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일 시대정신 주최로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 19층 기자회견장에서 열린 광우병 파동을 재조명하는 '거짓과 광기의 100일' 토론회에가 열렸다. 이날 '촛불시위 1년 후의 반성'이라는 주제로 발표한  홍성기 아주대 대우교수는 "광우병 촛불사태는 한국민주주의의 '기여'가 아니라 '위기'였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다음은 발제전문.

    촛불시위 1년 후의 반성

  • ▲ 홍성기 아주대 대우교수 ⓒ 뉴데일리
    ▲ 홍성기 아주대 대우교수 ⓒ 뉴데일리

    홍성기 아주대 대우교수

     촛불시위 1년 후

    2008년 여름 실체 없는 유령을 쫓는 것과 다름없던 촛불시위가 한국을 할퀴고 지나간 지 1년이 지났다. 작년부터 수입이 재개된 미국산 쇠고기는 조금씩 판매량을 늘리면서 한때 ‘매우 위험한 물질’로 취급당하던 시절은 이제 지나간 것 같다. 그러나 촛불시위가 지나간 자리에는 아직도 아물지 못한 상처들이 한국사회에 분열의 후유증으로 고통의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촛불시위를 촉발시킨 MBC 을 상대로 제기된 명예훼손과 업무방해 혐의에 대한 수사는 검찰과 간에 힘겨루기를 넘어 ‘언론자유 대 법치주의 논쟁’으로 비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문제의 핵심은 제작자들이 “PD수첩은 누군가의 명예를 훼손하기 위해 객관적 사실을 왜곡해 방송한 적이 없으며 정부 정책을 비판하고 국민 건강권을 지키기 위해 언론의 책무를 다했을 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처럼 오류를 인정하지 않고 정치적 탄압으로 몰고 가는 태도는 이 방영되기 훨씬 전부터 미국산 쇠고기의 위험성을 왜곡․과장해온 몇몇 광우병 전문가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뿐만 아니라 발생 초기부터 촛불시위를 열렬히 지지하였던 한국의 좌파 시민단체와 지식인들도 그들이 뭔가 잘못된 판단에 근거하여 잘못된 행위를 하였다는 반성은 전혀 하고 있지 않다. 차라리 정반대로, 촛불시위는 미국산 쇠고기의 위험성이 아니라 이명박 정부의 일반적인 실정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이 폭발한 것으로 말을 바꾸고 있는 실정이다.

    다만 부터 자칭 광우병 전문가들, 그리고 좌파 시민단체와 지식인들에 이르기까지 이들로부터 한 가지 확인할 수 있는 점은 촛불시위의 정당성에 대하여 더 이상 열광한다거나 적극적인 의미부여를 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는 2008년 8월 14일 <한겨레신문>과의 인터뷰에서는 다음과 같이 촛불시위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우리 역사상, 아니 세계 민주주의 역사상 유례가 드문 엄청난 사건을 만들어낸 것 자체가 승리라는 것이다. 이런 국민승리를 정부가 인정해 6·29처럼 항복선언을 하면 정부가 지면서도 이기는 길이고, 폭력 집회를 유도하고 탄압하면 정권의 몰락을 재촉하는 길이다. (......) 지금은 정부가 촛불이 꺼졌다고 기고만장하는 것 같은데 그런 정권의 앞날은 암담하다. 우리는 느긋한 마음으로 계속 시위할 사람은 시위하고, 미국산 쇠고기 불매운동도 하고, 언론분야에서 싸울 건 싸우면서 또 한 번의 도약을 준비하면 된다.

    그러나 백교수는 2009년 3월 18일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산 쇠고기 안전성 논쟁으로부터는 한 발 빼겠다는 점을 분명히 하면서 일종의 ‘퇴각 시 방어전술’로 전환하고 있다.

    미국산 쇠고기의 위험에 대한 과학적 증거는 양쪽이 다 충분치 못했다고 봅니다. 시위군중의 주장도 과장됐고, 그렇다고 덮어놓고 안전하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고 봐요. 그런데 묘하게 그 문제로 폭발했지만, 근저에 깔린 것은 다른 게 아니었나 싶어요. 인수위 시절부터 정권에 대해 쌓인 거부감과 불신, 거기다가 광우병문제를 가지고 정부가 서툴러서 그랬는지 오만해서 그랬는지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니까, (......) 그것이 광우병문제에 대한 과학적 논쟁이나 대립이었다면 매우 수준 낮은 토론이었다고 볼 수밖에 없지만 핵심은 그게 아니었던 거죠.

    광우병에 대한 과학적 논쟁의 수준이 일반적으로 낮았던 것은 분명하지만, 이 수준 낮은 과장․왜곡을 근거로 촛불시위의 의미를 한 때 전 지구적으로 확장시켰다가 과학적 진실이 드러나자 사후 합리화에 급급한 좌파 지식인들의 수준은 어떠한가?  촛불시위에 관한한 시위 발생 후 1년이 지난 한국의 모습은 ‘春來不似春’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어정쩡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미국산 쇠고기의 안전성에 대한 과학논쟁은 이제 더 이상 국민의 관심을 끌지 못할 만큼 정리되었다는 점에서 봄이 온 듯하다. 그러나 촛불시위의 발생구조를 단순히 몇몇 주요 사건들 간의 인과 관계로 해명함을 넘어서서 현 한국사회의 논쟁풍토의 문제에 대한 구조적 반성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고 그런 점에서 진정 봄이 왔다고는 할 수 없다.

    다른 한편 ‘촛불시위와 민주주의의 위기’에 대한 논의가 촛불시위 열성 지지자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 대강은 한국의 민주주의는 이명박 정부 하에서 심각한 위기에 빠졌고, 그 해결책으로 직접민주주의 혹은 참여민주주의의 한 형태로서 촛불시위가 구세주 역할을 하였다는 내용이다. 여기에 대하여 최장집 교수는 민주주의의 근간은 정당정치에 의한 대의민주주의에 있으며, 자칫 과열양상을 띄기 쉬운 직접민주주의는 보수세력에 의한 파시즘의 출현을 불러올 수 있다고 경고하였다. 좌파 지식인들 사이의 이 논쟁이 도착(倒錯)인 것은 촛불시위가 위기에 빠진 한국 민주주의의 구원자가 아니라, 바로 한국 사회를 위기에 빠뜨렸다는 점에 있다. 왜냐하면 촛불시위의 발생 동기도 허위였고, 촛불시위를 통해 실질적으로 이룬 것도 없기 때문이다. 차라리 촛불시위가 없었다면 일어나지도 않았을 분신자살 2건, 경찰과 시위대의 부상자 속출, 그리고 천문학적인 액수의 경제적 손실이 있었을 뿐이다. 민주주의 사회를 위기에 빠뜨렸다는 것은, 민주주의 사회의 그 무엇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았다는 점에 있다. 이런 점에서 굳이 촛불시위의 긍정적인 측면을 찾는다면 “한국의 민주주의가 결코 생각만큼 튼튼한 기반위에 서있지 않다”는 사실을 그 촛불시위 자체의 광기로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민주주의의 무엇이 와해됨으로써 촛불시위가 발생한 것일까?

    전문가가 왜곡하는 사회

    촛불시위를 일종의 사회병리현상으로 파악한다면, 우리는 잠복기, 발병, 진행의 3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촛불시위의 잠복기는 멀리 보면 2003년 12월 미국에서 첫 번째 광우병소가 발견되었을 때부터, 짧게 보면 2005년 6월 방미한 노무현 전 대통령이 한미 FTA의 사전작업으로 “미국산 쇠고기 수입재개 문제를 귀국하면 즉시 해결하도록 하겠다”고 약속하면서 시작되었다. 이  때부터 10명이 채 안 되는 자연과학 전공자들이 광우병 전문가로 나서면서 지속적으로 미국산 쇠고기의 위험성에 대하여 주로 좌파언론을 통하여 매우 과장된 주장을 하고 나섰다. 공중파가 아닌, 영향력이 제한적인 좌파 매체의 한계로 인해 이들의 주장이 전 국민에게 급속도로 번진 것은 아니지만, 이 기간 내의 여론조사 결과를 볼 때 이들의 주장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꾸준히 늘어갔다.

    이 자연과학자들이 미국산 쇠고기의 위험성을 왜곡, 과장한 이유가 한미 FTA의 저지와 관련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이들은 미국정부는 미국산 쇠고기의 전면 재수입을 한미 FTA의 비공식적 전제조건으로 요구하였음으로, 미국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한미 FTA 체결도 실패할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처럼 정치적 이유만으로 이들의 비과학적 주장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 우선 이 왜곡․과장을 본인들 스스로 ‘진심으로’ 믿었다고 보기에는 이들이 자격을 갖춘 자연과학자라는 점에서 설득력이 없다. 다른 한편 설사 이들이 목적을 위해서는 어떠한 수단도 정당화될 수 있다고 믿었다 하더라도, 자연과학자가 비과학적 주장을 계속할 경우 학자로서의 신뢰성을 상실한다는 문제가 있다. 결국 자연과학적 왜곡․과장도 특정 이념집단의 목적에 부합하면 마음대로 할 수 있고 또 받아들여지는 정보생산과 소비의 메카니즘이 있다는 결론을 피할 수 없다. 우리는 이를 “전문가-언론-독자-이념 복합체”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기왕의 왜곡 사례는 이미 다른 글에서 여러 번 거론되었다. 그러나 광우병 전문가라는 자연과학자들의 주장이 얼마나 심각한 사실 왜곡이라는 점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기왕의 사례보다 최근의 사례를 살펴보는 것이 더 도움이 될 것이다. 2009년 4월 8일 우희종 서울대 수의대 교수는 한겨레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피디수첩 보도가 옳았음이 증명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왜냐하면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지난달 14일 다우너 소 도축을 금지하도록 한 것은 그동안 미국의 (광우병 통제) 체제가 안전하지 않았음을 입증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 의 제작진들도 다우너 소를 광우병소로 몰고 간 2008년 4월 29일 방송내용이 결코 왜곡이 아니라는 근거로 미국의 ‘다우너 소 전면도축금지조치’를 들고 있다.

    얼핏 보아 매우 그럴 듯한 내용이다. 아마 “미국정부도 자국의 광우병 통제 체제가 안전하지 않음을 인정하고 있는 마당에 한국정부가 무슨 낯으로 미국소의 안전성을 강변하느냐는?”는 생각과 함께 “부시정부와 오바마정부 간의 양심의 차이”도 은연 중 전제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짧게 줄여 말하자면 지난 2009년 3월 14일 미국정부의 ‘다우너 소의 전면 도축 금지조치’는 광우병 통제조치를 강화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이 조치는 2008년 2월 미국 역사상 가장 규모가 컸던 쇠고기 리콜사태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이 사건은 미국의 동물보호단체 <휴메인 소사이어티>가 캘리포니아의 한 도축장에서 몰래 찍은 동물학대 동영상이 공개되면서 미의회 청문회로 이어진 것이 그 원인이다. 바로 이 ‘광우병 소’라고 지칭한 바로 그 장면이다. 미국 정부는 동영상이 공개된 직후 이 사건을 조사한 결과, 현재의 다우너 소 규정이 별 이익 없이 복잡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즉 주저앉는 증상을 보이는 다우너 소는 모두 도축 금지되지만, 검사 후에 다리가 부러지는 등 외상에 의해 주저앉는 소의 경우에는 수의사가 다시 판정하여 도축여부를 결정한다는 것이 기존의 ‘특정위험물질 규정’이었다. 문제는 이처럼 이중 검사 규정을 통해 ‘재검사 후 도축되고 식용된 다우너 소’의 수가 2007년 도축된 3400만 마리 중 불과 1000마리로서 0.003%가 채 되지 못하다는 점이다. 이런 이유로 미국 농무부장관 에드 새펴(Ed Schaffer)는 2008년 5월 20일 성명(0131.08)을 통해서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식품수급에서 소비자의 신뢰를 유지하고  안전규칙에 대한 오해를 제거하기 위하여, 그리고
    동물을 인간적으로 다루는 것을 촉진하기 위하여 나는 1차 검사 후의 다우너 소 도축을 전면금지하는 조치를 도입함으로써 이 문제를 간단히 만드는 것이 건전한 정책이라고 믿습니다.

    미국 농무부장관은 이 성명을 작년에 발표하여 특정위험물질 규정의 개정을 공고한 후, 전문가, 단체, 국민들의 반응을 참작하여, 올해 3월에 오바마 미대통령이 개정안을 국민에게 공식발표한 것이다. 그러나 개정의 배경은 어디까지나 ‘별 이익 없이 복잡한 규정의 단순화’에 있지 ‘광우병의 위험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아니다. 우교수는 이처럼 규칙개정의 맥락을 완전히 도외시하여 마치 다우너 소가 처음으로 도축 금지된 것처럼 오도하였고, 의 제작진들은 아직도 왜곡에 왜곡을 거듭하고 있는 것이다.

    우교수의 주장 중에서 더욱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오역임이 밝혀진 아레사 빈슨의 잘못된 병명을 계속 문제없다고 강변하고 있는 점이다. 즉 크로이츠펠트-야코프 병(CJD)을 의 자막에서 인간광우병(vCJD)으로 번역한 것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CJD(크로이츠펠트야코프병)-vCJD(변형크로이츠펠트야코프병·인간광우병) 자막 오기 논란’에 대해 우 교수는 “vCJD는 CJD의 4종 가운데 하나다. 한국에서 별개인 것처럼 얘기하지만 그렇지 않다. 더욱이, 엄밀한 학계에서도 용어를 문제 삼아 징계까지 하는 사례는 없다”고 밝혔다.

    우리는 도대체 이런 주장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지 난감하지만, 우교수의 주장을 따르자면 다음과 같은 가상적 상황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어야만 한다:

    종양이 발견되어 조직검사를 통해 확진을 기다리고 있는 어떤 환자에게 병원직원이 “악성종양이 발견되었다”고 하자, 심약한 환자는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죽었다. 그러나 조직검사 후 확진을 하고 보니 양성종양이었다. 환자의 가족이 병원 측에 항의하자, 담당의사는 “악성 종양도 종양 중의 하나다. 별개인 것처럼 얘기하지만 그렇지 않다. 엄밀한 학계에서도 용어를 문제 삼지는 않는다”며 병원은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다고 변호하였다.

    분류(taxonomy)가 학문의 기초인 생명과학을 전공한 학자가 이런 황당무계(荒唐無稽)한 이야기를 공개적으로 하더라도 아무 문제도 일어나지 않는 곳이 현재 한국이다. 특별히 생명과학을 전공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상위개념’과 ‘하위개념’ ‘유(類)’와 ‘종(種)’의 구별이 사라지면 큰 혼란이 온다는 것을 상식으로 알고 있다. 마치 “견백동이(堅白同異)”의 논란을 보듯 우교수의 주장은 이해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런 황당한 주장이 받아들여지고 있다. 앞에서 잠깐 언급하였듯이 한국에는 의도적이든 의도적이지 않던 광우병 전문가들의 공개적 왜곡을 무조건 퍼뜨리는 언론들과, 이러한 왜곡을 기꺼이 이해하고 믿는 계층이 존재하고, 나아가 이 언론들과 독자층은 이들의 견해에 ‘전문가적 권위’를 부여하는 “전문가-언론-독자-이념 복합체”가 존재하여 왔다. 구조적으로 볼 때 도 이런 예의 하나에 불과하다.

    사실의 파편화를 통한 광우병 심리전

    10명도 채 안 되는 ‘전문가’들의 지속적인 왜곡․과장이 열성적인 독자층을 넘어서 국민들 전체의 의식을 마비시키기 위해서는 좀 더 적극적인 전술이 요구되었다. 그것은 우리가 ‘사실의 파편화’ 혹은 ‘사실의 탈맥락화’라고 불러도 무방한 방법이다. 이 방법의 요체는 그 자체로는 미국산 쇠고기의 위험성을 전혀 함축할 수 없는 객관적 사실들의 맥락을 벗겨 파편화한 후에, 이들을 모아 재조립하여(montage) 강력한 논증을 만드는 데에 있다. 예를 들어 미국산 쇠고기가 위험하다고 한국의 광우병 전문가들이 제시한 이유들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1) 미국에서 광우병소가 발견되었다.
    2) 미국은 전체 도축소의 0.1%만 검사한다.
    3) 30개월 미만의 소에서도 광우병이 발견되었으며, 한국은 30개월 이상도 수입하고자 한다.
    4) 살코기에도 광우병 원인물질인 변형 프리온이 들어 있다.
    5) 광우병 발병에 필요한 변형프리온의 최소량은 열려 있다.(매우 적은 양으로도 소는 감염된다.)
    6) 인간광우병환자는 100% M/M형이고 한국인의 95%가 M/M형 유전자를 갖고 있다.
    7) 인간광우병의 잠복기는 최대 50년까지 예상된다.
    8) 유럽의 특정위험물질 규정이 미국보다 엄격하다.
    9) 유럽은 미국의 쇠고기를 수입하지 않고 있다.
    10) 광우병과 인간광우병에 대해서는 아직 과학적으로 모르는 것이 상당히 있다.

    위의 모든 주장들은 사실이다. 여기서 “수입된 미국산 쇠고기가 광우병 병원체를 포함할 수 있다”, 나아가 “미국산 쇠고기는 매우 위험하며, 이런 위험한 물질을 수입하여 국민에게 먹으라고 하는 정부는 정상이 아니다”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차라리 그런 사람이 정상이 아니다. 그러나 위의 10가지 사실 모두 원래의 맥락에 놓고 보면 어느 하나 미국산 쇠고기가 위험하다는 주장을 함축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유럽이 미국산 쇠고기를 수입하지 않는 이유는 유럽과 미국 간의 오래된 호르몬 분쟁의 결과이며, WTO에 의해 유럽이 패소하였다. 그러나 이런 사실들의 원 맥락을 찾아나서는 것은 결코 일반 국민이 할 수 있는 일들이 아니다. 그것은 전문가나 특별히 이 문제를 집요하게 천착하는 사람들에게나 가능한 일이다. 광우병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은 바로 이런 사실들의 원 맥락을 국민에게 알기 쉽게 설명해 주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일부 전문가들은 정반대의 일을 하였다. 일반 국민이 미치지 않는다면 어떻게 이들의 주장을 믿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사실 어린 여중생들을 청계천으로 몰고 간 ‘광우병 괴담’은 그 자체가 성인이나 지식인들이 믿기에는 워낙 황당무계하여 곧바로 소멸될 수밖에 없었다. 정작 위험한 것은 전문가에 의해 탈맥락과 파편화를 거쳐 재조립된 위와 같은 사실들로서, 나름대로 합리적으로 사고한다고 스스로 믿는 사람들도 이들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는 힘들다. 이처럼 일련의 사실로부터 거짓 결론을 끌어내어 확고한 근거를 갖고 있는 주장처럼 퍼뜨리는 것은, 내용적으로나 형식적으로 적국의 군인과 국민을 회유하기 위한 ‘심리전(psychological warfare)’에서 허위정보(disinformation)를 전파하는 방식과 사실상 동일하다. 미국산 쇠고기의 안전성에 대한 의 충격적 왜곡·과장도 실은 제작진 자체의 판단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수많은 주제를 다루는 시사프로그램의 제작PD들이 전문가 자문 없이 고도의 전문성이 요구되는 미국산 쇠고기의 안전성을 평가한다는 것은 불가능할뿐더러, 실제 방송 내용을 보더라도 국내외 전문가들의 자문을 받고 있다. 또 왜곡된 3개의 주제인 ‘다우너 소의 광우병 위험’, ‘아레사 빈슨의 병명’ 및 ‘한국인의 M/M 유전자형의 인간광우병 민감성’은 이미 2008년 2월경에 한국의 광우병 전문가들에 의해 거의 비슷한 수준으로 왜곡되어 주장된 바 있었다. 따라서 오역, 과장이 중첩되어 폭발적인 영향력을 발휘하였고 결국 촛불시위의 도화선이 된 것은 사실이지만, 촛불시위 발생의 전 과정을 볼 때는 대국민 심리전이 극적으로 성공한 것에 불과하다.

    공식적 권위의 와해와 사적 권위의 난립

    이 방영되기 불과 몇 달 전까지 집권했던 노무현 정권시절, 농수산부와 식품의약품안전청, 국립수의과학검역원 등 국가에 의해 그 권위가 보장되어 있던 전문기관들은 “미국산 쇠고기의 안전성”에 대하여 애매한 태도를 취해왔다. 그것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미국산 쇠고기 수입재개를 한미FTA 비준의 지렛대로 사용하기 위하여 취했던 이중적 태도에 기인한다. 공식적으로는 한미FTA와 별개로 진행됐던 쇠고기 수입협상에서 미국산 쇠고기의 안전성을 인정하였을 경우, FTA비준과는 무관하게 수입재개를 해야 하고, 만일 미국산 쇠고기가 위험하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하였을 경우에는 한미 무역분쟁과 함께, FTA비준의 지렛대를 잃어버리게 되기 때문이었다.

    이명박 정부는 이런 이중적 태도를 ‘先供後得’의 정신으로 ‘과감히’ 버리고 분명한 태도를 취하였다. 이미 미국산 쇠고기는 위험하다는 생각이 상당수 국민들의 잠재의식에까지 들어간 상태에서 한국정부는 용감하게도 위험소통의 과정을 ‘과감히’ 생략하고 “미국산 쇠고기의 안전성”을 인정함과 동시에 한미쇠고기 협정을 타결했다. 뭔가 먼저 줄 때는 화통하게 주는 것이 받는 자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 더 많은 수익창출을 할 수도 있다고 계산했을 것이다. 다만 이 계산은 MBC 과 같은 한국 좌파언론이 이런 좋은 소재를 방치하고 있는 순간에만 -약 10여일 남짓 했다-통할 수 있었다.

    다른 한편, 노무현 정권의 이중적 태도로부터 벗어나,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과학적 권위를 한국의 공식기관들이 인정하는 순간 이들은 그나마 근근이 유지하고 있던 권위마저 순식간에 잃어버리게 되는 역설적 상황에 빠지게 되었다. 그것은 말을 바꾼 사람들을 더 이상 신뢰하지 않는, 일종의 ‘양치기 소년 효과’라고 볼 수 있다. 이제 미국산 쇠고기에 대한 논쟁에서 국가의 공식적 기관들의 판단은 더 이상 확고한 배경지식으로 사용될 수가 없었다. 그 생생한 사례가 바로 2008년 5월 2일 농림수산식품부와 보건복지가족부의 합동기자회견인 “끝짱 토론”이었다. 이때까지만 하여도 공식 기관의 전문가들은 자신들의 권위를 전제하고 또 권위를 회복하려고 하였지만, 이들이 마주친 것은 정부의 말 바꾸기에 대한 거의 조롱에 가까운 질문들이었다. 길지만 인용할만한 가치가 있다.

    같은 관료들이 국민건강에 관한 정책의 일관성을 지키지 못한다는 지적도 제기됐다. MBC 임명현 기자는 두 가지 사례를 들어 다음과 같이 밝혔다.

    #1 “이 단장이 바뀐 것 없이 정책이 추진된다고 했는데 자세히 보면 2, 3년 전보다 많이 달라졌다. 우선,  우리 복지부에서 낸 전염병 예방지침서만 봐도 ‘뇌와 척수를 먹지 말아야한다, 광우병에 감염됐을 가능성이 매우 높은 부분이다, 이 부분을 먹으면 매우 위험하다’고 나와 있다. 그런데 불과 두 달 만에 이게 어떻게 안전해질 수 있느냐.”

    #2 “그리고 지난해 11월에 안전성을 검토했다고 작성된 문서에는 현재의 방역기준보다 더 강화해서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재개할 경우 더 강화된 조건으로 들여야 된다고 표시가 돼 있다.”

    #3 “심지어 국제수역사무소(OIE) 총회에 다녀와 낸 농림부 보고서를 보면 뇌·척수는 말할 것도 없고 ‘살코기와 혈액도 위험하다’는 일본의 강력한 주장에 우리 정부도 같은 입장을 취했고, 이 때문에 이 부분도 수입에서 안 된다는 식으로 그렇게 보고서가 돼 있다. 불과 3년이다. 어떻게 같은 일을 추진해온 공무원들이 이렇게 순식간에 입장을 바꿀 수 있느냐.”

    이에 대해 이상길 단장은 “일반 국민이 공감할 내용”이라면서도 “2005년 5월 살코기와 혈액이 위험하다고 한 것은 검증되지 않은 실험실의 연구결과를 토대로 방어적 차원에서 한 것이고, 이후 논의과정에서 국제적 검증이 안 됐다. 30개월 월령제한을 푼 것도 우리의 주장이 국제수역 사무국의 통제국 지위 결정을 뒤엎을 만한 과학적 근거가 없어 협상에서의 어려움이 있었다”고 답했다.

    이 끝짱 토론에서 권위의 전도와 이전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준 것은 한 기자의 첫 질문이었다. “30개월이 넘는 소는 우리나라 마장동 도축장 같은 경우 3등급 이하로 취급하는데 이것을 왜 지금 수입하면서 하수처리장의 입장이 됐느냐?” 이런 질문을 해당 부처 장관들과 정부기관의 전문가들이 참여하고 TV가 생중계하고 있는 공식기자회견에서 당당히 할 수 있다는 것은, 첫째 국가기관의 권위가 완전히 땅에 떨어졌다는 점, 둘째, 또 다른 전문가들의 왜곡된 주장이 광우병과 인간광우병에 관한 새로운 기준이 되어버려, 대중에게 사실을 전해야 할 기자들이 비판적인 사고를 하기는커녕 대중사회에서 일종의 지적 대량살상무기(WMD)로 변신하였다는 점이다.

    국가의 공식적 권위가 무너진 상태의 빈 공백을 채우는 것은 각종 사적 권위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인간의 의식주는 한 시라도 멈출 수 없는 것으로서 국민들은 그 어떤 판단기준을 요구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바로 그런 이유로 의식주의 안전문제는 그 자체는 정치적이지 않지만 엄청난 정치적 파급효과를 불러일으킨다. “조선인이 우물에 독약을 풀었다”는 관동대지진시 일제의 허위정보로부터 유태인 도축의 잔인성의 문제를 연결시킨 나치의 선전영화 “영원한 유태인(Der ewige Jude)”에 이르기까지 모든 선동자들이 인간 의식주 문제를 이용하여온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 만큼 의식주의 영역에서 국가의 공식권위가 무너진다는 것은 그 어떤 통치제도를 막론하고 파멸적 결과를 갖고 온다.

    실제로 촛불시위가 촉발되고 식품안전에 대한 공식적 권위가 무너진 이후, 미국산 쇠고기의 위험성을 과장하였던 광우병 전문가들이 논쟁의 판세를 장악할 수 있었다. 이들의 입장은 공식기관과는 달리 정권이 바뀌었어도 수년간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는 점에서 국민들의 지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 때문에 지금까지 보수언론에는 거의 소개되지 않았던 이들의 목소리는 과 촛불시위를 통해서 순식간에 모든 국민들에게 강한 영향력을 미치기 시작했다. 설상가상 미국의 몇몇 시민단체들도 강한 어투로 미국산 쇠고기의 위험성을 지적했다. 예를 들어 미국산 쇠고기를 수입하여 먹는 한국인들은 일종의 “실험동물”이라는 경고가 그것이다. 이러한 자칭 전문가들의 견해는 한국의 발달된 인터넷 매체와, 토론사이트, 시민단체, 블로그 등을 통해 어마어마한 속도로 확대재생산 되면서, 권위의 이동이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이제 미국정부와 한국정부의 공식기관 그리고 국제기구도 더 이상 한국국민에게는 ‘마지막 진실’을 이야기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런 추측의 근거야 “미국 축산자본의 이익을 위해”, “신자유주의를 위해” 등등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었다. 더 중요한 점은 이들이 권위의 이동을 의식하였고 또 의도하였다는 점이다. 우희종 교수는 한 강연에서 황우석 논문조작 사건의 경우 황교수는 「Science」라는 학술지의 국제적 권위를 내세웠고, 광우병 사태 시 한국 정부는 OIE(국제축역사무국)의 권위에 의존하였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권위’와 ‘권위주의’와의 경계가 흐려짐을 볼 수 있다.

    지금 돌이켜 보아도 한미쇠고기 협상은 물론, 촛불시위에 대한 이명박 정부의 태도는 무책임했다. 전자와 후자의 경우 모두 이명박 정부는 국민들과의 적극적인 위험소통을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이명박 대통령이 ‘열병과 광기의 소용돌이를 인위적으로 제압하느니 스스로 소멸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더 현명하다’는 인생의 경험에 의지하였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의식주에 관한 국가의 공적 권위란 심각한 도전을 받았을 때, 정권의 안위와는 무관하게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사실과 적절한 사실해석의 확보를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바로 이런 주관성의 해일 앞에서 어려운 시기를 극복해야 객관적 공신력과 권위를 확보할 수 있고, 사적으로 하기에는 너무 위험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가의 공적 권위가 해야 할 일을 촛불시위 당시에는 개인들과 사적 집단이 대신 해야만 하였다. 

    공적권위의 붕괴와 민주주의의 위기

    우리는 흔히 민주주의가 실현되었는지 여부를 권위주의 정권의 소멸, 언론과 사상의 자유 및 각종 정보에 대한 개방성 여부에서 찾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 조건들로부터 우리가 확보할 수 있는 것은 ‘진실을 찾고자 하는 논쟁의 개방성’이지 ‘진실을 찾을 수 있는 논쟁의 생산성’은 아니다. 왜냐하면 민주주의는 대중사회의 하나로서 누구나 원칙적으로 논쟁에 참여할 수 있는 자유가 있지만, 대중 각각이 모든 논쟁의 주제나 논쟁 자체에 대하여 판단할 수 있는 충분한 배경지식을 갖고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대 사회가 무한정한 토론의 자유가 있다고 해서, 또 인터넷과 같은 소통공간에 참여하는 익명의 대중 속에 전문가들이 있을 확률이 높다는 점만으로는 부족하다.

    모든 사회에서, 그러나 특별히 민주주의 사회에서 논쟁의 주제와 논쟁에 대하여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배경지식을 제공하는 공적 권위의 중요성이 두드러진다. 이러한 권위들을 우리는 일종의 “고정점”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논쟁 당사자들이 모두 동의할 수 있는 고정점 없이는 어떠한 논쟁도 평행선으로 흐를 수밖에 없으며, 결국 다수의 지지자들을 확보하기 위하여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말과 형식만 논쟁이지 실은 대중을 확보하기 위한 진지와 고지싸움으로 바뀌게 된다. 이때 공적인 권위가 무너지면 사적인 각종 집단이 이념과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권위 쟁취를 위해 몰려들게 마련이다. 특히 현재 한국에서는 촛불시위를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서 일어났던 사건을 지칭하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모든 운동의 기본도구로 일반명사화 하는 경향이 농후하다. 정치적으로 민감할 수 있는 사건이 일어나면 이념집단이나 이해집단에 의해 바로 ‘사적 진실’을 확보하기 위하여 사적 권위를 의미 하는 ‘진상규명위원회’의 조직과 함께, 진상이 규명되기도 전에 이미 ‘대책위원회’가 마련되고 동시에 촛불시위가 시작된다. 사실판단과 이념․이해관계의 추구가 동일한 집단에 의해 일어나면서, 이해관계의 추구에 사실판단을 맞추는 것이 현재 한국사회의 특징이 되어버린 것이다. 친북좌파성향의 진보연대는 촛불시위가 일어나자마자 호기를 놓치지 않고 광우병 대책회의를 조직하여 이명박 정권의 약화 내지는 와해를 목표로 촛불시위를 이용하였다. 이처럼 이념과 이해관계의 경계선은 열린사회를 순식간에 이 경계에 따라 닫힌 자폐의 섬들로 변화시킨다. 즉 자신들의 견해를 반박하는 어떤 현실적 증거나 문헌도 ‘열린 사회속의 폐쇄성’을 뚫지 못하며, 토론의 형태를 취했지만 실은 세뇌과정을 의미하는 단순 반복이 도처에 난무한다. 촛불시위 때 포탈 다음(Daum)의 토론카페 아고라가 바로 이런 역할을 하였다.

    이 폐쇄성이 난공불락의 요새인 것은 정보차단의 주체가 외부권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또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이 폐쇄성이 이념집단들 간의 일상적 진영사고와 다른 점은 이념집단 밖의 대중들을 대상으로 빠르고 공격적인 포섭행위를 시도하기 때문이다. 지난 촛불시위에서 이런 역할은 일종의 되먹임 구조로 이루어졌다. 전문가 집단에서 언론으로, 언론에서 대중으로 위기의식이 확장되면, 대중의 지지를 노리는 정치가들이 대중들의 위기의식과 행동을 찬양하며, 이것은 다시 최초의 전문가 집단의 견해가 옳음을 방증하는 증거로 언론에 소개되고 이런 과정이 반복된다. 그러나 이런 회오리성 되먹임 구조를 통해 확보된 권위는 전문가들 간의 과학적 논쟁을 통한 긴 호흡의 권위와는 달리 얕은 지식을 단순 요약한 Q&A, 즉 ‘교리문답’의 형태라는 점에서 유사종교적 특징을 모두 지닌다. 놀랍게도 지난 촛불시위의 경우에는 기존의 종교인들도 광우병 위험이라는 유사종교적 유령의 축출을 기도하면서 동시에 촛불시위의 유지를 위해 유령의 강림을 기원하는, 이중적 의미에서 성속(聖俗)이 뒤섞인 허위(虛僞)의 장관을 연출하였다. 이런 사회 속에서는 급격한 사회변혁의 순간에 관찰되는 사회의 구성원 대부분의 의견일치와, 외연을 최대로 확장시킨 자폐적 사회와의 구별이 불가능하다고 보일수도 있다.

    이 구별 불가능성이 바로 “열린 사회속의 폐쇄성”이 갖는 위험성이다. 공동의 배경지식으로서 권위 있는 고정점이 특별히 중요한 이유는 민주주의 사회가 대중사회의 한 형태이지만, 대중사회가 곧 민주주의 사회가 아니라는 점에 있다. 여기서 대중사회란 국가 권력의 창출에 있어서 어떤 절차와 방법이든 대중의 지지가 중요한 사회를 의미한다. 따라서 포퓰리즘이나 파시즘, 문화혁명기의 중국도 대중사회의 한 형태이다. 그러나 민주주의 사회에서도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대중의 지지를 확보하려는 시도는 대중이 바로 권력창출의 근원이라는 점에서 상존하는 위험성이다. 이때 그 수단이 막걸리이든, 돈봉투이든 아니면 과학과 진실의 이름을 뒤집어씌운 선동의 당의정이든 민주주의를 비민주주의적 대중사회로 밀어내는 본질적 위협이라는 점에서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사실 막걸리나 돈봉투 보다 더 위험한 것이 선동이다. 그 이유는 민주적 권리를 포기한 대중의 무감각이나 자괴감 대신 선동에 넘어간 대중들은 대개 외부의 특정세력에 대하여 ‘너희들은 절대 그르고 우리는 절대 옳다’는 독선에서 오는 증오로 한 사회를 견디기 힘든 고통의 장으로 만든다. 사회는 이런 고통을 오랫동안 참기 싫어한다. 사회의 이념 이해 집단들은 대중에게 고통의 원인으로 지목된 특정세력을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사회에서 축출할 것을 권유하고, 대중은 그렇게 함으로써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믿고 행동하지만, 바로 그 행동이 민주주의의 심각한 왜곡임은 이제 명백하다. 다른 한편 열린 사회속의 폐쇄성은 ‘원칙적으로’ 이념의 좌우를 가리지 않는다는 점에서 ‘촛불시위 1년 후의 반성’의 주체는 아마 국민 모두가 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