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리다(Derrida) 쉽게 읽기

박정자 프로필 보기 | 최종편집 2010.12.02 10:15:44

해체주의 미술


▲ 구스타브 메츠거(gustav metzger)의 행위예술.



  빨강, 검정, 하양의 넓은 나일론 헝겊 3장을 한데 겹쳐 세워놓은 가리개를 향해 검은 점퍼, 흰 모자, 노랑 고무장갑에 방독면을 쓴 남자가 스프레이로 산(酸)을 뿌리고 있다. 산에 녹아 헝겊은 서서히 찢어져 결국 너덜너덜한 3색의 넝마로 남는다. 영국에서 활동하는 독일계 유태인 구스타브 메츠거(Gustav Metzger)의 행위예술이다. 전쟁과 자본주의 비판을 메시지로 담은 작품이다. 
  가지를 쳐낸 21그루의 버드나무를 거꾸로 세워 콩크리트 판에 박아 놓았다. 흉칙한 모양의 뿌리들이 마치 가지처럼 하늘을 향해 곤두 서 있다. 역시 구스타브 메츠거의 작품으로 금년(2009) 영국 맨체스터 국제 페스티벌에 출품한 ‘도리깨질 하는 나무들’(Flailing Trees)이다. 인간의 환경 파괴를 비판하는 메시지를 담았다고 한다. 
이것이 해체주의 미술이다. 

해체주의 건축 

  스페인의 낙후된 도시 빌바오에 활기를 넣어준 것으로 유명한 구겐하임 미술관은 금속의 물결처럼 역동적이다. 여러 개의 넓고 긴 조각으로 해체된 철판들이 다시 조합되어 거대하게 넘실거리는 파도의 모양을 이루고 있다. 티타늄 소재의 표면은 물고기 비늘 같다. 


▲ 프랭크 게리(Frank Gehry) MIT 스타타 센터.


  미국 미네소타 대학의 와이즈맨 박물관은 철판으로 된 온갖 모양의 원통과 입방체를 아무렇게나 쌓아 놓은 듯한 모습이다. MIT의 스타타 센터는 중간까지 뒤로 기울어지다가 위에서 다시 돌출된 건물 윗부분이 1층 입구의 경사면 슬라브 위로 당장이라도 미끄러져 내릴 듯한 모습이다.
  이 모두가 미국 건축가 프랭크 게리(Frank O. Gehry)의 작품이다. LA의 월트 디즈니 콘서트 홀, 그리고 지금 짓고 있는 뉴욕 브루클린의 애틀랜틱 야즈(Atlantic Yards)도 그의 작품이다. 그가 30년째 살고 있는 산타 모니카의 집은 1920년대에 지은 네덜란드 복고풍 양식의 주택에 골판지 같은 철제 울타리를 치고, 마치 한 부분이 무너져 내린 것 같은 담 사이로 유리 입방체가 비스듬히 쳐박힌 형상을 하고 있다.
  구부러진 선과 각진 선이 뒤얽혀 건물 전체가 휘어지고 뒤틀린 건물들은 아이들이 서투르게 만든 공작품 같기도 하고, 마구 구겨 바닥에 던져 놓은 종이 뭉치 같기도 하다.
  이것이 해체주의 건축이다  


▲ 스페인 빌바오(Bilbao) 구겐하임 미술관.


  서울 동대문 운동장 자리에 세워지는 건물의 설계자 자하 하디드, 삼성 리움 박물관의 설계자 램 쿨하스 등 현대의 모든 건축가들이 이렇게 사선이나 곡선으로 기울어지고 비틀어지고 휘어지고 겹쳐지는 왜곡된 형태의 건축물을 설계하고 있다. 요즘은 더 이상 네모 반듯한 박스형의 건물을 짓지 않는다. 1,2,3층의 층 수 구분도 없다. 와이즈맨 박물관을 지을 때 건설현장의 인부들은 서로 작업 지시를 전달하면서 “저기 코 부분”, “저기 턱 부분”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건물의 외관만이 아니라 실내도 전통적 공간 유형에서 벗어나 마치 벽과 기둥이 기울어진것 같은 착각을 일으킨다. 모더니즘의 합리적, 기능적 배치는 이제 철 지난 촌스러움에 불과하다. 해체주의 건축은 비대칭성, 불확실성을 추구한다. 건물의 중심이 없으며, 통일성이나 계층적 질서도 없다. 공간 구성의 전략은 탈 중심, 탈 구성이다.
  건축물의 배치에서 평면 실내까지 모든 형태는 더 이상 공간을 경제적 미학적 기술적 실용적 기준으로 구성하지 않는다. 기능의 해체이며 문맥(context)의 해체이다. 또는 기존의 기능과 맥락을 다른 차원에서 해석하는 재해석의 방법이다. 마치 미술의 콜라주(collage, 화폭에 종이나 작은 물건들을 붙이는 것) 기법처럼 역사적 이미지를 파편화하여 이를 재구성함으로써 혼성모방의 상태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 디자이너 레이 가와쿠보의 '소년처럼' (comme de garcons).

해체주의 패션


▲ 디자이너 Ray Kawakubo.



  올이 풀린 듯 끈이 자켓 밑으로 내려오거나, 속옷이 밑으로 빠져 나오고, 지퍼는 자켓의 한 중간이 아니라 한 쪽에 치우쳐 있고, 사무라이의 옷을 닮은 반바지는 치마와 구별이 안 될 정도로 헐렁하다. 자켓 앞면의 한쪽이 찢겨나갔거나, 아니면 헝겊 조각들이 덕지덕지 덧붙여 있고, 스커트는 한 쪽이 찢겨져 쳐지거나 흘러내리고, 아무렇게나 쑤셔 허릿단 속에 집어넣은 치마는 앞이 들려 걷어 올라가 있다.
  소재와 문양과 색채가 서로 다른 세 가지 원단을 사선으로 몸에 감은 듯한 실루엣에 한쪽 팔은 긴 소매, 다른 팔은 소매가 없기도 하다. 아방가르드 패션을 선도하고 있는 꼼므 데 가르송(Comme des Garcons, ‘소년처럼’)의 디자이너 레이 가와쿠보의 옷들이다.
  이것이 해체주의 패션이다.
  레이 가와쿠보는 미완성의 햄라인(옷단), 풀어 헤쳐진 솔기, 복잡하게 얽힌 꿰매 붙이기, 특이한 주름, 비대칭, 다양한 찢기와 소재의 믹싱 등 실험적인 디자인을 통해 옷은 ‘신체에 맞아야 한다’는 고정 관념을 타파했다. 거친 소재의 원단으로 찢어지고 구겨지고 헐렁하게 만든 비대칭 디자인의 옷들은 프랑스식 엘레강스와는 전혀 다른, 그야말로 빈티가 나는 푸어 룩(poor look)이다. 그 자체로, 여자 옷은 섹시하고, 컬러풀하고 아름다워야 한다는 패션의 개념을 강하게 비판하고 해체시켰다. 일본 무사의 복장에서 영감을 얻고 그것을 독특하게 해체하고 조합하여 커팅한 그녀의 기막힌 발상은 80년대 파리 패션계에 충격을 주며 또 하나의 일본 세(勢)를 과시했다.
  80년대 초에는 충격으로 받아들여졌지만 지금은 길거리에 여자들이 입고 다니는 옷도 다반사로 비대칭에 여기저기 꿰매고 찢고 붙인 옷들이다. 해체주의 패션이 상식처럼 확산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해체주의 광고


▲ Benetton의 콘돔 광고 'condom olympics'



  이탈리아의 캐주얼 의복 브랜드인 베네통은 키스하는 수녀와 신부, 백인 여자와 흑인 남자와 황인종 아이, 알록달록한 콘돔, 기름을 뒤집어 쓴 오리 등의 파격적인 광고사진을 텍스트 없이 비주얼만 내 보냄으로써 80-90년대 전 세계 소비자의 시선을 강렬하게 잡아 끌었다. 인종차별 반대, 에이즈에 대한 각성 촉구, 환경 문제 고발 등 제품의 광고와는 직접 관계가 없는 사회 캠페인을 벌임으로써 오히려 광고 자체의 목적인 브랜드 인지도와 호감도를 극대화했다. 사회의 다양성을 편견 없 이 받아들이자는 메시지의 캠페인성 광고를 보면서 소비자들은 브랜드 자체에 신뢰감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광고적 메시지 부재, 상품 이미지 부재, 텍스트 부재의 광고를 해체주의 광고라고 한다.
 
해체(Deconstruction)의 시대

  뭐든지 단정하게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자르고 깎고 맞추고 중심을 잡고 균형을 잡아 반듯하게 쌓아 올리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알았던 우리의 의식이 심하게 흔들리고 있다. 프랭크 게리의 건축이나 레이 가와쿠보의 패션에서 우리는 분리되고, 분해되고, 풀리고, 해체되고, 조각나고, 빠지고, 단절되고, 고장난 것들이 우리의 시각을 강렬하게 사로잡고 있음을 느낀다. 해체가 우리의 지배적인 시각 환경이 되었다는 것은 우리의 의식 또한 해체로 경도되고 있음을 뜻한다. 탈 권위, 탈 중심이라는 현대적 의식의 도도한 흐름은 해체적 가시성의 풍경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지금은, 서양언어로는 de, dis, ex 등의 접두어가, 한국어로는 탈(脫), 비(非), 반(反) 등의 접두어가 지배하는 해체의 시대이다.


▲ Frank Gehry가 설계한 집.


▲ 철학자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

해체의 근원에 있는 철학자 데리다

  해체라는 도도한 흐름의 근원에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2004)가 있다. 프랑스 철학자로 미국에서 폭발적인 인기와 영향력을 누렸지만 역설적이게도 자기 나라 프랑스에서는 별로 인기가 없었다. 그의 글쓰기가 보여주는 현란한 스타일과 수사, 난해성 혹은 모호한 사상에 대해 프랑스의 철학계는 격렬하게 비판하거나 또는 경멸적으로 무시했다. 뤽 페리(Luc Ferry)와 알렝 르노(Alain Renaut) 같은 사람들은 ‘대단한 수출 상품’이라는 비아냥으로 그의 철학을 상품의 수준으로 비하했다. 그러나 미국에서 데리다는 포스트구조주의 철학 그 자체와 동일시되었고, 완전히 문화적인 영웅이었다. 미국의 여러 대학에서 그는 21번이나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푸코나 보드리야르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데리다도, 미국의 독자가 열광하여 읽어줄 때 비로소 세계적 철학자가 된다는, 다시 말해 프랑스의 철학도 미국을 통해야 만 세계적인 철학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해 보여주었다. 2차 대전후 실존주의의 인기는 프랑스만의 일이었지만 ‘해체’는 미국을 강타했고 이어서 전 세계로 확산되었다. 그는 1970-80년대 미국의 대학원 논문에서 가장 빈번하게 다루어졌던 프랑스의 철학자였다. 
  사건의 시작은 1966년 볼티모어의 존 홉킨스 대학에서 열린 ‘인간 과학과 비평 언어’(Languages of Criticism and The Sciences of Man)라는 주제의 학술대회였다. 이 학술대회는 미국에 프랑스 철학을 유행시킨, 그리고 데리다의 엄청난 인기가 시작된 출발점이었다. 르네 지라르가 주관하고 롤랑 바르트, 골드만, 이폴리트, 라캉, 풀레, 토도로프, 베르낭 등이 참석했던 이 학회에서  당시 36세였던 데리다가 발표를 통해 ‘해체’라는 참신한 텍스트 해석 방법을 제시했다. 다음 해에 출간된 그의 <그라마톨로지>((De la Grammatologie)와 <글쓰기와 차이>(Ecriture et la Difference)가 한 해 전 학술발표 당시의 충격과 맞물리면서 미국에 ‘해체’ 철학이 확산되는 강력한 계기가 되었다.


▲ 총 80권의 책을 쓴 Derrida library. 22개국어로 번역되었다.


  처음에는 영어권 지역에서, 특히 페미니스트들의 성 연구(gender studies), 다문화 연구, 포스트식민주의 연구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고, 이어서 건축으로까지 확산되었다. 그의 중심 개념인 ‘해체’만큼 대학 사회에서 떠들썩한 반향을 일으킨 철학 개념은 일찍이 없었고, 데리다만큼 지식 사회에서 논쟁을 불러 일으킨 철학자도 없었다.


▲ Derrida cartoon.


  사르트르, 푸코와 함께 그는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우상파괴적 학자였고, 우리의 사유방식을 혁명적으로 전복시킨 철학자였다. 74세로 타계한 2004년까지 사후 출판 1권을 포함하여 총 80권의 책을 써냈고, 모두 22개국어로 번역되었다. 노벨 문학상 후보에 오른 적도 있다.
  엄청난 인기에 대한 질시에서였을까. 그가 아직 살아 있을 때 사람들은 벌써 ‘해체’가 죽었다고 선언했다(1994년 1월 23일자 뉴욕 타임즈 매거진). 이에 대해 데리다는 오로지 ‘해체’가 죽었다고 말하기 위해 그 수많은 저서와 강연들이 쓰여지고 행해지고 있겠느냐고 반박했다. 하기는 그렇다.
  프로이트의 이름을 모르는 일반인도 일상생활에서 정신분석 개념을 상식처럼 말하고 있듯이 데리다의 해체도 철학만이 아니라 커뮤니케이션, 정신분석, 건축, 예술, 문학비평, 하다못해 패션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일상생활 도처에 두루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의 해체 이론은 록 음악과 영화에도 등장했다. 록 가수 스크리티 폴리티((Scritti Politti)는 I'm in love with Jacques Derrida / Read a page and know what I need to...라고 노래 불렀다. 영화감독 우디 알렌이 1997년에 만든 ‘해리를 해체하기’(Deconstructing Harry)라는 영화는 데리다의 해체를 주제로 삼은 것이다.
  
해체의 의미     

  건축이나 패션에서 볼 수 있는, 뭔가를 풀고 허물고 부순다는 시각적인 해체의 개념과는 달리 데리다의 해체는 그렇게 쉬운 개념이 아니다. 플라톤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서구 형이상학의 전통과, 소쉬르에서 시작되는 구조주의 언어학의 기초지식을 가지고 있어야만 이해가 가능한 난해하기 그지없는 이론이다. 하이데거에 의해 처음으로 쓰여졌지만 데리다가 그것을 체계적으로 사용하고 정교하게 이론화하였다. 비판자들은 이 단어의 뜻이 애매모호하고 지나치게 겉멋만 부렸다고 비난했다. 사실 그의 글쓰기 스타일은 신조어와 왜곡된 철자법, 괄호와 생략부호들의 이상한 사용 등으로 모호하기 짝이 없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데리다의 ‘해체’는 소크라테스 이래 지금까지 내려오는 서유럽의 전통적 형이상학을 비판하면서 그 철학체계를 처음부터 다시 쌓아올릴 것을 주장하는 방법적 실천의 이름이다. 그에 의하면 서구의 형이상학은 전통적으로 문자 언어를 폄하하고 음성언어에 특권을 부여함으로써 폭력적인 이성중심주의(로고스 중심주의)로 흘렀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해체’란 서구철학의 전통적인 형이상학을 부정하고 그 개념에서 벗어나려는 철학적 시도이지 철학 자체를 완전히 파괴하여 말살하겠다는 것은 아니다.
  구체적으로는 하나의 텍스트가 가진 의미의 모호함을 드러내기 위해, 거기에 숨겨진 가설과 생략들을 찾아내 초점을 맞추는 읽기 방식이다. 칸트나 루소같은 대가들의 저서를 해석할 때도 주요 논지보다는 서문이나 주(註)같은 주변적 요소들에 조명을 비춰 저자의 개념적 등급을 전복하기 일쑤다. 언어의 비확정성과 불안정성을 보여주기 위해, 그리고 말들 속에 숨겨진 잠재적 의미를 보여주기 위해서라고 그는 말한다.    
  그러므로 엄밀히 말해서 해체는 철학적 체계나 방법이 아니고 하나의 실천이다. 그러나 여러 분야에 광범위하게 스며든 ‘해체’의 개념은 이제 현대 철학의 한 방법이고 사조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 구스타브 메츠거의 행위예술.

  
흔적

  데리다가 아주 좋아하는 낱말 중의 하나가 흔적(trace)이다. 동물이 지나가면 발자국을 남기고 수레가 지나가면 바퀴자국을 남긴다. 그것이 흔적이다. 흔적은 동물이 또는 수레가 지나간 표시이지만 지금 동물이나


▲ 베네통 광고 '피묻은 옷'.

수레는 없다. 이미 지나가고 지금 없으므로 흔적을, 동물이나 수레의 현전(現前)(현재 있음, presence)으로 생각할 수는 없다. 그러나 과거에 한 번 지나간 것은 사실이므로 그것들이 전혀 없다(부재, absence)고 말할 수도 없다.
  단순히 현전도 아니고 단순히 부재도 아닌 것, 그것이 흔적이다. 흔적은 ‘있다’, ‘없다’고 확정적으로 말할 수 없는 ‘비확정성’(undecidable)이다. 또는 있음과 없음 사이에 애매하게 걸쳐 있는 경계선이다. ‘비확정성’, ‘경계의 사유’ 등 데리다의 핵심적인 개념은 모두 흔적에서 출발한다.
  모든 언어는 비확정성의 원칙에 종속되어 있다. 예컨대 단어건 음소(音素)건 언어의 요소들은 그것 자체로 의미가 확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요소들과의 차이에서 의미가 발생한다. ‘나리’, ‘다리’ ‘머리’‘유리’라는 단어들 중에서 ‘머리’라는 의미가 발생하는 것은 순전히 ‘나’ ‘다’ ‘머’ ‘유’의 차이에서이다. 우리가 의미를 파악하는 것은 이것이 ‘나’나 ‘다’가 아니고 ‘머’이지라는 것을 확인하는 과정이다. ‘다리’가 아니고 ‘머리’이지 하고 확인하는 순간 우리의 의식 속에서는 ‘다’가 잠시 남아 있다가 그것이 ‘머’로 대체된다. 이때 사라진 먼저 것은 흔적으로만 남아 있고, 그것을 대체한 새 것은 흔적 위에 중첩되어 있다. 남의 말을 잘못 알아 들었을 때 우리는 이런 과정을 확연하게 의식할 수 있다. 구조 언어학의 이 차이 이론에서 ‘모든 가치는 차이에서 발생한다’라는 현대사회의 기본적 화두가 생겨났다.
  언어는 이처럼 같은 체계의 서로 다른 요소가 흔적으로 남아 있다가 그것이 새 요소와 중첩되고, 이 새 요소는 또 다른 요소의 흔적이 되어 사라지는 과정의 연속이다. 언어의 모든 요소들은 독자적으로는 아무 기능이 없고, 자체적으로 현전하지 못하며, 다른 요소의 흔적 위에서만 기능을 발휘한다.
  그 어떤 것도 온전하게 있거나 온전하게 없는 것이 아니라 마치 하나의 글자 위에 X 표시를 하여 그 글자를 삭제하는 것처럼, 흔적 위에 다른 흔적이 덧씌워지는 형국이다. 그것들은 있으면서 없고, 취소되었으면서 삭제되지는 않았고, 현전이면서 부재이다. 따라서 언어는 있음과 없음 사이의 끊임없는 교직(交織)이다. 있음이라는 씨줄과 없음이라는 날줄 사이의 무한히 들고 나는 직조(織造), 하나의 텍스타일(textile), 이것이 바로 텍스트이다.  
  직물(textile)처럼 이질적인 것들이 얽혀 있는 텍스트에서 하나의 기원적인 중심개념은 있을 수 없다. 즉 어떤 텍스트의 중심에서 출발하여 그 주위로 동심원의 파문을 그어나가는 그런 해석은 불가능하다. 텍스트에는 의미를 생산한다고 간주되는 한 중간의 중심이 없다. 흔적의 유희는 한 요소에서 다른 요소로의 끊임없는 미끄러짐일 뿐이기 때문이다. 언어의 불안정성은 여기에서 유래한다. 
  ‘흔적의 흔적’인 문자의 세계에서 모든 것이 흔적이라면, 그리고 흔적이 현전과 부재 사이의 끊임없는 미끄러짐이라면, 그 흔적들 중에 어느 것이 더 우월한 흔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철학 언어라고 해서 다를 바 없다. 존재, 진리, 중심, 기원 등 형이상학의 용어들도 역시 완벽하고 충만한 현전이 아니라 한갓 불안정한 흔적의 유희에 불과하다. 데리다가 서구 형이상학의 뿌리를 흔든 것은 바로 이 언어의 불안정성을 폭로함으로써였다.

차연(差延)


▲ Derrida 'differance'



  흔적에서 차연의 개념이 나온다. 차연(differance)은 차이와 연기(延期)를 합쳐 만든 데리다의 신조어이다. 차이는 ‘다리’ ‘머리’에서 ‘다’와 ‘머’ 같은 공간적인 다름이다. 그러나 언어의 의미가 발생하는 것은 ‘다’가 잠시 우리 의식 속에 머물러 있다가 ‘머’로 대체되는 시간 속에서였다. 그러므로 언어에서의 의미는 공간적인 차이와 시간적인 지연이 한데 합쳐졌을 때 발생한다. 공간적인 차이와 시간적인 지연을 합친 것, 그것이 바로 차연이다.  
  차연은 데리다의 작품에서 가장 잘 알려진 개념들 중의 하나다. 1963년에 만들어져 그가 평생 사용한 상표와도 같다.
  모든 요소들의 끊임없는 미끄러짐과 겹침이라는 차연의 논리는 결국 양면성이나 양가성의 논리로 이어지고, 양면 긍정의 사유를 끌어내며, 플라톤의 파르마콘처럼 약이자 동시에 독인 결정불가 혹은 비확정성의 논리가 된다.
  현상적 세계가 불과 물, 더위와 추위, 여름과 겨울의 반복과 교차이듯이 관념적 세계의 존재나 무, 현전이나 부재도 고정된 실체가 아님이 차연에 의해 밝혀진다. 
  기원(起源)의 부재라는 개념도 차연에서 나온다. 모든 것이 언제나 그 앞의 것의 흔적이라면 우리가 기원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이미 그 앞의 어떤 것의 흔적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항대립의 허구

  우리의 사고방식은 알고 보면 일체의 이항(二項)대립으로 구성되어 있다. 건조한/축축한, 신선한/썩은, 연속/단절, 가득한/빈, 안/밖, 위/아래 등 이항 대립의 변별성이 인간 사고의 기본 법칙으로 간주되고 있다. 모든 학문도 이항 대립의 기초 위에 구축되어 있다. 예컨대 인류학은 자연/문화 라는 이항 대립에서 출발한다. 철학도 마찬가지다. 고대 희랍의 자연/법, 자연/기술의 이항대립적 구조에서 시작된 이래 서양철학은 정신/물질, 의식/자연, 주관/객관 등의 이항대립적 사고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했다.
  우리가 누구를 선량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악하다’라는 반대 개념이 있기 때문이며, ‘안’은 ‘밖’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서구의 형이상학은 이 대립을 언제나 절대적인 것으로 구분해 왔다. 그런데 이항대립의 각 항은 서로 완전히 동등한 것이 아니라 언제나 한 쪽이 우세하다. 역사적으로 이 이원성은 다른 대립들과 공모하면서 정치적으로, 조직적으로 두 항 중 하나의 가치를 깎아 내렸다. 그리하여 부재보다는 현전이, 현상보다는 본질이, 경험적 세계보다는 가지적(可知的) 세계가, 가상(假象)보다는 실재가, 글쓰기 (ecriture, writing)보다는 말하기(parole, speech)가, 문화 보다는 자연이, 여성보다는 남성이 우월한 것으로 아예 처음부터 가치 체계가 매겨져 있었다.
  데리다는 전통적 텍스트에 있는 이원성의 횡포를 폭로하기 위해 차연의 개념을 사용한다.  언어의 유희적 운동인 흔적은 어떤 요소가 더 우월하다는 것을 허용치 않으며, 차연은 정확히 차이들을 생산해 내는 운동이고, 그것에 의해 개념들이 지연되는 그런 과정일 뿐이다. 그러므로 개념들 사이에 우열 관계는 없다. 1차적 진실이란 없고, 따라야 할 초월적 가치도 없다. 페미니즘에서 또는 다문화 연구에서 데리다의 해체 이론이 열렬한 지지를 받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 Derrida. 


▲ 소크라테스.

글쓰기와 파르마콘  

  저서 없이 육성으로만 철학을 논했던 소크라테스는 문자(ecriture, writing) 불신이 대단했다. (그러나 그의 철학은 모두 플라톤이 문자로 기록하여 후세에 남긴 것이다). 그는 글을 쓰는 사람들을 소피스트로 부르며 멸시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현전과 진실에 대한 애착과 관심보다는 기록의 보존에만 열을 올리는 엉터리 학자이기 때문이다. 플라톤의 <파이드로스(Phaedrus)>를 읽어보면 아테네 도시국가에서 실력있는 학자들이 글을 쓴다는 것을 얼마나 부끄럽게 여겼는지 알 수 있다.
  말(parole, speech)은 현장에서 소리로 생생하게 주고받는 영혼의 살아 있는 대화이지만, 글은 생명이 없고 영혼이 없는 기록에 불과하다는 것이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생각이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문자로 씌어진 기록은 살아있는 지식으로서의 대화술(변증법)과 비견할 수도 없이 격이 떨어지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글쓰기와 비교한 것이 바로 파르마콘(pharmakon)이었다. 파르마콘이란 말하자면 의학적 묘약으로, 치료제이기도 하고 동시에 독이기도 하다. 적당히 쓰면 약이지만
▲ pharmakon.

자칫 잘못 쓰면 독이 된다. 그러므로 파르마콘은 약이자 독이며, 축복이자 저주이다. 소크라테스는 문자가 바로 파르마콘과 같은 성질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문자는 기록을 통하여 우리의 기억을 보완해 주고 대신해 주는 순기능을 하지만 동시에 사람들의 기억력을 감퇴시키는 기능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순히 그것만이 아니다. 플라톤이 문자와 파르마콘을 같은 차원의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 애매모호한 이중적인 성격 때문이다. 학문은 참과 거짓, 안과 밖, 선과 악, 본질과 가상, 약과 독 등을 구분해서 전자의 계열을 취하는데, 문자와 파르마콘은 그런 경계가 없이 뒤섞인 혼돈 그 자체이다. 게다가 문자와 파르마콘은 똑같이 인간 내면의 생명력과 관계없이 밖에서 들어온 침입자요 불청객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문자와 파르마콘은 인간에게서 알레르기를 일으킨다.
  애매모호한 이중성이라는 점에서 문자와 파르마콘은 정체불명이고, 엄밀한 정의가 불가능하고, 자기 자리가 분명치 않고, 마치 트럼프 카드의 조커처럼 아무 카드에나 접목되어 놀이를 일삼는 유목적 행태를 보인다. 이렇게 자기 고유성과 자기 정체성이 뚜렷하지 않으므로 글쓰기는 하나의 흔적이나 그림자 혹은 환영(simulacre)으로 간주되었다.
  플라톤은 로고스의 순수성을 보호하기 위하여 파르마콘으로서의 문자를 악으로 규정했지만, 데리다는 파르마콘이야말로 서구 형이상학의 음성중심주의를 타도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그에게 있어서 파르마콘은 비확정성이나 경계선의 사유 혹은 탈 중심 같은 주요 사상을 이끌어내는 핵심적인 개념이다.
  파르마콘이 갖고 있는, 이쪽에 있으면서 저쪽에도 있는 양가성(兩價性), 이쪽의 것이 저쪽의 것을 보충하고 대리해주는 보충대리적 성격, 이쪽의 성질이 저쪽의 성질 속에 박혀 들어가 있는 상감(象嵌)작용 등은 모두 이중적 가치를 선호하는 데리다의 철학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더할 수 없이 적절한 성질들이다.
   파르마콘 속에서 치료약과 독약은 상호 보충대리의 역할을 하면서 치료약이 독약이고 독약이 치료약이 되는 가역적 반복을 계속하고 있다. 결국 파르마콘은, 이 세상에 자기동일적인 현전이란 없으며, 모든 것이 끊임없이 지워지는 차이와 흔적의 겹침과 미끄러짐 속에서 같음과 다름은 하나라는 것을 보여주는 차연의 은유였다.

글쓰기의 친부살해적 성격 


▲ pharmakon.



  소크라테스가 문자의 기능을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문자가 그림과 같이 살아있는 대상을 감쪽같이 모방하여 실재와 모조품 사이의 구별을 어렵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림이나 문자가 실재(實在)인 대상이나 말을 그대로 모방하는 것을 보고 소크라테스는 전율을 느꼈다. 그 감쪽같은 모방이 사람들로 하여금 참과 거짓을 혼동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자의 모방은 그림의 모방보다 더 위험하다. 그림은 대상과 똑같이 그리기가 어렵지만 문자는 말의 소리를 거의 어긋남이 없이 그대로 재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자는 그림보다 더 마법적이고 더 사람들을 현혹시킨다. 그래서 플라톤은 문자가 죽음을 삶처럼 꾸미는 가면이거나 아니면 짙은 화장과 같다고 했다.
  문자는 마치 가짜 쇼와도 같이 실재와 본질이 아니면서도 이것들에 거의 닮아 있는 가상(假象)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주검이지만 교묘한 분장술 때문에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보이는 문자는 ‘살아있는 주검, 유예된 주검, 연기된 생명, 위장된 숨결’ 혹은 허깨비, 환각, 환영으로 간주된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사상에서 ‘말’(logos)과 ‘말하는 주체’는 아들과 아버지로 비유된다. 내가 말을 할 때 나의 말은 나의 아들이고, 나는 내 말의 아버지이다. 이처럼 말이 아버지의 적자라면 문자는 아버지가 없는 고아와 다를 바가 없다. 아버지의 후광으로 당당한 권리를 갖고 있는 음성언어(로고스)에 비해 정체불명의 방랑자와 같은 문자는 아버지가 없는 탕아, 사생아, 버린 자식 혹은 불쌍한 자식이다.
  ‘말하는 주체’가 직접 말을 했으므로 말(로고스)은 그가 낳은 아들이지만 문자로 된 글쓰기는 그가 직접 한 말이 아니라 다시 글로 옮겨진 것이므로 적자(嫡子)가 아니라 사생아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문자의 특성은 아버지의 부재이고, 문자의 욕망은 고아의 욕망, 혹은 친부살해적 찬탈의 욕망에 비유된다.
  문자가 고아처럼 풀이 죽어 생기 없는 상태인데 비해 말(로고스)은 자기 옆에, 뒤에, 안에 서서 꼿꼿이 그를 지탱해 주고 있는 아버지와 함께 생생하게 살아 있는 존재이다. 이렇게 생생하게 살아있는 로고스는 아버지에 대한 은혜를 잊지 않아 결코 친부살해의 마음을 품지 않는다.
▲ Pablo Secca가 그린 Derrida.

말하기(로고스)의 우위성 

  사람들은 원고 없이 한 두 시간씩 물 흐르듯 말 잘하는 강연자에게 존경을 표한다. 가끔 유머를 섞어가며 생생한 육성으로 하는 문어체의 강연은 그 모든 개념이나 내용이 강연자의 머리에서 직접 나오는 것 같아, 그가 만만찮은 실력의 소유자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반면에 자기가 말할 내용을 미리 글로 써서 그 원고를 가지고 와 읽는 강연자는 어쩐지 미덥지 못해 보인다. 그가 고심하여 밤새워 쓰고 고친 그의 생각임에도 원고의 글은 그의 생생한 생각이 아니라 어디서 베껴 온 것인 듯한 느낌을 준다.
  플라톤의 <파이드로스>를 읽고서 우리는 우리의 문자 불신이 소크라테스로 거슬러 올라가는 뿌리 깊은 인류의 전통이었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
  전통적인 이원론적 대립항 중에서 데리다가 가장 극렬하게 비판한 것이 ‘말하기’와 ‘글쓰기’의 대립항이었다. 플라톤에서 루소, 레비-스트로스에 이르기까지 서양 학문은 일관되게 음성 언어에 특권을 부여했다. 문자 언어인 글(에크리튀르)은 그 가시성과 물질성에도 불구하고 서구의 철학적 전통에서는 오류의 근원으로 폄하되었다. 생생한 목소리는 진실의 근원이지만 문자는 발화자로부터 단절된 흔적에 불과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데리다는 서구의 오만한 로고스중심주의가 바로 여기서 유래한다고 말한다.
  서구 형이상학의 전통에서 ‘문자’는 죽음, 부재의 이미지를 갖는데 비해 ‘말’은 ‘생명’, ‘현전(現前, presence)’으로 간주된다. 서양 언어의 근원인 그리스어에서 ‘말’은 ‘로고스’이다. 따라서 음성언어의 우위는 로고스중심주의(logocentrisme)로 이어진다. 로고스는 또 ‘이성(理性)’의 어원이기도 하다. 따라서 로고스중심주의는 이성중심주의이고, 이성중심주의는 모든 비이성적인 것을 억압하는 근거가 된다. 이성적인 것은 ‘동일자’, 비이성적인 것은 ‘타자’라는 공식이 성립되면서 ‘우리’ 아닌 모든 타자를 배제하는 이론적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 Frank Gehry의 뉴욕 Bard College 공연장.


  로고스중심주의는 일자(一者)중심, 태양 중심 체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태양 중심 사상에서는 세계가 중심과 변방으로 나뉘고, 빛이 잘 스며들지 않는 변방은 언제나 중심에 종속된 주변으로 남는다. 이것이 태양 중심의 정치(helio-politique)다.
  태양 중심의 정치, 로고스중심, 빛 중심 등의 개념들은 한결같이 상반되는 것을 모른다. 왜냐하면 빛은 밤을 모르기 때문이다. 헬리오폴리틱에서는 빛 속에 모든 것이 통일되어 융해되고, 그 빛의 융해는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동일자만을 좋아하는 로고스중심주의는 타자를 폭력적으로 억압하고 전체주의로 흐르기 십상이다. 이것이 데리다가 말하는 폭력의 철학이다.
  데리다는 이런 형이상학적 체계를 남근-로고스중심주의(phallogocentrisme)라고 비판하면서, 이러한 형이상학을 해체하는 것이 서구 형이상학의 시급한 과제라고 주장했다. 그 철학적 근거로서 그는 같은 것(동일자)은 다른 것(타자)의 흔적이라는 차연의 논리를 제시한 것이다. 그의 ‘해체’ 사상이 결국 모든 권위의 부정으로 이어질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 Frank Gehry 'simpson.'

 


▲ 구스타브 메츠거 '도리깨질하는 나무들'. 맨체스터 국제 페스티벌 출품작 (2009).

 

 해체의 해방감

 독자들은 왜 그토록 난해한 데리다의 철학에 열광했으며, 이제 유행처럼 사라진 듯한 그의 ‘해체’는 왜 그토록 넓게 문화현상의 저변에 말없이 깊숙히 스며들어 있는 것일까?
무질서가 주는 편안함과 해방감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너무나 오랫동안 빈틈없는 이성의 틀에 사로잡혀 숨죽이고 살아왔다. 르네상스 시대의 자로 잰 듯한 좌우 대칭의 건물에서부터 코르셋으로 조이는 여성의 옷에 이르기까지 근대적 합리성의 온갖 예의범절과 위계질서에서 해방되어 이제 사람들은 직선과 직각 대신 구부러지고 휘어진 사선, 우아하고 아름다운 것 대신 더럽고 지저분한 것, 칼날 같은 구분 대신 이것도 저것도 아닌 비확정성, 위선적인 엄숙함 대신 어린아이의 천진함을 닮은 유희를 추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더 이상 중심이 없거나, 있어도 유일무이하게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며, 중심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변도 중요하며, 중심으로 상징되는 권위는 해체되어 모든 요소가 등가(等價)의 가치를 갖게 되는 그런 세상에 대한 꿈을 해체적 건축, 해체적 패션으로 가시화시켰을 것이다.                      
                                                                                           (*그 동안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박정자 교수의 홈페이지 www.cjpark.p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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