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I

    올해는 한일합방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암울했던 일제시대에 어떻게 하는 것이 독립을 위한 최선의 길인가에 대한 독립운동의 방략을 두고 해외의 망명애국지사들 간에는 뜨거운 논쟁과 헤게모니 투쟁이 벌어졌다.

    그 과정에서 견해 차이로 인해 인간관계가 악화되어 다시는 만나기를 싫어할 만큼 적대세력이 되었던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이런 독립운동의 방략을 두고 벌어진 대립은 독립운동가들의 지역주의와 결합되어 갈등은 더욱 격화되었으며, 일제의 패망 시까지 근본적으로 해소되지 못하고 분열된 채 해방을 맞이하였다.

    이런 독립운동의 방략을 두고 벌어진 파벌적 대립과 갈등과 분열상은 독립운동의 힘을 소진시켰을 뿐만 아니라, 미국을 위시한 연합국에게 임정의 불승인정책을 추진하는 좋은 구실을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한국인의 독립운동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심어주어서 독립운동에 많은 지장을 초래하기도 했다.

    독립운동의 방략을 놓고 대표적인 인물과 주의주장이 등장하는 데, 크게 세 가지 유형으로 나뉠 수 있다.

    첫 번째로 흥사단을 조직한 안창호가 주창한 ‘務實力行論’으로써 한국인들은 독립의 준비가 되지 않았으니 교육과 계몽을 통해서 힘을 축적하여 일제와 싸울 준비를 하고 조직을 하고 힘을 기르자는 것이다.

    두 번째로 박용만, 신채호와 이동휘 등이 거론한 ‘무장투쟁론’으로, 군사력 등 무력을 갖추어서 한 사람의 일본인에게라도 결연히 맞서 처절하게 싸워야한다는 일종의 폭력혁명론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 번째로 이승만(1875-1965)의 ‘외교론’으로 한국인들은 군사적으로 막강한 일본군대에 대항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고, 무장투쟁이나 테러행위는 일본군의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켜서 더욱 심각한 한국인의 인적 물적 인명피해를 발생시키기에 조심스럽게 접근하지 않으면 오히려 손실이 더 크다는 주장이다. 힘을 기르면서 미국을 중심으로 한 연합국에서 상해임정 등의 독립운동을 외교적으로 승인받은 연후에, 원조를 받아서 더 효과적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이승만에 대해 전해오는 인식을 말하자면 이승만은 외교의 천재이지만 너무 미국에 의존했으며, 자신의 외교론에 너무 집착하고 무장투쟁에 관해서는 무관심했고 기여한 바도 없으며, 무장투쟁에 대해서 별다른 지식이 부족했다고 지적한다. 심지어 무장투쟁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 독립운동가들과 수많은 마찰과 알력이 있었다는 것으로 알려져 왔다.

    이런 인식은 해방이후 이승만의 연구는 처음부터 반이승만 경향을 가진 인물들에 의해 주도되었던 점에서 그 영향력이 컸다.
    실제로, 해외에서는 김원용, 이정식, 서대숙을 중심으로 해서 한국에서는 언론인 송건호와 재야사학자 이이화가 주도했으며, 대체적으로 이승만의 라이벌인 박용만과 안창호를 옹호하는 입장에서 이승만의 외교론을 비판적 시각에서 분석하는 것이 대세를 이루었다.

    이 글의 의도는 이승만이 외교론에 몰두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역사적 배경을 통해 재인식하고,
    이승만에 대한 이러한 스테레오 타입을 교정할 목적으로 서술되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해방 전까지 독립운동의 반생애에 걸쳐서 무장투쟁에 대해 관심이 없었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러므로 이 글은 이승만이 무장투쟁에 대한 인식의 변천과정을 추적한 글이 될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바람직한 독립운동의 방략이란 무엇인가를 재음미해보는 것이 될 것이다.


    II

    반일테러행위나 무력투쟁에 대한 이승만의 不好感情은 미국망명 초기부터 일찍 나타났다.

    첫 번째 예는 1908년 대동보국회 소속 장인환과 전명운이 샌프란시스코에서 동경주재 미국공사로 일했던 친일파 미국인 스티븐스(D.W. Stevens)를 총격 사살하는 테러사건이 벌어졌던 것에 대한 이승만의 반응이다. 스티븐스는 일본에 의해 외교고문이 되어 한국의 외교권 찬탈에 기여한 인물이다.
    미주교포는 이승만에게 통역을 부탁했으나, 이승만은 테러행위에 대해서는 협조할 수 없다하여 거절했다고 하여 재미교포사회에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이것은 이승만의 폭력행위에 대해 인식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KBS 한국사전(傳) 이승만 2부작은, 이승만이 (일본의 조선 침략을 두둔하는 미국인 스티븐스를 저격한) 장인환 의사의 재판에 통역을 맡아 달라는 제안을 거절했다고 방영했다. 그 이유는 장 의사의 방법이 폭력적이라는 이유에서였다는 것이다. 그는 안중근과 윤봉길의 거사 등에도 거부감을 토로했다는 점이 방영되었다.

    이 사건이 벌어졌을 때, 이승만은 막 조지 워싱턴 대학에서 학사학위를 마치고, 하버드대학의 대학원에 입학했을 때였다. 본격적인 독립운동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단지 장차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 학문의 길을 매진해야한다는 결의를 다질 때였다. 이승만의 자서전 속에서 ‘살해사건’이란 용어를 사용하면서 미국의 여론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등 별로 그 행위에 대해서 극찬하지 않는 그의 심정을 읽어본다.

    "그해 겨울에 2명의 한국인이 샌프란시스코에서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의 친구인 스티븐스(Stevens)를 세인트 프랜시스(St. Francis) 호텔 앞에서 사살했고, 바로 그전에 한국의 애국지사 안중근이 시베리아의 하얼빈에서 일본의 거물 정치가인 이토오 히로부미(伊藤博文)을 사살했다. 스티븐즈는 오버린 대학(Oberlin College)의 졸업생으로 미국에서는 퍽 영향력이 강한 사람이었다.…

    붙잡힌 청년은 형무소에서 동정적인 대우를 받았고, 내 기억에는 10년형을 받았다.
    하얼빈과 샌프란시스코에서 있은 이 두 살해사건은 일본의 선전기관들이 한국 사람들을 흉도들이고 최악의 악당들이라고 묘사하는데 대대적으로 이용되었다. 나는 그때 캘리포니아에 갈 일이 있었는데 일본의 선전에 영향을 받은 모든 사람들은 학교에서나 교회에서나 한국 사람을 대하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두 번째로 무력항쟁에 대한 이승만의 기피는 박용만과의 갈등에서 잘 나타나있다.

    이승만은 옥중동지였던 박용만의 지원으로 미국으로 떠나게 되었는데, 박용만은 1913년 이승만을 초청한 운동의 발기자 중 일원이었다. 박용만은 네브라스카 주립대학을 졸업하고 하와이에 있는 이승만과 합류했다.
    그러나 도미 후 박용만과의 독립운동의 방략에 대한 견해 차이는 날이 갈수록 심해졌으며, 라이벌 집단을 형성했다.
    박용만은 군사학교를, 이승만은 언어학교를 세우려고 했기 때문이다.
    박은 직접 행동을 주장했고, 이승만은 외교를 주창했다. 박용만은 애국지사였으나, “한국의 독립성취는 일본에 대한 폭력혁명을 통하지 않고서는 달성될 수 없다”는 신념을 고수했다.

    이와 달리 이승만은 그와 같은 혁명의 가능성은 성립되기 어려우며 “한국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서구열강의 외교적인 지지와 미국인의 동정을 살 수 있도록 애쓰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하여 일찍부터 이승만은 독립운동에서 외교를 중시하였다. 이것이 10년대에서 20-30년을 거쳐서 태평양전쟁 발발직전까지 이승만이 간직했던 독립운동 방책에 대한 변함없는 인식이었다.

    1915년 박용만과 갈등이 심했던 이승만의 생각은 이렇다.

    “이 시점에서 한인들의 가장 중요한 과업은 동포2세들에게 기독교문명의 기초가 되는 진리를 가르쳐 국가의 장래를 담당할 지도자를 양성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곧 그의 ‘길게 준비하는’ 독립운동 방략이기도 했다. 그는 실력있는 인재를 양성함으로써 미국을 비롯한 기독교국가들로부터 한인들이 자치능력을 양성함으로써 미국을 비롯한 기독교국가들로부터 한인들이 자치능력이 있다는 것을 인정받고, 그들의 지지와 협조를 얻어서, 독립을 달성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승만이 볼 때에 국민회가 연무부를 두고 동포 장정들에게 군사훈련을 실시하고, 특히 박용만이 온 다음에는 그의 무장투쟁론에 동조하여 막대한 비용을 들여 산넘어 병학교를 지원하는 것은 ‘모래 위에 집짓는 일’처럼 여겨졌던 것이다.

    1915년 6월 16일자로 호놀룰루의 <애드버타이저>지에 보낸 공개서신에서
    “나는 한국이나 하와이에서 혁명을 시작해 보려는 생각은 꿈에도 해본 적이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면서 박용만의 방식에 대해서는 거리를 두었다.
    그해 6월 26일자의 <스타불리튼>지에는 이승만 박사와의 인터뷰 기사가 실렸는데, 이승만의 정책은 “조국의 독립 쟁취를 지원하되 어떤 종류의 것이라도 무력혁명으로써 달성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승만은 미 대통령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장차 언젠가는 한번은 어떤 방법으로라도 한국을 위하여 큰 도움이 되어 줄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윌슨에게 이승만 자신과 한국민들은 오해를 받는 행동을 해서는 안 되었던 것이다.

    이승만은 3.1만세운동‘에서 평화적 시위운동을 지지하였다.
    학자들은 3.1운동의 평화적 시위에 대한 평가에서 견해가 크게 벌어지지만, 분명한 것은 단기적으로 볼 때, 3.1운동은 일제에 의한 대규모의 한국인 희생과 학살을 가져왔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상해임정의 출현과 더불어 독립운동의 기폭제가 되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일본은 서서히 국제무대에서 외교적으로 고립되기 시작했다.

    1차대전의 종결을 기점으로 파리강화회의에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전세계에 메아리쳤을 때,
    박용만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편승하여 국제정세가 자유를 쟁취하려는 식민지 압박민족에게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기 때문에 한국민의 결의를 극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국내의 무장봉기가 절실히 요청된다고 주장했다. 즉 박용만은 우드로 윌슨의 14개조 원칙에 동조하는 자유민주주의 정치가들의 성원을 확보하면 아무리 일본의 세력이 막강하더라도 이러한 봉기를 꺾기 어려울 것이라고 믿었다.

    이에 대해 이승만은 문제의 해결이 유혈의 봉기로써 이루어질 수 없다는 점을 들어 항변하였다.
    전쟁에 지친 연합국들이 과연 한국인을 도울 정신적 물질적 여력이 있겠는가?
    결국 이승만은 평화적으로 대대적인 시위운동으로 전개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승만은 박용만의 무장봉기로 인한 폭력혁명론이 시기상조이면서도 무모했다고 판단했지만, 제3세계나 식민지대중을 해방시킬 수 있는 기폭제였던 민족자결주의를 선언한 우드로 윌슨에 대한 이승만의 순진한 기대감은 또한 국제정치의 냉혹함을 덜 깨우친 결과로 나타난 과오도 있었다.

    1919년 7월 5일, 이승만이 임시정부에 보낸 장문의 편지에서는 투쟁의 기본원리가 제시되고 있다.
    “우리의 노력은 앞으로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다소를 불문하고 미국에 집중되어야 할 것이다.”

    이승만은 미국역사를 연구한 결과, 미국의 역사가 자유를 얻기 위한 과정임을 간파하고 언젠가는 미국민들이 한국인들의 대의명분과 독립투쟁에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굳게 간직하였다.

    그러나 1921-22년에 열린 워싱턴 군축회의에서 미국을 위시한 열강들이 한국독립에 대한 무관심과 일본문제를 단지 세력균형의 차원에서 이해하는 점에 깊이 실망한 이승만은 강대국위주의 현실권력정치에 큰 실망을 가지게 되었다.
    미국 내에서 이승만의 인식에 동조세력이 형성되게 된 것은 30년대 초부터 일본의 만주침략이 본격화한 이후부터였다.
     
       
    III 

    1919년 3.1만세운동이 무저항주의로 인해 참담한 실패로 끝나고 기대했던 연합국들의 한국을 비롯한 제3세계의 독립문제에 대한 지원은커녕 오히려 냉담한 반응을 보이자, 한국의 독립운동가들 간에서도 자정의 목소리가 커지는 한편, 독립운동의 방책에 대해서 본격적인 논의가 시작되었고, 이에 따라서 독립운동을 놓고 각 독립운동 지도자 간의 노선투쟁과 파벌싸움은 더욱 심화되었다. 여러 갈래의 방책이 논의되었지만, 중국의 임정에서는 독립운동의 방책으로 무력항쟁과 외교의 두 방안으로 독립운동을 추진하는 전략이 수립되었다.

    1921년 이승만의 상해 방문 시, 임정각료 사이에는 독립운동의 방법론을 둘러싸고 강경론과 온건론이 대립했다.
    강경파들은 ‘의병단’ 조직과 국내 진입, 소련과의 연계, 중국 내 배일정당과의 제휴 등을 주장했다.
    이에 대하여 이승만은 소규모 게릴라전은 국내 동포들에 대한 일제의 탄압을 가중시키며, 공산당의 원조를 받아 독립을 성취하려는 것은 조국을 ‘공산주의 국가의 노예’로 만들자는 것이라며 반대했다.

    무장투쟁론을 주장한 국무총리 이동휘는 이승만과의 노선투쟁을 겪었고 결국 사임했다.

      1925년 상해임정이 이승만을 탄핵했을 때, 그 사유 중에서 거론한 내정 실책의 7가지가 있다. 그 중에서 외교의 실패를 논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원래 외교라는 것은 외국과 교섭하여 자국의 이익을 도모하려는 것이다. 이런 목적에 비추어 볼 때, 우리와 같은 처지에 놓인 중국과 약소민족, 그리고 침략적 자본주의 및 제국주의를 적으로 하는 소련과 제3국제당〔코민테른〕이 일차적인 외교 대상이 되었어야 마땅하다. 태평양상의 이해와 중국 대륙의 이권을 놓고 일본과 다투는 미국ㆍ영국ㆍ프랑스 등 서방 열강도 있지만, 그들은 어디까지나 제2위에 속한다. 그런데 이승만은 소련은 赤色이라 위험하니 不可近이고 중국 등은 약자라 無勢하니 不可交라 하여 오직 미국만을 하늘같이 신뢰했다. 그러나 미국이 우리 민족운동에 대하여 하등의 원조를 주었다는 것을 아직 見聞치 못했다.”

    이승만은 임정의 탄핵소동에도 개의치 않고 사태를 관망하면서 기회를 기다리는 듯한 태도를 취했다. 그것은 동지회를 확대, 강화하고 국내 민족운동세력과의 연계를 도모하는 일이었다.
    이때 이승만은 하와이에서 동지식산회사의 설립과 동지촌 건설 등 ‘경제적 실력양성’에 주력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아직은 맹렬하게 독립운동을 할 시기가 아니라는 것이 이승만의 판단이었다.

    이승만이 무장테러에 대한 반대의 입장을 고수했지만, 일본과 한반도의 강압적인 탄압행위로 인해 무장테러의 당위성이 힘을 얻어가고 있었다.

    1923년 동경대지진의 결과 수천 명의 무고한 한국인들이 참살되고 십만 명의 재일 한국인의 재산이 약탈되었고, 1929년의 국내에서 일본 관리에 의한 한국인 소녀 학대사건, 1930년 북한지역의 봉기사건 등이 발생하여 한국인의 일본 통치에 대한 저항이 극에 달했다.

    1932년 1월, 이봉창열사가 천황을 암살하려 했으나 미수에 그쳤다.
    또 1932년 4월 29일, 중국 상해에서 만주침략의 성공을 축하하기 위한 군대의 개선행진 사열 시에 윤봉길 의사의 폭탄테러 감행으로 일본사령관 시라가와 대장은 사망, 후일 군국주의 외무대신 시게미쓰(重光)은 한쪽 다리를 잃었고, 노무라(野村) 제독은 한쪽 눈을 실명했다.

    “이런 맹목적인 거사로는 도저히 한국의 독립이 이루어지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일본인들에게 강력한 한국인 탄압의 구실만을 조장케 될 뿐이라는 것”을 설득하려고 ‘비밀의 사명’을 상해로 전달할 계획을 세웠다. 여기서 말하는 비밀의 사명이란 이와 같은 테러식의 전술을 포기하도록 종용하는 비밀지시였다. 이승만의 무력투쟁에 대한 포기 종용에도 불구하고, 파괴선동과 유격전술을 해가 갈수록 증가되었다.


    IV
      
    1941년 12월 7일, 새벽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폭격하자 이승만은 중경임정에게 조속히 대일선전포고문을 채택하라는 전문을 보냈다.
    이렇게 함으로써 연합국의 일원으로 전쟁에 참전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진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한국정부에서 발포한 대일선전 포고문은 미국무부 관리들에 의해 무시를 당했다. 미국의 관리들은 일본을 자극하면 일본 내의 미국인들의 안전문제가 우려됐고, 일본과의 외교문제가 정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본의 진주만 폭격이후 이승만은 임시정부에 대한 승인을 미 국무부에 요청했는데 미국 관리는 반대의사를 표명했다. 그 이유는 미국이 “일본과 전쟁을 하고 있는 상태라도 적어도 일본의 對韓主張에 관한 한 양국(미일)은 ‘우호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식의 논리였다.
    후일 이런 전쟁초기의 ‘일본자극불가론’의 논리는 전쟁이 종반에 가까워지면서 태평양전쟁에서 중국이 아니라 소련의 지원을 얻기 위하여 ‘소련자극불가론’으로 전환하게 된다.
    그리하여 전시에 미국이 임시정부에 대한 승인은 완전히 물 건너가게 된다.

    1942년 2월 2일, 이승만은 미 국무부를 방문하여 국무장관 헐과 국무부의 실력자 앨저 히스와 면담하였다. 이승만 박사는 한국인이 일본을 패망시킬 수 있는 최선의 방도를 설명하고 동시에 임시정부에 대한 승인을 요구하면서 경제원조를 해주면 한국인들이 연합국 지도하에 일원이 되어서 사보타지나 게릴라 활동에서 중요한 역량을 발휘할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히스는 “임시정부 승인에 대해서는 미국이 아무런 대책을 세울 수 없다”고 선언하고 “소련이 동아시아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으므로 소련의 의중을 무시할 수 없다“고 부언했다.
    이 당시 이승만은 히스가 소련의 첩자로서 이익을 위하여 봉사하고 있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하고, 이 청년 히스의 정치적 판단력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자리를 물러섰다.

    미 국무부에 대한 이승만과의 투쟁은 이 글에서 주요 논의 대상이 아니기에 장황하게 언급할 수 없는데, 분명한 사실은 임시정부의 승인에 반대하거나 한국의 조기독립에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 인사들이 국무부의 핵심인사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는 점이다.

    국무부에서는 임시정부 불승인 정책을 고수했지만, 대일전쟁에 한인무장조직을 활용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전쟁 초기부터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러므로 미 군부와 정보기관에서는 이승만에게 호의적으로 반응하였다.

    그 이유는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모든 인적 물적 자원을 투입해야할 필요성에 직면하자 대륙방면에서 일본 본토와 그들의 점령지역에 접근하고자 할 때 한반도가 갖는 전략적 중요성 때문이었다.

    미 군부와 정보기관은 국외 한인들을 이용한 소규모의 첩보 및 침투공작에서부터 한반도 내 무장봉기에 이르기까지 그 가능성에 대해 폭넓게 검토했다. 이렇게 해서 이승만은 미국의 군부와 정보기관의 인물들과 교류하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1941년 7월 루즈벨트 대통령의 지시로 설립된 정보조정국(Coordinator of Information, 이하 COI로 줄임)은 국가안보와 관련된 정보수집과 분석을 전담했는데, 이 문제에 가장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도노반(William J. Donovan)을 책임자로 한 COI는 그 해 11월 중국 상해를 거점으로 한 비밀 첩보기관의 설치 방안을 검토했다. 그 계획을 입안한 인물은 게일(Esson M. Gale)이었는데, 이승만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떤 경로로 두 사람이 친분을 맺게 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1942년 1월 24일 게일은「적후공작을 위한 한인 고용」(“Employment of Koreans for S.O. Operations”)이라는 보고서를 도노반에게 제출했다.
    그 목적은 일본 본토와 한반도, 만주에 있는 한인들을 대일 정보 수집과 사보타지에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공작 거점은 중국 중경이었다. 게일은 광복군이 35,000명의 병력을 소유하고 있으며, 그 중 9,250명이 중경에 있다는 정보를 인용했다. 또 그는 미국에서 선발된 요원들로 하여금 중경의 한인을 대상으로 한 특수훈련학교를 건립하자는 안을 제시했다.

    1월 27일 COI는 ‘올리비아’(Olivia)라는 작전명을 수립했다. 이는 COI본부를 중국 중경 인근에 설치해서 한국ㆍ만주ㆍ화북ㆍ양자강 등에서 정보 및 사보타지 그룹을 지휘하고, 이 때 한국인을 활용한다는 것이었다. COI가 일본 점령지역에서 특수공작을 수행하는데 한국인이 가장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판단했다는 점은 당연했다.

    COI는 올리비아 계획을 위해 보다 구체화된 훈련과정을 설정하고, 이를 통해 COI의 최초 특수작전부대인 101부대를 창설했다. COI의 구상은 중국-한국을 거쳐 최종적으로 일본에 침투한다는 것이었다.

    이승만은 자유한인대회(1942.2.27-3.1)가 폐막되자 바로 장석윤(張錫潤)을 COI의 제1기생으로 추천했다. 이 때 장석윤은 중경의 임시정부와 주미외교위원부를 연결시킬 이승만의 편지를 휴대한 채 입대했다. 굿펠로우는 중국 주둔 미군사령관 스틸웰(Joseph Stilwell) 장군과 협의해 아이플러(Carl Eifler)를 이 부대의 지휘관으로 선발했고, 1942년 3월 이승만과 친분이 있는 장석윤ㆍ정운수(鄭雲樹) 등 한국인 20명을 COI 제1기생으로 소집했다. 

    한편 게일은 이 계획을 성사시키기 위해 1942년 2월 8일 뉴욕을 출발해 3월 중경에 도착해 활동했다. 그리고 5개월간 중국에 체류했다. 그러나 7월 중순 게일은 계획 취소의 전문을 보냈다. 그 취소의 이유는 공개활동에 따른 신분 노출과 상해임정 요인들의 임정승인 촉구로 인한 주중 미 대사관과의 갈등, 무엇보다 중국 측 정보기관의 강력한 견제와 방해 등의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비록 게일의 계획의 차질에도 불구하고 이승만과 COI는 더욱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왜냐하면 이승만과 미군 정보당국은 이 계획을 계기로 한인들을 대일 특수작전 및 정보공작에 활용하는 논의를 보다 활발하게 논의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이승만은 전쟁이 중반기에 올수록 군사문제와 무장투쟁에 대한 관심을 증대시켰다.

    태평양전쟁이 중반기로 접어들 무렵, COI 등 정보부대가 한인 게릴라부대의 창설 및 활용에 우호적인 상황 속에서 한인들의 대일 특수전 참가시도는 오히려 활발해졌다.

    COI는 1942년 6월 13일 합동참모부 산하의 전략첩보국(Office of Strategic Service, 이하 OSS)으로 재조직되었다. OSS는 적국에 대한 정보수집 외에도 적 후방에서 파괴, 교란, 게릴라전 등을 포함한 특별 활동을 계획하고 실행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이승만은 OSS의 유력 인물과도 친분을 맺었다.
    그는 육군부 정보참모부 소속으로 COI의 중요 직책을 맡고 있던 굿펠로우(M. Preston Goodfellow)였다. 그는 8월에 대령으로 진급하면서 OSS의 부국장이 되었다.

    7월 17일자 이승만의 비밀서신에는 그의 숨은 의도가 잘 드러나 있다.
    “그 결과가 만족스럽게 나타나면, 한국인들은 이 전쟁에서 큰 역할을 맡게 될 것이다. 우리들이 원하는 기회가 주어진 만큼 그것을 최대한 이용해야한다.”
    비록 소수이지만 한국인이 태평양전쟁에 참전하게 된다면, 두 가지 효과가 생길 것이다.
    첫 번째는 임정승인을 강력하게 요구할 수 있는 명분이 생길뿐만 아니라, 두 번째로 미국 측으로부터 무기대여에 의한 원조도 받을 수가 있다는 희망이었다.

    이승만은 10월 10일, 굿펠로우에게 “미국 군사당국에게 한인 군사지원 제공”(Offer of Korean Military Resources to U.S. Military Authorities)이라는 제목의 공문을 부쳤는데, 이 공문에서 두 가지 방안이 제시되었다.
    첫 번째로, 재미한인들을 훈련시켜 단위부대로 미군에 배속시키거나 독자적인 자유한인부대(Free Korean Legion) 창설을 구상하였다.
    두 번째로, 극동에서 25,000명의 한인병력을 미군의 지휘체계로 이관하자는 것이었다.

    이승만은 1942년 10월 게릴라 훈련에 필요한 한인지원자 60명의 명단을 제공했고, 이 기회를 이용해 한인게릴라부대 창설을 제안했다.
    요컨대 자유한인부대는 미주에서 한인청년과 유학생들로 편성하고, 극동에서는 임정 산하의 광복군을 미군의 지휘체계 속에 편입시켜 대일전쟁에 동원한다는 계획이었다.
    이승만은 이렇게 함으로써 임정의 참전외교를 현실화시킬 구상이었다.
    이를 위해 이승만은 굿펠로우에게 자신의 계획(Korean Project)을 합동참모부의 소관 위원회로 넘겨 승인을 받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했다. 이 계획이 승인된다면 이승만은 미국인 고문(한미협회 회장 크롬웰)과 함께 인도의 캘커타로 가서 임정 및 광복군 지도자들과 접촉할 용의가 있다고 했다. 그 목적은 중국-버마-인도전구 미군사령관인 스틸웰 장군에게 상세한 정보를 제공하는데 있다고 했다. 이승만은 광복군을 통해 미국으로부터 군사지원을 이끌어내고 이를 바탕으로 임정승인까지 얻어낸다는 복안이었다.

    이를 위해 이승만은 비밀각서를 A, B안으로 작성해 미 전쟁부에 제출했다.
    A안은 극동에서 미군 지휘 하로 편입될 한인 병력 25,000명에게 필요한 물품과 군사장비 품목이었다. B안은 미국에서 구성될 대대급 한인자유부대 모병에 소요되는 경비 내용으로 매월 3,940달러가 책정됐다. 이승만은 B안이 빠른 시일 내에 착수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를 통해 광복군과 미군 간의 협력을 추진할 계획이었다.  

    이승만은 이 계획안을 전쟁부로 보내 승인을 받으려고 했고, 이를 바탕으로 해서 무기대여청으로부터 무기대여 원조를 확보하려 했다. 무기대여청의 크로울리(Leo Corwley)청장은 이 문제를 합동참모부로 넘겼고, 합동참모부는 OSS에게 넘겼다. 결국 이승만의 이 계획은 OSS에서 부정적인 결론을 내림으로써 실현을 보지 못하게 됐다.

    이승만의 무력항쟁에 대한 관심과 대책은 미국 정부에 보낸 서신에서 잘 나타나있다.
    1942년 12월 7일, 이승만은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보낸 서신에서 “이해 12월 7일을 기하여 미육군성의 대일항쟁계획의 일부로써 한국인 훈련을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인원수는 적어요. 그러나 대통령 각하! 훈련 목적은 섬 놈(일본인)들을 멸망시키기 위하여 아시아에 있는 거대한 한국의 인적 자원을 이용하여 주세요.”라고 써서 무력항쟁의 조직화와 대일투쟁의지를 강하게 표현했다.

    그해 11월말에 이승만은 미 국무부의 중국담당 외무차관으로부터 한국 임시정부의 목적을 분명히 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12월 5일, 이승만은 자신의 정책을 정리한 서신을 국무부에 보냈다. 그 내용을 요약한다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당면목표는 다음과 같이 3가지로 대일전쟁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연합국을 지원하려 한다. ① 한국군을 전쟁무기로서 적절하게 무장시키려고 한다. ② 극동지역 내에 있는 한국인의 인적 자원에 접근함으로서 한국인을 증강할 수 있다. ③ 적에 대한 사보타지와 혁명적 행동을 유효히 수행하기 위하여 한국내외에 스파이 조직을 설치할 수 있다.”

    물론 이승만이 미 정부가 한국민의  무장항쟁을 조직, 지원하여 대일전선에 투입하는 것은 임정의 승인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이런 서신의 사본을 다시 헐 국무장관에게 보냈는데,
    “만약 한국임시정부의 승인을 이 이상 지연한다면 장차 필연적으로 한반도에 공산주의 국가를 세우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승만이 무장항쟁에 대한 적극적인 대책을 거론한 또 다른 이유는 “어떤 국민도 그 자신의 자유를 위하여 이 싸움을 하지 않는 경우 미국의 원조를 기대할 수 없다”는 헐 국무장관의 공식 성명서를 접했기 때문이다. 헐의 성명서에는 분명히 한국은 「싸움을 하지 않는 국민」이라는 범주에 포함되어 있었으니, 이 성명서를 듣고 이승만이 경악을 금치 못한 것은 당연했다.

    이승만이 전쟁 중 무력항쟁에 대해서 관심이 고조된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유럽전선에서 드골장군이 이끄는 레지스탕스라는 지하조직의 맹활약에서 큰 영향을 받은 점도 컸을 것이다. 이제 임정승인이란 외교문제에만 몰두할 것이 아니라 무장항쟁의 역할을 통해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전할 기회를 적극적으로 모색하지 않으면 전후 한국의 독립문제에서 자신의 발언권이 약화될 수 있었던 것이다.

    1944년 7월 18일 합동참모부에 보낸 이승만의 편지는 그 심정을 잘 표현하고 있다.
    “연합국 국민들은 언론을 통하여 프랑스 내 지하조직의 놀랄만한 성과들을 전해 듣고 감격하고 있다.”라고 한 뒤, 한국인들도 프랑스 내 지하조직에 못지않은 공헌을 할 수 있다고 했다. 이를 위해 자신은 수백 명의 믿음직한 한인들을 즉시 제공할 수 있으며, 그들은 태평양제도와 일본 및 한국으로의 침투작전과 첩보 및 파괴활동을 벌임으로써 미국의 전쟁수행에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장담했다.


    V

    그 후 OSS는 1944년 한반도침투계획의 일환으로 독수리작전(Eagle Project)과 냅코계획(Napko Project)을 세웠는데, 이것은 주미외교부와 중경임정을 통하지 않고 소수의 한인을 직접 훈련시키는 비밀작전이었다. 미국정부가 임정승인의 부담을 갖지 않고 직접 한인들을 무장시키는 방안이었다.

    특히 냅코작전은 1941~1942년 이승만이 주장한 재미한인의 대일무장투쟁과 한인게릴라부대 창설의 제안에서 비롯됐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둘 수 있다. 

    유럽에서 전쟁이 실질적으로 끝난 1944년 중반 OSS가 최종적으로 눈을 돌리게 된 것이 태평양전선이었다. 이는 1945년 1월 23일 워싱턴 OSS의 기획단이 작성한 ‘비밀정보수집을 위한 일본적진에 대한 요원 침투 특수계획’(Special Program for Agent Penetration of Japan's Inner Zone, for Secret Intelligence Purposes)으로 나타났다.
    이 계획에서 중국전구가 한반도침투작전을 위한 가장 중요한 근거지로 확정됨에 따라 중국전구 OSS의 활동을 강화하고, 한인들을 이용한 침투계획을 수립하여 추진했다.

    냅코계획은 OSS가 미국 내에 수용되어 있던 한인 전쟁포로들을 첩보요원으로 활용하려고 구상한 계획이다. 이 계획은 OSS 워싱턴 본부의 아이플러(Carl F. Eifler) 대령과 굿펠로우 대령 등이 유일한(柳一韓)ㆍ장석윤 등과 함께 미국 내 전쟁포로수용소의 한인포로들을 훈련시켜 태평양 오키나와에서 잠수함으로 한반도에 비밀리에 침투시키는 작전이었다. 이는 중국을 거치지 않고 미국에서 곧바로 한반도로 침투하기 위한 것이었다.

    냅코계획은 1945년 3월 7일 아이플러가 도노반에게 ‘NAPKO PROJECT'라는 제목의 보고서에서 냅코라는 명칭을 사용하면서 본격화 되었다. 워싱턴의 OSS 기획단에서는 1945년 5월 31일 냅코작전을 공식 승인했고, 미국 합동참모본부도 6월 19일 이를 승인하기에 이르렀다.

    냅코작전에 동원된 한인들은 모두 19명이었다. 이들은 재미한인 출신인사, 미군에 입대했던 한인병사, 맥코이 포로수용소 출신, 일본군을 탈출한 학병출신 등으로 구성됐다. 이 때 장석윤은 맥코이 포로수용소에 위장 잠입하여 냅코작전에 필요한 한인 학병 및 노무자 출신을 선발하는 임무를 맡아 수행했다. 이들 포로 및 노무자 출신을 제외한 13명은 미국시민으로 미 육군에 입대했다가 OSS에 배속된 사람과 민간인 신분으로 있다가 OSS에 참여한 인사로 구분된다.

    그러나 냅코작전도 한인 요원들이 훈련을 끝내고 중국 및 태평양 지역 미군 사령관들의 승인을 기다리는 과정에서 일본이 패전함으로써 실행에 들어가지 못하고 끝나게 됐다.

    또한 중국전구에서 활동하는 미 OSS의 부정적 시각도 여기에 한몫을 했다.
    중국 주재 OSS 간부들은 냅코작전계획이 한반도 실정을 정확히 반영하지 않았다는 점과 최악의 경우 중국전구 OSS가 주관한 독수리작전을 위험해 빠뜨릴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문제점을 들어 이의 실행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러면서 중국의 OSS에서는 독수리작전이 한국의 임정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에 냅코작전은 주중 OSS의 지휘 하에 진행되거나 독수리작전의 일부로 편입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냅코작전은 일제의 패망으로 그 시기를 놓치게 됐고, 미 합참도 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