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사다는 두번 다시 함락되지 않는다"  
     
     자주국방의 나라 이스라엘 紀行(6)
    趙甲濟    
     
     로마 항쟁의 마지막 요새, 967명 장열한 자살 
     
     서기 70년 로마장군 티투스가 예루살렘을 함락시키고 聖殿을 파괴함으로써 반란은 진압되었으나 마사다 요새에서는 967명의 유태인들이 끝까지 버티었다. 서기 72년에 로마군은 실바 장군의 지휘 하에 예루살렘에 주둔하던 제10군단 1만5000여 명의 병력을 동원, 마사다를 포위했다. 기자 일행은 케이블 카를 타고 마사다 요새로 올라갔다. 실바의 로마 攻城軍(공성군)이 흙으로 댐을 쌓아올려 서쪽으로 기어올라왔다는 그 흙댐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마사다 요새는 500×300m 모양의 타원형이다. 1960년대 초에 이스라엘 군 참모총장 출신인 야딘 장군(그는 死海文書 발굴도 지휘했다)의 지휘 하에 발굴작업이 벌어졌다. 성벽, 수영장, 창고, 교회당, 貯水槽(저수조) 같은 시설이 드러났다.
     
     마사다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반란군 960명(7명은 생존)이 집단자살로써 장렬한 최후를 마친 곳이기 때문이다. 유태인 반란군의 한 지휘자였던 조세푸스 플라비우스는 로마軍에 투항, 공격자의 입장에서 ‘유태인의 전쟁’이라는 귀중한 기록을 남겼다. 이 책에서 그는 마사다의 최후를 극적으로 묘사했다. 반란군 지휘자 엘라자르는 로마軍의 공격을 막을 수 없게 되자 반란군과 가족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연설했다는 것이다.
     
     “이제 새벽이 오면 우리의 저항은 끝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명예로운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지금 갖고 있다… 우리의 손이 자유롭고 아직도 칼을 잡을 수 있는 힘이 있을 때, 우리의 敵에 의해 노예가 되기 전에, 우리의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자유인으로서 이 세상을 떠나자.”
     
     이들의 자살을 입증할 수 있는 물증―960명의 유골은 1960년대의 발굴에서 발견되지 않았으나 유태인들은 마사다를 대학살 박물관과 함께 하나의 聖地(성지)로 여기고 있었다. 기갑부대 新兵훈련생은 수료식을 여기에서 한다. 절벽길을 걸어서 올라 와서 이들은 저 멀리 요르단 땅과 死海를 내려다보면서 구호를 외친다.
     “마사다는 두 번 다시 함락되지 않을 것이다!”
     마사다에서 내려온 우리는 기보니氏를 따라 死海연안의 한 호텔로 갔다. 기보니氏는 “내 장인이 휴가차 이 호텔에 투숙하고 계신다”면서 객실로 전화를 걸었다. 장인은 큰 버스회사의 경리책임자로 일한다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의 전쟁엔 히로이즘이 있는데…  
     
     조금 있으니 기보니氏와 장인이 다가오더니 인사를 청하는데 두 팔이 모두 잘려나간 老人이었다. 그는 쇠손을 내밀었고 나는 차가운 금속을 잡고 악수를 했다. 6일전쟁 때 기보니氏의 장인은 예비군으로 소집돼 소령으로 복귀, 대대를 지휘했는데 요르단 戰線에서 포격을 당해 부상했다고 한다. 1년 동안 수술을 수십 번 받으면서 온몸에 박힌 파편을 뽑아내느라 死境을 헤맸다고 한다. 그는 “전쟁에서는 모든 게 運이지. 내 직속 부하는 한 방에 날아가 버렸으니 그래도 나는 행운이었소”라고 쾌활하게 말했다. 기보니氏의 장모는 전형적인 ‘주이시 마더’(Jewish Mother)로서 한국에서 온 손님에게 대접할 것이 없나 해서 안달이었다.
     
     이 할머니는 이스라엘 독립전쟁 때 유명한 여성 戰士로서 그때 총을 잡았던 그 손으로 커피를 타서 주는데 남편은 두 쇠손으로 그 커피 잔을 부둥켜안듯이 받았다. 폭격기 조종사 출신 사위, 상이용사가 된 장인, 독립군이었던 장모 그 세 사람의 정답고 밝은 모습에서 기자는 이스라엘의 전쟁은 한국의 전쟁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들의 전쟁은 자유의지로 선택하고 받아들이며 견뎌낸 적극적인 전쟁이었던 데 비해 한국의 전쟁은 강요된, 그래서 피하고 싶은 비극으로만 기억되고 있다.
     
     이스라엘의 전쟁엔 히로이즘과 영광이 있는데 한국의 전쟁엔 슬픔과 후회뿐이다. 1995년 국방부에서 만든 6·25전쟁 포스터의 문구는 ‘형제의 가슴에 총부리를 겨누어야 했던 아픈 기억’이었다. 중학생 수준의 作文을 연상시키는 이 글에는 최소한의 국가관·역사관은커녕 鬪地도 의욕도 없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공산세력의 확장을 최초로 저지시킨 6·25의 의미를, 영광과 승리의 전쟁으로 해석하지는 못할망정 마치 국군이 피붙이도 무시하는 가해자의 입장에 선 것 같은 죄의식으로써 전쟁기피 풍조나 부채질하는 표현을 쓰고 앉아 있으니 우리 國軍은 과연 어느 쪽의 군대인지. 내일이 있는 군대인지, 조국이 있는 군대인지…. 
     
     애조 띤 유행가 
      
     예루살렘에 있는 히브류 大學으로 가는 車中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이스라엘 유행가를 듣고 기자는 깜짝 놀랐다. 우리나라의 흘러간 옛 노래와 흡사한 멜로디와 唱法(창법)이었기 때문이다. 가사만 한국말로 바꾸면 누가 들어도 한이 서리고 애조 띤 뽕짝이었다.
     1950년대 우리 유행가에 6·25의 비극을 담은 것이 많았듯이 이스라엘 유행가엔 나치에 의한 유태인 대학살을 소재로 한 가사가 많다. ‘재와 먼지’(Ashes and Dust)란 제목의 앨범엔 ‘트레브린카 작은 역’이란 노래가 있는데 트레브린카 수용소로 끌려가는 유태인들을 상징화한 이런 가사가 있었다.
     
     ‘때로는 인생여정이 5시간45분 만에 끝나고, 때로는 죽을 때까지 편안하게 계속된다.’
     우리의 ‘단장의 미아리 고개’를 연상시키는 곡이었다.
     천성적으로 음악을 좋아한다는 점에서 유태인과 한국인은 닮았다. 유태인 출신의 음악天才들을 꼽으라면 紙面(지면)이 모자라지 이름이 모자라지는 않는다. 소련이 해체된 뒤 러시아에서 살던 유태인 약50만 명이 이스라엘에 정착하기 위해서 이민 왔다. 텔 아비브의 벤 구리온 공항에 내리는 러시아系 유태인들 중엔 바이올린을 들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바이올린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들은 피아니스트로 봐야 한다”는 농담까지 생겼다.
     
     히브류 대학 트루먼 연구소에서 만난 벤 아미 실로니(Ben Ami Shillony) 교수는 日本역사 전문가이다. 60代의 나이에 체구는 일본 사람같이 작고 웃는 표정이 소년처럼 천진난만한 학자였다. 네 차례 한국을 방문했다고 한다. 실로니 교수는 日本에서 교환교수로 일하는 사이 한국을 처음 찾았던 1982년의 감동을 이야기했다. 한국은 ‘특별한 느낌’으로 다가왔다고 한다. 한국인은 日本人보다 훨씬 마음 편한 상대였으며 유태인과 한국인 사이의 공통점이 너무나 많은 데 놀랐다고 한다(기자가 이스라엘에 와서 그런 공통점을 발견하고 놀란 것과 똑같은 체험을 한 셈이다). 
     
     허약한 尙武전통, 그러나 建國 과정에서 군사력 배양  
     
     1989년 11월 실로니 교수는 건국대학교에서 열린 ‘국민국가와 세계평화’를 주제로 한 심포지엄에서 한 논문을 발표했다. 그가 자랑스럽게 건네준 논문 복사본의 제목은 ‘유태인과 한국인의 역사적 경험에서 나타난 국가와 평화의 중심적 역할’이었다. 그는 ‘두 민족은 늘 戰士(전사)보다 학자를 더 존중하였고 물리적 허약성을 도덕성으로써 극복하는 능력을 가진 점에서도 닮았다’고 지적했다. 유태인과 한국인은 유럽이나 日本 등 대부분의 근대 국가와는 달리 ‘武士(무사)계급의 지배집단化’라는 전통을 갖지 않은 아주 특이한 민족이란 것이다.
     
     군사적 전통이 취약한 두 민족은 그 때문에 나라를 잃었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똑같은 시기에 국가를 건설하고 지켜가는 과정에서 세계가 놀랄 만한 군사력을 갖추게 되었다. ‘평화를 지향하는 민족이 완강한 병사로 바뀐 것’은 물론 독립국가로서 생존하기 위한 결의의 결과였다. 실로니 교수는 ‘유태인과 한국인은 국가의 목표를 평화에 두고 있기 때문에 일단 평화를 달성한 다음엔 군사조직이 약화될 것이다’라고 전망했다. 실로니 교수는 ‘한국인의 위대한 성취가 戰線(전선)이 아니라 공장에서 기록되었던 것처럼 이스라엘人의 위대한 성취도 하이테크산업, 대학, 그리고 음악당에서 이루어졌다’고 썼다.
     
     “유태인의 첫 인사말은 히브류語(어)로서 ‘샬롬!’인데 ‘평화’를 의미합니다. 한국인의 ‘안녕하십니까’도 마찬가지로 평화에 대한 희망을 표현합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가까운 장래에 우리 두 민족이 그 염원을 꼭 이루기를 바랍니다.”
      
      군대가 이스라엘을 만들어냈다  
     
     실로니 교수의 관찰은 형식면에선 맞지만 내용으로 들어가면 한국과 이스라엘은 본질적인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된다. 두 나라가 尙武정신이 부족했던 점에서는 같지만 建國 과정에서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과 자세는 달랐다. 이스라엘人은 건국 前 영국의 통치下에서 이미 비밀군사조직을 만들어 아랍人들과 對敵하면서 키부츠(집단농장)를 지키고 建國을 준비하다가 제2차 세계대전 뒤 全아랍국가를 상대로 한 독립전쟁에서 당시 인구의 1%가 戰死하는 代價를 치른 다음 나라를 세웠다. 국가가 생기고 군대가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국민군이 국가를 만들어낸 것이다. 한국의 독립은 태평양 전쟁에 이긴 미국의 선물이었고 군대조직도 美軍(미군)이 만들어주었다.
     
     이스라엘 군대는 국민 속에서 솟아났고 한국군은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었다. 한국군은 한국전쟁 때도 국토방위의 주도권을 美軍에게 내주었고 휴전 뒤 지금까지도 駐韓美軍의 지도하에서 나라를 지키고 있다. 이스라엘 군대는 인구比(비)에서 아랍에 대하여 1대 30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여섯 차례의 전쟁에서 한 번도 외국 군대의 도움을 받은 적이 없다. 한국군은 또 두 번의 쿠데타를 통해서 정권을 잡는 경험에 의해 한때는 지휘부가 國土방위보다는 國內정치에 더 신경을 쓰는 체질로 변모하였다.
     
     이스라엘은 과거의 나약성에 대한 처절한 반성 위에서 主體的 결단에 의하여 군대를 만들었다면 한국은 피동적이고 의존적인 심리기반을 가진 군대를 갖고 있다는 얘기가 된다. 군대를 대하는 兩국민의 자세에도 큰 차이가 있다. 이스라엘軍의 대령 이상은 총리보다 더 많은 월급을 받는다. 군인의 퇴직 후 年金(연금)은 일반 공무원의 두 배이다. 군인이 戰死했을 때 친척들을 인터뷰하여 그 사진을 보도하는 것은 금지돼 있다. 戰死한 군인의 시체도 보도 금지다. 군인이 戰死한 그 작전의 타당성을 정치인이 비판하는 것도 금기 중의 하나다. 戰死者의 가족에게 그 죽음이 헛된 것이었다는 느낌을 주지 않으려는 배려에서다.
     
     모든 전사자가 戰場에서 남긴 수필, 시, 편지는 유고집으로 편집돼 끊임없이 출판되고 있다. 1991년 4월의 공식발표에 따르면 이스라엘 建國 이후 1만7150명이 戰死하고 5만6272명이 戰傷(전상)했다. 이들 가족은 이스라엘 사회에서 聖骨(성골)대우를 받는다. 戰場에서 부상자는 어떤 희생을 무릅쓰고라도 후송해야 한다. 한 사람의 생명을 구하기 위하여 열 명을 희생하는 것도 감수하려는 자세이다. 
      
     조국은 포로를 잊지 못한다  
     
     이스라엘에서 출판되는 연감은 1982년 레바논 전쟁에서 포로가 된 공군항법사 론 아라드와 네 명의 실종자에 대한 구출 노력의 진행상황을 반드시 언급한다. 1994년 5월21일 이스라엘 특공대는 시리아가 통제하고 있는 베카 계곡의 한 가옥을 급습하여 시아派(파) 테러조직의 간부인 무스타파 디라니를 납치, 헬리콥터로 싣고 와서 감옥에 집어넣었다. 디라니는 아라드를 데리고 있다가 30만 달러를 받고 이란 혁명수비대에 넘겨주었다는 혐의를 받고 있었다. 이스라엘 정부는 포로나 실종자가 조국에 의해 결코 잊혀지지 않고 있음을 끊임없이 상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6·25 휴전 후 북한이 납치해간 어부 400여 명에 대한 한국정부·언론·국민들의 무관심과 한 번 비교해 보라.
     
     국가는 국민을 보호하려는 의지력을 보일 때만이 협회나 기업과는 다른 특별한 공동체임을 증명할 수 있다. 그럴 때만이 국가는 국민에게 충성을 요구할 수 있는 권위를 갖게 된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우리가 연예인과 스포츠 선수들을 이야기하는 식으로 장군들의 이름을 외고 있었다. 1982년 레바논 베카 계곡 상공에서 벌어진 시리아 공군과의 공중전에서 87대(격추된 시리아 공군기) 대 0(격추된 이스라엘 공군기 없음)의 스코어를 기록했던 공군사령관은 누구이며 1976년 엔테베 작전의 특공대장은 누구이고 나치독일의 비밀경찰 간부 아이히만을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납치해온 모사드의 간부는 누구라는 식으로 줄줄 외는 것이다.
     
     이스라엘 공군에선 한때 조종사들을 상대로 ‘홀로코스트 퀴즈’문답을 실시하여 상을 주곤 했다. 어느 조종사가 유태인 대학살에 관하여 가장 정확한 상식을 가지고 있는지를 시험하기 위한 행사였다. 질문은 이런 식이다. ‘트레브린카 수용소에서 몇 명이 학살되었지요?’, ‘부켄발드 수용소에선?’, ‘리비아에 만들어진 수용소엔 몇 명이 수용돼 있었나요?’ 
     
     特攻작전의 철학  
     
     학살과 전쟁은 이스라엘人들에겐 악몽과 추억뿐만이 아니라 문화이고 생활 그 자체이며 항상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있게 하는 각성제이다. 엔테베 작전의 특공대장 요나단 네탄야후 중령은 현장(우간다 엔테베 공항)에서 인질 구출작전을 지휘하다가 戰死했다. 이 작전의 유일한 전사자가 지휘관이었다는 것은 장교들이 앞장을 서 장교 사망률이 유달리 높은 이스라엘 군대의 전통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동생 베냐민 네탄야후는 야당인 리쿠드黨(당)의 당수로 있다(그 뒤 두 번 수상을 역임하였다). 그는 야당 당수로서가 아니라 ‘특공대장 요니의 동생’으로 더 유명하다. 엔테베 작전을 감행한 것은 이스라엘이 지금까지도 지키고 있는 중요한 원칙 때문이었다. 그 원칙이란 테러리스트와는 어떤 협상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스라엘군과 정보기관의 특공작전은 그 발상의 기발함과 행동의 대담성에 있어서 ‘다이하드’ 같은 영화를 연상시킨다. 이들 특공작전은 이스라엘式(식) 생존방식을 보여준다. 학살과 핍박의 희생양으로 오랫동안 경멸받던 나약한 유태인이 더 이상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자 하는 新生국가 이스라엘의 결의에 찬 행동, 또 그러한 과거로 돌아가지 않으려고 건너온 다리에 불을 질러버리는 모진 자기 다짐인 것이다. 그들은 국제법을 어기고 국제여론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특공작전도 사양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렇게 해야만 국가로서 살아남을 수 있다. 600만 유태인이 학살될 때 당신네들은 어디에 있었는가”라고 쏘아붙이면서 “믿을 사람은 우리뿐”이라고 서로를 일깨우는 사람들이다.  
     
     애국심이 살아 있는 나라 
      
     기자는 10일간의 이스라엘 취재가 재미있고 마음 편한 체험이었다. 한국에선 아무런 감흥도 유발하지 못하는 단어가 돼버린 ‘애국심’이 이스라엘에선 살아 숨쉬고 있었다. 국가와 민족이란 말도 한국에선 일부 정치인과 위선자의 선동가들에 의해 그 의미가 크게 퇴색돼 버렸지만 이스라엘에선 입술이 아니라 행동을 통해서, 總口를 통해서, 자기 희생을 통해서 生動하는 가치로 구현되고 있었다. 국가 보위와 민족의 생존을 위해서 지도자·국민·군대가 똘똘 뭉쳐 머리와 가슴을 맞대고 열정을 불태우는 것은 아름다운 일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기자가 무엇보다도 기분이 좋았던 것은 많은 동조자들을 만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기자는 대한민국이 아직도 정신적으론 독립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국가가 아니라 협회에 가까운 조직이라는 의혹을 늘 가지고 있었다. 경제력에 있어서는 수십분의 1에 불과한 북한과 상대하면서 외국 주둔군에 자신의 국방을 의존하고 있고 그러면서도 부끄러움이나 문제의식을 갖지 못한 한국의 지도층. 그들과 만날 때마다 기자는 싸우다시피 해왔다.

     “自主국방을 못 하는 나라는 국가가 아니라 식민지이며 국민은 노예근성을 갖게 된다.”
     이런 말에 동조자를 발견하기란 어려웠다. 이스라엘에서 나는 너무나 많은 동조자를 발견하였다. 그들에게 있어서 本 기자의 주장은 국수주의적인 주장도 탁견도 아닌 상식 중의 상식이었다. 주한미군이 철수할까봐 전전긍긍하면서도 駐韓美軍의 범죄에는 과장과 선동으로써 대하는 분위기, 남의 희생을 이용하여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면서도 미군에 대하여 고마워하기는커녕 콤플렉스를 폭발시키는 우리 사회 일각의 병적인 분위기. 우리가 건강한 정신으로, 책임 있는 시민으로 다시 태어나려면 주한미군의 철수를 우리가 먼저 요구해야 한다고 생각해 왔던 기자는 이스라엘에 와서 비로소 그런 생각의 정당성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