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14일자 오피니언면에 언론인 류근일씨가 쓴 <'중도(中道)' 내건 좌파의 위장개업>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민심이 외면한 좌파 정파(政派)는 요즘 갑자기 ‘진보’ 대신 ‘중도’ ‘통합’ ‘평화번영’ ‘양심세력’이라는 간판으로 바꿔 달고 위장개업을 꾀하고 있다. 일부 재야인물들도, 심지어는 박정희-전두환 시대를 통해 한 번도 ‘중도’임을 자처한 적이 없고 그 비슷한 것으로도 낙인 찍힐까 보아 전전긍긍, 권위주의 권력에 기생하던 일부 전천후 출세주의자들까지, 너도 나도 ‘중도’의 우산을 펴 보이거나 그 밑에 끼어들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그런 국면타개용(用) ‘방패막이 용어’들만큼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얼렁뚱땅한 말도 드물다. 일부 대중의 착시(錯視)를 예방하기 위해서라도 이제야말로 그런 정치 시장의 캠페인 용어들을 정확하게 꿰뚫어 봐야 할 것이다.

    이들이 말하는 ‘중도’는 무엇인가? 여기서 먼저 밝히고 넘어가야 할 것은 “극단주의를 배척한다”는 의미의 교과서적인 ‘중도’를 시비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중도’를 파시즘이나 볼셰비즘으로 기울지 않는다는 의미로 쓸 경우라면, 보수주의 자유주의 사민당 노선 등 서구적 정치지형 상(上)의 모든 의회민주주의 정파들이 다 비(非)극단적인, 따라서 중도적인 좌-우파들인 셈이며, 그런 의미의 ‘중도’를 배척하려는 것은 아니다. 아울러 ‘전부냐 무(無)냐?’ 대신, 여러 당사자들의 이해를 적절히 배합한다는 의미의 정책적 ‘중용(中庸)’ ‘중도’를 배척하려는 것도 아니다.

    문제는 집권좌파 패잔병들과 ‘진보적’임을 자임하던 재야인사들이 왜 요즘 갑자기 ‘진보’ 대신 ‘중도’ ‘평화번영’ ‘양심세력’ 운운의 상품들을 그처럼 다급하게 꺼내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는 한마디로 그들이 그간의 자신들의 ‘좌파적 실험’의 실패를 더 이상 부인할 수 없게 된 사정을 스스로 반증하는 것이면서, 그럼에도 그들이 그것을 정직하게 자책하기보다는 계속 ‘중도’ 운운 등의 구명정(救命艇)에 옮겨 타 또 한번 정치적 연명을 꾀하려 하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들이 진정으로 달라질 의사가 있다면 먼저 1980년대 이래의 자신들의 NL 주사파와의 ‘불륜(不倫)’ 행각부터 진지하게 사과해야 한다. 그러면서 지금이라도 김정일의 주구(走狗) NL 운동권은 ‘진보’ 아닌 진짜 ‘수구’라는 것을 공개적으로 시인하고 그들과의 단호한 결별을 선언해야 한다. 그들은 막연히 ‘중도’ 운운이라며 얼버무릴 것이 아니라, 과거에 자신들이 “권위주의 독재 물러가라!”며 목이 쉬게 외쳤던 그만큼 “김정일 마피아 수령 독재 비판···”을 분명하게 밝혀야만 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들이 김정일의 반동적 소(小)스탈린주의, 군사독재, 인권학살에 대해 무엇이라고 한번 딱 부러지게 시비했다는 이야기를 아직까지는 들은 바가 없다.

    오히려 그들은 “그렇게 해서 전쟁하자는 것이냐?” “화해와 평화를 위해 김정일을 비판해서는 안 된다” 어쩌고 하면서 구차스러운 억지와 궤변만 주워섬기곤 했다. 그런 논리대로라면 지난날의 남쪽 권위주의 ‘독재’와 ‘인권문제’에 대해서도 ‘화해와 평화를 위해’ 침묵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물론 그러지 않았지만 지금까지도 ‘과거사 정리’다 뭐다 하면서 이쪽 흉터만 진돗개처럼 물어뜯고 있다. 이렇게, 이근안의 ‘남영동 분실’만 악(惡)으로 보고 김정일 요덕수용소의 악은 알면서도 모르는 척해 주는 것이 과연 ‘중도’요 ‘양심’인가?

    집권좌파 실패자들이 이 시점에서 할 일은 따라서 자신들의 죄과를 침통하게 자괴(自愧)하는 것이지, ‘정계개편’이 어떻고 ‘정권 재창출’이 어떻고 후안무치하게 떠들 때가 아니다. 부동산 값 폭등으로 서민의 피눈물을 흘리게 한 것만으로도 그들은 당장 자폭해 마땅한데 오히려 재창출을 떠들어대고 있으니 정신상태가 제대로 된 사람들이 아니다. 저들은 이미 개혁도, 진보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