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들을 신나게 할수록 나도 신난다 
    10년의 방황(彷徨)과 10년의 핍박(逼迫) 그리고 불혹

     
    새벽차를 타고 강원도 산골의 한 리조트를 찾았다. 대학생 500여 명이 모인 MT장소다.
    “자유통일은 당신의 기회다! 희망이다! 300만 일자리 창출이다!” 열변을 토했다.
    박수와 환호가 쏟아져 나왔다. 강연이 끝나자 진지한 질문에 한참을 놀았다. 챙겨간 수십 장의 명함은 오늘도 동이 나 버렸다. 강연료 대신 음료수 한 박스를 선물로 받은 뒤 서울로 향했다. 우울한 저들을 신나게 할수록 나도 신난다.

     저녁에는 또 다른 청년들 모임을 찾아 희망을 전한다. “낙심과 절망은 청년의 원수다. 번민에 젖지 말고 가련한 자들을 구해라. 성인(聖人)은 천하 만민을 걱정하느라 자기 하나 걱정할 틈이 없는 이다. 소인(小人)의 길을 가지 마라 성인(聖人)의 길을 가라” 

    어둠을 헤매는 청년은 우리의 동지다. 그러나 낙심, 절망, 번민, 고통은 우리의 적(敵)이다.
    나는 이 땅의 가련한 청년을 데리고 더할 나위 없이 비참한 북한의 동포를 구하러 나섰다. 저들이 선하고 의로운 사명을 깨달을 때 도산(島山)이 설파한 대공의식(大公意識)을 갖게 될 것이다. 좁디 좁은 자기연민도 깨어질 것이다. 빛을 찾는 아메바처럼 이것은 청년의 숙명이다.


    <원수 같은 낙심, 절망, 번민, 고통에 살았다. > 

    나는 한심한 20대를 보냈다. 원수 같은 낙심, 절망, 번민, 고통에 살았다.
    어린 시절부터 설명하기 어려운 종교적 체험이 많았고 사춘기가 찾아오면서 이것은 물질적 혼란과 감각적 망상으로 번졌다. 세상은 허무(虛無)했고 인생은 공허(空虛)했다. 중학교 때부터 도(道) 닦는 척하며 뒷산을 올랐고 고교시절엔 “서울대 철학과”를 입에 달고 살았다. 철학이 무언지 몰랐지만 틈틈이 익혀 온 여러 가지 수련(?) 중 하나일 것으로 여겼다. 

    막상 대학 갈 무렵 “서울대 철학과”는 허망한 꿈으로 끝났다. 아버지 고집에 집을 나가든, 法大나 商大에 가 고시를 보든 둘 중의 하나의 선택만 있었다. ‘대학에 일단 들어가 학력고사를 다시 본다’는 안이한 생각에 충돌을 피했고 법대에 들어왔다. 그리고 입학 이후 예측된 방황(彷徨)은 격해졌다. 

    집에 가기 싫어 ‘고시공부’ 핑계로 전국의 고시원을 떠돌아 다녔다. 사법시험은 하루도 제대로 공부한 적이 없었고 응시(應試)도 하지 않았다. 학교를 제대로 다닐 리 없었다. 도서관에 앉아 종교와 철학 책만 쌓아놓고 읽었다.
    취미에 안 맞는 공부를 하면서 허무(虛無)는 독해졌다. 결국엔 산속에 굴(窟)까지 뚫으며 수행에 나섰다.
    동기들 대학 졸업 여행 때도 입산수행 중이었다. 졸업을 위해 학점을 때워야 할 때는 연희동 안산(安山) 옆 움막을 지었다. 공사로 헐릴 때까지 3개월을 지냈다. “고시(考試)”를 강요하는 아버지 밑에서 유일한 선택은 생에서 자유로워지는 것뿐이라며 더욱 더 열심히 도를 닦았다. 

    나라와 민족에 대한 소망이 없진 않았다. 그러나 ‘철인(哲人. 鐵人이 아닌)정치’를 꿈꾸는 나에겐 ‘깨침’을 얻는 게 먼저였다. 방안 가득 민족사 영웅의 위패를 만들어 정신을 가다듬었지만 지독한 허무는 언제나 낙심, 절망, 번민, 고통에 나를 몰았다. 책에는 진리가 있지만 그것을 따르지 못했다. 사회주의·공산주의·트로츠키주의 같은 담론도 아무런 열정을 주지 못했다.  


    ‘깨침’을 얻자며 전국의 명산(名山)과 대천(大川)을 돌았다. 손가락 나침반 하나, 닳아빠진 목검 하나 들고 강원도 산중을 누빌 때도 많았다. 아무도 없는 지리산 산중은 오히려 마음을 편하게 해줬다. 혼란과 망상도 줄었다. 그러나 식량으로 싸들고 간 미숫가루가 떨어질 무렵엔 지겨운 세상을 또 다시 찾았다. 철들고 파고든 지독한 염세주의(厭世主義)는 버리고 싶어도 그림자처럼 지긋지긋하게 따라다녔다.  


    <허무(虛無)는 또 다른 허무(虛無)를 낳았다>  


    세상에 존재한 수많은 종교를 접했다. ‘깨침’을 얻기 위해 9개월 동안 육식을 끊기도 했다.
    집 안팎에선 미친놈 취급을 받았다. 기독교인인 식구들은 물론 친척들과 관계도 최악으로 치달았다. 더욱 더 이른바 수행에 빠졌다. 그러나 기(氣)를 돌려 소주천(小周天)을 해도 허무(虛無)는 또 다른 허무(虛無)를 낳았다. 
    대학을 마치고 2년을 놀면서 용돈도 끊겼다. ‘도 닦는’ 책들은 더 이상 볼 것이 없으니 영어로 된 책들을 구해 읽었다. 급기야 친구와 이른바 정신세계(精神世界) 서적을 번역하고 출판사 등록에 나섰다. 오래지 않아 첫 번째 사업은 유산돼 버렸다. 

    수년 만에 아버지와 화해하고 대학원에 들어갔지만 집에선 끝도 없는 밤샘 토론과 논쟁만 계속됐다. 다시 집을 나왔고 두 번째 사업에 나섰다. 명색이 벤처기업이었다. 그러나 돈이 안 되니 사업계획서만 쓰고 한약(韓藥)을 팔았다.  

    마지막에 간 곳은 대개 그러하듯 노가다판이었다. 군대에서 ‘영선반’에서 공구리치고 미장하고 용접도 했지만 사회는 달랐다. 아침이면 몸이 부었고 몇 시간 짐을 진 후 근육이 풀렸다. 정신의 고통을 말해왔지만 육체의 고통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보이지 않는 허무는 그렇게 조금씩 균열이 생겼다. 

    20대 후반에 접어들며 몇 차례 사업은 완전히 망했다. 돌아갈 곳이 없었다. 아침에 북한산에 올라 저녁때 내려왔다. 어딘가 있을 신(神)을 향해 끝없이 외쳤다. “나를 구해 달라”고. “살려 달라”고. 

    3월 초 어느 날 끝에 몰린 나는 십여 년 만에 교회(敎會)를 찾았다. 백수로 또 다시 1년을 보내며 예의 종교적 열정을 가지고 새벽예배로 하루를 열었다. 산을 가는 대신 기도원을 찾았다. 회개와 간구의 기도로 보냈다. 세상의 가련한 자들에 눈감고 협착한 번민에 젖었던 과거가 모두 원수였다. 죄악이었다. 우울(憂鬱)에 빠진 이 땅의 청년을 보면서 느끼는 안타까움은 부끄러운 지난날에 대한 나의 참회 같은 것인지 모른다.  


    <산중(山中)에서 벌어지는 빨치산 추모행사> 


    서른 무렵 기자 생활을 하면서 살아난 연민(憐憫)은 북한을 향했다.
    저 미천한 이들에 대한 느낌은 심장의 가시와 같았다. 저들을 죽이고 가두는 김정일만큼이나 남한의 안락을 누리며 독재를 감싸는 자들에 대해 화가 솟았다. 김대중·노무현 정권 아래 번성한 이른바 친북주의자들은 흥미로운 취재영역이었다. 기자라고 신분을 밝히고 취재한 적도 있지만 적대적 분위기 때문에 청중처럼 드나든 적이 더 많았다. 좌파단체 사무실을 기웃거리다 급히 자리를 피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산중(山中)에서 벌어지는 빨치산이나 간첩들 추모행사는 위험성이 배가된다.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언제든 뛸 수 있도록 신발 끈을 동여 매곤 한다. 예전의 수행(修行) 장소가 취재장소가 되었다. “어디서 오셨느냐?”는 의혹에 찬 질문은 가장 곤혹스럽다. 순박한 웃음을 지으며 “그냥...”이란 말로 둘러댔다. 엉뚱한 명함 서너 장은 지갑에 반드시 챙기고 다녔다.  


    20대 내내 나 하나의 허무로 인한 죽음의 충동은 민족과 조국을 향한 결사적 열정으로 치환됐고 그만큼 열심히 뛰었다. 세상을 향한 냉소, 지긋지긋한 우울, 낙심, 절망과 번민은 죽어가는 북한 동포 앞에, 남한 서민의 애절한 아픔 앞에 철없는 사치였다. 내가 20대들에게 호통 치는 이유는 이 유치한 고민을 즐기는 과거의 나를 향한 독백일 것이다.  


    기자생활은 평범하지 못했다. “애국한다”는 격려보다 경찰과 검찰에 불려간 횟수가 더 많았다. 노무현·김대중 정권 당시 이른바 친북좌파는 나와 같은 류(類)를 필사적으로 괴롭혔다.  


    근무하던 신문사는 재정이 워낙 열악해 월급도 제대로 나오질 못했다. 어린 아들 기저귀 값도 대주지 못할 땐 힘들었다. 서른 무렵 정신적 고뇌는 봄바람처럼 사라져 갔지만 물리적 고통이 끊이질 않았다. 

    1억 원짜리 소송만 두 번을 당했다. 빚지며 살던 나에게 두 번째 소송은 치명타였다. 눈앞이 캄캄했다. 보호해 줄 신문사도 없었다. 잊을만하면 경찰과 검찰이 불렀고 법원에 불려갔다. 이제는 더 이상 할 수 없다고 여겼다. 지금까지 최선을 다했다며 위로도 했었다. 신앙이 평안을 유지해 줬지만 아팠다. 때리니 아픈 건 당연했다. 그러다 우연히 극장에 들렀다. ‘크로씽’이라는 영화가 상영 중이었다.  


    나는 눈물에 익숙지 못하다. 눈물을 보이면 조롱당하는 삼형제 속에서 자랐다. 어린 시절 깨진 무릎 붙잡고 터뜨렸던 울음이 기억 속에 흐릿하다. 크로싱은 호기심 가는 영화도 아니었다. 북한에 관한 이야기, 대충 알고 항상 쓰고 계속 말해 온 것들이었다.  


    장마당에 꽃제비, 변방의 구류장, 몽골의 탈주로까지...다 알고 있던 그곳을 보는데 두 눈은 엉망이 됐다. 감당 못할 눈물에 당혹스러웠다. 낮 시간, 큰 극장에 서너 명 밖에 없다는 핑계로 실컷 울었다. 

    ‘저들을 구하기 위해 여기까지 온 게 아닌가?’ 친북좌익? 누구에 대한 미움이 아니었다.
    ‘죽어가는 동족을 살리고, 갇힌 자를 옥(獄)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처한 자를 간에서 나오게 하리라’는 선(善)한 동기의 사랑이었다. 간절히 간구해왔다. 원치 않는 적(敵)을 만든 나의 글과 말은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주인공 차인표의 대사는 들리지 않았다. 배우의 눈빛에 공명했다. 아들 ‘준이’에 대한 애끓는 부정(父情)은 나의 마음이었다. 

    지금도 수많은 용수(차인표 扮)의 절망은 대륙에서 반복된다. 꽃제비로 떠도는 숱한 준이의 죽음이 끝없이 이어진다. 우리는 침묵할 수 없다. 침묵해서도 안 된다. 그것은 악(惡)에 대한 방관이기에 앞서 악(惡)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포기할 수 없었다. 내면의 허무로 인한 20대의 절망이건 외부의 공격으로 인한 30대의 절망이건 그것은 원수였다. 빛이 아닌 어둠이었다. 다시 새 힘을 얻었다.  


    <자칭 보수정치권도 달가워하지 않는 주장> 


    나의 글과 말은 수많은 ‘적(敵)’들을 만든다. 누구도 좋아하지 않은 얘기, 이른바 좌파(左派)는 물론 기득권에 집착하는 자칭 보수정치권도 달가워하지 않는 게 북한해방과 자유통일의 논리이다.  


    한국 교회 대부분이 이른바 ‘인도적 대북지원’에 천착하면서 기독교 주류(主流)도 기자 같은 부류를 기피해 버린다. 기독교인에 대한 비판은 특히 극렬한 반대를 부른다. 그 동안 간첩(?)의 공갈·협박은 받지 못했어도 목사들의 공갈·협박은 숱하게 받아왔다. 

    그럼에도 이 말을 하고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아직도 갈 길이 멀고 할 일이 많은 탓이다.
    준이의 죽음과 용수의 절망이 북한 땅에 일상처럼 되풀이되는 탓이다.
    북한 땅에 자유를 주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함이다. 고귀한 약속 때문이다.
    7천만 민족을 살리는 일인데 나 하나의 생명은 의미 있는 투자가 아닌가?
    북한구원의 고귀한 꿈을 위해 생명을 바칠 기회가 있음은 정녕 복 받은 일이 아닌가?
    10년의 방황(彷徨)과 10년의 핍박(逼迫)은 성스러운 꿈을 향한 피할 수 없는 통과의례였다.  


    진리는 따르는 자가 있고 정의는 이루는 날이 있다.
    북한정권은 무너진다. 죄 없는 자의 피를 끝도 없이 땅에 쏟은 사악한 세력은 사라질 것이다.
    그것을 북한의 급변사태라 정의하건, 정권교체라 부르건 상관없다.  


    이미 깨지기 시작한 한반도 현상은 김정일 세력의 멸망과 퇴출, 약화를 초래할 것이다.
    남은 것은 한반도 새 판을 짜기 위한 준비(準備)다.
    60년 대한민국이 축적한 지력(知力)과 금력(金力)에 더해 도덕(道德)의 힘을 발휘한다면 혼란 없는 자유통일을 이룰 것이다. 더 안전하고 강력하고 풍요로운 나라의 탄생이다.
    하늘은 지금 새로운 시대의 주역을 찾고 있다.
    청년아. 낙심과 절망과 번민을 넘어 약속의 땅으로 가자.

    <김성욱 /객원논설위원, 리버티헤랄드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