도 더 흠모한 인물이 있었다. 바로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1879-1910)이었다. 장군의 자서전에는 일본군과 독립전쟁을 하다가 패전하여 열흘 이상을 거의 먹지도 못하고 죽을 고생을 하며 도망가면서 스스로 다짐하는 기록이 있다.
     
      “옛날 미국 독립의 주인공 조지 워싱턴은 7-8년 동안 바람과 먼지 속에서 그 많은 곤란과 고초를 어떻게 참고 견디었을까? 참으로 만고에 둘도 없는 영웅이다. 앞으로 내가 일을 성취하면 반드시 미국으로 가서 워싱턴을 추모하고 숭배하며 그가 남긴 뜻을 기념하리라.”
     
      안중근 장군은 조지 워싱턴과 같이 중장 계급으로 독립전쟁에 임했다. 그러나 워싱턴은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미국이 독립을 쟁취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고 초대 대통령이 된 반면, 안중근은 적의 우두머리를 처단하고 포로가 되어 일제의 법정에 서게 되었다.

      참고로 독립전쟁 당시 조지 워싱턴은 그저 별이 세 개 달린 중장의 제복을 입고 싸웠을 뿐이지, 미국 군인은 아니었다. 그가 미군 정규 군인이 된 것은 대통령을 역임한 후,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인 1798년이다. 당시 존 애덤스 대통령에 의해서 그는 미군 중장이 되었다. 그리고 미국 독립 200주년인 1976년, 포드 대통령에 의해서 대원수로 특진되었다.
     
     ■ 동양평화와 인류애를 향한 크고 고귀한 삶
     
      1910년 3월 26일 오전, 여순형무소 사형집행실. 안중근 장군은 이 세상 사람들에게 마지막 말씀을 남긴다. “내가 행한 행동은 오로지 동양평화를 도모하려는 진실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바라건대 오늘 이 자리에 있는 일본 관헌들도 나의 변변치 못한 충정을 잘 헤아려, 너와 나 구별 없이 마음을 모으고 협력해서 동양평화를 기필코 도모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이 같은 최후의 유언을 남긴 장군은 “동양평화 만세3창을 하자”고  제안했으나, 일제의 사형집행관은 이를 제지했다. 그러자 장군은 2분 동안 조용히 기도를 한 후, 형리에 이끌려 교수대에 올라 30년의 영웅적인 삶을 마감했다.
     
      순국 직전까지 장군이 혼신의 힘을 기울여 집필하던 ‘동양평화론’은 다음과 같이 섬뜩하고 예언적인 경고의 글귀를 끝으로 절필되었다.
     
      “슬프다! 자연의 형세를 돌보지 않고, 같은 인종, 이웃나라를 해치는 자는 마침내 독부(獨夫, 중국 하나라의 걸왕‘桀王’이나 은나라의 주왕‘紂王’과 같이 폭정과 주색을 일삼은 포악무도한 군주. 맹자는 천심과 민심을 잃고 버림받은 잔인한 도적에 불과한 이런 자들을 제거해도 된다고 함)가 당하는 재앙을 틀림없이 피하지 못할 것이다.”

      그로부터 35년 후, 일제는 처절하고 끔찍한 재앙을 맞으며 패망했다.
     
    ■ 동아시아 근대사의 위대한 영웅
     
      오늘 우리가 보는 안중근 장군의 모습은 말 타고 총 쏘며 사냥을 즐겨했던, 기골이 빼어나고 패기 넘치던 장군, 대한 독립과 동양평화를 설파하는 지도자의 모습이 아니다. 거의가 일제에 의해 만들어진 초췌한 죄인의 형상일 뿐이다.
     
      일제는 장군이 영웅이 되는 것을 무서워했다. 그러기에 제대로 된 그분의 사진 한 장 남겨놓지 않을 정도로 잔인했다. 그러나 일제의 안중근 죽이기는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분에 대한 한국인을 비롯한 동양인들의 사랑과 존경심을 증폭시켰다.
     
      또한 장군은 중국의 근대혁명과정에서 우파나 좌파를 떠나 모든 중국인의 우상이었다. 중국의 국부 손문(孫文,1866-1925)은 “백세의 삶은 아니지만, 죽어서 천추에 빛나도다”라고 장군을 기렸고, 중국의 레닌 진독수(陳獨秀, 1879-1942)는 “나는 청년들이 톨스토이와 타고르가 되기보다, 안중근과 콜럼버스가 되기를 바란다”라는 경구를 남겼다고 한다.
     
      뿐만이 아니다. 장군을 대면했던 일제의 관헌들도 그분의 높은 이상을 존경하게 되어, 지필묵을 넣어주며 서예글씨를 써주도록 청탁을 했다. 장군은 자신을 심문하고 사형을 구형했던 일제의 검찰관에게 인류사회대표중임(人類社會代表重任, 인류사회의 대표는 책임이 막중하다)이라는 글씨를 선물했다.
     
      특히 여순 형무소에 근무하면서 장군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았던 일본군 헌병 지바 도시치에게 장군은 신앙의 대상이었다. 그는 귀국 후, 장군으로부터 받은 위국헌신군인본분(爲國獻身軍人本分, 나라위해 몸 바치는 것이 군인의 본분이다)이라는 유묵과 위패를 모셔놓고, 평생 아침저녁으로 그분의 명복을 빌어드렸다.
     
    ■ 무엇이 안중근 장군을 위대하게 만드는가?
     
      도대체 한국인은 그렇다 하더라도, 중국과 일본인들까지 안중근 장군에게 매료되고, 그분을 존경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그분이 지녔던 나라사랑, 동양평화 염원, 인류애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인간이라면 타고났든 배웠든 적어도 그러한 이상을 품고는 있는 것 아닐까? 그분의 위대성에 관한 필자의 생각은 이렇다.

      첫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는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고종황제를 폐위시켰으며, 강제로 남의 나라 국권을 빼앗고, 무고한 한국인을 학살하는 등 동양평화를 해친 일제의 상징이었다. 흉악하고 음흉한 독부(獨夫)였다.
     
      장군은 세계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효율적인 방법으로 독부를 제거한 영웅이다. 몇 만 대군이 아니라, 혼자의 힘으로! 장군의 행위가 죄 없고 무고한 인명을 살상한 테러행위였더라면, 또한 이렇게 탁월한 전과(戰果)를 올리지 못했다면, 그분의 이상(理想)이 아무리 숭고했더라도 그 빛을 발하지 못하고 묻혀버렸을 것이다.
     
      둘째, 안중근 대한의군 참모중장(參謀中將)은 국제법을 준수한 정의로운 지휘관, 인류애와 박애정신을 실천했던 지휘관이었다. 장군은 일본군 포로들을 총포까지 되돌려주고 석방하는 이상주의적인 행동으로 동지들로부터 소외당하고, 패전하는 쓰라림을 감수해야 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장군은 자신이 흠모했던 조지 워싱턴보다도 더 인간미 넘치는 군인이었다.
     
      셋째, 사람은 올바르게 살아야 한다고 교육받지만, 대부분의 인간은 말로는 바르게 산다면서도, 실제로는 옳지 못한 방법으로 권세를 얻고 돈 버는데 혈안이 된 채, 제 몸과 제 가족의 안락만이 전부인양 그릇되게 살아간다.
     
      그러나 장군은 실천한 유별난 분이었다. 권력과 돈 있는 자들에게 큰 소리쳤고, 벼슬에는 아예 관심이 없었으며, 나라를 구하고 동양평화를 이루기 위해서 처자식 굶기면서 헌신하다가 가문을 위태롭게 했다.
     
      넷째, 장군은 평생 즐기는 네 가지가 있었다. 1) 친구와 의리를 맺는 것 2) 술 마시고 노래하며 춤추는 것 3) 총으로 사냥하는 것 4) 날랜 말 타고 달리는 것.

      그런데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장군은 국권이 회복될 때까지 술을 끊기로 결심한다. 이후 순국할 때까지 그리도 좋아하던 술을 단 한 잔도 입에 대지 않았다. 장군은 나라 잃은 설움을 술로 달랜다거나 자살하는 졸장부가 아니었다. 진정으로 자신을 절제할 줄 아는 대장부였다.
     
      다섯째, 장군은 끊임없이 몸과 마음을 단련하여 내공을 쌓은 겸손한 분이었다. 장군은 “글은 이름이나 적을 줄 알면 그만이다”라는 초패왕 항우(項羽, 역주: BC 232-202)의 말을 인용하면서, 장부의 삶을 살겠다고 친구들에게 얘기했었다.
     
      그러나 거사 후, 심문 및 공판 과정에서 장군이 보여준 학문·지식·정보·지성은 일제관헌을 압도했고, 감동시켰다. 장군은 힘만 믿고 학문을 게을리 한 항우를 능가하는 불세출의 영웅이었다.
     
    ■ “안응칠 역사”로 위대한 영웅의 삶을 배우자
     
      우리는 흔히 위대한 영웅들의 삶을 자서전, 평전, 영화, 드라마, 다큐 등을 통해서 접하게 된다. 그러나 경계해야 할 것은 이러한 자료들이 군더더기 붙고, 극화된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중에는 간혹 진솔하고 후세의 귀감이 되는 기록이 있다. ‘안응칠 역사’라는 제목의 안중근 자서전이 바로 그중의 하나이다.
     
      이 자서전은 그 춥고 지옥 같은 일제의 여순 감옥에서 1909년 12월 13일부터 1910년 3월 15일까지 93일 동안 장군이 직접 집필한 것이다. 그러나 통탄스럽게도 아직 일본은 장군의 유해는 물론, 그분이 남긴 순한문으로 된 자서전 친필 원본을 한국으로 돌려주지 않고 있다.
     
      다행스럽게도 ‘안응칠 역사’ 친필 원본의 필사본, 등사본 등이 남아있으며, 이 자료들이 안중근 자서전이라는 이름으로 시중에 번역되어 나와 있다. 아쉽지만, 이렇게라도 안중근 장군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이 세상 어디에서 이렇게 꾸밈없고 진솔한 자기 고백을 만날 수 있을까? 이 세상 어디에서 이보다 더 위대한 영웅의 생애를 접할 수 있을까?

      일본 교과서가 안중근 장군을 폄하하고 욕되게 하는 내용이 실렸다는 소식을 접한 우리가 무엇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필자는 권하고 싶다. “안응칠 역사”를 읽은 독자들은 다시 한 번, 읽지 않은 독자들은 이번에는 꼭 번, 책상 앞에 반듯이 앉아서 글자 하나하나를 새기며 읽어 보도록, 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