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은 하와이 타향에서 이렇게 죽어갔다

이동욱 전 월간조선 기자 | 최종편집 2011.01.17 13:09:23
이승만은 他鄕에서 이렇게 죽어갔다 
  
 現代史 발굴 연재②
귀국이 이유 없이 계속 늦어지자 李박사도 점점 불안해하기 시작했다. 이 무렵부터 李박사의 건강은 악화일로를 걷는다.

李東昱(前월간조선 기자)   
 
 첫 번째 거주지-‘윌버트 崔’씨의 별장
 
  교포들은 고령의 李 박사 부부가 가실 곳이 마땅치도 않고, 오랜 기간 동안 머물 것도 아니라는 판단에 조경사업을 하고 있는 윌버트 崔씨의 별장으로 모시고 갔다. 윌버트 최씨는 하와이에서 조경사업으로 상당한 성공을 거두고 있었고, 李박사의 전용기가 내린 호놀룰루 공항의 조경도 그가 담당한 것이었다.
 
  이곳에서 여장을 푼 李박사 내외는‘휴양객’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당시 李박사는 별다른 갈등을 보이지 않았다. 프란체스카 女史(여사)의 책 ‘대통령의 건강’에도 잠깐 언급된 별장 생활은 그 당시 李박사의 심정과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하와이에 도착한 후 독립운동 당시의 옛 동지들과 사랑하는 제자들을 만나게 된 대통령은 한결 즐거운 듯하였고 건강도 좋아지는 듯싶었다. 우리는 별장에서 기거하며 옛 동지들과 제자들의 방문을 받기도 하고 초대에 나가기도 하였다. 매주 일요일에는 독립운동 당시 대통령이 창립한 韓人 基督敎會(한인 기독교회)에 참석하여 다정한 교우들과 함께 예배를 봤다>
 
  별장에서도 교포들은 北韓(북한)의 테러를 의식한 듯, 유학생 두 명을 항상 기거토록 조치해 두었다. 이 무렵 프란체스카 女史의‘매주 일요일에는 교회에 나갔다’는 대목은 단지 한 달 동안 세 차례에 불과했음을 가리킨다.
  당시 하와이 주재 조선일보 통신원이었던 車指壽(차지수)씨의 기사를 보면 李박사가 5년 동안의 하와이 망명생활을 통해 공적인 모임에 모습을 보인 것은 모두 다섯 차례에 불과하다고 기록되어 있다. 교회에 세 번, 해양대학 훈련생의 하와이 친선방문 때 가진 유학생들과의 축구시합에 한 번, 그리고 교포 목사 딸의 백일 잔치 때가 마지막이었다.
 
 그 밖의 외출에 대한 이야기는 愛犬(애견) 해피와 관련한 세 번의 외출이 가장 큰 나들이라고 吳重政(오중정)씨는 기억하고 있다. 별장에서 기거하는 동안 귀국이 계속해서 연기되자, 제일 먼저 李박사를 위해 취해진 측근들의 조치는 한국에 두고 온 愛犬 해피의 미국行(행)이었다.
 ‘잉글리시 토이 스파니엘’계통으로 코가 뭉툭하고 축 처진 귀에 노란점이 드문드문
 있는 이 개는 외국인으로부터 선물 받은 것으로 슬하에 자식이 없던 李박사 부부로부터 끔찍한 사랑을 받고 있었다.
 
  평소 李박사 부부가 영어로만 대화를 했던 이유 때문에 해피도 영어만 알아들었다. 梨花莊(이화장)측으로부터 한 달만 맡아달라고 제의를 받은 片正姬(편정희·80세.생존) 女史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해피는 영어로만 말을 알아들어 주인이 없던 梨花莊측에서 기르기가 아주 곤란했던 모양이다. 편정희 女史는 두어 달 기르다가 미국으로부터 하와이로 가는 인편으로 이 개를 보내라는 전갈을 받고 하와이로 보냈다.
 
 “요즘 우리나라는 어떻게 돼 가나”
 
  한편 하와이의 별장에 머물면서 자신의 귀국이 늦어지는 이유를 알 수 없어 답답해하던 李박사는 해피가 하와이로 왔다는 소식에 대단히 기뻐했다. 말년에 공식행사에는 다섯 번 참석한 데 비해 해피를 위한 외출은 세 번씩이나 됐던 것을 보면 그 기쁨을 미루어 짐작할 만하다. 그러나 실제로는 해피와 산책을 함께 간 것이 아니라 당시 미국 州法(주법)에 의해 120일 동안 검역을 위한 구금상태에 놓인 개를 면회하기 위해 외출한 것이었다고 한다. 그것이 李박사의 가장 기쁜 외출이었던 셈이다.
 
▲ 이승만 대통령과 애견 해피.


  양복차림의 李박사가 건물 외벽을 등지고 의자에 앉아 개를 무릎위에 앉힌 채 두 손으로 해피의 앞발을 반쯤 들고서 찍은 사진은 이 무렵의 것이다.
  그리고 크리스마스 때면 교포들이 모여 파티를 했고 그때 한 차례 외출을 한 것이 외출의 전부였다.
 
  그러나 귀국이 이유 없이 계속 늦어지자 李박사도 점점 불안해하기 시작했다. 이 무렵부터 李박사의 건강은 악화일로를 걷는다. 李박사가 보행에 불편을 느껴 부축을 받아야 했던 때가 이때부터였다. 자주 트리풀러 육군병원을 다녀야 했다. 길어야 한 달을 지낼 것으로 믿고 간단한 옷가지만을 챙겨 하와이로 왔던 李박사는 별장에서 무려 6개월을 보내야 했다. 그러고도 기약없는 상황은 계속되었다.
 
  당시 양복점을 운영하며 李박사를 친부모님처럼 모시던 교포 崔伯烈(최백렬)씨와 吳重政씨 그리고 윌버트 최씨 등이 모여 의논한 결과 주택가로 두 분을 모셔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마침 윌버트 최씨가 팔려던 마키키(Makiki)街 2033번지의 목조건물 한 채가 있어 교포들은 李박사 내외의 거처를 이곳으로 옮기도록 주선했다. 여기서 1년 4개월 간의 마키키 생활이 시작된다.
 
  마키키街의 주택생활 무렵부터 李박사는 트리풀러 육군병원을 자주 가야 했다. 때로는 건강이 악화되면 입원을 하기도 했다. 입원기록을 보면 1961년 3월1일 심장관계로 앰뷸런스로 옮겨졌으나 이튿날 상태가 호전되어 퇴원한 적이 있고, 그해 4월15일에는 잔등에 종기가 심해서 입원하여 3주간 치료를 하고 5월9일 퇴원을 했다.
  그 밖에도 현기증이 일어나 입원하기도 했다. 당시 李박사는 노인성 질환을 앓고 있었던 것 같다. 혈압이 올라가면 아주 위험하다는 점을 의사로부터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와과 주위 사람들이 경고를 받았고, 이 때문에 李박사의 감정을 건드릴 만한 문제는 항상 얼버무리거나 혹은 善意(선의)의 거짓말로 대답해 넘겨야 했다.
 
  李박사가 하와이에서 여생을 보내는 동안 집중적으로 고민하고 질문했던 문제는 韓國(한국)의 현재와 미래에 관한 心慮(심려), 그리고 자신의 還國(환국)이었다. 첫 번째 문제인“요즘 우리나라는 어떻게 돼 가나?“라는 질문은 그를 만났던 교민과 친지들 모두가 가장 많이 기억하는 두 개의 질문 중 하나였다.
  이 질문에는 너나 할 것 없이 “잘 돼갑니다”라는 식이었고, 李박사는 확인할 도리가 없었으므로 그럭저럭 받아 넘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자신의 환국 문제만큼은 눈을 감을 때까지 그 자신을 가장 답답하게 만들었고, 그만큼 그를 간호하고 모셨던 사람들을 곤혹스럽게 만든 질문이기도 했다.
 
  1875년에 태어나 73세 고령의 나이로 비로소 나라를 세우고 대통령이 되었던 李박사로서는 대통령이 된 이후부터 그가 눈을 감을 때까지 그의 면전에서 각박하나마 제대로 저간의 사정들을 이실직고해 줄 사람들은 만날 수 없는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박사가 대통령직에 머물 당시 그의 주위에 항상 아부를 잘하는 관리들이 들끓었던 이유 중 하나는‘노인에 대한 배려’가 관리들 개인의 욕심과 어우러져‘심려를 끼쳐드리지 않기 위해서’라는 명분을 제공한 때문이지 않았을까.
 
 “저기가 우리나라 땅인데...”
 
  李박사가 대통령직에 오른 이후 하와이에서 눈을 감을 때까지 솔직한 報告(보고)와는 인연이 없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 하와이 마키키街의 살림집.


     
 “마키키의 작은 집. 아예 쬐그만 집. 마당까지 해서 30여 평이나 될까? 일층은 지하실까지 해서 창고 같은 방이 하나. 뒤에는 작은 뜰이 있었고, 이층에 사방 3m가 조금 넘을까 하는 침실이 두 개, 그리고 부엌 하나. 그뿐이었어요. 李박사는 거기서 신문지를 갖다 놓고 붓글씨를 쓰시곤 했지. 지금도 이 집은 있지만 수리를 해서 조금 모양이 변했지요.”
 
  당시를 회고하는 吳重政씨의 말이다.
  李박사가 마키키로 집을 옮기던 날. 교포들은 자신들이 쓰던 가구들을 하나 둘씩 가져와 책상이며 식탁과 주방도구들을 마련해 주었다. 그 중에서 식탁은 지금도 梨花壯에 전시되고 있는데, 알미늄으로 만들어진 조립식이었다.
  가로 1m20cm, 세로 90cm 정도 되는 호마이카 식탁판은 3등분되어 접을 수 있도록 되어 있는데 보면 볼수록 건국 대통령의 식탁으로는 턱없이 초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식탁에서 李박사는 식사 때마다 나라를 위한 기도를 계속했고, 아침마다 서쪽을 가리키며 “저기가 서편이야. 바로 저쪽이 우리 한인들이 사는 데야”하고는 멍하니 바라보곤 했다.“아니, 식사는 안 드실 생각이세요?”하고 프란체스카 女史가 주의를 환기시켜드리면 매우 못마땅한 듯이 “왜?”하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당시 프란체스카 女史의 기록.
  <우리의 생활은 몹시 단조로왔으며 나는 워싱턴에서의 독립운동 시절과 같이 살림을 꾸려 나갔다. 우리를 도와주는 동지들과 제자들에게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으나 우리는 이런 생활이나마 허락해 주신 하느님께 늘 감사하였다>
 
 독립운동하듯 여생 보낸 두 老人
 
  ‘독립운동하듯’여생을 보내야 했던 전직 대통령 부부. 프란체스카 女史의 기록을 좀더 살펴보자.
 
  <단 두 식구가 사는 간단한 살림이었지만 나는 하루 종일 쉴 새 없이 일했다. 나는 집안을 청소할 때마다 창문의 유리를 두 장씩 닦아 나갔다. 그렇게 하면 1주일이 지나는 동안 닦아야 할 집안의 유리창문은 모두 나의 손을 한 번씩 볼 수가 있어서 깨끗한 창문을 유지하게 되는 것이었다.
 
  대통령은 넓지 않은 마당에 나가 화초에 물을 주기도 하고 나무에 손질을 하며 마음속의 시름을 달랬다. 대통령은 이때에도 무슨 음식이나 잘 들었고 체중이 주는 일도 없었으므로 나는 항상 과식을 삼가도록 배려했다. 체중이 늘면 고혈압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며 특히 노인의 건강에 해롭기 때문이었다. 나는 대통령의 보행을 위해 매일 시간을 정해 옥외로 함께 나가 산책을 했다. 이렇게 1960년 한 해를 하와이에서 넘기게 되자 1961년 설날 나는 떡국을 끓여 대통령에게 아침식사를 들게 했고 친지와 교포들이 어린 자녀들을 데리고 새배를 와서 우리를 기쁘게 해 주기도 했다>
 
  이 글을 쓰면서 프란체스카 女史에 관한 언급을 피할 수가 없을 것 같다. 잠시 그녀에
 관한 부분을 요약해 본다.
  늙어서도 자신보다 스물 다섯 살이나 더 먹은 李박사의 건강을 돌보았던 프란체스카 女史. 그녀가 李박사를 처음 만나게 된 것은 1933년 스위스 제네바의 레만 호숫가에 위치한 호텔‘드 라 뤼씨’에서였다.
 
 퍼스트 레이디 프란체스카
 
  프란체스카 女史의 집안은 오스트리아에서 대대로 양조업을 해왔다고 한다. 그러나 대를 이을 아들이 없자 막내딸인 프란체스카에게 사업을 물려주기로 하고 남자처럼 강인하게 훈련시키면서 상업전문학교에 보냈고 언어수업을 위해 스코틀랜드까지 유학을 시키기도 했다.
 
  이런 프란체스카가 어머니와 함께 유럽을 여행하다 동양에서 온 노신사 李承晩(이승만)을 만났을 때 그녀는 33세로 영어 통역관 국제 자격증을 가지고 있었고, 속기와 타자에 아주 능숙했었다. 그녀는 마치 李承晩이란 인물을 만나기 위해 살아온 여성 같았다.
  어머니와 그녀가 이미 만원이 된 호텔의 4인용 식탁에 앉아 식사를 기다리고 있을 때, 자리를 잡지 못한 李박사를 위해 지배인이 “동양에서 오신 귀빈이 자리가 없으신데 함께 합석하셔도 되겠습니까?”하고 양해를 구했다.
  女史의 어머니가 李박사를 한번 훑어 본 뒤에 안심을 하고 승낙했음은 물론이다.
  女史는 당시 李承晩 박사와 마주앉아 식사를 하면서 매우 놀랐다고 그녀의 책에 적고 있다.
 
  <지배인의 안내를 받으며 우리가 앉아 있는 식탁으로 온 李박사의 첫인상은 기품 있고
 고귀한 동양신사로 느껴졌다. 그는 프랑스어로 “좌석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하고 정중하게 인사를 한 뒤에 앞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곧바로 메뉴를 가지고 온 웨이터에게 높은 신분으로 보였던 이 동양신사가 주문한 식탁을 보고 나는 무척 놀랐다.
  사워크라후트라는 시큼하게 절인 배추와 조그만 소시지 하나, 그리고 감자 두 개가 전부였다. 당시 유럽을 방문하는 동양 귀빈들의 호화판 식사와는 달리 값싼 음식만을 주문했기 때문이다.
 
  나는 왜 그런지 이 동양귀빈의 너무도 초라한 음식접시에 은근히 신경이 쓰였다. 그리고 숙녀들에게 먼저 말을 걸어오는 서양 신사들과는 달리 온화한 표정으로 말없이 앉아서 웨이터가 음식을 가져오자 식사를 하기 전에 불어로“본 아뻬띠!”(맛있게 드세요)하고 우리에게 예의를 갖춘 후 조용히 식사만 하고 있는 이 동양 신사에게 사람을 끄는 어떤 신비한 힘이 있는 것 같이 느껴졌다>
 
  동양 신사의 보이지 않는 신비한 힘에 이끌린 그녀와 李承晩 박사와의 결혼에 이르는 과정은‘절제된 사랑의 아름다움’이라 표현해야 적당할 것 같다. 빈의 숲 속을 함께 거닐며 노처녀 프란체스카가 배운 한국말은‘사랑’이라는 로맨틱한 단어였다.
  그녀는 그동안 연마해 온 자신의 특기를 자금과 일손이 한없이 필요했던 항일 독립투사를 위해 무료봉사하기 시작했다. 시간과 경비를 줄이기 위해 식사 대용으로 날계란에 식초를 타 마시며 독립운동을 하고 있던 저명인사를 女史의 집안에서는 단연코 거부했지만 이 두 사람의 결혼은 이듬해인 1934년 10월8일 뉴욕 몬트 클레어 호텔 특별실에서 윤병구 목사와 존 헤인즈 홈즈 목사의 합동 주례로 이루어졌다.
 


 ▲1934년 막 결혼한 이승만, 프란체스카 부부
 
  그 후 李承晩 박사의 전 생애에 걸쳐 그녀는 훌륭한 비서의 역할을 했다.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시절에 한인 동지회측은 碧眼(벽안)의 이방인을 아내로 맞은 李承晩에 대해 거부감이 일어나 공식행사에는 혼자 참석하도록 종용하기도 했지만 李承晩 박사는 아내를 끝까지 데리고 나갔다. 아내에 대한 남편의 존중 못지않게 프란체스카 女史의 남편에 대한 존경은 그녀의 전 생애에 걸쳐 면면히 이어졌다.
 
  나라를 잃고 망명중이었던 李承晩 박사와 함께 자청해서 망명생활의 짐을 나누어지고 내핍생활을 견지하며 항상 한국을 자신의 內面(내면) 속으로 받아들였던 프란체스카 女史. 그녀의 남편에 대한 존경과 인내하는 자세는 전통적인 한국 여성들에게도 찾기 어려울 만큼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그녀는 1992년 3월19일 梨花莊에서 92세로 타계했다.
 
 두 번째 養子 李仁秀씨
 
  마키키에서 李承晩 박사는 아내 프란체스카에게 간간이 6대 독자인 자기 때문에 남달리 고생만 하시다가 멀리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아들을 그리며 홀로 쓸쓸히 돌아가신 아버님 이야기를 했다. 그러면서 자신은 선영을 돌볼 아들이 없음을 자주 토로 했다.
  이런 이야기가 몇 차례 오가고 난 뒤에 두 노인은 다시 養子(양자)를 맞아들일 것을 고려해야 했다. 李起鵬(이기붕)의 아들 李康石(이강석)을 養子를 맞아들인 적이 있었지만 4·19 직후 일가족 동반자살로 비극 속에 사라진 뒤로 한동안 養子 문제를 거론하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한 사람은 90을 바라보고 또 한 사람은 환갑을 넘겼으니 쓸쓸한 두 노인에게 養子만은 절실했다.
 
  누가 한국에 가서 이 어려운 일을 해줄 것인가를 골똘히 생각한 끝에 뉴욕에 있는 李淳鎔씨(이순용·작고)에게 이 일을 부탁하기로 했다. 李씨는 대통령과 함께 독립운동을 했고 한때 내무부 장관을 지낸 일이 있었다. 그는 한인동지회의 吳重政씨로부터 연락을 받고 호놀룰루로 와서 李承晩을 만났다. 이때가 1961년 5월 초. 5·16이 일어나기 직전이었다.
 
  李承晩 박사는 이순용씨의 손을 꼭 잡고 “내가 이런 처지에 있는데 나에게 누가 아들을 줄 사람이 있겠나. 하지만 내 後事(후사)를 이을 아들이 필요하네”하며 간곡히 부탁했다. 자초지종을 다 이해한 이순용씨가 李承晩 박사의 養子를 구하러 한국에 왔을 때는 5·16이 일어난 다음이었다.
  그 무렵 군사정부측에서는 자유당 정부 때의 장관이 미국에서 급거 귀국한 사실만으로도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이 일로 말미암아 당시 서울 국제호텔에 묵고 있던 이순용씨는 한동안 모든 행동을 감시받는 생활을 해야 했다.
 
  이런 와중에 이순용씨는 종친회를 통해 李承晩 박사의 養子를 찾아나섰다. 당시 李承晩 박사의 養子에 적합한 사람은 네 가지 조건에 맞아야 했다. 맨 첫 번째 조건은 系代(계대)를 맞춰야 한다는 것이었다.
  讓寧大君(양녕대군)의 16세 손이었던 李承晩 박사는 계대에 의하면 이을 承(승)이 돌림자였고, 따라서 17세 손의 돌림자인 빼어날 秀(수)가 이름에 있어야 했다. 원래 李起鵬의 장남 李康石은 孝寧大君(효령대군)파여서 종친회에서도 말이 많았다고 한다.
 
  養子에 적합한 두 번째 조건은 현재 양부모가 모두 늙어 어려울 때이니 너무나 어려서는 안되고 大學(대학) 정도는 졸업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세 번째로 未婚(미혼)이란 조건이 붙었고, 끝으로 養부모의 문화적 배경을 이해해서 영어를 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프란체스카 女史는 한국말을 잘 못했다.
 
  “그 놈도 나를 좋아하겠지”
 
  이런 조건이 붙자 후보는 아주 적었고 결국 16세 孫(손)인 李承用(이승용)씨(당시 楊州郡 교육감)의 장남 李仁秀(이인수)씨가 養子의 적임자로 오르게 되었다. 이 때가 1961년 6월이었다. 그러나 李仁秀씨는 그다지 쉬운 일이 아니란 것을 알고 좀 더 좋은 사람을 추천해 보라고 몇 차례나 고사했다고 한다.
 
  9월이 되자 하와이에서 독촉하는 전갈이 왔다. 종친회에서는‘집안을 위해서는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란 명분을 세워 끈질기게 독촉을 했고, 더 이상 거절할 명분이 서지 않던 李仁秀씨는 결국 하와이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현재 명지대 법학과 교수로 재임 중인 李仁秀씨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한다.
 
  “담담하기도 했지만, 어떤 사명감을 가지고 있었지요. 권력도 없고 아주 어려운 때 제가 그 분들의 養子로 간다는 사실이 제게 책임감을 많이 느끼게 했습니다. 그 당시 하와이 형편이야 집안으로부터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었으니까요. 갈 때는 제가 재떨이며 선물이 될 만한 물건들을 좀 사가지고 갔습니다. 교포들과 미국인들이 두 분의 생활을 돕고 계신다기에 그 분들께 드릴 선물을 마련한 겁니다. 어쨌든 집안의 모든 책임을 나의 두 어깨에 짊어져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1961년 하와이에 도착한 이승만 대통령의 양자 이인수(中)씨
 
  한편 하와이에서 養子를 사진으로 먼저 받아본 李박사는 하와이에 온 이후 가장 밝은 표정을 지었다고 한다. 李承晩 박사는 그때부터 양아들 仁秀가 오기를 기다렸으며 수속상 시간이 걸리게 되자 “그 놈이 정말로 나를 좋아한다면 더 서둘러 빨리 와야 하 것이 아닌가”하면서 몹시 마음을 썼다.
 프란체스카 女史에게도 곧잘 농담을 걸어오기도 했고 종종 거울까지 들여다보며 젊은이처럼 “그 녀석도 내가 저를 좋아하듯이 나를 좋아하겠지”하고 부인에게 묻기도 했다.
 
 1961년 12월13일 정오. 李承晩 박사가 그토록 기다리던 양아들 李仁秀씨가 호놀룰루 공항에 도착했다. 노부부는 번잡을 피하기 위해 공항에 나가지 않고 집 앞 테라스에서 기다렸다. 崔伯烈씨와 吳重政씨 등 교포 십 여 명이 李仁秀씨에게 꽃다발을 걸어주었다. 이들이 차를 타고 20여분을 달려 녹색 수림이 울창한 주택가에 다다르자 하얀 목조건물이 나타났다. (계속)
보도자료 및 기사제보 press@newdaily.co.kr
[자유민주·시장경제의 파수꾼 - 뉴데일리/newdaily.co.kr]
Copyrights ⓒ 2005 뉴데일리뉴스 - 무단전재, 재배포 금지
※ 청소년에 유해한 댓글 과 광고/반복게재 된 댓글은 작성을 금지합니다. 위반된 게시물은 통보없이 삭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