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앙일보 16일자 오피니언면 '시시각각'에 이 신문 김두우 논설위원이 쓴 칼럼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선거는 일종의 선택이다. 자질과 능력과 경험과 도덕성을 두루 갖춘 후보가 많아 누구를 선택할지 고민스럽다면 다행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우리가 경험한 선거는 최선 또는 차선의 선택이 아니라 차악의 선택을 강요당할 때가 많았다. 그럴 때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 중 하나다. 최악의 후보가 당선되는 꼴이 보기 싫어 마지못해 다른 후보를 선택하는 것과 기권하는 것이다. 어느 쪽이나 유권자는 불행하다. 이 경우 유권자가 선택할 수 있는 제3의 길이 있다.

    투표 용지에 '지지할 후보 없음'이란 난을 신설하면 어떨까. 각 정당에서 공천한 후보와 무소속 후보가 모두 못마땅하다는 의사를 표시할 수 있는 길을 터주자는 것이다. 그래서 '지지 후보 없음'의 득표가 1위를 차지하거나 반수를 넘겼을 경우 그 선거 전체를 무효로 돌리고 재선거를 하면 된다. 이때 출마했던 후보들은 재선거에 출마할 수 없도록 제한해야 한다. 유권자에 의해 거부됐기 때문이다. 그러면 완전히 새로운 후보들로 재선거를 치를 수 있게 된다.

    이를 선거 용어로는 'NOTA(None of the Above)'라고 한다. NOTA는 '투표 용지에 열거한 후보 중 누구도 지지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미국에서는 네바다주 등 일부에서 실시하고 있으며, 캘리포니아 녹색당이 당내 경선에서 시행하고 있다. 그러자 데이비드 '르로이' 개철이라는 테네시주의 한 정치인은 자신의 이름을 데이비드 'Nota' 개철로 바꾸어 2002년 주지사 선거와 2006년 상원의원 선거에 출마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NOTA 입법화를 위한 온라인 서명운동이 벌어지는가 하면 녹색당과 월스트리트 저널도 이에 동조하고 있다. 스페인과 우크라이나는 이미 이 제도를 도입했다.

    물론 NOTA 때문에 재선거를 치른 경우는 극히 드물다. 1976년부터 실시한 네바다주의 경우 NOTA의 평균득표율은 7.7%에 불과했다. 러시아는 이 제도를 시행하다가 실효성이 없다며 2006년에 폐지하기도 했다. 그러나 NOTA는 한국에서는 상당한 효과가 있을 것 같다. 정당의 지역성이 강한 데다 공천 과정이 비민주적이기 때문이다.

    지난해 5.31 지방선거 때의 일이다. 영남의 한나라당, 호남의 민주당 일부 후보자에 대해 주민들의 불만이 많았다. 악덕기업이나 고리대금업으로 부를 쌓은 자들이 공천을 따내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지역 국회의원과의 어두운 뒷거래가 있었을 것이라는 건 쉽게 짐작이 간다. 그렇다면 영남에서 민주당 후보를, 호남에서 한나라당 후보를 선택하면 되지 않느냐고? 이성적으로는 그렇지만 아직 지역감정이 뿌리 깊이 남아 있어 그게 쉽지 않다.

    내가 지지하는 정당은 있지만 그 정당의 후보는 정말 싫고, 그렇다고 내가 싫어하는 정당의 후보를 뽑을 수도 없을 때 NOTA는 유용한 제도다. 지방선거에서 영남 또는 호남의 한두 곳에서라도 NOTA의 득표가 많아 재선거를 하게 됐다 치자. 공천에 간여했던 지역 국회의원이나 당 지도부에 비판의 화살이 쏟아질 것이고, 당의 이미지도 큰 상처를 입게 된다. NOTA 제도를 도입하는 것만으로도 '텃밭'이라며 주민을 볼모 삼아 '막대기를 꽂아도 당선된다'는 오만은 부리지 못할 것이다.

    흔히 "기권도 유권자의 의사 표시"라고 한다. 그렇다면 '지지 후보 없음'이란 제도를 도입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유권자의 다수가 그런 뜻이라면 선거를 무효화하고 새 후보들로 선거를 다시 치를 수 있게 된다. 기권보다는 NOTA가 훨씬 적극적인 의사표시 아니겠는가. 지방선거나 재·보선의 낮은 투표율을 높일 수 있는 방안이기도 하다. 이런 NOTA의 입법화에 반대하는 것은 지역 유권자를 볼모로 삼고 공천 전횡과 야합을 일삼는 정당들뿐이리라. 당장 다가오는 4.25 재·보선에서도 NOTA가 도입됐다면 호남과 영남의 유권자 상당수가 거기에 기표하고 싶은 심정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