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보를 外國에 맡기는 것은 머리를 남에게 맡기는 것" 
      
     自主국방의 나라 이스라엘 紀行(4)
    趙甲濟    
     
     歷戰의 용사 토니  
     
     쉬프 기자를 만난 직후 기자는 텔아비브 대학內에 있는 재피 전략연구소(The Jaffee Center For Strategic Studies)로 에프라임 캄 부소장을 찾아갔다. 약속한 시각이 오후 2시. 쉬프 기자와의 대화가 길어져 점심을 생략하기로 했다. 어제에 이어 두 번째의 점심 생략.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스라엘에서는 일이 바쁘면 점심을 거르는 일이 보통이라고 한다. 사무실 근무자에게는 점심시간이 따로 없고 샌드위치로 적당히 때우는 식이라고 한다.
     기자를 안내한 사람은 토니 리트만氏였다. 그는 군수산업체 라파엘에서 퇴직하여 일종의 프리랜서 신분으로서 외국인 방문객을 안내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1950년대 말에 영국에서 이스라엘로 이민을 왔다는 그는 아주 모범적인 영어를 구사하고 있었다. 50대 후반인 그(별명이 ‘앤토니’였다)는 대학구내에 들어와서 재피 전략연구소의 위치를 학생에게 물으면서 농담처럼 혼잣말로 이렇게 말했다.
     “가장 좋은 아이디어란 질문이다.”(The best idea is to ask.)
     
     리트만氏도 역전의 용사였다. 6일전쟁 때는 시나이 전선에서, 1973년 10월전쟁 때는 골란고원에서 하사관으로 전투에 참여했다. 그의 장남은 해군의 수중 폭파 부대원 출신으로 미국의 해양 석유 시추회사에서 일하고 있다고 했다. 리트만氏는 자신의 지프차에 나를 태워서 3일간 함께 텔아비브와 예루살렘을 오고가며 취재원을 소개해 주는 안내자 노릇을 했다. 차에서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누다가 보니 리트만氏가 오히려 더 좋은 취재원이 되어주었다.
     
     신생국가 이스라엘을 세우고 지켜 나가면서 국민들이 함께 고생한 이야기를 그는 대단히 자랑스럽게 했다. 말과 행동도 군인처럼 끊고 맺는 게 분명하고 정확했으며 유머감각이 뛰어나 對話 자체가 큰 즐거움이었다. 리트만氏는 뷔페 식당에서 음식진열대로 나갈 때도 늘 작은 까만 가방을 어깨에 메고 다녔다. 나중에 물어보니 가방 안을 보여주었다. 38구경 권총이었다. 실탄을 여섯 발 장전한 채였다. 외국손님 경호용으로 정부의 허가를 받아 지니고 다닌다고 했다.
     
     예루살렘의 국립박물관에 간 날 중학생들이 단체관람을 하고 있었다. 그들을 따라다니는 뚱뚱한 어른은 탄창을 꽂은 카빈을 메고 있었다. 그날 뽑혀 나온 학부모로서 1일 호위병이었다. 스쿨버스가 아랍 테러리스트에게 납치돼 수십 명이 죽은 사고가 발생한 적도 있어 학생들이 소풍을 갈 때도 學父母 호위병이 꼭 따라간다고 한다. 한 번은 히브류대학에 유학 중인 李호일 목사의 아들이 다니는 초등학교 학생들이 소풍을 가는데 李목사가 1일 호위병으로 선정돼 호출되었다. 학교에서는 외국인에게 총을 줄 것인가 말 것인가로 의논을 한 끝에 총 없이 근무하도록 했다고 한다. 
     
      기독교에 대한 反感 
     
     리트만氏는 자신을 세속인(Secular Israelis)이라고 불렀다. 이스라엘 거주 유태인의 총수는 1995년 현재 전체 인구 546만 명의 약82%이다. 나머지 14%는 이슬람 교도(대부분이 팔레스타인 사람), 2.8%가 기독교, 1% 남짓이 드루제(Druze) 교도 등 군소종교의 신도들이다. 적어도 통계상으로는 무종교인이 없다. 그러나 저명한 유태인 중엔 “나는 무신론자”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었다. 텔아비브 근교에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의료원을 운영하고 있는 요피(Joffe) 박사는 기자에게 “나는 두 가지 이유로 해서 무신론자가 되었다”고 말했다.
     “하느님이 존재한다면 어떻게 나치의 유태인 학살을 내버려두었겠습니까. 그리고 나는 과학자입니다. 과학을 믿으면 神을 믿기가 어렵지요.”
     
     요피 박사가 기독교로 개종하면 그는 더 이상 유태인으로 분류되지 않는다. 유태인에 대한 가장 중요한 定義는 유태교를 믿느냐의 여부이다. 유태교와 기독교의 차이는 간단하다. 기독교는 舊約성경에서 예언된 메시아가 예수라는 주장이고, 유태교는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하기를 거부한 채 아직도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유태교인들의 기독교에 대한 反感은 이슬람에 대해서보다도 더 강하다. 이슬람 교도들은 적어도 종교의 자유는 허용했다는 것이다. 특히 이슬람帝國이기도 한 오스만 투르크는 15세기말 스페인에서 종교재판 선풍에 걸려 핍박 당하던 유태인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하였다. 지금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터키 사람들에 대해선 거의 우방국 같은 친근감과 고마움을 지니고 있다. 중세 유럽에서 있었던 유태인들에 대한 탄압과 히틀러에 의한 대학살, 그리고 서양 사람들의 암묵적인 방관, 그 뒤에는 기독교의 反유태주의 전통이 있었다고 보는 것이다.
     
     기독교 중에서도 가톨릭에 대한 반감이 더 센 것 같았다. 유태인들에게 “당신들도 예수를 처형하지 않았느냐”고 물으면 “예수는 로마人에 의하여 처형된 것이다. 유태교는 他종교의 자유를 침해한 적이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스라엘에 사는 약 450만 명의 유태인은 全세계 유태인 인구의 약 3분의 1을 차지한다. 미국에 가장 많은 유태인이 사는데 약 600만 명이다. 이스라엘 거주 유태인 중 이스라엘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61%, 유럽-아메리카 대륙 출생자는 25%, 아시아-아프리카 대륙 출생자는 약 14%이다.
     
     유태교의 사회통제
     
     이스라엘 거주 유태인들 중 리트만氏처럼 세속인으로 분류되는 사람들은 50%쯤 된다. 이들은 정치·교육 등 일상생활에 대한 유태교의 과도한 영향력 행사에 반대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거의가 이스라엘 建國 이념인 시온주의자들이다. 나머지 35% 정도는 종교적 시온주의자(Religious Zionists), 15% 정도는 극단적인 유태교도(Ultra-Orthodox )이다. 흔히 종교인(Religious People)으로 불리는 극단적인 유태교도들은 항상 검은 옷을 입고 수염을 기르고 다니며 종교적인 이유를 근거로 軍 입대를 거부하기도 한다.
     
     이스라엘은 이란처럼 종교가 국가를 지배하는 형태의 종교국가는 아니지만 유태교에 사회통제의 일정부분을 맡겨놓고 있다. 결혼허가는 유태교 법정에서만 받을 수 있다. 여기서 허가를 받을 수 없는 이스라엘人들은 외국, 특히 키프러스로 가서 결혼한 뒤 돌아온다. 누가 유태인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최종 결정권도 유태교 법정에서 행사한다.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정하여 철저하게 지키도록 감독하는 일도 유태교 법정의 권한이다. 안식일에는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일 이외의 상업행위, 자동차 타기, 오락을 금하는 것이 원칙이다.
     
     이런 유태교의 영향력에 대해서 리트만氏 같은 세속인들(그들도 유태교 신도)은 반감을 감추지 않았다. 1986년엔 종교인들이 여자 수영복 광고가 붙어 있는 버스 車庫를 불태웠는데 세속인들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유태교 교당인 시나고그에 불을 질렀다. 텔아비브 대학內의 재피전략문제연구소는 이스라엘 군대의 정보국장이었던 아론 야리브 장군이 주로 미국내 유태인의 헌금으로 1983년에 창립, 운영해왔다. 야리브 장군은 1994년에 사망했다.
     
     그는 1967년 6일전쟁 때 정보국장으로서 이집트 비행장의 전투기들에 대한 정확한 정보들을 수집하여 이스라엘의 전격적인 승리에 큰 기여를 하였다. 야리브 장군은 1972년 뮌헨 올림픽 때 이스라엘 선수와 임원 11명이 팔레스타인 테러조직(‘검은 9월단’)의 습격을 받아 죽은 뒤 이 테러조직원들을 암살하라는 특명을 골다 메이어 총리로부터 받고 집행했던 이였다. 이스라엘 암살부대원들은 뮌헨 테러에 관련된 9명의 테러리스트들을 유럽 등지에서 차례로 찾아내 암살했다. 그러다가 노르웨이 릴리함메르에서 ‘검은 9월단’의 테러지휘자 알리 하산 살라메로 오인된 웨이터를 사살, 국제적 문제를 야기하기도 했다. 이스라엘 암살단은 살라메를 1979년 베이루트에서 발견, 자동차 폭파로써 끝장내 버렸다.
     
     이스라엘 보안기관에선 PLO(팔레스타인 해방기구)와의 평화협정 이후에 테러사건이 더욱 빈발하자 최근에 다시 암살단을 동원하고 있다고 한다. 1994년 11월, 12월에 이미 이란이 조종하는 테러조직의 핵심간부 2명을 암살했다는 것이다. 중동지역의 안보문제에 관해서는 세계적인 권위를 인정받는 재피연구소의 부소장 에프라임 캄 박사는 뒷머리꼭지에 빵모자를 얹고 있었다. 이는 그가 종교인(Religious People)이란 표시이다. 그의 명함엔 ‘대령(예비역) 에프라임 캄 박사’라고 쓰여 있었다. 이스라엘에서 장교 출신일 경우 계급을 명함에 써 넣는 경우가 많았다. 
     
     이란은 북한 무기에 의존  
     
     정보장교 출신인 캄 박사는 2년 전 轉役했는데 이란 문제 전문가로 유명하다. 그는 이란이 核개발을 하고 있다는 증거가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서 이렇게 대답했다.
     “첫째, 이란은 석유와 천연가스가 풍부한 나라인데 왜 원자로를 짓습니까. 그것은 핵무기 원료를 얻으려는 의도이지 어떤 경제적 논리도 발견할 수 없어요. 둘째, 러시아·중국·아르헨티나에서 핵무기 개발에 쓰일 수 있는 기구를 사들이고 있습니다. 셋째, 1979년의 호메이니 집권 무렵에 외국으로 빠져 나갔던 核 관련 과학자들에게 귀국을 종용하고 있습니다.”
     캄 박사는 이란은 6∼7군데로 분산된 연구시설에서 核무기 관련 연구를 하고 있다고 했다. 1981년에 건설 중이던 이라크의 오시라크 원자로를 공습하여 파괴시켰던 이스라엘이지만 이란에 대해선 그런 공격목표를 정하기가 어렵게 돼 있다고 했다.
     ―이란·북한의 공동 프로젝트, 즉 장거리 미사일 개발에 대한 정보가 있으면 말씀해 주시죠.
     “이란은 북한에 대해서 미사일 발사시험을 이란 영토 내에서 하도록 설득하고 있습니다. 이란은 초기 단계에선 북한제 노동 미사일을 구입한 뒤 자체적인 조립·생산공장을 지으려 할 것입니다.”
     ―이란이 북한에 대해서 장거리 미사일 개발 자금을 지원하고 있다는데 현금으로 합니까, 기름으로 합니까.
     “모르겠습니다. 기름도 돈 아닙니까.”
     ―이란이 원자폭탄을 갖는 데 몇 년 걸린다고 봅니까.
     “전문가들은 8∼10년 사이라고 이야기합니다만 정확히는 알 수 없지요.”
     ―북한제 미사일은 핵탄두 운반용이라고 믿습니까.
     “그렇습니다.”
     
     캄 박사는 이란의 핵 개발 시설에 대한 폭격의 어려움을 거듭 지적하면서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압력을 먼저 사용해야 한다. 이스라엘 혼자의 힘으로는 이란의 기도를 좌절시킬 수 없다”고 했다. 캄 박사는 또 “이란과 같은 과격파 이슬람 정부가 핵무기를 갖는다는 점에 위협의 본질적 의미가 있다”면서 터키와 같은 온건한 이슬람 국가와 이란은 이스라엘에 대한 위협의 정도가 다르다”고 했다.
     캄 박사는 이스라엘 정보기관이 중동에서 활동 중인 북한 기술자·상인들의 동태를 주시하고 있다고도 했다. 중동內 북한인들의 활동이 증가하는 추세라고 말한 캄 박사는 “특히 이란의 경우 미사일 등 중요무기 체계에서는 러시아나 중국보다 북한에 대한 의존도가 더 크다”고 지적했다. 캄 박사가 제시한 자료(1993∼1994년도 중동군사연감, 재피센터 발간)에 따르면 북한은 이란, 이라크, 리비아, 시리아, 이집트와 군사협력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주로 미사일 판매 및 미사일 개발기술 수출이다. 북한은 이란에 기술자문관들을 주둔시키고 있으며 이란의 군사훈련생들을 받아 북한에서 훈련시켜주고 있다.
      
     이스라엘의 對北 접근, 美國의 견제로 좌절 
     
     
     이란이 스커드 미사일을 최초로 사용한 것은 1985년이었다. 리비아로부터 얻은 선물이었다. 이란-이라크 전쟁 중에 이란은 북한에서 스커드 미사일을 수입하여 이라크를 향해 발사했다. 이란은 이란-이라크 전쟁이 끝난 뒤 북한과의 협력관계를 강화하였다. 북한의 지원 하에 스커드 미사일 공장을 만들었다. 개량된 스커드 B, C형을 북한으로부터 계속 구입했다.
     
     1992년에 이란은 북한에 150基의 노동1호를 주문하게 되었다. '이스라엘 산업, 연구, 기술 번역 및 자료 주식회사'(IBRT)에서 펴낸 1995년도 연감의 국방분야에서도 제1주제는 이란과 북한의 장거리 미사일 거래였다. 이 연감은 半정부 출판물로 알려져 신뢰성이 높은데 재미있는 내용이 기술돼 있었다.
     
     <이란정부가 중국 및 북한과 공모하여 핵개발을 시도하고 있다는 의심은 이젠 경보로 바뀌었다. 1993년 8월 이스라엘은 미국과의 약속에 따라 북한과의 비밀교섭(편집자 註: 이란에 대한 미사일 수출을 중단하는 대가로 북한에 경제지원을 하겠다는 내용의 거래)을 중단시켰다. 미국 측은 영변 핵시설 사찰문제와 관련하여 평양과 회담을 할 때 이스라엘의 이익을 대변해주겠다고 약속했었다. 1994년 9월1일, 워싱턴 당국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판단한 이스라엘 외무부의 아이탄 벤 추르 차관보는 워싱턴에서 미국의 對北 협상팀과 만나 북한에 압력을 행사하여 이란·시리아에 대한 무기금수를 관철시키도록 요구하였다>
     
     이스라엘 측은 이 요구가 관철되지 않으면 미국과의 약속은 사라진 것으로 해석하겠다는 뜻을 전달했다. 평양 측은 북한이 이스라엘의 이웃나라들에 무기를 공급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했으나 이란에 대한 무기판매 및 시리아·이란·북한·중국의 협력 하에 이뤄지고 있는 地對地(지대지) 미사일 공장건설에 대하여는 언급하지 않았다. 이스라엘 측은 미국에 의해 북한과의 직접 비밀교섭을 차단당하고도 아무런 효과를 보지 못한 데 대해서 불만이 있는 듯했다(이스라엘은 외무부와 해외담당 정보기관 모사드의 간부 2명을 북한에 보내 북한의 의도를 타진한 적도 있다). 한국의 입장에서 봐서도 이스라엘에 신세를 한 번 진 셈이 되었다. 재피센터의 보고서에 따르면 1992년 초 스커드 C 발사대를 싣고 시리아 항구로 들어가려던 북한 선박은 (미국과 이스라엘 측의 감시와 위협에 의해) 강제로 귀환조치되었다고 한다. 북한 측은 1993년 8월에야 러시아 수송기 편으로 시리아에 그 발사대를 실어다주었다는 것이다.  
     
     “정보를 외국에 의존하는 건 머리를 맡기는 일”  
     
     캄 박사는 어떤 국가나 군대가 진정한 독립을 유지하려면 ‘군사정보체제의 독립적 운영’이 그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스라엘은 자금·무기원조를 외국으로부터 받은 적은 있지만 정보수집·분석체계만은 결코 외국에 의존해선 안 된다는 점을 일찍 깨닫고 1950년대에 이미 독자적인 정보체제를 발전시켰습니다. 어느 나라의 정보체제이든 그 나라의 필요나 이해관계에 맞춰서 운영되고 있습니다.
     
     다른 나라를 위해서 일반적인 정보를 줄 수는 있지만 정작 필요한 정보를 제공할 수는 없습니다. 수집된 정보를 정직하게 외국에 주는 정보기관은 어느 나라에도 없습니다. 여과되고 가감되어 때로는 왜곡된 정보를 전달받게 되는데 문제는 그 외국정보의 신뢰성을 검증할 방법이 없습니다. 한국이 미국에 정보를 의존하고 있다면 미국이 잘못 판단했을 경우 한국도 그것을 카피하게 돼 있지요. 외국에 정보를 의존한다는 것은 자신의 머리를 남에게 맡기는 일이 됩니다.”
     
     며칠 뒤에 이스라엘 외무부 사무실에서 만난 재피센터의 미국-이스라엘 관계 전문가 도리 골드 박사도 정보기능의 對美의존이 결과한 재앙을 소개하면서 정보독립이 자주국방의 요체임을 거듭 강조했다.
     
     “6일전쟁 후의 이른바 소모전(War of Attrition) 시절에 미국의 중재로 이집트와 이스라엘은 수에즈 운하 양쪽의 군사력 증강을 더 이상 하지 않기로 하고 휴전을 했습니다. 미국정찰기가 협정준수 여부를 감시하기로 했지요. 이집트는 협정을 무시하고 地對空 미사일 수십 基(기)를 수에즈 운하 연안에 전진배치시켰습니다. 미국은 그 정보를 수집하고도 우리에게 알리지 않은 채 침묵했습니다.
     우리 정보책임자가 워싱턴으로 날아가 국방부 정보책임자에게 항공사진을 앞에 놓고 따졌어요. 미국 측은 이집트의 협정 위반은 시인했지만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1973년 중동전쟁이 터지자 이집트 군은 문제의 그 地對空 미사일의 엄호하에 수에즈를 건너와 시나이 반도로 밀려들어갔습니다. 우리 공군기는 그 미사일에 맞아 많이 떨어졌어요. 정보의 對美의존에 대해 우리는 피로써 대가를 치렀습니다.”
     
     두 사람의 말은 그대로 한국군에 대한 경고로 들렸다. 북한 핵 문제의 처리과정에 있어서 한국정부와 언론, 그리고 국민들은 미국 CIA나 DIA(국방부 정보본부) 측에서 흘리거나 흘러나온 북한 핵개발 관련 정보에 일비일희하면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미국 정부가 강경노선 쪽으로 선회하면 ‘북한이 한두 개의 핵폭탄을 가진 것으로 판단된다’는 정보가 춤추고 對北 유화론으로 가닥을 잡으면 ‘한두 개의 핵을 가져 봤자 큰 위협이 안된다’는 정보가 등장한다. 1994년 가을의 美-北 제네바 합의 이후, 즉 미국이 북한의 과거 행적에 대해서는 사실상 묵인하기로 결정한 이후엔 북한의 핵개발 위협에 대한 정보가 거의 흘러나오지 않고 있다.
     北核정보를 미국이 거의 독점하다시피 하고 그 정보를 먹이처럼 이용하여 사육동물의 심리를 조종하는 식으로 한국의 정책과 여론을 움직이는 것을 경험한 기자로서는 이스라엘 要人(요인)들의 확고한 정보마인드-‘한 국가의 독립은 정보체계의 독자적 운용에서 출발한다’는 자세가 인상적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