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반도 유사시 對中-對北 '선제공격'의 필요성 
    클라크 전 UN군 총사령관이 보는 중공의 한국전쟁 개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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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크 W 클라크 대장.


     
    마크 웨인 클라크(Mark W. Clark, 1896년 5월1일~1984년 8월17일) 장군은 6.25전쟁당시 UN군 측 대표로 휴전협정에 서명한 장본인이다.

    반공(反共)휴머니스트인 장군은 자신의 회고록인 ‘다뉴브 강에서 압록강까지’(From the Danube to the Yalu)에서 6.25전쟁당시 남북통일을 앞두고 압록강을 건넌 중공군에 대해 미국이 강력한 군사력을 동원해 저지했어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장군은 “미국이 당시 전쟁에서 승리할 결의만 되어 있었다면 그 승리를 획득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중국 본토에 대한 폭격의 위협만 했더라도 휴전 협정 조인 시의 정세보다는 유리한 정세가 극동에 조성되었으리라고 본다”고 언급했다.

    그는 이어 “휴전협정은 대량학살만을 중지시킨 것”이라며 “앞으로 더 값비싼 피의 희생을 우리 국민이 바치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에 나의 마음은 한량없이 불안하기만 했다”고 적고 있다.

    클라크 장군의 이 같은 지적은 이후 현실로 드러났다. 다만 그 피해자는 미국 국민도, 중국 국민도, 소련의 국민도 아닌 우리 동포들의 희생이었다. 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 기간 동안 북한에서는 3백만 명에 달하는 무고한 주민들이 기아로 희생됐으며, 지금 이 시각에도 20~30만 명에 달하는 정치범들이 수용소에 갇혀 고통의 세월을 보내고 있다.

    김정일의 건강이상설이 국내외 언론을 통해 잇따라 보도되고 있는 가운데 상당수의 국내 학자들을 비롯, 고위급 탈북자들 사이에서는 ‘중국식 개혁·개방’이 회자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중국 외교 관계자들과 정치인들이 2002년 경 북한 정권 붕괴가 중국의 국익에 악영향을 끼칠 것이라는 판단 하에 북한의 급변사태를 막는 동시에 이를 제어하는 내부 방침을 정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중국의 한반도 문제 개입은 결국 북한 내 친중 정권의 수립으로 이어질 것이다. 북한 내 친중 괴뢰 정권의 성립은 조선 노동당 독재체제의 연장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북한 정치범 수용소(30만 명 수용상태)도 해체되지 않을 것이다.

    애국세력은 한반도의 미래를 중국에게 맡겨서는 안 된다. 통일은 우리 자신의 ‘비전’과 ‘의지’에 달려 있다. 우리가 자유 우방 동맹국들과 조금만 더 전략적 지혜를 발휘하면 예상외로 빠른 시간 내에 우리 헌법에 입각한 한반도의 통일(자유통일)을 달성할 수 있다.

    솔제니친은 “공산주의자들은 벽에 부딪칠 때만 후퇴한다”고 했다. 김정일의 유고 이후 중국의 대(對)한반도 문제 개입은 중국식 공산주의의 확산에 지나지 않는다.

    대한민국이 중국 공산당 세력의 개입을 차단하는 ‘자유의 벽’을 만들지 않으면 중국의 세력 확장은 북한 지역에서 끝나지 않고 한반도 전체로 이어질 것이다. 애국세력이 중국 공산당에 반대하고 저항하는 행위는 향후 자유통일 과정에서 인도적인 일이 될 것이다.

    비(非)인도적인 중국식 공산주의를 거부하고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써 우리는 인간답게 존재할 수 있다. 이는 바로 선(善)과 악(惡)의 관념을 망각시키려고 책동하는 공산주의에 대한 우리 영혼의 저항이다. 

    [관련자료] 클라크 전 UN군 총사령관이 보는 중공의 한국전쟁 개입

    《한국전에 참가해 포로가 된 중공 포로들의 4분의 3이 송환 결사반대를 했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중공 포로들의 대부분이 고향에 돌아가는 것보다는 차라리 객지에서 죽겠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들이 과연 미국인을 증오한 지원자들이란 말인가?

    그러나 중공의 권력층은 이러한 허구를 눈 한 번 깜짝하지 않고 끝까지 자기네들이 옳다고 우겨댔다. 중공의 팽덕회가 한국 휴전 협정에 서명했을 때 그 당시 그의 실제적인 직책은 중공 인민 혁명군 군사회의 부장이었다. 그런데도 휴전 협정에는 중국 인민군 지원군 사령원이라는 직책으로 서명했다.

    중국인들이 한국전에 개입한 것은 그들 수뇌들의 선전과 같이 ‘미국인에 대한 증오’에서 나온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것은 표면적인 구실이었고, 실질적인 이유는 내부적인 데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예전부터 중국의 통치자들은 방대한 중국 천하를 다스리는 기본 정책을 ‘백성의 마음을 어떻게 움직이느냐’에 두어왔다.

    그러나 그들은 백성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 민주 방식을 택한 것이 아니라 병법을 활용했던 것이다. 중국 통치자들에게는 전쟁이야말로 방대한 중국 천하를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 전쟁에는 또한 일거양득의 놀랄만한 효과가 있었다.

    하나는 백성의 마음을 자력처럼 사로잡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전쟁을 빙자해 통치자들의 권력을 계속 유지할 수 있게 하는 점이었다. 중공 지도층에게는 한국전쟁이 전개되던 바로 그때 일거양득할 수 있는 그러한 전쟁이 필요했던 시기다.

    모택동 그룹은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불과 1년 전에 중국 본토의 정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백성의 마음을 얻어 일단 정권을 장악했지만 그들의 권력 기반은 여러 가지 면에서 허약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한국전의 개입을 통해서 백성의 마음도 얻고, 정권의 안정을 계속 유지하는 이중적인 목적을 노렸다.

    그것은 바로 일거양득할 수 있었던 병법의 지혜였고, 그 지혜를 모택동 그룹은 마음껏 활용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중국을 누볐던 그 이중적인 목적을 달성하려는 주인공은 과연 누구였던가? 모택동 그룹... 그들은 주은래, 팽덕회, 유소기 등 공산 골수분자들이었다.

    미국과 자유세계는 당시 이 점을 꿰뚫고 간파했어야 했다. 그리고 어떤 결정적인 단안을 내려야 했다. 그 시기는 바로 중공이 한국전에 본격적으로 개입한 1950년 11월이었다. 자유세계와 미국은 이 때 결판을 내야 했던 것이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한국군과 UN군은 도처에서 격파당하고, 진격을 저지당했으며, 학살당했다.

    한반도의 매서운 찬바람을 뚫고 들려오는 중공 병사들의 날카로운 피리 소리는 우리의 귀를 너무나 자극시켰다. 그러나 그 소리도 얼마 안가서 익숙해져 버렸다. 자유세계와 미국은 바로 이 때 스스로 다음과 같은 자문을 했어야만 했다.

    한국 땅에서 우리 군대와 중공군이 피나는 전쟁을 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중공 정권과 중공 자체가 우리와의 전쟁을 시인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인가? 이런 자문에 대한 대답 여하에서 우리의 군사적 승패의 방향이나 가능성도 달라졌을 것이다.

    물론 이런 대답이 순전히 군사적인 면에만 국한해서 결정할 성질의 것은 아니라는 것도 나는 잘 안다. 그것을 위해서는 우리 우방들의 견해도 참작해야 했다. 또 미국의 장래와도 관련시켜 종합적인 판단이 요구되는 정치적 요소를 내포하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적의 무서운 위협, 그 위협을 받고 있는 일선 군대 사령관의 입장은 다르다.

    자기 휘하의 장병들이 온갖 수단을 다하는 적의 공격을 받고 있을 때, 사령관은 여하한 일이 있더라도 적을 타도하고 박살내고야 말겠다는 결의로 가득 찬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군사 전략 면에서도 그랬다.

    내가 중공군의 한국전 개입 초기에 현지 사령관 이었다 하더라도 침략자들의 군사적인 후방 기지로 되어 있던 만주와 중국 본토 내에 있는 군용 비행장이나 기타 군사 시설 및 병참 기지의 폭격을 응당 외쳤을 것이다.

    나의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우리가 중국 본토의 군사 시설을 공격했다 하더라도 세계 대전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설사 전화(戰火)가 세계적으로 확대될 위험이 있다 하더라도 만약 중공군이 즉시 철수하지 않으면 중공은 우리와 정식 교전 상태에 있다고 선언하고, 그 소재가 어디 있건 간에 중공군의 가장 중요한 군사적 시설에 대해 가차 없이 공격을 가하겠다는 것을 세계에 공언하지 않은 워싱턴 당국의 처사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당시 UN군 사령관이었던 맥아더 원수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을 것이다. 중공군이 조직적인 정규 전쟁의 형태를 띠고 미국 청년들을 죽이고 있는 현장을 묵인했다는 것, 그리고 이들 미국 청년들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전력을 경주하지 않았다는 것은 도대체 이해가 안가는 처사였다. UN군 사령관직을 맡게 된 후에도 이러한 나의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물론 우방국들의 의견과 제3차 세계 대전이 일어날 위험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을 내가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러나 3차 세계 대전은 한국전에서 강경책을 쓴 데서 온 다기 보다는 연약한 정책을 쓰기 때문에 올 가능성이 많다고 생각하는 것은 나만의 개인적인 생각이었을까?

    나는 한국전에서 승리를 얻기 위해 희생을 지불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미국인의 생명을 구하는 것이라고 확신했다. 살고자 하는 자는 죽을 것이고, 죽음을 각오한 사람은 결국 산다는 교훈이 이때처럼 적절했던 경험은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공산 중국이 우리와 정식으로 전쟁을 하고 있지 않다는 허구적인 주장을 묵과해서는 결코 안 되었다. 만약 그런 허구적인 주장을 묵인하면 그들은 군사력을 증강하는 한편 우리와의 협상과정에서 더욱더 오만해질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결국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이러한 나의 우려는 현실로 입증됐다. 중공은 그 막대한 대군을 한국전에 투입했으나 전투기 및 대포의 지원은 형편없었다. 중공군은 전쟁에서 육탄전에 의지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중략)

    이런 사실에 비추어 우리는 너무나 어리석었다. 한국전에서 미군과 연합군을 향해 공격을 하고 있는 악당들의 군사 기지에 대해서는 폭격을 가하지 못하도록 스스로 제한을 가하고 있었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한국전에 불개입했다는 중공의 엉터리 같은 주장을 합리화시켜주는 결과 밖에 되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왜 그랬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군사적인 측면에서도 우리가 그렇게 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현지 사령관이 된 후 모든 정세를 검토한 결과 이런 결론을 내렸다.

    만약 우리가 전쟁에서 승리할 결의만 되어 있었다면 그 승리를 획득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중국 본토에 대한 폭격의 위협만 했더라도 휴전 협정 조인 시의 정세 보다는 유리한 정세가 극동(極東)에 조성되었으리라고 본다.

    그와 동시에 그런 위협을 보다 효과적으로 과시하기 위해서는 육·해·공군의 막강한 군사력을 극동(極東) 지역에 집결시켜야 했다. 이것은 곧 적의 태도 여하에 따라서 언제든지 가공할 파괴력을 가진 전투력을 즉시 동원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과시, 적에게 더욱 심리적인 압박을 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중략)

    그런데... 그 당시 하나의 문제가 있었다. 미국 국민들이 한국 전쟁을 잘못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한국 전쟁 수행 방식에 대해 오해를 갖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전쟁에 미국이 그렇게 장기간 개입해야 되느냐의 원천적인 문제에 대해 의문을 갖고 있었다.

    더욱 그런 끝없는 전쟁에서 미국의 청년들이 피를 흘려야 할 이유가 있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그런 미국인들의 불만을 극동에 있었을 때 이미 느꼈으며, 본국으로 돌아 온 후에 더욱 실감할 수 있었다. 한국 전쟁이 과연 미국의 이익과 안전의 증대에 기여하는 전쟁인가 하는 의문, 이 의문이야말로 미국인들의 뇌리에 이미 싹터 있었다... (중략)

    나는 한국전쟁의 휴전 협정에 조인한 장본인의 한 사람이다. 그런 입장에 있었던 나로서는 해야 할 일도 많고, 하고 싶은 말도 많다. 그러나 단 한 가지 나는 무서운 마음을 가지고 휴전 협정에 서명했다는 것을 명백히 해 두고 싶다.

    안개 속의 미래… 그 미래를 생각할 때 무서웠다. 휴전호(號)를 지휘해 항구까지 입항시키기는 했으나 그 후에 올 사태에 대해서는 나 자신의 특별한 대책이 없었다. 다만 한 가지 자위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당분간은 한국전선에 살육전이 멈추었다는 것 뿐이었다.

    아니 대량 학살만 중지됐을 뿐이다. 공산 측의 생리로 보아 휴전을 조문 그대로 지킬 리가 없다. 한국에서 공산주의를 결정적으로 패배시키지 못했다는 사실... 앞으로 더 값비싼 피의 희생을 우리 국민이 바치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에 나의 마음은 한량없이 불안하기만 했다.》

    (출처: 클라크 前 UN군 총사령관 회고록(제목: 「From the Danube to the Yalu」) 발췌)
    정리/김필재 기자 (spooner1@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