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혀 새로운 사태전개
     
    지난 5월말의 두 번째 북한 핵실험은 2006년 10월의 제1차 핵실험과는 전혀 다른 의미가 있다. 제1차 핵실험에서 나온 폭발력은 미국 核 전문가들에 의하여 400t(TNT 환산)으로 추정되었다. 핵폭탄을 만들 수 있을 정도의 폭발력은 TNT 기준으로 1만t 정도이다. 국내외 전문가들은 핵폭탄 설계의 문제로 일어난 未熟(미숙) 폭발(불완전 폭발)이라고 단정, 북한이 아직은 핵폭탄을 만들 수 있는 수준에 이르지 못하였다고 판단하였다. 

    미국 등 관련당사국들은 추가 핵실험을 막으면 핵 기술의 발전을 중단시킬 수 있다고 보고 그 뱡향으로 치중하였다. 미국이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북한정권을 빼주면서까지 양보를 해 온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중국도 주변국들에 대하여 “북한의 핵 및 장거리 미사일 기술은 實戰(실전) 배치할 정도가 못된다. 너무 과잉반응할 필요가 없다”고 설득하여 왔다. 

     이번의 두 번째 핵실험에서 나타난 폭발력에 대하여는 미국 등 주변국 전문가들이 분석중이다. 지하핵실험으로 인한 震度(진도)가 첫 번 실험 때보다 매우 강하였다. 이를 기준으로 계산한 폭발력은 TNT 환산 4000t에서 2만t까지로 폭 넓게 추정된다. 어쨌든 북한정권이 지난 3년간 핵 기술을 발전시켰으며, 이제는 원자폭탄을 제조할 수 있는 단계에 왔다고 볼 수밖에 없게 되었다. 1945년 7월 말 미국은 뉴멕시코 사막에서 地上(지상)핵실험을 성공시켰다. 당시 폭발력이 1만5000t 정도였다. 미국 군대가 핵폭탄을 조립하여, 함정에 싣고 사이판 옆에 있는 티니안 기지로 옮겨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하는 데는 보름밖에 걸리지 않았다. 이를 기준으로 한다면 북한군은 이미 핵폭탄을 만들어 實戰(실전)배치해놓았다고 봐야 한다.
     
      비대칭형 남북戰力
     
    아직 핵폭탄을 1t 이하로 소형화하지 못하여 미사일엔 실을 수 없으니 너무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을 하는 이들도 있다. 이는 구경꾼의 觀戰評(관전평)과 같은 한가한 樂觀論(낙관론)이다. 

    무거운 핵폭탄은 폭격기로 운반할 수 있고, 배에 싣고 부산항이나 고리 원자력 발전소 근방에 와서 폭파시킬 수도 있다. 2005년부터 노무현 정권은 제주~남해안 사이의 해협을 북한선박에게 열어주어 멋대로 지나다니게 하고 있다. 우리 海警(해경)이 “무슨 물자를 싣고 가느냐”고 물어도 응답조차 하지 않는다. 이런 북한 배에 대하여는 경고사격을 하여 停船(정선) 검문을 해야 하는데, 국가지도부가 그런 결심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商船(상선)으로 위장한 군함에 핵폭탄을 싣고 부산항이나 고리 원자력 기지로 접근하는 것을 막기는 어렵다. 막을 수단이 없어서가 아니라 현재의 국가 지도부가 남북한 좌익의 눈치를 보면서 自衛(자위)조치를 취할 의지력이 약하기 때문이다. 

    원자폭탄 투하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선 각7만 명씩 사망하였다. 인구가 두 도시보다 훨씬 많은 서울에 북한의 핵폭탄이 떨어진다면 수십 만 명이 죽는다고 봐야 한다. 북한정권은 지구상에서 가장 非理性的(비이성적)인 집단이다.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미국, 러시아, 중국, 영국, 프랑스)은 핵무기를 가져도 되지만 북한이 가져선 안 되는 이유가 있다. 刑事(형사)는 권총을 가져야 하지만 살인강도나 정신이상자가 가져선 안 되는 이유와 같다. 

    오늘 밤이라도 김정일이 발작하여 남한에 대한 核(핵)공격을 명령할 때 이를 저지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북한 안에 있는가? 없다. 그렇다면 한국인들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핵폭탄을 머리 위에 이고 살고 있는 셈이다. 

    主敵(주적)이 핵무장을 하고 우리는 재래식 무기로 무장한 현재의 남북한 대결상황은 비대칭형 戰略(전략)상황이다. 임진왜란 때처럼 倭軍(왜군)은 조총을, 조선군은 활을 가진 상황이 이와 같은 비대칭형이다. 국방장관이 말하였듯이 核(핵)에는 核(핵)으로 대응하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해야 비대칭형이 해소되고 대칭적 전략이 먹혀든다. 
     
    자위적 핵무장론의 등장
     
    제대로 된 主權(주권)국가라면 이런 상황에선 두 가지 선택을 한다. 이스라엘처럼 북한의 핵시설을 폭격하든지 국가생존 차원에서 自衛的(자위적) 핵무장을 하는 것이다. 主敵이 핵무장을 하였는데도 이 두 가지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 나라는 한국뿐일 것이다. 체제의 운명을 걸고 전쟁을 결심해본 적이 없는 국가 지도부이기 때문이다. 북한정권이 경제와 외교의 절대적 劣勢(열세)를 딛고 한국을 상대로 유리한 게임을 이끌어가는 이유는 그곳의 지도부가 체제의 운명을 걸고, 또 목숨을 걸고 덤벼들기 때문이다. 

    북한의 核(핵)에 대하여 한국도 核(핵)으로 대응해야 하는데 지금 국가 지도부는 한국의 핵이 아닌 미국의 핵을 비는 방법을 선택하였다. 즉 핵우산 개념이다. 북한이 한국을 핵으로 공격하면 미국은 북한에 대하여 핵공격을 한다는 공식이다. 미국은 한국에 대하여 핵우산을 제공하겠다고 약속해오고 있다. 

    문제는 남북한의 복잡한 상황에서는, 그런 정면 공격이 아닌 변칙적인 核(핵)위협에 대하여 미국의 核(핵)우산은 별 쓸모가 없다는 점이다. 예컨대 서해상에서 북한이 먼저 도발한 다음에 한국군이 보복을 하려고 할 때 “그렇게 하면 우리는 핵무기로 대응하겠다”고 협박할 때 어떻게 할 것인가? 북한군이 全面(전면) 기습으로 서울을 포위한 이후 ‘현위치 휴전’을 제의하면서 불응하면 핵공격을 하겠다고 위협할 때 어떻게 할 것인가? 이때를 틈타 남한의 좌익들이 위선적 평화론을 앞세워 “휴전하자”고 들고 일어날 때 과연 국가 지도부가 決死(결사)항전의 결정을 내릴 것인가? 이런 경우에도 핵우산이 실효성 있게 작동할 것인가? 

    유엔 대사 출신인 朴槿(박근)씨 같은 분들은 “우리도 NPT(핵확산금지조약)에서 합법적으로 탈퇴하여 자위적 핵무장을 하겠다고 선언해야 중국이 북한의 목을 비틀어 핵을 포기시킬 것이다”는 취지의 이야기를 해왔다. 제2차 핵실험 이후 정치권이나 安保(안보)단체에서 자위적 핵무장론이 나오고 있는 점이 달라진 모습이다.
     
    북한, 러시아에서 경수로 플루토늄 밀수입
     
    북한의 핵능력과 관련하여 중요 변수가 하나 있다. 이들이 갖고 있는 플루토늄의 量(양)이 어느 정도이냐 하는 것이다. 공개된 시설을 기준으로 추산하면 약40kg, 즉 핵폭탄을 열 개 정도 만들 수 있는 양의 플루토늄을 가졌다고 본다. 문제는 소련이 무너지면서 핵물질 관리가 엉망이 되었을 때 북한이 플루토늄이나 농축 우라늄을 얼마나 밀수입했느냐가 焦眉(초미)의 관심사이다. 

    최근 필자는 수년 전 한국으로 온 북한 과학자를 만났다. 이 분은 核(핵)과 미사일을 개발하는 북한노동당 군수공업부 소속의 先任(선임) 과학자로서 核(핵) 및 미사일 개발에 간접적으로 관계한 사람이다. 핵실험이나 미사일 발사가 있을 때마다 이 분(일단 A씨라고 한다)의 의견을 구하였는데 그때마다 그는 상당히 정확한 전망과 분석을 내렸다. 

    A씨는 최근 필자에게 북한의 러시아 핵물질 밀수에 대하여 충격적인 증언을 했다. 그 요지는 이러하다. 

    <1997년 무렵 군수공업부 산하 고위 과학자들이 모여 회를 하였다. 영변에서 핵개발에 종사하고 있던 과학자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내가 들었다. 

    “러시아의 경수로 원자력 발전소에서 재처리된 플루토늄을 들여왔다. 수많은 캡슐에 넣어 운반하느라 애를 먹었다. 純度(순도)가 낮아 이를 핵무기 제조에 직접 사용할 순 없으나, 무엇인가 활용방안을 찾고 있다.” 

    얼마나 많은 量(양)인지는 듣지 못하였다. 나는 1차 핵실험에서 폭발력이 매우 낮은 원인은 순도가 낮은 이 러시아 밀수 플루토늄을 썼기 때문이 아닌가 추측한다. 핵폭탄을 만들려면 핵실험을 여러 번 해야 하는데, 무기급 플루토늄은 아끼고 순도가 낮은 플루토늄을 먼저 써서 실험을 하였으므로 제대로 터지지 않은 것이 아닐까?>

    영변의 흑연로는 무기급 플루토늄을 만드는 소형 원자로이다. 러시아는 발전용 원자로를 무기급 플루토늄 제조용으로 겸용하였다고 한다. 輕水爐(경수로)보다는 흑연로에서 나온 사용후 핵연료를 재처리하는 게 순도 높은 플루토늄을 만들어내는 데 유리하다. A씨의 증언에 의하면 북한은 흑연로 플루토늄은 구하지 못하고 순도가 낮은 경수로 플루토늄을 밀수하였다는 뜻이다. 

    한국의 권위 있는 핵물리학자에게 물었다. 그는 이런 견해를 밝혔다. 

    <순도가 낮은 경수로 플루토늄을 가지고도 핵폭탄을 만들 수 있다. 문제는 매우 큰 폭탄이 된다는 점이다. 경수로 플루토늄을 여러 번 가공하여 순도를 높이는 방법도 있다. 북한이 그런 능력을 가졌는지는 알 수 없다. 소련이 붕괴될 때 핵물질 관리가 느슨해져 북한이나 테러집단에 넘어갔을 가능성이 있다. 소량을 밀수하려다가 적발된 건수가 200건 이상이다. 농축 우라늄 밀수 시도도 있었다.>
     
     小型化는 아직
     
     A씨는 러시아의 플루토늄을 밀수한 부서는 북한노동당 군수공업부 산하 제2 경제위원회 소속 대외경제총국이라고 지목하였다. A씨는 북한의 핵개발에 대하여 이런 秘話(비화)를 털어놓았다. 

    <북한의 핵개발은 黨的(당적) 요구에 복무하여야 하므로 과학적인 절차가 무시되는 경우가 많다. 노동당은 핵폭탄을 소형화하라고 독촉하니 그럴 실력이 없어도 과장보고를 올리는 경향이 있다. 1차 핵실험에서 폭발력이 매우 낮게 나오니 북한정권은 ‘소형화에 성공하였다’고 선전에 써 먹고 있다. 사실상 실패한 실험인데 이를 선전에서 역이용하였다. 일부 미국 사람들이 속아 넘어가 북한이 핵폭탄의 小型化(소형화)에 성공하였다고 주장한다. 이번 실험은 성공작이라고 봐야 한다. 다만 1t 이하로 핵탄두를 작게 만드는 데는 시간이 많이 걸릴 것이다. 북한은 플루토늄 폭탄 이외에 파키스탄 칸 박사의 도움을 받아 농축우라늄 폭탄을 만드는 길을 새로 뚫었다. 정무원 산하 원자력총국이 이 일을 맡았다. 가스확산원심분리 방식으로 농축을 해야 하는데, 아직 원심분리기를 만들지 못하였다. 분당 1만7000번 이상 회전하는 고속 모터, 고압 알미늄 管이 필요한데 아직 자체 제작에 성공하지 못하였다. 일본, 독일, 덴마크에서 器材(기재)를 샘플로 도입하여 연구하고, 자체적으로 대량 제작하려고 애를 쓴다. 일본 기술이 없으면 북한의 핵개발은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싱가포르 등지를 통하여 일본의 정밀 기자재를 많이 수입하였다. 한국군이 쓰는 군통신기기도 싱가포르를 경유하여 수입한 적이 있다. 대형 트럭을 수입해 가서 분해, 핵개발에 쓰이는 부품을 얻기도 하였다>

    그는 북한이 핵과 미사일 개발을 하지 못하도록 국제사회가 PSI(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기구)에 가입, 활동하고 있는 데 대하여 그 결과를 회의적으로 보았다. 북한은 중국선박을 이용하여 물자를 반입하거나 반출하므로 중국이 PSI에 가입, 협조해주지 않는 한 효과가 없다는 것이다. 
     
    군인들의 등에 비수를 꽂은 세력
     
    A씨는 지금 김정일 정권안에서 중대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고 덧붙였다. 

    “김정일이 공식적으로 권력을 승계한 1994년 이후 북한은 제대로 되는 게 없습니다. 정권내의 엘리트들 사이에서 ‘이대로는 안 된다’는 여론이 형성되고 있습니다. 이들은 ‘중국, 베트남, 쿠바도 개방하여 경제발전에 성공하였지 않은가. 그래도 공산당이 계속 집권하고 있지 않은가. 왜 우리는 못한단 말인가’라고 합니다. 이게 김정일에겐 큰 압력이지요. 김정일은 중국이나 베트남과 달리 북한이 개혁 개방으로 나가면 수령지배체제가 무너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개혁 개방으로 우상숭배의 허구성이 폭로되면 정권이 유지될 수 없습니다. 내부로부터 압력을 받으니 김정일은 외부에서 긴장을 조성하여야 할 절박한 필요성을 느끼게 된 것이고, 어쨌든 핵보유국으로 인정받아야 생존할 수 있다는 집념이 더 강해졌습니다. 여기에 기름을 붓듯이 군부에선 ‘전쟁하자’는 이야기를 해댑니다. ‘전쟁하자’고 부추기는 사람은 속으로는 져도 좋고 이기면 더 좋다는 생각이 있어요. 지면 김정일 정권이 무저니고 이기면 남조선이 우리 차지가 된다는 것이죠. 이런 압박이 김정일로 하여금 이상한 형태의 도발을 감행하게 할지 모릅니다.”

    主敵에게 핵무장을 허용한 나라는 신경과민 상태가 되어 “누가 敵의 핵개발을 허용하였는가”라고 눈을 부라리면서 내부의 敵을 찾게 된다. 한국은, 북한정권이 두 차례나 핵실험을 해도 “누가 북한의 핵개발을 도왔는가”라는 문제가 제기되지도 않고 공론화되지도 않는 이상한 나라이다. 국가생존의 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주요직에 너무 많기 때문일 것이다. 북한이 미사일을 쏘고 핵실험을 한 그 순간에, 군인들이 눈에 핏발을 세우면서 NLL을 감시하고 있는 그 순간에, 경찰이 노숙자처럼 거리에서 먹고 자면서 불법시위를 막고 있는 그 순간에 복면한 수천 명의 무장폭도들이 都心을 점거하는 나라가 한국이다. 主敵과 상대하는 국군의 등에 비수를 꽂는 세력이 너무 강성하니 主敵(주적)의 핵개발을 도운 사람들을 찾아내어 단죄해야 한다는 여론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북한군이 백령도에 상륙작전을 하여 수천 명이 戰死하는 사태가 일어나면 그 피의 보복으로서 ‘핵 간첩 사냥’이 일어날지 모르겠다. 
     
    역사를 바꾼 간첩
     
    1945년 7월21일, 항복한 독일의 古都(고도) 포츠담에서 영국의 처칠, 소련의 스탈린과 함께 회담을 하고 있던 트루먼 미국 대통령 앞으로 기다리던 보고서가 들어왔다. 原爆(원폭)개발 맨해튼 프로젝트 지휘관 글로브 장군이 보낸 電文이었다. 

    뉴멕시코주 사막에서 있었던 核실험에 대한 보고였다. 33m 철탑 위에 장치한 핵폭발장치를 터뜨렸더니, 화염은 버섯구름처럼 치솟아 고도 3000m에 달하였다. 수천 t의 모래, 쇠조각이 상공으로 말려 올라갔다. 먼지 구름은 상공 12km까지 솟았다. 섬광은 280km 떨어진 곳에서도 볼 수 있었고, 160km까지 폭음이 들렸다. 

    파괴력을 실험하려고 폭발장소에서 약800m 떨어진 곳에 철근 구조물을 시멘트로 단단히 고착시켜 세워 놓았다. 이 철 구조물은 뿌리가 뽑히고 휘어지고 산산조각이 났다. 철근콘크리트 건물도 핵폭발엔 버틸 수 없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트루먼 대통령은 사흘 뒤 이 정보를 스탈린에게 알려주었다. 그는 지나가는 말처럼 "매우 파괴력이 강한 새로운 무기를 개발하는 데 성공하였다"고 했다. 스탈린은 "일본에 대하여 그 폭탄을 썼으면 좋겠다"라고만 했고, 新武器(신무기)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자는 주문을 하지 않았다. 미국측은 차분한 스탈린의 반응을 보고는 이 사람이 핵폭탄의 역사적 의미를 잘 모르고 있다고 판단하였다. 

    이는 誤判이었다. 스탈린은 뉴멕시코의 핵개발 연구소에서 일하는 스파이를 통하여 핵개발 상황을 자세히 알고 있었다. 그날 스탈린은 애써 무관심한 것처럼 행동하였을 뿐이다. 역사를 바꾼 核스파이는 클라우스 푹스라는 영국 과학자였다. 

    그는 1911년에 독일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라이프치히 대학의 신학 교수였다. 그는 킬 대학에 다닐 때 독일공산당에 가입하였다. 敵의 핵 개발을 돕는 것과 같은 어머어마한 간첩질은 이념적 소신을 가진 자가 자진하여 하는 경우가 보통이다. 푹스도, 뒤에 설명하는 로젠버그 부부도 그러하였으니 한국도 그럴지 모른다.

    푹스는 나치가 집권하자 탄압을 피해 영국으로 망명, 量子力學(양자역학)을 전공하여 실력으로 에딘버러 대학 교수가 되었다. 그는 1942년부터 영국의 原爆(원폭) 개발 작업에 참여하였다. 이때 이미 푹스는 소련군 정보총국(GRU)과 접선하고 있었다. 푹스를 소련 스파이 조직에 소개시켜준 사람도 독일 공산당원이었다. 푹스는 독일군이 소련을 침공하였으니 소련에 정보를 제공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생각을 하였다고 한다. 1943년 푹스는 미국에 건너가 미국의 원폭개발계획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는 플루토늄 폭탄의 핵심 기술인 內爆(내폭)장치 개발에 종사하면서 정보를 소련의 첩보기관에 제공하였다. 
     
    로젠버그 부부 간첩
     
    푹스는 미국이 原爆에 이어 수소폭탄 개발에 착수하자 수소폭탄의 이론적 개념을 적어 소련측에 주었다. 戰後(전후) 그가 제공한 정보 중에 전략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미국의 핵물질 생산량에 대한 통계였다. 당시 미국은 한 달에 100kg의 우라늄과 20kg의 플루토늄을 생산하고 있었다. 소련은 이 정도의 생산량을 가지고는 1950년을 前後(전후)한 시점에서 미국이 핵무장한 소련을 상대로 핵전쟁을 일으킬 순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소련은 1949년에 핵실험 성공). 이런 판단이 한국전쟁에도 영향을 끼쳤다. 스탈린은 미군이 한국전에서 핵무기를 쓸 수 없을 것이라고 자신하고, 김일성을 지원하는 모험을 했다는 이야기이다. 

    스탈린은 이때 미국의 핵 능력에 대하여 또 다른 루트로 보고를 받고 있었다. 당시 영국의 첩보기관 및 외무부 안에는 킴 필비 등 네 명의 간부가 소련을 위하여 일하는 간첩이었다. 그들 중 한 사람인 도널드 매클레인은 미국과 영국의 핵 공동 개발 프로젝트에서 영국측의 창구였다. 예컨대 당시 미국, 영국, 캐나다는 ‘통합정책조정기구’를 만들어 핵무기 관련 정보를 공유하고 있었다. 이 기구 회의에는 푹스도 참여하였을 뿐 아니라 이 기구의 공동 사무총장 중 한 사람이 매클레인이었다. 두 사람의 고급 간첩을 통하여 들어온 정보를 토대로, 스탈린은 맥아더가 한국전에서 原爆(원폭)을 쓸 수 없을 것이란 판단을 하였다고 한다. 이런 판단이 모택동의 중공군 파견에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푹스야말로 세계 역사를 바꾼 간첩이란 이야기를 듣는다. 

    영국과 미국 정보기관은 당시 소련의 암호를 해독하는 베노나(VENONA) 작전을 통하여 푹스를 의심할 만한 단서를 얻었다(영국 정보기관 MI 6의 미국측 연락관 킴 필비는 이 암호해독 작업에 대하여 소련에 알려주었으나 소련측은 이 정보를 활용하면 필비의 정체가 들통 날 것이라고 생각하여 모른 척하였다고 한다). 영국 방첩기관은 1950년 푹스를 신문하여 범행을 자백 받았다. 푹스는 징역 14년을 선고 받고, 9년을 복무한 뒤 풀려나 東獨(동독)으로 건너갔다. 여기서 그는 중국의 물리학자들에게 원폭 기술을 가르쳐주어 1964년에 중국이 핵실험에 성공하도록 도왔다. 그는 동독에서 과학원 회원으로 선출되고 원자력 기술 연구소 책임자로 근무하는 등 좋은 대접을 받다가 동독이 붕괴되기 한 해 전 사망하였다. 

    푹스를 신문한 영국과 미국 정보기관은 그가 해리 골드라는 미국 간첩을 통하여 소련측에 정보를 제공하였음을 알아내고 골드를 체포하였다. 골드를 신문하는 과정에서 미국의 로스 알라모스 原爆(원폭)연구소에서 기계 기술자로 일하던 그린글라스를 간첩으로 붙들었다. 그린글라스는 자신의 형부인 줄리우스 로젠버그가 누나를 통하여 자신을 포섭하였다는 진술을 하였다. 
     
    “핵 스파이는 살인범보다 더 악질”
     
    율리우스 로젠버그는 유태인으로서 미국 청년 공산 연맹원이었다. 공산당원인 부인을 만난 것도 이 연맹 활동을 할 때였다. 1942년, 로젠버그는 미국 공산당 간부를 통하여 소련의 KGB 요원 세메노프에게 소개되었다. 로젠버그는 미국 통신부대의 레이다 기술자로 근무힌 적이 있었다. 세메노프는 로젠버그에게 부탁하여 더 많은 무기관련 기술자들을 간첩으로 포섭하도록 하였다. 로젠버그에게 로스 알라모스에 근무하는 처남을 포섭하도록 시킨 것도 세메노프였다. 

    이 사건에서도 알 수 있듯이 독일과 미국의 공산당원들이 소련을 위하여 核(핵) 스파이 역할을 자진하여 수행하였다. 1941~1945년까지는 미국과 소련이 연합군이었으므로 소련을 돕는다는 것에 대한 죄책감도 덜하였다. 

    1951년 4월 한국전이 한창일 때 로젠버그 부부는 사형선고를 받았다. 어빙 카우프만 판사는 준엄하게 논고했다. 그 요지는 이러했다. 

    "나는 피고인들의 범죄가 살인보다 더 악질이라고 간주한다. 당신들은 러시아가 과학자들이 생각하던 것보다 1년 먼저 핵실험을 할 수 있도록 도왔다. 그리하여 한국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침략전쟁을 벌여 5만 명 이상의 희생자가 생겼고, 백만 명 이상의 무고한 사람들이 피고인들의 반역으로 피해를 볼지 모른다. 피고인들의 반역은 역사의 흐름을 우리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바꿔 놓았다. 우리가 핵무기 공격에 대비한 민방위 훈련을 매일 하고 있다는 것이 피고인들의 반역에 대한 증거이다."

    국제공산주의 운동이 소련의 핵무기를 믿고 한국에서 침략전쟁을 벌였다는 논지이다. 1950년 무렵 핵 스파이로부터 가장 큰 피해를 본 것은 한국이다. 그 한국이 또 다시 북한의 핵무장을 도운 핵 스파이들로부터 피해를 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세계의 좌익 지식인들이 들고 일어나 로젠버그 救命(구명)운동을 벌였다. 사건이 조작되었다는 주장, 유태인 탄압이란 주장이 난무하였다. 프랑스의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 사르트르, 아인슈타인, 교황까지도 이 운동을 지지하였다. 

    로젠버그 부부는 1953년 6월19일에 전기의자에서 사형 집행되었다. 부인은 즉시 죽지 않아 의사들이 추가로 感電(감전)시켜야 했다. 로젠버그 사건을 둘러싼 논란은 공산권 붕괴 이후 그를 관리하였던 소련 요원의 증언, 소련 암호문 해독자료의 공개에 의하여 종지부를 찍었다. 흐루시초르 소련공산당 서기장도 死後(사후) 공개된 자신의 회고담에서 스탈린으로부터 로젠버그가 소련의 原爆(원폭)개발을 앞당겨주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적었다.   
     
    군사비 專用 가능성 알고 송금

    김정일의 핵개발을 도운 한국 사람은 없는가? 한국판 로젠버그는 없는가? 敵(적)의 핵개발을 돕는 방법은 돈, 정보, 기술이다. 그런 정보중엔 “북한이 핵실험을 해도 한국 정부는 국제제재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것도 포함된다. 무엇을 한다는 정보보다 무엇을 하지 않는다는 정보가 더 중요할 수 있다. 스탈린은 한국전쟁중 미국이 原爆(원폭)을 사용할 수 없다는 정보를 얻었다. 전략을 좌우하는 최고급 정보였다. 군사시설 사진을 찍어 보내는 간첩이 아니라 主敵(주적)의 핵개발에 도움이 되는 간첩은 이념적으로 북한정권에 동조하는 고위인사라고 봐야 한다. 푹스와 로젠버그를 중심으로 한 核(핵)스파이들은 자신들의 활동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확신범들이었다. 

    2003년 6월11일 이른바 對北불법송금사건 특검 사무소에 전 국정원 제3차장(對北담당) 김보현씨가 참고인으로 출두하였다. 박광빈 특별 검사보는 제1차 평양회담의 막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그에게 “(북한정권에)돈을 직접 주는 것에 대한 문제점은 있지 아니한가요”라고 물었다. 金(김)씨는 이렇게 진술하였다. 수사기록을 인용한다. 

    “돈을 직접 주는 것은 첫째 국민적 비판여론을 감내하기가 어렵고 둘째 혹시 북측이 군사비로 轉用(전용)할 우려가 있다는 문제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 당시에는 1억불 정도를 주더라도 남북정상회담을 열어서 해빙무드를 조성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판단하였습니다.” 

    이 진술은 앞으로 法的(법적) 쟁점이 될지 모른다. 김대중 정권이 현대그룹을 앞세우고 國情院(국정원)을 시켜서 해외의 김정일 비자금 계좌로 보내준 최소 4억5000만 달러가 군사비로 전용될 가능성을 당시 실무자가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되기 때문이다. 범죄구성에서 필수적 조건인 고의성을 입증할 수 있는 증거이다.
      김대중측이 보낸 4억5000만 달러는 미국 정보기관이 핵과 미사일 관련 자금을 관리하는 은행으로 보는 대성은행 계좌 등으로 들어갔다. 對北(대북)불법송금 사건 특검 수사기록에 따르면 현대상선이 조달한 2억 달러는 2000년 6월9일 북한 김정일의 서기실(39호실)이 관리하는 대성은행의 계좌(중국은행 마카오 지점에 개설되어 있었음)로 송금되고, 현대전자와 현대건설이 조성한 2억5000만 달러는 홍콩과 싱가포르에 있는 金正日의 비밀계좌로 송금되었다.

    현대상선이 조성한 2억 달러 가운데 국정원 직원 김○○의 명의로 중국은행 마카오 지점, 계좌주 「DAESUNG BANK」로 송금한 4500만 달러가 실제 계좌주인 「DAESUNG BANK-2」와 일치하지 않아 송금 처리되지 않는 사고가 발생하기도 했다.

    이 수사기록에 의하면 金大中 당시 대통령은 林東源 국정원장으로부터 對北송금의 실정법상의 문제점을 보고받고, 『정부가 떳떳하게 해야 하는데...실정법에 다소 어긋나더라도』 對北 송금을 하라고 지시한 것으로 드러났다. 對北(대북)송금이 법에 어긋나고 敵(적)을 도울 수 있다는 인식하에서 이뤄졌다는 이야기이다. 
     
    국방부 연구소도 ‘군사비 전용 가능성’ 인정
     
    국방부 산하 한국 한국 국방연구원의 성채기, 박주현, 백재옥, 권오봉 연구원이 노무현 정부 시절이던 2003년 8월에 발표한 논문 ‘북한경제위기 10년과 군비증강 능력’도, 금강산 관광 代價(대가)로 지급되는 달러가 군사비나 對南(대남)공작비로 轉用(전용)될 가능성이 있다고 문제를 제기했었다. 이런 주장이 정부 연구소에서 나왔다는 점에서 증거력이 커진다. 

    연구자들은 이 논문에서 금강산 관광 代價로 現代측이 제공하는 달러는 김정일이 직접 관리하는 '궁정경제'의 관할로 들어가 군사비나 對南공작비로 쓰일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연구자들은 또 "꼭 필요로 하는 국가 전략적 사업이 발생하는 유사시기에는 이 자금이 군사적 목적으로 투입될 중요한 자금원임에는 틀림없다고 보여진다"고 결론 내렸다. 연구자들은 이어서 金正日이 매년 6000~7000만 달러의 비자금을 축적하고 있으며 해외에서 관리되는 규모는 20~40억 달러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지난 5월 말 북한이 두 번째 핵실험을 한 직후 미국 정부는 북한정권의 돈줄을 봉쇄하기 위하여 북한의 두 은행-조선무역은행과 대성은행에 대하여 금융거래를 하지 못하게 하는 유엔결의안을 준비하였다가 중국이 “너무 과격하다”면서 반발하여 철회하는 대신에 일본 한국 등 우방국들과 연계하여 금융제재를 하기로 하였다는 보도가 있었다. 미국 정부가 두 은행을 찍은 이유는 핵과 미사일 자금을 관리하기 때문이란 것이었다. 

    김대중 정권이 보낸 거액의 달러가 핵과 미사일 개발 자금을 관리하는 은행으로 들어갔으니 이런 돈이 핵 및 미사일 개발에 쓰였다고 보는 것은 당연하다. 1998~2007년 사이 김대중-노무현 정권이 거액의 달러를 북한정권에 지급할 때는 북한이 장거리 미사일과 핵무기를 개발하고 있다는 사실이 다 드러난 시절이었다. 핵 개발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도, 핵개발 비용으로 전용될 가능성을 알고도 두 정권이 보내준 달러는 약30억 달러라는 통계가 나왔다. 

    지난 5월 초 李明博(이명박) 정부가 집계한 통계이다. 조선일보 보도에 따르면 김대중·노무현 정부 10년 동안 한국측이 북한정권에 준 현금만 29억 달러(3조6000억원·환율 1240원 적용), 현금과 현물을 더한 對北지원·經協의 총규모는 69억5950만 달러(8조6800억원)로 나타났다고 한다. 이 규모는 같은 기간 중국의 對北지원액 19억 달러의 3.7배, 북한의 전체 수출액 77억 달러의 90%에 해당한다.

    필자는 공개적으로 좌파정권이 10년간 북한정권에 100억 달러의 金品을 퍼주었다고 비판하여왔었다. 이번 정부 통계는 이런 주장이 정확하였음을 뒷받침한다. 밝혀진 70억 달러(금품)는 공식적인 것이고 비공식적으로 北(북)으로 들어간 액수까지 치면 100억 달러說은 사실에 근접한다. 
     
    “핵 및 미사일 개발 자금으로 큰 거 두개” 

    정부 내부 자료에 따르면 한국측은 금강산·개성관광 代價와 개성공단 임금 등으로 29억222만 달러의 현금을 북한에 주었고, 쌀·비료·경공업 원자재 등 現物(현물)로 전달된 규모는 40억5728만 달러로 계산되었다. 식량 270만t과 비료 256만t 등을 유·무상으로 지원하는 데만 32억 달러를 썼다. 

    정부 소식통은 이날 "그동안 북한은 장거리로켓을 개발하는 데 5억~6억 달러, 핵무기를 개발하는 데 8~9억 달러를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며 "남한에서 넘어간 현금이 핵무기나 장거리미사일 등을 개발하는 데 쓰였을 수도 있다"고 했다.

    김정일 정권이 남한으로부터 들어온 30억 달러를 식량구입에 썼더라면 북한에선 한 사람도 굶주리지 않을 수 있었다. 大飢僅(대기근) 기간에 북한정권이 매년 3억 달러만 써 옥수수 200만t씩을 수입하였더라면 굶어죽는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정부 인사가 前(전) 정권이 主敵(주적)의 핵개발을 돈으로 지원하였을 가능성을 피력한 것은 정상적인 국가에선 큰 문제가 된다. 이는 국가차원의 조사, 감사, 수사를 부를 만한 의혹 제기이다. 공직자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반역은 主敵(주적)의 핵무기 개발을 도움으로써 조국을 위기에 빠뜨리는 행위이다. 

    작년 國情院(국정원)의 한 연구소에서 근무중이던 금융인 출신 탈북자 金光進(김광진)씨는 북한대학원 대학교에서 받은 석사 논문 ‘북한 외화 관리 시스템의 변화 연구’에서 중요한 증언을 했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노동당 조직지도부(장성택)에 1억 달러의 현금이 할당되었으며 이는 김정일의 6월11일 ‘말씀’에 따라 당 조직지도부 행정부문 소속 은행인 동북아시아 은행에서 혁명자금으로 관리되었다. 혁명자금 이용에 대한 보고는 한 달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김정일에게 이루어졌으며 자금관리는 ‘611계좌’를 통하여 내가 단독으로 맡아 하였다> 

    金(김)씨는 필자와 인터뷰를 하는 자리에서 이렇게 부연설명을 하였다. 

    “이 1억 달러는 2000년 6월11일 중국은행(Bank of China) 마카오 지점에서 동북아시아 은행의 싱가포르 계좌로 송금되었습니다”

    이 증언은 2003년 對北불법송금 사건 수사로 밝혀진 사실과 부합된다. 김대중 정부가 2000년 6월9~12일 사이 현대그룹을 통해서 4억5000만 달러를 북한으로 보낼 때 현대상선이 조달한 2억 달러는 중국은행(Bank of China) 마카오 지점에 개설된 ‘DAESUNG BANK-2' 명의의 계좌로 송금되었다. 김정일의 비자금을 관리하는 39호실 산하 대성총국의 마카오 지점인 조광무역상사 총지배인 박자병은 入金(입금)상황을 평양의 중앙당 서기실로 보고했고, 그 전화를 한국의 정보기관에서 감청했다. 

    김정일은 남한에서 들어온 4억5000만 달러중 1억 달러를 동북아은행에 보낸 것으로 보인다. 김광진씨는 “북한측은 (김대중측으로부터) 송금 받은 돈을 혁명자금으로 분류하여 黨(당)과 軍(군)에 나눠주었다”고 말했다. 

    동북아시아은행을 통해 관리된 1억 달러는 김정일의 매제(妹弟)인 張成澤(장성택) 당시 조선노동당 조직지도부 행정담당 부부장이 집행을 감독했는데 대동강 맥주공장 건설과 평양시내 닭 공장(養鷄場-양계장) 현대화에 쓰였다고 한다. 나머지 자금에 대해서 김광진씨는 “우리 은행 총재한테서 ‘큰 거 두 개(2억 달러)는 창광 쪽으로 갔다, 한 개(1억 달러) 정도는 군 쪽에 갔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창광은행은 북한노동당 군수공업부 소속으로서 핵무기와 미사일을 포함한 무기생산에 쓰이는 돈을 관리한다. 군으로 들어간 돈은 장비 및 시설 관리에 주로 쓰였을 것이라고 김(金)씨는 말했다. 노무현 정권 때 입국하였던 金씨는 이런 증언을 국정원 신문관에게도 하였다고 한다.
     
    노무현은 왜 BDA를 비호했나?
     
    김광진씨는 "나는 611 자금이 김대중 정권이 보낸 것인지는 몰랐다. 한국에 와서 對北송금 사건 기록을 읽어보고는 거기에서 나온 돈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 전에 1억 달러가 한꺼번에 들어온 예는 없었다"고 말하였다. 김씨의 진술을 토대로 4억5000만 달러의 용처를 추정해본다면 북한동포의 생활 향상에는 1억 달러가 쓰이고 나머지 3억 달러 이상은 우리가 예상하였던 대로 핵무기 개발이나 군사력 증강에 쓰였다는 이야기가 된다. 

    기획재정부는 지난 6월1일부터 단천은행 등 북한의 세 기업에 대하여 금융거래를 금지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이 세 기업은 유엔 안보리가 미사일 발사 시험 이후 제재대상으로 선정한 회사인데, 우리 정부가 실천에 옮긴 것이다. 핵 및 미사일 개발, 그리고 군사력 증강에 이용되는 이 세 회사와 거래하는 한국의 기업은 없다고 한다. 그럼에도 북한정권의 눈치를 보지 않고 북한정권의 돈줄 차단에 한국정부가 참여하였다는 것은 의미가 있다. 뉴욕타임스도 이 기사를 중요하게 취급하였다.

      이 단천은행은 김광진씨가 말한 창광은행이 이름을 바꾼 것이다. 단천은행은, 핵과 미사일 개발, 그 중에서도 특히 미사일 수출에 관련된 일을 주로 한다고 한다. 김대중 정권이 현대그룹과 국정원을 시켜서 보낸 4억5000만 달러가, 미국과 유엔이 핵 및 미사일 개발 관련 자금을 관리하고 있다고 판단한 대성은행 및 단천은행 등으로 들어갔다는 수사결과와 주장이 확보되었다. 여기서, 김대중 정권이 主敵(주적)의 핵무기 개발을 알고도 거액의 不法(불법)송금으로 이를 도왔다는 판단이 내려진다면 그 뒤 국가가 취하여야 할 조치가 있을 것이다. 

    알렉산더 버시바우 전 駐韓 미국 대사는 최근 미국에서 "2005년 노무현-부시 정상회담은 사상 最惡(최악)의 한미정상회담이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는 워싱턴의 한미경제연구소(KEI)가 주최한 강연회에서 駐韓 대사로 在任할 당시의 秘話를 일부 공개했다. 대사는 "노무현 전 대통령과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2005년 11월 경주에서 있었던 정상회담에서 한 시간 넘게 마카오에 있는 방코델타 아시아 은행의 북한 계좌 동결과 관련해 '논쟁'을 벌였다"고 말했다. 盧 당시 대통령은 김정일의 비자금이 관리되고 있는 이 은행에 대한 미국정부의 간접적인 금융 제재조치를 풀어줄 것을 요청하였다고 한다. 부시 대통령은, "미국은 달러를 위조하는 북한을 응징할 권리가 있다. 한국 같으면 어떻게 하겠느냐"라고 짜증을 냈다고 한다. 

    분쟁지역에 대한 무기 수출 부문에 종사했던 한 고위 탈북자는 방코델타은행(BDA)를 여러 번 이용한 사람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BDA는 북한정권이 안심하고 이용할 수 있는 세계에서 유일한 은행이었습니다. 북한 돈을 의심하지 않고 받아주는가 하면 계좌도 열어주고 신용장도 개설해주었습니다. 무기수출, 마약밀매, 위조달러 유통 등 不法 사업의 창구였지요. 물론 합법적 무역에도 써 먹었습니다만 북한이 하는 일중 어디까지가 합법이고 어디부터가 불법인지 알 수가 없어요.”

      이 탈북자는 BDA에 계좌를 갖고 있는 북한의 기업과 은행들의 명단을 줄줄 외었다.
      1. 대성총국(김정일 비자금 관리 39호실 산하 은행. 공산품 취급)
      2. 대흥총국(39호실 산하 은행. 농산품 취급)
      3. 단천무역(군수 공업 부문. 무기수출 전문)
      4. 오륜무역회사(당 체육지도위원회 소속의 무역회사)
      5. 조광무역(대성총국 마카오 지점)
      6. 대성은행
      7. 고려은행
      8. 합영은행(주로 재일교포의 송금을 받아 관리하는 은행)
      9. 조선무역은행 

    이 명단에서도 핵과 미사일 개발에 관련된 조선무역은행, 단천무역, 대성총국의 이름들이 등장한다. 노무현 당시 대통령이 비호할려고 한 BDA는 매우 ‘위험한 은행’이었다. 
     
     主敵의 핵실험에 맞춰 韓美연합사 해체 결정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6년 10월9일 북한이 핵실험을 한 이후 실효적인 대응조치를 전혀 취하지 않았다. 인접한 主敵(주적)이 핵실험을 하였는데도 당시의 한국처럼 행동한 나라는 세계에서 유일할 것이다. 금강산 관광도, 개성공단 사업도, 북한방문도, 무역도 제한하지 않았다. 그는 꼭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으면서 절대로 해선 안 되는 일을 하였다. 戰時(전시)작전권의 二元化(이원화)를 초래하여 전쟁수행을 어렵게 하고 韓美(한미)동맹을 약화시키게 될 韓美(한미)연합사 해체를, 북한의 핵실험과 때를 맞추어 확정지은 것이다. 노무현 당시 대통령은 국민여론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를 강행하였다. 이는 그의 이념적 소신일 것이다. 북한이 핵무장을 하면 한국군의 방어태세를 강화해야 하는데 오히려 약화시킨 그의 이념적 소신은 핵실험을 한 북한에 대한 제재거부와도 연결된다. 노무현 전 대통령 또한 북한의 핵개발을 도왔다는 의심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다. 

    노무현 당시 대통령은 북한이 핵실험을 한 날엔 햇볕정책을 수정할 듯한 태도를 취했다. 그러자 바로 김대중 전 대통령이 반발하였다. 김씨는 핵실험 이틀 뒤 전남대 강연에서 『햇볕정책이 무슨 잘못이냐』며 이렇게 말하였다.

     『對北(대북) 포용정책을 그만두어야 한다는 해괴한 여론이 돌아다닌다. 금강산 관광도 개성공단도 그만두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북한의 핵실험은, 햇볕정책 때문이 아니라 미국이 못살게 굴고 살 길을 열어주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또 『북한의 핵 보유를 惡意的(악의적)으로 무시하고, 압박과 경제제재를 계속하는 것은 오히려 북한의 도발을 조장하는 결과가 될 것』이라며 미국을 비난하기도 했었다. 

    김대중, 노무현 정권 시절 청와대, 통일부 등의 부서에는 친북반미적인 성향의 인물들이 집중적으로 포진되었다. 국가보안법 위반자 등 좌경운동권 출신들도 국가기밀을 다루는 부서나 對北정책 부서에 많이 진출하였다. 좌경인맥이 남북관계에 큰 영향을 미치는 가운데 북한의 핵개발은 남한 공격용이 아니라 자위용이란 희한한 논리가 등장하였다. 노무현 당시 대통령은『북한의 핵과 미사일이 자신을 지키기 위한 억제수단이라는 주장이 일리 있다(2004년 11월12일 발언)』,『북한이 핵을 개발하는 것은 선제공격용이 아니라 방어용(2006년 5월29일 발언)』이라고 했다.
     
      林東源은 대한민국 사람인가?
     
    좌파정권 10년간 국가 지도부의 분위기가 어떠했는가를 짐작하게 하는 문서가 있다. 이 시기 對北정책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던 林東源 전 국정원장은 작년에 나온 ‘피스메이커’라는 외고록에서 도저히 대한민국 국민이라고 볼 수 없는 언어를 구사하였다. 

    <부시 대통령은 북을 '악의 축'이요 '선제핵공격'의 대상이라며 위협하고, 핵의혹을 조작해 제네바 합의를 일방적으로 파기했다. 미국은 국제기구까지 동원해 북측을 압박하고, 쌍무회담을 기피하며 북한이 핵문제의 국제화를 추진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이런 워싱턴의 네오콘들의 방해책동에 맞서 우리 민족은 힘을 합쳐 지뢰를 제거하고 '평화회랑' 건설을 위해 매진했던 일을 이제는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다. 북한은 흡수통일과 북침의 공포증에 시달리며 생존전략을 추구하고 있다>

    <(2000년) 8.15 이산가족 교환방문 후 9월 초 우리 정부는 화해의 상징으로, 북한에 돌아가기를 원하는 비전향장기수 63명 전원을 판문점을 통해 무조건 송환했다. 분단피해자들의 인권을 존중하겠다는 우리 정부의 성숙한 자세를 과시한 것이다. 당연히 냉전수구세력의 송환반대와 방해가 극심했는데, 이들은 "가치관의 혼란 우려" "북측의 체제선전에 이용당할 우려" 등을 들먹이며 "탈북자 및 국군포로 문제와 연계시켜야 한다"는 논리로 송환 반대 여론을 조성했다. 7년 전 이인모 노인을 비롯한 비전향장기수 송환을 반대할 때 들고나온 논리를 고스란히 반복하고 있었던 것이다>

    국군포로의 송환을 요구하는 애국자들을 ‘냉전수구세력’이라고 부르는 인물은 한반도에서 김정일 세력뿐이다. 북한이 핵실험을 한 마당에 미국이 核의혹을 조작하였다고 뒤집어씌우는 사람도 남북한에선 從北(종북)주의자뿐일 것이다. 간첩 잡는 부서의 책임자가 종북주의자 같은 언어를 구사하고 있다. 이런 집권세력이 김정일의 핵개발을 방조하였거나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고 보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젊었을 때 공산주의자가 되면 간첩의 길이 열린다
     
    국민행동본부는 노무현 대통령 재임 시절 그를 내란 및 外患 혐의고 검찰에 고발하였다. 고발장엔 이런 대목이 있다. 

    <좌경적 사상에 충실했던 피고발인은 전향 여부가 불분명한 386주사파 출신 공산주의자 등 親北利敵전력자들을 대거 등용했습니다. 그는 이들로 하여금 國家機密과 國家豫算을 다루게 하는 한편 국가주요 정책의 입안과 추진에 관여케 하여 북한정권에 이롭고 대한민국에 위태로운 활동을 하도록 했습니다. 

    피고발인은 특히 △북한의 對南공작원으로 확정판결된 송00 에 대한 검찰수사를 방해할 목적으로 국회연설을 통해 선처를 주문하는 방식으로 압력을 행사하고(2003년 10월13일), △개전(改悛)의 情이 전혀 없는 재범간첩 민00 가 刑期의 반밖에 채우지 않았는데도 그를 직접 사면 복권시켜 석방한 뒤 북한방문을 허용했으며(2005년 8월15일), △조총련 소속 거물간첩 박용의 국내입국을 허락, 反국가활동의 자유를 부여했습니다(2005년 8월15일). 

    피고발인의 이 같은 행위는 △主敵의 내란행위인 對南적화공작을 방조하는 것인 한편 △적국과 합세하여 대한민국에 항적(抗敵)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386 운동권 출신들은 對南(대남)공작이 먹혀드는 풍요로운 밭이다. 이들이 가진 친북반미 성향은 김정일 정권에 대한 거부감을 삭제시키고, 북한공작원들을 同志(동지)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대학생 시절 좌경이념에 노출된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잘 보여준 것은 1930년대 영국의 캠브리지 대학에 다니면서 공산주의자가 되었다가 소련 첩보기관에 의하여 스파이로 포섭된 4명의 엘리트들이었다. 필비, 매클레인, 버지스, 블런트는 영국정보기관과 외무부에 들어가 엘리트 코스를 밟고 요직에 근무하면서 소련을 조국으로 생각하고 적극적으로 고급정보를 제공하였다. 이념적 소신에 따른 행동이었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이들의 간첩질은 한국전쟁의 향방에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 1950년, 그 운명의 해에 간첩 필비는 영국 해외정보기관(MI 6)의 對美 연락관으로서 미국 CIA와 FBI 최고위층과 자유롭게 접촉, 고급정보를 공유하였다. 같은 시기 필비의 동료인 간첩 버지스는 미국주재 영국대사관의 2등 서기관으로서 고급 문서에 쉽게 접근할 수 있었다. 같은 시기 이들의 동료인 간첩 매클레인은 영국 외무부의 미국 데스크였다. 당시 영국과 미국은 고급정보를 공유하고 있었으므로 이들은 한국전에 대한 미국의 전략정보를 자연스럽게 얻어 소련에 제공하였다. 매클레인은 미 국무부의 고위직에 있으면서 소련에 정보를 제공하던 엘저 히스와 친하였다. 매클레인은 6.25 이전에 히스로부터 입수한 주한미군을 비롯한 해외미군에 대한 정보를 소련측에 제공한 것으로 추정된다. 영국 애틀리 수상은 트루먼 대통령을 만나 그로부터 맥아더 사령관에게 원자폭탄 사용권한을 주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았는데 이 정보도 매클레인에 의하여 넘어간 것으로 보인다. 

    네 명의 간첩중 블런트만 제외하고 3명은 정체가 탄로 나자 소련으로 도망가서 여생을 마쳤다. 소련은 고르바초프 시절 필비를 기리는 우표까지 발행하였다. 
     
    한국판 로젠버그는 누구인가?
     
    좌파정권 10녀간 한국에선 필비와 같은 자발적 간첩이 없었을까? 북한의 핵 및 미사일 개발 관련 자금을 관리하는 은행에 비자금을 송금하고, 핵실험을 해도 달러를 계속 보내주고, 미리 미리 “당신들이 핵실험을 해도 우리는 제재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계속 던지고, 미국이 김정일의 비자금을 관리하는 은행에 제재를 가하는 것에 대하여 집요하게 미국 대통령을 물고 늘어지고, 북한이 핵실험을 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한미연합사 해체 계획을 확정해버리고, 대통령이 나서서 북한간첩을 早期(조기)에 석방, 북한 방문까지 허용하는 이런 분위기 속에서 정말 무슨 일이 일어났던가를 조사하지 않는다면 이건 나라도 아니다. 

    누구 북한의 핵개발을 도왔는가를 조사하려면 국가의 정보 수사 능력이 총동원되어야 한다. 한국은 북한 핵 개발을 막을 수 있었다. 主敵(주적)의 핵무장을 절대로 허용하지 않으려는 국가지도부의 의지가 이스라엘처럼 강하고 韓美동맹에 충직하였더라면 북한의 핵무장을 막을 수 있었다. 실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용기가 부족하여 핵무장을 허용하였다. 

    북한의 핵무장 성공은 한국의 국가적 실패이다.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하여 국가적 반성이 있어야 한다. 청문회, 감사, 조사, 수사는 다시는 이런 실수를 허용하지 않겠다는 결의를 다지는 일이다. 李明博(이명박) 정부는 ‘누가 北核(북핵) 개발을 도왔는가’라는 보고서를 국민들에게 내어놓을 의무가 있다.
      한 사람의 용기 있는 실무자가 역사의 흐름을 바꾼다. 2003년 가을 노무현 당시 대통령이 국회 연설에서 북한노동당 비밀당원 송두율씨에 대한 선처를 호소하고, 국정원 수뇌부와 청와대가 수사에 미온적이었지만 계급정년을 앞둔 수사과장이 “자료가 완벽하다. 법대로 하겠다”면서 밀어붙여, 결국 宋씨의 정체를 밝혀내고 구속기소하도록 하였다. 수사과장 孫씨는 불이익을 각오하였으나 오히려 승진하였다. 林東源의 국정원은 김정일의 해외비자금 계좌로 2억 달러를 송금해주는 얼빠진 짓을 했으나 S 과장의 奮鬪(분투)가 국정원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를 어느 정도 유지시켰다. 一流(일류)국가의 절대적 조건은 반역자와 惡黨(악당)에 대한 응징력과 법치력이다. 조국의 법치주의와 응징력을 무력화시킨 다음 主敵을 도와 핵무장을 하게 한 자를 가려내 처벌할 수 없는 나라는 망하는 게 正義(정의)일지 모른다. 한국판 로젠버그는 누구인가? 국가가 대답해야 할 차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