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8 광주항쟁을 주제로 한 영화 '화려한 휴가'가 왜곡이 심하며 군에 적개심을 가지게 하는 영화라고 비판했던 조갑제 전 월간조선 대표가 '화려한 휴가'를 5.18 당시 전남도청을 지켰던 공수 11여단장 61대대장 출신 안부웅씨와 본 소감의 글을 자신의 홈페이지에 18일 게재해 주목을 끌고 있다.

    조 전 대표는 1980년 5월 당시 국제신문 기자로서 회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광주항쟁을 취재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안씨는 조 전 대표가 1988년에 월간조선 기자로서 ‘공수부대의 광주사태’(그해 7월호 게재)를 취재할 때 만나 인연을 맺었다.  안씨는 1980년 5월21일 낮 전남도청 앞에서 공수부대원들이 장갑차와 트럭 등을 몰고 돌진해오는 시위대를 향해서 발포했을 때 부대의 지휘관이었다.

    다음은 조 전 대표가 게재한 글 전문

     空輸대대장과 함께 본 '화려한 휴가'
    운명의 그날 전남도청을 사수했던 공수 11여단장 61 대대장 출신 안부웅씨는 영화를 보고나와 "완전히 만화네요"라고 했다.


    보기 싫었던 영화

    ‘화려한 휴가’는 정말 보기 싫은 영화였다. 너무나 우호적인 언론보도를 통해서 영화의 의도와 내용이 알려져 버렸기 때문이다. 좌파-어용 언론뿐 아니라 정상적인 언론도 이 영화에 대해서는 好評 이외엔 일체의 비평을 삼가고 있다는 점이 무엇보다도 이 영화의 성격을 설명해주고 있었다. 김대중, 박근혜, 노무현 대통령이 이 영화를 보았다는 사실이 나를 냉담하게 만들었다. 대선을 앞두고 개봉되어 정치적으로 활용되는 영화이니 공수부대를 악으로 시민들을 선으로 그렸을 것이 뻔하다. 한편으로는 하나의 의무감이 생겼다. 1980년 5월, 부산의 국제신문 사회부 기자이던 필자가 광주사태(공식적으로는 광주민주화운동으로 불리나 선입감을 배제하고 객관적 기술을 하기 위해서 이 기사에선 광주사태라고 표기한다)를 취재하러 가지 않으면 기자로서 죄를 짓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생각이 났다. 

    이 영화를 보고 나온 이들의 평을 간접적으로 전해 들었다. 20대 직장여성은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한숨과 눈물 훔치는 소리도 관람석에서 들리더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왜 공수부대가 야수처럼 변하여 잔학한 진압을 해야 했는지 그 영화로썬 잘 알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학생들이 이 영화를 보면 국군에 대해서 치를 떨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 친한파 일본인은 두 번 보았다면서 다소 흥분해 있었다.

    “저 나름대로 광주사태를 조사한 적도 있어 잘 알고 있습니다. 영화를 보고나서 화가 솟았습니다. 남의 나라 일에 간섭하는 것 같지만 사실을 왜곡한 데 대해서 화가 났습니다. 피해자의 입장에 서는 것도 이해할 수 있고, 공수부대의 잔혹상을 강조한 것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만 이 영화는 대한민국을 적으로 돌리고 있습니다. 애국가를 부르는 평화적 시위대에 대해서 집단발포 하는 장면, 그건 정말 이해할 수 없어요” 

    기자는 혼자서 이 영화를 볼 마음은 생기지 않았다. 실미도, 태극기 휘날리며, 황산벌이 사실을 왜곡하고 역사를 희화화하였다고 비판하는 기사를 쓰도록 했던 나는 일부러 시간을 쪼개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영화를 볼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혼자서 보는 것보다는 누구 하고 같이 가서 보는 것이 마음이 좀 편할 듯했다. 동행할 사람을 생각하다가 안부웅이란 이름이 떠올랐다.

    공수부대 대대장 출신과 영화관으로

    안씨는 1988년에 월간조선 기자로서 ‘공수부대의 광주사태’(그해 7월호 게재)를 취재할 때 만난 공수 11여단 61대대장 출신이다. 1980년 5월21일 낮 전남도청 앞에서 공수부대원들이 장갑차와 트럭 등을 몰고 돌진해오는 시위대를 향해서 발포했을 때 그는 부대의 지휘관이었다. ‘화려한 휴가’의 성격을 규정하는 가장 핵심적인 장면인 집단발포의 현장, 바로 거기에 있었던 실제 주인공이다. 고참 대령일 때 그를 만나 취재를 했던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그가 격정적으로 쏟아놓았던 이야기는 월간조선 기사에선 익명의 증언으로 처리되었다.
     
    1988년 가을 국회의 광주사태 청문회 때 증인으로 불려나온 그는 내가 쓴 기사로 해서 곤욕을 치렀다. 월간조선의 ‘공수부대의 광주사태’는 청문회 국회의원들의 교재가 되어 증인신문에 자주 인용되었다. 1995년 5.18 사건이 재수사될 때도 안씨는 여러 번 검찰에 불려가 신문을 받았다. 광주에 투입된 공수부대의 지휘관들 가운데 가장 많이 조사를 받은 이다. 그는 법정에 증인으로도 나와 당당하게 자신의 역할을 설명했다. 그는 광주사태의 핵심인 발포 경위를 조사할 때 뺄 수 없는 인물이 되었다. 

    66세인 안부웅씨를 19년만에 다시 만난 곳은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의 한 교회 입구에서였다. 그는 내가 찾아온 의도를 묻지 않았는데도 알고 있었다. 그가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제가 다니는 교회 목사님이 말씀하시더라고요. 제가 공수 대대장이었다는 것을 모르고 말입니다. ‘화려한 영화'를 보았는데 군인들이 너무 했더군이라고 그러셔요. 제가 말했지요. 아니 목사님, 그런 영화를 믿으십니까? 그런데 저도 한번 영화를 보기는 해야겠는데 내키지가 않아요” 

    “그, 잘 되었군요. 우리 식사하고 같이 영화 보러 갑시다” 
    안부웅 예비역 대령은 서울 출생이다. 갑종 출신 장교이다. 월남 전선에 두 번 파견되었다. 광주에 투입된 공수여단 대대장 가운데서 공수부대 경력이 경험이 가장 길다. 직업군인출신답게 모양과 행동이 아직도 각이 진 느낌을 준다. 그는 “이제 잊을 만하니 그 영화 때문에 또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남편이 청문회, 검찰, 법정에 여러 번 불려다니는데 신경을 쓰던 부인은 심장병을 얻었다고 한다. 

    “저는 지난 3년간 호스피스 일을 했습니다. 말기 암 환자들이 수용된 시설에 매일 나가서 죽어가는 이들의 말동무를 했습니다. 저의 인생관도 많이 바뀌었습니다. 요사이는 교회 일을 돕습니다. 친구들과 함께 교회서 섹스폰 연습도 자주 합니다” 

    안씨는 검찰이 결론 내린 것을 되풀이 되풀이해서 강조했다. 

    “조 선생도 잘 아시겠지만 광주에서는 발포명령이 없었습니다. 군인들이 죽지 않고 살기 위해서 돌진하는 시위대 트럭과 장갑차를 향해서 쏜 것이 발포의 시작입니다. 검찰이 그렇게 캐보았지만 발포 명령자는 찾아내지 못했지 않습니까” 

    우리 두 사람은 중국집에서 식사를 마치고 영화관으로 갔다. ‘화려한 휴가’의 다음 상영까지는 거의 두 시간을 기다려야 한단다. 그렇게 공을 들여 영화를 본다는 건 자존심이 상할 일이다. 다시 오기로 하고 헤어졌다.

    감정 없는 살인기계

    그 다음 월요일 오후 기자와 안 전 대령은 ‘화려한 휴가’를 보았다. 공수부대를 악의 화신 정도가 아니라 살인기계로 그린 영화였다. 반면 궐기한 광주시민측의 인물들은 지고지선의 영웅이요 천사들이었다. 너무 도식적 설정에서 감동은 없었다. 

    공수부대가 몽둥이로 시민들을 두들기는 퍽 퍽 소리가 일종의 영화 음악이었다. 왜 공수부대가 이런 진압방식을 썼는가에 대해선 설명이 부족했지만 왜곡이라고 볼 수는 없다. 광주사태 직후 계엄사가 발표한 검시조서상의 사인분류 통계가 있다. 

    165명의 사망자 중 18명이 타박상, 4명이 자상으로 죽은 것으로 되어 있다. 타박상은 주로 머리이다. 주로 공수부대가 진압봉으로 시민들의 머리를 난타하고 찔러 죽게 했다는 이야기이다. 대도시의 대낮 거리에서 공수부대원이 몽둥이로 시민과 시위대를 때려죽이고 찔러 죽였다. 그 모습을 본 온건한 광주시민들까지도 화가 나서 돌과 화염병을 던지다가 나중엔 트럭, 택시, 버스, 장갑차를 몰고나와 군경을 몰아붙였다. 5월21일 공수부대가 발포를 시작할 무렵엔 예비군 무기고 등을 습격하여 카빈, 기관총, 수류탄 등으로 무장하여 군인들과 총격전을 벌였다. ‘화려한 휴가’는 그런 시각에서 만들어졌다.

    이 영화에선 공수부대원들이 야수 같지도 않고 기계 같아 보인다. 야수는 감정이라도 있는데 이 영화에 나오는 공수부대원들에게선 인간적 감정 반응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공수부대가 흥분하여 몽둥이질을 하게 된 것은 공수부대의 특권의식에다가 “계엄령 하에서 민간인이 감히 군인들을 향해 돌을 던져?”라는 감정이 출발점이었다. 안부웅씨는 
    “부마 사태 식으로 공수부대가 나타나기만 하면 시위는 자동적으로 끝이라고 생각했다. 시민들이 군인들에 대항한다는 것이 상상되지 않았다. 그래서 시위 진압장비를 준비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돌을 던지는 다수 시위대를 향하여 쏠 최루탄도 가져가지 않았고, 돌을 막아줄 방패도 없었다. 머리를 보호하는 방석망은 군 수송반에서 엉성하게 만든 것이었다. 

    이 영화에선 시민을 추격하여 골목으로 들어온 공수부대원을 시민이 쏴 죽이고 때려눕히는 장면이 나온다. 공수부대 장교 출신 시민이 빌딩 옥상에서 공수부대를 향해서 기관총 난사를 하는 장면도 있다. 그가 시민들에게 기관총 쏘는 교육을 시킨다. 트럭으로 무기고를 부수고 들어가 탈취하는 장면도 실감 난다. 이런 장면을 보고도 관객들은 “이렇게 해도 되나?”라는 문제의식이 별로 생기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공수부대는 악당으로, 시민은 정의로운 사람들로 극적 대비를 이룬다.

    나치 군대의 유태인 학살 같은 장면

    이 영화엔 공수부대의 사격을 유발한 시위대의 장갑차, 버스 돌진이 나오지 않는다. 

    영화 ‘화려한 휴가’의 가장 중요한 장면은 전남도청을 지키던 공수부대가 애국가를 부르는 시민들을 향하여 집단적으로 발포하여 수십 명(또는 수백 명)이 죽거나 다치는 대목이다. 나치 군대가 유태인을 집단학살하듯 하는 장면이다. 관객들이 공수부대를 살인집단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도록 한 연출이다. 이 영화를 보고나온 이들은 이 장면을 오래 기억할 것이다. 영화를 보고 나와 저녁 식사를 하면서 안부웅 예비역 대령에게 물었다. 

    “줄곧 피고인석에 앉은 기분이 들지 않았습니까?”
    “완전히 만화더군요. 그런 식의 발포명령을 내렸다면 감옥에 갔지 내가 무사할 수 있었겠습니까? 애국가를 부르는 시민을 향해서 발포하라고 명령했다면 부대원들이 나를 가만 두었겠습니까? 부대원들 중엔 호남 출신도 많았는데. 그 영화에선 왜 ‘김대중을 석방하라’ ‘최 돼지는 물러나라’는 구호는 안나옵니까? 군에서 장비를 지원해준 것 같은데 왜 가만 있는지 모르겠네요. 공수부대가 살인마가 되었는데” 

    다음날 국방부에 알아보니 군에서 장비를 지원해준 사실은 없다고 했다. 영화 제작사에서 각종 장비를 모형으로 만들어 썼다는 것이다. 군에서는 영화사측에 사실왜곡에 대해서 항의한 적도 없다고 한다. 

    이 영화는 도입부에서 ‘사실에 근거하여 극화했다’는 자막을 내어보냈다. 집단발포 장면은 사실을 왜곡하는 정도가 아니라 터무니 없이 조작한 것이다. ‘사실에 근거하여 극화’한 것이 아니라 ‘사실에 없는 내용을 극화’한 것이다.
    첫째, 영화에서는 공수부대가 누군가로부터 사격명령을 받고 탄창을 M-16 소총에 일제히 끼운 뒤 무릎 쏴 자세를 취한 다음 애국가를 부르는 시민들을 향하여 아무런 경고도 없이 일제히 사격한다. 그날 전남도청 앞에서는 그런 사격도, 그런 사격 명령을 내린 장교도 없었다. 광주사태에 대해서 가장 정밀하게 조사했던 1995년의 서울지검과 국방부 검찰부도 사격명령은 없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둘째, 공수부대의 발포는, 시위대가 탈취한 장갑차를 몰고 군인들을 향하여 돌진, 공수부대원을 깔아 사망하게 한 사건을 계기로 자위적, 그리고 조건반사적 대응 차원에서 이뤄졌다고 검찰은 밝히고 있다. 이때도 공수부대 중대장들에게만 15발씩 지급되고 일반 사병들에겐 실탄이 거의 지급되지 않은 상태였다.
    셋째, 애국가를 부르는 평화적 시위대를 향해 공수부대가 집단 발포하는 장면은 공수부대가 대한민국에 대해서 발포하는 듯한 상징성을 풍긴다. 영화 관람자는 공수부대가 반란군이라는 인상을 받을 것이다.

    공수부대만 표적으로 삼은 저의는?

    국방부는 이 장면에 대해서 영화사에 항의하고 국민들에게 “그런 일이 없었다”는 해명을 했어야 했다. 군 장병들에게도 특별한 정훈교육을 시켜야 할 의무가 있다. 공수부대의 난폭한 몽둥이 진압이 광주사태의 한 원인이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사실을 확대하여 공수부대를 “동족을 무차별 사살하는 살인집단”으로 그릴 권한은 누구에게도 없다. 이 영화는 시작되기 전 “이 영화는 사실과 다릅니다”라는 주의를 주어야 할 터인데 거꾸로 ‘사실에 근거하여 극화했다’고 한 것은 2중의 왜곡이다. 국방장관은 영화를 보았다는 대통령을 찾아가 이 영화의 이 장면은 사실이 아니라고 설명했어야 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9월1일 서울시내 영화관에서 김지운 감독·기획시대 제작의 이 영화를 봤다고 한다. 극장 관계자에 따르면 대통령은 영화를 본 후 눈시울을 붉혔고 영화의 완성도를 높이 평가했다는 것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도 이 영화를 보았는데 오마이뉴스는 그가 유인택 기획시대 대표와 이런 대화를 나누었다고 전했다.

    "젊은 사람들이 많아 봤으면 좋겠어요. 관객이 얼마나 들었습니까?"(DJ)
    "400만 조금 넘었습니다."(유인택)
    "얼마나 더 들겠습니까?(DJ)
    "700만~800만 정도 예상합니다."(유인택)
    "좀더 노력해서 1000만명이 됐으면 좋겠습니다"(DJ)
    "어떤 장면이 기억에 남으셨습니까?"(유인택)
    "마지막 결혼식은 명장면이었습니다. 아이디어가 좋았습니다"(DJ) 

    박근혜 한나라당 전 대표는 경선기간에 광주의 한 영화관에서 이 영화를 본 후 “마음이 아프고 무거운 심정으로 봤다”고 말했다. 그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27년 전 광주시민이 겪은 아픔이 느껴지는 것 같다”며 “그 눈물과 아픔을 제 마음에 깊이 새기겠다”고 덧붙였다. 

    이 영화는 다큐멘터리가 아닌 극영화인데도 사기 정치인들은 사실이라고 전제하고 감정적 반응을 보인 듯하다. ‘이 영화는 사실을 극화했다“는 영화 제작자의 선전이 먹힌 셈이다. 

    이 영화는 공수부대의 ‘만행’을 부각시키는 데 주력했다. 공수부대 이외의 진압부대, 즉 31 사단이나 경찰은 열외시켰다. 광주사태는 특공작전을 전문으로 하는 부대를 시위 진압에, 그것도 진압장비 없이 투입한 데서 비롯되었다. 공수부대의 투입은 정치적 결정이었다. 전두환 장군 그룹, 이른바 신군부가 정권을 잡기 위하여 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정치인들을 연행하고 국회를 봉쇄하고 학교를 휴교시킨 이른바 5.17 조치의 일환으로 공수부대가 광주에 내려 간 것이다. 1996년 대법원은 전두환 그룹의 이 조치를 내란행위로 규정했다. 이에 따라 광주사태 진압도 내란행위가 되었다. 

    영화는 이런 배경 설명을 소홀히 하고 공수부대의 강경진압만 부각시켰다. 광주사태에 대한 모든 책임을 공수부대에만 집중시키는 영화를 만듦으로써 反국군 감정을 자극하는 영화가 되어버렸다. 5.18 재판 때도 법원은 공수부대의 지휘관들에겐 법적 책임을 묻지 않았다. 검찰은 집권과정의 주모자만 기소했고, 광주에 파견된 군인들을 기소하지는 않았다. 군인 신분으로서 상부의 명령을 수행했으므로 처벌할 수 없다는 논리였다. 이 영화는 검찰이 ‘처벌불가’라고 결정했던 공수부대를 처벌하고 있는 셈이다.

    비체험 세대를 오도할 영화


    1985년 국회에서 광주사태가 재론되고 월간조선과 신동아가 이 사건을 집중적으로 보도했을 때 광주사태에 관한 많은 신화가 있었다. 전두환 정권이 이 사건에 관한 보도를 금지시켰기 때문에 과장된 소문이 기승을 부렸다. 사망자 2000명설을 비롯하여 경상도 군인이 많았다, 여자의 유방을 도려냈다, 임산부의 배를 갈랐다, 기총소사를 했다 등등의 소문은 그 뒤의 여러 차례 조사를 통해서 사실이 아닌 것으로 확인되었다. 월간조선은 1985년 7월호 특집에서 공수부대 등의 과잉진압을 상세히 보도하면서 사망자는 정부 발표에서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라고 보도했었다. 이 기사로 해서 광주에선 월간조선 불매운동이 일어났다. 

    6공화국 때의 국회 청문회, 김영삼 대통령이 지시한 5.18 사건에 대한 재수사로 해서 광주사태의 진상은 거의 완전하게 드러났다. 시민측의 시각과 정보가 지배적이던 데서 벗어나 이제는 진압군측의 정보도 많이 공개되었다. 진압군과 시민 양쪽에서 이 사건을 종합적으로, 입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을 만큼 시간이 흘렀고, 피해보상도 이뤄졌으며, 고위 책임자들이 단죄도 당했고, 사람들도 성숙해졌다. ‘화려한 휴가’는 이런 변화를 전혀 수용하지 못했다. 시민측의 시각에만 충실하다가 보니 진실에서 멀어졌다. 이런 영화는 1980년대에 나왔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광주사태는 벌써 27년 전의 사건이 되었다. 광주사태를 잔인하게 진압한 전두환 정권에 대한 분노가 1980년대 학생운동권, 즉 386 세대의 가장 큰 동력이었다. 지금 젊은 세대는 이 사건을 일제 시대 사건 정도로 아득하게 느낄 것이다. 그런 만큼 이 영화가 잘못된 선입감을 이들 백지 상태의 젊은이들에게 심어줄 가능성이 있다. 비체험 세대에겐 이 영화가 광주를 이해하게 하는 교과서 역할을 할 위험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