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아버지

김성욱 | 최종편집 2010.09.02 11:11:44

아버지의 葬禮式(장례식)을 마치고 집에 오니 장대비가 쏟아진다. 많은 男子들이 그러하듯 나 역시 孝子가 아니었다.
 
 나는 아버지 고집에 억지로 法大(법대)에 들어갔고 입학 첫날 司法試驗(사법시험) 응시를 강요받았다. 고교시절부터 『서울대 철학과(물론 철학이 무엇을 뜻하는지도 전혀 모른 채)』를 입에 달고 살던 나는 집을 나가든, 法大나 商大에 가 고시를 보든 둘 중의 하나의 선택만 있었다.
 
 「대학에 들어가 다시 원하는 학과에 가리라」는 생각에 아버지 뜻을 따랐지만 입학 이후 彷徨(방황)은 격해졌다. 「고시공부」 핑계로 전국의 고시원을 떠돌며 사법시험은 하루도 제대로 공부한 적이 없었고 應試(응시)도 하지 않았다. 학교를 제대로 다닐 리 없었다. 도서관에 앉아 宗敎(종교)와 哲學(철학) 책만 쌓아놓고 읽었다.
 
 虛無(허무)한 인생의 고뇌로 청춘을 보냈다. 결국엔 窟(굴)까지 뚫으며 修行(수행)에 나섰다. 동기들 대학 졸업 여행 때도 나는 入山수행 중이었다. 졸업을 위해 학점을 때워야 할 때는 연희동 安山 옆 움막을 지었다. 공사로 헐릴 때까지 3개월을 지냈다. 『考試(고시)』를 강요하는 아버지 밑에서 유일한 선택은 이 역겨운 生(생)에서 자유로워지는 것뿐이라며 더욱 더 열심히 道(?)를 닦았다.
 
 대학을 마치고 2년을 놀면서 용돈도 끊겼다. 친구와 이른바 精神世界(정신세계) 서적을 번역하고 출판사 등록에 나섰다. 오래지 않아 첫 번째 사업은 유산돼 버렸다. 수년 만에 아버지와 화해하고 대학원에 들어갔지만 집에선 끝도 없는 밤샘 토론과 논쟁만 계속됐다. 다시 집을 나왔고 두 번째 사업에 나섰다. 명색이 벤처기업이었다. 그러나 돈이 안 되니 사업계획서만 쓰고 韓藥(한약)을 팔았다. 마지막에 간 곳은 대개 그러하듯 노가다 판이었다.
 
 20대 후반에 접어들며 몇 차례 사업은 허무하게 끝이 났다. 돌아갈 곳이 없었다. 아침에 북한산에 올라 저녁때 내려왔다. 세상에 존재한 수많은 종교를 접했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 9개월 동안 육식을 끊기도 했었다. 집 안팎에선 미친놈 취급을 받았다. 아버지와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더욱 더 이른바 수행에 빠졌다. 그러나 氣(기)를 돌려 小周天(소주천)을 해도 虛無(허무)는 또 다른 虛無(허무)를 낳았다. 3월 초 어느 날 완전히 끝에 몰린 나는 십여 년 만에 敎會(교회)를 찾았고 오래지 않아 집에 들어갔다.
 
 대기업 금융사 직원을 거쳐 記者 생활을 했어도 아버지와 관계는 그다지 좋지 못했다. 아무리 감추려 했어도 평범한 記者는 아닌 탓이다. 경찰과 검찰에 수시로 불려 다녔고 1억 원짜리 소송만 두 번을 당했다. 아버지에게 나는 언제나 問題的(문제적) 三男이었고 그 같은 생각은 가시는 날까지 그다지 바뀌지 않았다.
 
 장례식을 치르며 평소 알고 지내던, 또는 알지 못하는 수많은 愛國(애국)인사들이 殯所(빈소)를 찾았다. 어머니 손을 잡고 전해 준 격려와 위로에 감사할 뿐이다. 당신의 아들이 싸워온 價値(가치)가 얼마나 소중한 것임을 전해 준 元老(원로)들 말씀은 저 천에 아버지도 들으셨을 것이다. 10년의 彷徨(방황)과 10년의 逼迫(핍박) 속에 살아 온 問題兒(문제아)가, 이 순수한 이들과 저 고상한 목표에 헌신해 온 것임을 가신 뒤 비로소 보셨을지 모른다. 그리고 아버지가 꿈꿔 온 『憲法(헌법)이 지배하는 대한민국』을 우리들 손으로 이뤄질 수 있음도 느끼셨으리라.
 
 他人과 화합도 못하고 타협도 못했던 固執不通(고집불통) 아버지와 나는 언제나 葛藤(갈등)과 緊張(긴장)의 관계였다. 그러나 아버지는 나에게 훌륭한 憲法(헌법)교사였다. 『憲法(헌법)을 지켜야 나라가 산다』는 말을 초등학교시절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으며 살았다. 『우리가 충성하는 것은 國家(국가)지 政府(정부)가 아니』라며 『대통령도 헌법을 어기면 叛逆(반역)』이라는 말은 記者가 좌파 정권 시절 두려움 없이 싸웠던 혈연적 자양분이었다.
 
 22세에 고시에 붙어 제도권 내에서 비교적 편안히 살아 온 아버지와 진흙탕에서 백병전을 벌여 온 記者의 방식은 달랐지만 아버지의 民主主義(민주주의)와 法治主義(법치주의)에 대한 신념은 언제나 尊敬(존경)의 대상이었다. 다만 아버지는 文人(문인)의 기질로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했고 나는 武人(무인)의 기질로 어떻게 멋지게, 아름답게, 올바르게 죽을 것인가 고민했을 뿐이다. 서로를 인정할 순 없었지만 아버지와 나는 더 좋은 祖國(조국)을 만들기 위한 同志(동지)의 길을 걸었다.
 
 나의 憲法(헌법) 교사이셨고 대한민국을 사랑하셨던 아버지 永眠(영면)하십시오.
 
 * 빈소를 찾아주시어 위로해주시고 격려해주신 애국동지 여러분께 다시 한 번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본사 객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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