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27일자 오피니언면에 언론인 류근일씨가 쓴 칼럼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나라의 진로는 원래 정당들이 앞장서서 제시하고 국민이 그중에서 선택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는 그 반대다. 국민이 끌고 가야 한다는 말이다. 열린우리당은 아예 국민의 버림을 받았지만, 한나라당의 지방선거 승리도 국민이 떠안겨 준 것이지 그들이 선도해서 따낸 것이 아니다. 지난 시대 야당이 투쟁의 최선봉에 섰던 것과는 달리, 한나라당은 ‘선도’는커녕 국민 뒤쫓아 오기에도 바쁘다. 한나라당엔 “한반도 현실을 어떻게 인식하는가?”에 대한 통일된 당론조차 없으니까….

    이 점은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내년 대통령 선거에 이르는 기간에도 정당들이 국민을 선도해 주기를 기대하기는 어렵게 되었고, 오히려 국민이 정치권을 향해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주문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김근태씨의 일련의 발언을 봐도 열린우리당이 5·31 반좌파 민심에 부응할 조짐은 보이지 않는다. 한나라당 역시 국민의 가슴에 와닿는 체계적인 대항적 담론을 제시하지는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국민이 나라를 어디로 끌고 가야 하는가를 정치권에 요구할 수밖에 없다.

    나라를 과연 어디로 끌고 가야 할 것인가? 한마디로 “대북, 경제, 외교, 교육…을 더 이상 선무당 좌파의 앙심정치, 깽판정치, 무뢰배정치, ‘김정일 비위맞추기’에 맡길 수 없다”고 한 ‘5·31 민심’을 계속 밀고 나가는 것이다. 그만큼 오늘의 민심은 “확 뒤집어 보자”던 2002년의 생각을 또 한번 뒤집어서 이제는 다시 “먹고살기가 더 어려워졌다” “불바다 공갈범이 어떻게 저렇게 대한민국 땅을 휘젓고 다니나?” 하는 분노와 환멸로 꽉 차 있다.

    이런 달라진 민심에 부응하기 위해선 새로운 탈좌파적 ‘한반도 프로젝트’가 하루속히 나와야 한다. 김정일은 이미 금년 초에 그의 ‘한반도 프로젝트’를 발 빠르게 제시한 바 있다. 바로 ‘반보수 진보대연합’이라는 ‘테제’였다. 한반도에서 우파의 존립을 아예 끝장내라는 그의 막판 지령이었다. 그만큼 그가 “남조선 혁명 다 됐다”라고 판단했다는 뜻도 될 것이고, 그만큼 그가 궁지에 몰려 다급해졌다는 뜻도 될 것이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을 지키려는 사람들로서는 그의 ‘반보수 진보대연합’에 맞서기 위한 ‘반 김정일 우파대연합’을 내세울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것을 위해서는 한나라당이 먼저 ‘한나라당 + 다른 많은 우파’ 연합전선론을 펴야 한다. 최근 이재오 원내대표도 그런 뜻을 내비쳤지만, 한나라당은 예컨대 분권형 대통령제하에서 실세 국무총리를 어떻게 다른 우파 동맹군에 맡기겠다든지, 통치주체도 어떻게 광범위하게 짜겠다든지, 인사의 공공성을 어떻게 최대한 기하겠다든지, 지역 예산권을 어떻게 더 확대하겠다든지, 그리고 본격적인 ‘협의제 민주주의(consociational democracy)’를 어떻게 구현하겠다든지의, 설득력 있는 ‘확대우파’ 통합정권론을 내놓아야 하는 것이다.

    범대한민국 진영의 승리를 위해서는 정당권 밖의 국민운동도 필수적이다. 대한민국을 지키려는 여러 계열들이 한나라당을 선도하거나 채찍질하는 차원에서 ‘5·31 민심’을 반영한 ‘국민 공동강령’ 같은 것을 만들어 낼 수는 없을까? 현재의 정치구도나 한나라당의 상황으로 보아 한나라당 혼자서 대선을 감당할 수 있을 것으로는 믿기지 않는다. 그래서 각자가 서있는 자리에서 앞으로 ‘이룩해야 할 바’의 공동목표를 향해 한 방향으로 나가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평택 미군기지 반대투쟁’ ‘6·15 통일축전’, 그리고 김정일의 미사일 공갈에 대응한 이쪽을 오히려 ‘냉전을 선호하는 사람들’이라며 더 못마땅해 한 사례에서 입증됐듯이, 오늘의 한반도 결승전 대진표는 이미 그 실체를 분명하게 드러냈다. ‘반대한민국-친김정일 대연합’이냐, 아니면 ‘반김정일-친대한민국 대연합’이냐의 적나라한 대결구도가 바로 그것이다. 이 결정적인 국면에서 대한민국이 이기려면 한나라당은 전체 우파를 아우르는 폭넓은 ‘우파 연합정권론’으로 과감하게 전환해야 한다.