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교조, ‘교육 포퓰리즘’의 옷을 벗어야

    교육의 본분은 포퓰리즘에 맞서는 것
       ‘포퓰리즘’(populism)의 반대말은 흔히 ‘엘리트주의’(elitism)로 알려져 있다. 포퓰리즘이 ‘엘리트가 아닌 일반대중’의 입장과 이익을 대변하는 정치행태로 정의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포퓰리즘의 ‘진정한’ 반대말은 ‘책임주의’이다. 역사적 경험에 비추어 볼 때 포퓰리즘의 최대 희생자는 역설적으로 일반대중이다. 인기영합 정책으로 발전을 추동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교육의 본분은 정치적 포퓰리즘을 거부하고 맞서는 것이다. 인기에 영합하지 않아야 국가의 백년대계를 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육은 포퓰리즘의 확산을 막는 ‘보루’여야 한다. 그러나 6.2 교육감 선거를 계기로 역주행하고 있다. 교육이 포퓰리즘과 ‘길항’(拮杭)관계를 유지하기는커녕, ‘포퓰리즘’의 비옥한 토양을 제공하고 있다. 그 중심에는 전교조가 자리 잡고 있다.

       전교조는 7월 진보좌파 성향의 청소년 인권단체 ‘아수나로’와 민주노동당 그리고 교육관련 단체와 함께 ‘학생인권조례제정운동 서울본부’를 결성했다. “폭력과 경쟁, 차별 없이 모든 학생이 마음 편하게 다닐 수 있는 학교”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이는 일반대중이 반길만한 구호로 짜여진 인기에 영합하는 정치적 포퓰리즘의 ‘복사판’이 아닐 수 없다. 마치 경쟁으로 인해 폭력과 차별이 만들어지는 것으로 비춰지고 있다. “경쟁 없이 마음 편하게 다닐 수 있는 학교”를 학생들이 마다할 리 없다. 문제는 그 같은 학교운영으로 “대한민국의 미래를 열 수 있겠는가”하는 것이다. 이글의 목적은 “학업성취도, 교원평가, 학생인권조례”의 3대 교육쟁점을 중심으로 전교조의 ‘교육 포퓰리즘’을 비판하는 데 있다.

    경쟁을 부정하는 전교조
       전교조가 칭하는 ‘일제고사’의 정식 명칭은 ‘국가수준 학업성취도평가’이다. 굳이 ‘일제고사’로 칭한 것은 정식명칭이 길어서만은 아닐 것이다. “모든 학생들에게 일제히 시험을 강제해 모든 학생을 일제히 한 줄로 세우는 시험”이라는 부정적 이미지를 극대화하기 위한 것으로 추측된다. 전교조는 “성적을 기준으로 학생을 한 줄로 세우는 것은 학생들에게 상처를 주는 것이며, 더 나아가 학생들을 ‘서열화’하는 반(反)교육적 처사”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국가수준 학업성취도평가”의 목적은 학생을 일렬로 줄을 세우려는 것이 아니다. 학업성취도를 “보통이상, 기초학력, 기초미달”의 3등급으로 구분할 뿐이다. 학생의 학업성취 정도를 알려줌으로써 자신을 ‘객관화’하라는 교육적 메시지가 담겨 있다. 평가고사의 목표는 학업평가를 통해 지원이 필요한 학생과 학교에 부족한 것을 보충해 줌으로써 학생 간, 학교 간 학력차이를 좁히는 것이다.

       전교조 논리에 따르면, ‘줄 세우기’를 피하려면 학업평가를 하지 말아야 한다. 상처를 줘서 안 된다면 언제까지 학업평가를 미뤄야 하는가? 하지만 ‘경쟁’을 끝까지 피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고학년 들어 처음 맞이하는 경쟁은 ‘충격’ 그 자체일 것이다. 피할 수 없는 것은 담담하게 맞아야 한다. 이를 가르치는 것이 교육이다.

       ‘하이에크’가 일찍이 설파했듯이 경쟁은 일종의 ‘발견과정’이다. 치열한 경쟁을 통해서만이 자신의 소질과 적성을 발견할 수 있다. 경쟁을 억압하고 미루는 것은 학생들로 하여금 진로 탐색의 기회를 갖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이는 학생들이 앞날을 탐색하지 못하도록 ‘무지의 장막(veil of ignorance)’을 치는 것이다.

       전교조는 학력평가에 대한 ‘견강부회’식 반대논리도 모자라, 학생과 학부모에게 ‘학업성취도평가’를 강제할 것이 아니라 ‘선택권’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체험학습’과 ‘대체수업’을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선택은 ‘동일한 범주’의 대안들 간의 취사(取捨)를 의미한다. 그러나 평가고사와 체험학습과 대체수업이 동일한 범주의 선택일 수 없기 때문에, 전교조의 선택권은 ‘범주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전교조의 학업성취도 평가반대의 기저에는 ‘불편한 진실’이 숨어 있다. 학업성취도 평가를 허용하면 학교 간 경쟁이 촉발되고, 그렇게 되면 교원평가를 피할 수 없을 것이라는 우려가 그것이다. 교원평가의 취지는 교육내용과 교육방법에 대한 ‘자기진단’이다. 자신을 ‘거울’에 비춰보는 되먹임(feed back)이다. 오히려 초·중등 교사의 전문성을 강화하여 대학교원 수준으로 격상하는 제도이다.

       교육에는 막대한 국가재정이 투입된다. 교육예산은 국방예산과 SOC예산보다도 유의하게 많다. 교육에 이렇게 많은 재정을 투입하는 것은, 교육경쟁력이 우리의 미래이기 때문이다. 교육투자의 성과는 ‘학업성취도’와 ‘교원평가’로 측정된다. 국민의 혈세가 제대로 쓰여졌는지를 점검하는 데 전교조가 걸림돌이 돼서는 안 된다.

    학생의 인권은 ‘사각지대’였는가?
       전교조는 학생인권조례 제정을 통해 학생들에게 “차별과 폭력으로부터의 자유, 사생활의 자유, 자치참여의 권리”를 보장하겠다고 한다. 그러나 헌법에서 보장하는 보편적 가치로서의 ‘인권’을 조례로 정하는 것이 법체계상 타당한 것인지 의문이 제기된다. 논리적으로도 학생의 인권이 인간이 향유하는 ‘보편적 인권’과 다를 수는 없다.

       학생인권조례를 부득이 제정해야 한다면, 학생 인권이 교육현장에서 심각하게 침해되고 있다는 객관적 논거가 제시돼야 한다. 학생의 인권이 침해되었다면, ‘학생인권조례’가 불비(不備) 되어서라기보다는 교육청 등 교육관리 당국이 학교나 교사 등의 비인권적 행위나 조치를 제대로 감독하지 못한 ‘감독소홀’이 더 중요한 귀책사유일 것이다.

       조례안(案)에는 “두발자유, 체벌 금지, 교복자율화”의 범위를 넘는, ‘사상의 자유, 집회 및 결사의 자유’를 허용하는 파격적인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학생에게 최소한 요구되는 규율을 해체하고 교내에서의 정치자유를 허용하겠다는 것이다. 만일 후자의 논리가 맞다면, 학생들은 당장 ‘피선거권과 투표권’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미성년자 개념도 사라져야 한다. 인권조례는 민주시민으로서의 책임·권리·규율을 배우지 못하고 인권에 대한 편향적인 사고를 갖게 할 수 있다.

    ‘교육 포퓰리즘’의 옷을 벗어야
       전교조는 금선(禁線)을 넘고 있다. 자기계발에 대한 열정을 포기한 채 철밥통의 집단이기주의 행태를 보이고 있다. 학업성취도평가를 논리적 근거 없이 반대하는 것도 사실은 집단의 이익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학교 공동체’의 최소한의 규칙과 규범을 속박과 굴레로 왜곡시키고 수학(受學)과정의 학생들에게 해방구를 열어주려는듯한 행태마저 보이고 있다. ‘교육 포퓰리즘’은 ‘이념과잉과 정치과잉’에서 비롯되고 있다. 전교조는 숭고한 교육의 장(場)으로 돌아와야 한다. 그 길이 학생과 학부모 그리고 사회로부터 다시 신뢰를 회복하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