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과서들이 묵살한 김일성과 북한정권의 8대 恥部 
      
     대한민국 建國 과정에서 李承晩이 한 역할을 格下시키려고 애쓰면서 김일성이 한 못되고 못난 짓들은 덮어주었다. 
    趙甲濟   
     
     李明博 정부가 올해 채택, 고등학생들에게 교육시키고 있는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들은 거의가 북한정권의 출범과정에서 일어났던 反민족적, 反민주적 사건들을 가르치지 않는다. 김일성을 소련군대가 조종한 사실, 김일성이 스탈린 앞에서 시험을 친 뒤 북한정권의 지도자로 결정된 사실, 남한의 공산주의자들까지도 스탈린의 지령을 받아 활동하였다는 사실, 북한정권의 國號 및 헌법도 스탈린이 만들어준 사실 등을 교과서에 싣지 않는 것은 북한정권의 反민족성을 은폐하기 위한 의도로 보여진다. 대한민국 建國 과정에서 李承晩이 한 역할을 格下시키려고 애쓰면서 김일성이 한 못되고 못난 짓들은 덮어주었다.
     
     예컨대 아래 사실들이 한국사 교과서에서 거의 묵살되고 있다.
     
     1. 소련군은 소련군에 편입되어 있던 중국공산당 산하 抗日 빨치산 출신 장교 金日成을 자신들의 꼭두각시로 발탁하여 1945년 9월 북한에 데리고 들어왔다. 김일성은 중국공산당원으로서 일본에 대항하여 싸웠지만 조선독립을 위해 싸운 적은 없다. ‘朝鮮戰爭’이란 책을 쓴 일본공산당 기관지 기자 출신 하기와라 료씨는 “이때 김일성은 조선인의 의식을 갖지 않은 일종의 이방인이었다”고 지적했다.
     
     2. 바로 이 시기 李承晩은 34년째 미국에 머물러 있었다. 소련이 김일성을 북한으로 데리고 들어온 것과는 반대로 미국 정부는, 미래의 대통령이 귀국하는 것을 막고 있었다. 李承晩은 1945년 초 흑해연안 얄타에서 있었던 회담에서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한반도를 소련에 넘겨주기로 스탈린에게 약속했다는 폭로를 한 적이 있다. 그 전부터 李承晩은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이 태프트-가츠라 밀약을 통하여 한국에 대한 일본의 식민통치를 묵인했듯이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한반도에 대한 소련의 지배를 인정하려 한다고 공개적으로 문제를 제기하여 親蘇的이고 좌경적인 인물들이 박혀 있었던 미 국무부를 화 나게 했었다.
     
     3. 냉전이 끝난 뒤 공개된 舊소련 문서에 따르면 스탈린이 한반도의 38도선 이북 지역에 '민주정권', 즉 단독정부 수립을 결정한 것은 1945년 9월20일이었다. 스탈린은 그해 8월 초순 런던에서 열린 외상회담에서 미국이 反蘇的 태도를 보이는 것을 보고 미국과의 대결을 결심한다. 이에 따라 중국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제거하고 북한에서 공산정권을 공고화한다는 정책을 결정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소련당국은 김일성을 시켜 북한에서 행정조직과 군대를 만드는 등 정권 수립에 박차를 가한다. 단독 정권 수립 방침에 따라 소련군은 군사관할 분계선에 불과한 38선을 사실상 국경선으로 만들어 한민족의 자유로운 이동을 금지시킨다. 남북분단의 全的인 책임은 소련과 김일성이 져야 한다. 李承晩이 남한에서라도 단독 정부를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스탈린의 分斷 결정 그 1년 뒤였다.
     
     4. 1945년 11월23일 신의주에선 6개 남녀중학교 학생들이 소련군과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만행을 규탄하는 '공산당 타도' 시위를 벌이다가 보안군과 소련군의 집중사격을 받아 23명이 죽고 700여 명이 다쳤으며 2000명이 체포되었다.
     
     5. 1945년 12월26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美, 英, 蘇 3國 外相 회담은 남북한에 대한 5년 기한의 신탁 통치안을 발표하였다. 金九, 李承晩이 주도한 反託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朴憲永의 조선공산당은 熱火(열화)와 같은 민심에 동요하여 贊反(찬반)을 정하지 못했다. 소련의 지령이 내려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박헌영은 서울 주재 소련영사관을 찾아가 지침을 받으려 했으나 영사관측은 본국으로부터 훈령을 받지 못하였다고 했다. 박헌영은 12월28일 밤 비밀리에 38선을 넘어 평양으로 갔다. 그는 김일성 등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 간부들에게 신탁통치에 대한 남한의 민심이 반대쪽이라고 설명하였다. 김일성도 어쩔 줄 몰라 하였다. 모스크바에 갔던 북한주둔 소련군 民政사령관 로마넨코가 평양으로 돌아온 다음날 朴憲永에게 지침을 하달하였다. 신탁통치를 결의한 모스크바 협정을 지지하라는 것이었다. 朴憲永은 1946년 1월1일 밤 평양을 출발, 2일 새벽 서울에 도착, 김일성과 보조를 맞추어 조선공산당 이름으로 모스크바 협정, 즉 신탁통치 지지 성명을 발표하였다. 공산당 세력은, 民心을 거역하고 소련의 지령에 충직하게 복무함으로써 회복이 불가능한 敗着(패착)을 두었다. 좌익은 賣國세력, 우익은 民族진영이 된 것이다.
     
     6. 金學俊 전 동아일보 회장(전 서울대 교수)이 쓴 '북한의 역사'(1,2권)는 東西 냉전이 끝난 후 공개된 문서를 바탕으로 연구한 책이다. 1946년 7월에 스탈린이 김일성과 박헌영을 모스크바로 불러 일종의 면접시험을 치게 한 뒤 김일성을 북한정권의 지도자로 선택하는 장면은 李承晩이 왜 김일성을 무시하고 스탈린과 상대하려 하였고 북한을 항상 北傀라고 불렀는지를 깨닫게 한다.
      金學俊 박사에 따르면, <스탈린은 우선 金과 朴에 대해 조선반도의 정세, 남조선의 정세, 북조선의 정세를 자세히 물었다>고 한다. 김일성은 시험 준비를 단단히 하였다고 한다. <레베제프는 이 경우에 대비해 이미 김을 “꼼꼼하게 준비시켰었다>고 한다. 스탈린이 무엇을 물어볼 것인가를 예측한 뒤 예상되는 질문들에 대한 대답을 미리 마련했었다는 것이다. 그는 金에게 특히 군사문제에 각별히 주의를 기울이라고 충고했었다고 한다. 그 결과 김일성의 대답은 대체로 충실했다고 한다. 김일성은 특히 “군사 및 전략 분야에서 자신의 재능을 가장 완벽하게 내보일 수 있었다”라고 레베제프는 회상했다.
      김일성은 스탈린과 소련군에 대하여 호의적으로 언급했다고 한다. 그는 스탈린의 배려, 그리고 소련군의 주둔 및 협조가 북한에서 여러 개혁들을 가능하게 했다는 말을 되풀이 함으로써 스탈린의 환심을 사려 했다.
      박헌영의 통역을 맡았던 샤브신의 부인 샤브시나의 회상에 따르면, 스탈린의 지시에 대해 朴이“인민들과 상의를 해봐야 한다"고 대답하자, 스탈린은 그 자리에서 자기 스타일대로 “인민이라니? 인민이야 땅을 가는 사람들이잖소. 결정은 우리가 해야지”라고 잘라 말했다고 한다.
     
      김학준 박사는, '북한의 역사'에서 이렇게 썼다.
      <스탈린은 자신의 별장으로 김일성과 박헌영의 일행을 초청해 연회를 베푼 뒤 朴을 모스크바에 며칠 머무르게 해 기업소들과 공장들을 견학시키라고 지시했다. 스탈린의 통역들의 회상에 따르면, 김은 “무서운 지도자”라는 인상을 주지 않았고, 오히려 중급의 黨(당)간부처럼 보였으며, “아첨하는 어조로” 말했을 뿐만 아니라 내내 스탈린에게 동의하곤 했다. 金은 긴장해 있었고 언제라도 스탈린의 명령을 따를 준비가 된 것처럼 보였으며 스탈린은 김이 마음에 들었다는 표정을 지었다.
      스탈린은 김일성을 자신의 학생처럼 대하면서 강의하고 지시했다. 통역들에 따르면, “스탈린은 군사에 관한 깊은 지식으로 金을 감동시키면서 戰爭史(전쟁사)로부터 예들을 자주 인용했다. […] 김은 진심에서 우러난 감격과 환희를 나타내며 입을 벌린 채 그것을 들었다.” 레베제프에 따르면, “스탈린은 김에게 깊은 감동을 안겨주었다. 김은 열광적인 단어를 그치지 않고 반복했다. […] ‘어린 지도자’는 스탈린의 손에 의해서 그가 차지한 ‘영웅’의 권위가 ‘커다란 지도자’의 작은 손짓만으로도 순식간에 사라질 수 있음을 분명히 이해했다.>
     
      여러 증언들을 종합하면 김일성은 스탈린에 대하여 아부하였고, 박헌영은 깐깐한 자세였던 듯하다. 김일성은 생전에 黃長燁 비서에게 자신이 스탈린에게 불려가 시험을 잘 쳐서 박헌영을 누르고 지도자로 뽑혔다고 자랑하더라고 한다.
     
      한편 李承晩 대통령은 1954년 미국을 방문,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할 때 미국측이 韓日수교를 압박하자 "내가 살아 있는 한 수교는 없다"고 잘라 말하였다. 화가 난 아이젠하워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회의장을 나가자 李 대통령은 그의 등을 향하여 "저런 고얀 X이 있나, 저런"이라고 호통을 쳤다. 미국 대통령에게 호통 친 한국 대통령과 소련 독재자에게 아부한 북한 지도자의 차이가 오늘의 남북한 차이이다.
     
     7. 일본의 法政大 교수 시모도마이 노부오(下斗米伸夫)가 쓴 '아시아 冷戰史'에 따르면 1948년 4월24일 모스크바 교외에 있는 그의 별장에서 스탈린은 몰로토프와 주다노프 등 소련공산당 간부들과 만나 북한 헌법 제정 등의 절차를 결정했다.
      <헌법은 1947년부터 소련헌법을 기초로 하여 준비되었으나, 일부는 스탈린 자신이 집필했고, 또 당초 있었던 임시헌법에서 임시라는 표현을 삭제한 것도 스탈린이었다. 이 회의에는 북한 지도자는 아무도 참가하지 않았다. 소련이 일방적으로 결정했다. 이 4월 회의의 결정에 따라 8월에 조선최고인민회의 선거가 이뤄지고 9월2일에 제1회 회의를 소집했으며, 8일엔 헌법을 채택, 9일엔 인민공화국 창설이 선언되었다. 國名이 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도 러시아語로부터 直譯한 것이다.>
     
     대한민국 헌법은 1948년 5월 총선으로 구성된 制憲국회가 열띤 토론을 거친 끝에 만든 것이다. 이 헌법에 따라 국회가 李承晩을 대통령으로 선출, 정부를 구성하도록 하였다. 북한정권은 스탈린에 의하여 제조되었고, 대한민국은 공정한 선거를 통하여 출범하였다. 한국의 정통성은 民意에 의하여 탄생한 국가라는 점에 있고, 북한정권의 이단성은 외국인 독재자에 의한 被造物이란 데 있다.
     
     8. 김일성이, 북한정권을 세우면서 위대한 독립투사이자 민족지도자인 曺晩植 선생을 숙청한 사실을 생략한 교과서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